[white rabbit in the cage]
Switch on.
"─────!"
소리가 되지 않는 긴 소리.
멀지 않은 시야에서, 소녀가 울부짖고 있지만,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햇빛의 조각들이 살을 파고들어 따갑게 만드는 이 여름의 어느날.
허전한 감촉을 느끼며, 대지로 미끄러진다.
천천히, 모든 감각이 하나씩 꺼져가며 나의 의식에 경종을 울린다.
죽음이란 건, 생각한 것 보다 엄청나게 싱거운 것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풀내음, 새파란 하늘, 따가운 햇살, 소녀의 눈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이성이 없는 붉은 눈──
"────."
할 수 있었다. 빠르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아무리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상대는 서툴렀고 난 몸에 익숙했다.
소녀를 지키기 위해선, 달려드는 소년을 그저 ─여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저것은, ─니까.
하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지만, 시야가 TV의 전원이 꺼졌을 때처럼, 픽 하고 나가버린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차가워지는 몸에 느껴지는 건, 시끄럽게 흐르는 공기의 흐름뿐.
아아, 이제 아무래도 좋다.
쉬게 해줘.
촉각마저 사라지고,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나의 세계를 채웠다.
의식의 아주 작은 빛이, 꺼지기 전에 한번 깜박였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소년을 미워하지 않았다.
Switch, off.
///
온 몸이, 물에 흠뻑 젖은 듯이 무거웠다. 깨닫고 보면, 나는 밤거리를 헤메이고 있었다. 찌뿌둥한 머릿속은 잡념으로 엉망이었다.
"으, 읏. 크윽."
이를 악물고 잠시 거리의 공중전화박스에 기대에 숨을 고른다. 차츰 흔들거리던 시야는 진정되었고, 머릿속은 맑아졌다.
안경. 안경은 쓰고 있다.
나이프. 나이프는 주머니 속에 무리할 정도로 꽉 쥐고 있다.
옷. 땀에 젖어 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몸.
몸은……. 아. 하하하.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내면, 내 '목적'은 선명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이름은 토오노 시키.
이 거리를 배회하는 '살인귀'를 쫓고 있는 소년.
어째서냐고 묻는 것도 무의미하다.
두고 볼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반드시 그 살인귀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이──.
"윽."
그 이상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면, 두통이 엄습해온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듯한 위태로운 몸을 가지고 비틀거리며 살인귀를 찾아 헤메이는 것 만이,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헤메이기 시작한 시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지.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벤치에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공원인가, 아니면 거리 어딘가의 벤치인가.
모든 것이 꿈처럼 희미한 시야 속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뚜벅.
발걸음은, 안개를 걷는다.
뚜벅. 뚜벅.
그래.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며 걷는 건 불가능하다. 고요에 대비되어, 멋대로 울려서 커다랗게 들리는 것 뿐이다.
뚜벅. 뚜벅. 뚜벅.
이미 애매한 이성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왼손을 안경에 댄다. 오른손은 주머니의 단도를 쥔다. 주위를 신경쓸 필요는 없다. 이 주변에 사람들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습은 갑작스럽게.
"읏, 차가웟!"
목 뒤에, 어느샌가 차가운 금속이 닿았기에 나는 벤치에서 그대로 펄쩍 뛰어오르고 말았다. 그러자, 정적을 깨는 맑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아하하, 그렇게 멍하게 있다간 길거리를 배회하는 살인귀가 덥석 물어가도 모른다구. 시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여어여어. 어딜 봐. 자아."
목소리는 옆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면, 눈 앞에는 차가운 금속 캔이 내밀어져 있기에 나는 멋모르고 그것을 덥석 받아들었다. 조명이 희미해서, 음료수의 라벨 따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벤치 내 옆자리로 다가와있는 그 사람만은,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오랜만이야. 못본새 많이 컸잖아."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 백발의 소년. 나 또래의 나이로 보이는 그는, 푸른 기모노를 입고 희미한 달이 걸린 밤하늘을 응시하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진다. 모든 미혹이 사라지고, 가려졌던 기억의 커튼이 활짝 펼쳐진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키(四季)형…?"
짖궂고 떠들기를 좋아했던, 토오노가의 장남.
얼핏 보기에는 경박해 보이는 장난꾸러기 도련님이었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이 관심과 호의를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비뚤어졌을 뿐이었다.
나, 어릴때의 나나야 시키는 나보다 한살 나이가 많은 그 소년을 꽤나 좋아했다.
그는, 토오노라고 하는 가문에 섞여 들어온 이분자인 자신을, 아무런 부담도 없이 유쾌하게 웃으며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이다.
마키히사의 변덕에 의해 살아남아 토오노로 스며든 나나야는, 저택의 공기에 언제나 짓눌렸다. 어른들도 모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형식적으로 맞아주고는 했다.
어른의 편견이란 아이를 괴롭게 한다.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는 같은 아이들 뿐.
토오노 시키는, 그 중에서도 제일 앞장서서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히스이와 아키하를 알게 되어 같이 뛰어놀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덕분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를 잊고 있었던 거지.
"어라, 머리, 염색이라도 한 거야? 하하하."
어색하게 받아넘기려 한다. 기억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전후가 뒤집히고 인과가 역전되어 차곡차곡 재배열되었다. 이 바보같은 회화가, 진실이 되게.
"시키(志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어?"
시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평정은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시계가 빙글 뒤집힌후에 제자리를 찾았다. 입에서는 멋대로 끼워맞춰진 기억을 토대로 터무니 없는 헛소리를 내뱉고 있다.
"아아, 형이 워낙 안 들어오길래. 아키하가 찾아오라고 했거든. 코하쿠씨도 많이 걱정하더라고. 아아, 시키 도련님은 너무 밤놀이를 좋아하신다고요─ 하고 말야. 알지? 그 뾰로퉁한 말투."
스스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다. 귀에는, 매미 소리가 환청처럼 울리고 있다.
매앰──맴.
매앰──맴.
매앰──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그럼, 가 봐야지."
시키는 의외로 순순히 일어났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야."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그는 이야기했다.
"살인귀, 찾았어?"
"───."
비틀.
손에 든 차가운 캔음료가 떨어지며 메마른 소리를 울린다.
동시에, 빌어먹을 매미의 소리가, 세계를 가득 메워간다.
나의 의식은 다시 한번 과거로 떨어져갔다.
스위치가 올려지면, 모든 것이 다시 재현되어간다.
비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처럼.
그것은 갑작스러운 이변이었다.
고통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시키가 바닥에 엎드린 후.
갑자기 눈을 붉게 빛내고,
땅을 박차올라서,
그 추하게 뻗은 살의로──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죽이겠다'라고 외치지 않았다.
그는 '피해' 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 속에서만의 외침.
뻐끔거리는 그 입모양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던 건,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던 나 뿐이었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아키하를 살리고, 나도 사는 방법은 간단했다.
소년을 죽인다.
형, 이라 부르며 따랐던 나와 같은 이름의 소년을──
아니, 이젠 마(魔)가 되어버린 그 추한 것의 목을 꺾고 손톱을 그 자신의 심장에 돌려주면 아주 쉽게 끝나는 일인 것이다.
나, 아키하, 시키가 모두 사는 길은 없었다. 히스이가 사람을 부르러 갔다고 해도, 아키하의 비명을 듣고 누군가 달려나온다고 해도, 이미 모든 것은 끝난 이후일 것이다.
결국, 나는 선택했다.
나의 죽음을.
둘중 누군가 한명만을 살리기 위해선, 다른 한쪽이 죽어야만 한다.
지독한 불합리.
왜, 친남매가 서로 죽여야만 하지.
나를 토오노에 받아들여준 소중한 아이들.
그들중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건 용납할 수 없다.
──차라리 나를 희생하는 편이 나아.
나의 선택은 그렇게 끝났다.
시키한테 등을 보인 채, 아키하를 감싸고 난 쓰러졌다.
다가오는 죽음.
그 과거의 비디오 기록중 마지막 장면, 테이프의 마모된 뒷면에 새겨진 장면이, 노이즈와 함께 떠오른다.
그 소년은,
이성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붉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수놓는 붉은 색과 함께 테이프는 정말로 끝을 맺는다.
스위치는 곧 내려간다.
"살인귀는──"
"바로 여기 있잖아. 토오노 시키."
"무슨 소리야! 토오노 시키는 바로 형이잖──."
"아니, 난 쓰레기 같은 살인귀고."
시키는 손으로 날 가리켰다. 그 손 끝에선, 날이 달린 금속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네가 바로 토오노가의 장남이잖아? 시키."
호흡이 멎는다. 시키는 친근하게 나의 이름을 노래부르듯 읊조렸다.
"시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살아가려고 했던 것 뿐인데. 삐걱삐걱, 삐걱삐걱, 모든 톱니바퀴가 어긋나 돌아가고, '나'의 의식은 그 날을 기점으로 모두 뒤집어졌지."
시키는 팔을 내리고 서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점에 도달한 순간, 나이프를 역수로 쥐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머릿속 전체가 바싹바싹 말라서 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몸은 충실하게 반응을 시작한다.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뽑는것과, 날이 튀어나오는 것은 한 동작.
역수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나이프를 위로 올려치며 공격거리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 동작.
다음 공격에 대비해 몸을 깊이 낮추는 것이 마지막 동작.
그 세 동작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예술적인 타이밍에 맞춰 이루어졌다.
시키는 기모노의 앞섶을 내 나이프에 찢겼지만, 다시 태연스러운 얼굴을 나에게 돌렸다.
"선의는 위선으로. 신뢰는 배신으로. 애정은 증오로. 삶의 욕구는 살해의 쾌락으로. 나의 세계,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이 거울에 비친 비뚤어진 모습으로 변했고,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어. 난 살인귀조차 아니야. 그저, 난──."
시키는 비틀린 입가를 들어올렸다.
"살인에 탐낙한 일개 광인일 뿐이다. 그러니까 날 형이라 부르지 마,"
이번엔 치명적인 비수를 바로 쥔다. 그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저건, 진지한 상대를 원하는 눈이다.
어설프게 상대해 주는 건 시키의 저 애정에 대한 실례다. 시키는 도약의 준비를 위해 몸을 낮추었고, 나는 독주를 위해 몸을 낮추었다.
"네가 형이라 부르던 존재는 그 여름날 사라졌다. 자아, 그러니 부담없이 서로 죽여보자구. 시키(志貴)."
말을 끝낸 그의 도약이 더 빨랐다. 마치 허공을 밟아 날아오르는듯한 모습으로, 기모노를 펄럭이는 시키의 모습은 정말로 취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이해하는 대신, 힘으로 납득시키면 된다.
나는 싱긋 웃으며,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안경을 쓱 고쳐썼다.
"아아, 알겠어. 시키(四季). 나도 확실히 네 '바보같은 면'을 죽여주도록 하지──!"
이 싸움에, 직사의 마안 따위는 불편한 방해물일 따름이다.
우리는 형제이며,
거울에 비친 앞뒷면과도 같은 닮은꼴.
그 둘의 결착을 짓는데, 원치도 않았던 이능(異能)따위를 개입시킬 것 같냐──!
몸을 날리는 그 순간, 나는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숲속을 뛰어다니던 나나야 시키로 돌아갔다.
///
신속의 도약과 신묘의 독주가 교차하며 불꽃을 튀긴다.
"겨우 이거냐, 시키이이!!"
어느 쪽이 소리쳤는지 모르겠다.
나였을지도 모르겠고, 그였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로 달라붙는 자석의 다른 극처럼 둘은 다시 서로를 끌어당긴다.
상대가 목을 노리면, 이쪽은 아킬레스건을 끊어 준다.
등으로 떨어지면, 뒤집어서 옆구리로 파고든다.
은빛 날이 수없이 허공을 가르고, 교차하며 맑은 소리를 튀킨다.
도약하면 파고들고, 파고들면 도약한다.
숨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쾌속의 공방.
서로의 옷자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의 목적도 잊어가고 있었다.
그저, 이 한번한번의 공방이 오가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그 빈틈을 찔러넣고, 반격당하면 그것을 여유롭게 대처하고, 때로는 위태로운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그 순간들은 최고의 쾌락이었다.
이미 싸움이 아니라 이것은 놀이다.
그 놀이의 끝은 없다.
이 위태로운 놀이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놀이가 지속되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시간에 영원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 끝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칠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 가운데, 그 끝은 의외로 싱겁게 왔다.
시키의 나이프가 내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간다.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으면 이마의 살가죽이 훌렁 벗겨졌을지도 모르는 깔끔한 일격이었지만, 틈이 너무 컸다.
나는 몸을 완전히 구부리고는 미끄러지듯 시키에게로 파고들어 칼 손잡이 부분으로 시키의 무릎 반대편을 찍었다.
시키의 무릎은 기습과 회전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꺾였고, 나는 그 기세에 힘을 더해 발을 후려쳐 몸의 중심을 잃게 했다. 시키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크헉!"
비명과 함께 바닥에 상반신을 충돌시킨 시키는, 강렬한 충격에 재차 튕겨오르며 피를 토해냈다.
그 피는 내 가슴 부분에 튀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분명 강렬한 충격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틈은 지극히 미약하다.
하지만 그 틈만 찾아 공략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나는 주저없이 등을 땅에 대고 누운 시키의 배 위에 올라타고, 나이프를 두 손으로 높이 쳐들었다.
방금전에 있던 충돌로 인해, 안경은 미끄러져 내 눈엔 선명한 '죽음의 선' 들이 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이걸로……!"
이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나나야 시키.
세계가 빙글, 반전하고 기억과 의지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내, 나는 토오노 시키로 되돌아왔다.
뭐, 남은 일을 하는데 더 이상 나나야의 기억은 필요 없다.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시키(四季)를 향해 높이 들어올려진 나이프를 그대로──
버린다.
"에?"
당황한 듯한 시키의 목소리. 나는 안경을 고쳐썼다. '죽음'은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져갔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기분은 나아졌어? 형."
"……너."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형을 죽이지 못해."
"……."
"자아, 집으로 돌아가자. 아키하도, 히스이도, 코하쿠도 모두 기다리고 있을거야. 한밤의 놀이는 이제 끝. 너무 늦으면, 잔소리만 늘어난다구?"
그것이, 나의 진심.
시키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 옮겼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나사가 빠진 듯한 웃음소리가 텅 빈 공원을 울린다.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이, 그저 '웃을 뿐인' 메마른 소리.
정말로 텅 비어버린 존재가, 눈 앞에 있었다.
그 사실은, 지독히 슬펐고.
푹.
"…어…라."
가슴이, 뜨거워서 눈물이 흐를것만 같다.
아니, 가슴을 꿰뚫고 있는 그 붉은 것을 따라 피가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피. 피. 피.
그때와 같이,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피──
"그러니까 말했잖아. 나, 반전했다고. 내 사랑은 뒤집혀 증오가, 살의가 되어 널 죽일수밖에 없어. 그래서 기왕 이 더러운 몸뚱아리를 꿰일 바에야, 너나 아키하한테 당하고 싶었는데──"
아아. 듣고싶지 않아. 변명은 그만 두라고.
그저 거기에, 이날 이때까지 살아있던 것 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쿨럭.
시야가 모두 붉어서, 내가 토해낸 피는 마치 검은색처럼 지독하게 어두운 색감으로 비춰졌다.
"윽, 뜨뜻미지근한 감촉. 급하다곤 해도, 얼굴에다 해버리다니. 너무한데."
나는 더 이상 상반신을 지탱할 힘을 잃었다. 휘청이며 앞으로 무너져 내리면, 시키가 윗몸을 일으켜 날 안듯이 지탱했다.
그는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그래도 말야. 넌 죽으면 안돼."
아득.
목덜미에 기이한, 이제껏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촉이 틀어박힌다.
그것은 목을 타고 흘러들어와 척수를 관통하는 쾌락.
내 기운 전체가 목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상실감.
두 감각이 교차하여,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녹아내려간다.
"너만은, 나의 편이 되어 줬으면 해. 시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성은 날아가서, 다른 것이 머릿속을 꾸역꾸역 채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
욕망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하반신에 몰려들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 으으윽."
입에서 침이 흘러내린다. 피가 섞여 흘러나온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고통도 부끄러움도 알 수 없게 되어간다.
그저, 목소리만이 들린다.
"저런. 많이 괴로운가 보네. 하지만 걱정 마. 오늘밤은, 재회의 기념으로──."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의미가 되지 않는다.
뒤로 밀리면 쓰러지고, 바닥의 차가움에 전율하며, 추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욕망의 덩어리가 된 물건에, 매끄러운 혀가 달리면.
몸이 튄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그 중 하나도 알 수 없다.
붉은 시야는 분홍색으로 바뀌어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몇번이나 사정했는지 알 수 없다.
범해졌던가?
아니면 범했던가?
모른다.
그것은 이제와서 의미가 없는 일.
시키는 시키를 달랬고, 미친 시키는 쾌락에 물든 시키를 범했다.
앞이든 뒤든 그 어떤 기억이든 남김없이 더럽혀져──
──가. ──를. ──해서.
///
────────.
────.
──.
─.
딱. 똑. 딱. 똑.
회전의자에 늘어진 시계가 거꾸로 초침을 달린다. 분침은 내 심장을 찌르고 있고, 시침은 내 나이프다.
끼릭끼릭.
기분나쁜 소리로 쇠창살이 웃는다.
쓰고 있던 물안경을 벗고 그것을 '죽인다'.
이내 방은 고요를 되찾는다.
그래도 분침에 찔린 내 심장은 꽥꽥 비명을 질러댄다.
아아, 시끄럽다.
시침을 들어 적당한 심장 위의 '점'을 고르고 있자니, 코하쿠씨가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뭐죠, 그거.'
'점심이에요. 아우아우. 오늘은 특별히 준비했지요.'
바구니엔 도시락이 담겨져 있다.
열면, 피냄새가 지독한 면도칼의 날이 낱개로 한가득이다.
'아키하는 먹었어요?'
'아키하님의 목은 히스이가 현관에 매달고 있지요.'
'피 냄새를 맡고 흡혈귀가 몰려들 거에요. 코하쿠씨.'
'괜찮아요. 살인귀를 쫓는데는 효과 직방이니까요.'
코하쿠씨의 도시락을 덥석 집어 삼킨다.
우물우물.
역시 코하쿠씨의 요리 솜씨는 최고다.
'자아자아. 그만 드세요. 남은 걸로 할게 있어요.'
코하쿠씨는 내 손에서 도시락을 빼앗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 죽은 창살을 넘어 새장을 하나 들고 와 테이블에 놓았다. 새장 안에는 새하얀 털을 가진 새빨간 눈의 토끼 한마리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코하쿠씨는 토끼를 꺼냈다.
그리고 싱글싱글 웃으며 도시락을 연다.
도시락 안의 면도칼을 한움큼 쥐면, 이내 코하쿠 씨의 손은 피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토끼의 몸에 면도칼을 박아넣는다.
'라~ 라라아~ 라라~'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코하쿠씨는 면도칼을 토끼에게 심고.
토끼는, 발버둥을 치면서 미친듯이 날뛰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코하쿠씨에게도 상처를 냈다.
하지만 코하쿠씨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하며 면도칼을 토끼의 몸에 슥슥 박아넣는다.
그리고 서로 피투성이가 된다.
토끼의 몸도, 코하쿠씨의 손도, 모두모두 피투성이.
'아프지 않아요?'
'네? 무슨 말이죠?'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하는 코하쿠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저건 인형이다.
혈관에 흐르는 것은 피를 닮은 액체다.
거짓말이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둔다. 그렇지 않으면 괴로우니까.
토끼의 피는, 정액 냄새가 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름철 잡풀 내음일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새하얀, 지금은 새빨간 토끼의 눈동자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시키.'
'네?'
'토끼 이름이요.'
'틀렸어요♪ 얘 이름은 토오노에요.'
'……왜.'
'이렇게 해두면, 분명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에요.'
머리에 이명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알람이 우는건가.
초침이 딱똑딱똑.
심장의 분침이 빙글빙글.
손안의 시침이 느릿느릿.
종료시간을 울리기 전에, 나는 고한다.
'적당히 해 둬요.'
'라~ 라라아~ 라라~'
이미 내 말 따윈 닿지 않는다.
손을 빙글 돌려, 반복작업을 계속할 따름인 인형에게 죽음을 선사해준다.
코하쿠씨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늘어졌다.
무의미한 짓이란걸,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고, 애초에 누가 비틀었을지 모를 파멸의 톱니바퀴는 돌아서 여기에 맞물렸다.
……아니, 비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조금씩 비틀려 있던 톱니바퀴가 애초부터 같이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코하쿠씨의 무릎에 앉은 토끼는 출혈량이 심한지, 더이상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미약한 움직임으로 꿈틀대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고 죽음을 죽일 재주는 없다.
그의 시계는 부서졌다.
하지만 나는 소중히 토끼를 안고, 비틀비틀 지하실을 빠져나간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것은 슬프다.
하지만, 살아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할 수 없는 자는 슬픔조차 느낄 수 없다.
지하실을 빠져나가면, 여름 햇볕이 나를 감싸고.
내 품 안에 안겨 있는건 작은 소년이었다.
면도칼은 없었지만, 이미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숨이 끊어져 있었다.
할 말은 없다.
누구의 죄인가.
피의 업인가.
그저, 재앙이었나.
한발짝을 더 내딛으면, 숲의 풍경은 바뀐다.
붉은 귀신은 내 아버지와 장기를 두다가, 화나서 판을 엎어버렸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껄껄껄 웃었다.
아버지는 웃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토오노 마키히사의 목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동정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뒷맛은 지극히 씁쓸하다.
'날, 내려놔.'
죽은 것이 분명한 소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지는 않고, 담담하게 대꾸한다.
'싫어.'
'난, 이미 아키하에게 죽었는걸.'
타닥타닥.
숲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소년의 말을 무시한다.
그 이전에, 코하쿠씨에게 이미.
아니, 그 아버지에게 이미.
그것마저 아니라, 태어나기 전 이미──
'묻어주겠어.'
'……에?'
'죽은 사람을 묻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안 그래?'
뭐,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사멸한 그에겐 더이상 남은 것이 없다.
그래서, 꿈 속에서나마 묻어준다.
속죄는 아니다. 죄는 애초부터 그 누구도 지은 적 없다.
이건 단지, 작은 아쉬움.
손으로 흙을 긁어내, 작은 자리를 만들고 소년을 눕힌다.
'이런 거…… 필요 없는데.'
'바──보.'
'뭐야. 바보는 너잖아.'
'싸구려 동정 따위에 기뻐할 필요 없어. 난 이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갈 거야. 형도, 기억속에 묻어 버리면 이제 영영 안녕이지. 이대로 아키하랑 러브러브 전개가 될지도♡'
'……흥. 추하게 질투 따위는 안해.'
'암암. 죽은 주제에 질투하는 것도 추하고 말고.'
생긋 웃으며, 흙을 덮어올린다.
'──윽, 그 웃음 기분 나빠. 전언 철회. 매일 밤 꿈에 나타나서 범해 줄거야.'
'아까도 한건 했잖아. 이 색마. 하지만 난 원래 꿈 안꾸는데.'
'누가 네 꿈이라고 했냐, 멍청아.'
'하지만 아키하 꿈에 나와봤자, 1초만에 꼬치구이가 되어버릴걸.'
'그건 나도 동감. 대신, 이번에 있던 꿈 이야기를 해주는 건 괜찮을지도. 아키하 녀석, 의외로 그런데 면역이 없으니까──'
'……죄송함다. 형님. 다시는 까불지 않겠슴다.'
바보같은 대화.
그래도, 터무니없이 즐겁다.
소년의 시체를 묻고, 나는 몸을 돌린다.
이것으로, 숲을 나가면 모든 것은 끝.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애초부터, 시체가 말 따위 할리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나는 꿈에서 떠올랐다.
///
깊은 숨을 토해내면, 눈 앞에는 코하쿠씨의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인다.
"아,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시키씨. 몸은 괜찮으세요?"
난 웃음지으며 대꾸한다.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에에에엑?!"
잠깐, 잠깐, 왜 코하쿠씨가 내 침실에?!
히스이, 히스이는 어디갔어?
이내, 조용한 말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밤 사이, 시키님이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시기에 언니를 데려와서 간병하게 했습니다. 아키하님도 지켜보시다가 조금 전에 학교로 가셨습니다. 그 사이, 알퀘이드란 분도 찾아왔습니다만, 시키님이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기에 정중하게 돌려보냈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었는지요?"
고개를 돌리면, 침대 옆에서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히스이가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누운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으응, 아니. 괜찮아. 잘 했어. 약속은 기억나지만… 오늘은 별로, 놀 기분이 아니야. 몸도 아직 찌뿌둥하고."
"그럼, 알맞은 약을 조제……."
옆에서 코하쿠씨가 끼어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쉬면 나을 것 같아요. 둘 다, 제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나가 있으면 안될까요?"
그 말에, 코하쿠씨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나참. 언제나 이렇다니까요. 혼자서 모든걸 다 떠안으려 어리광부리고 말야."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투덜대는 코하쿠씨.
…저기, 코하쿠씨에게만은 왠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에요.
"뭐어, 그래도 가끔은 받아주는 것도 좋겠죠. 히스이쨩, 우리는 나가 있자구."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푹 쉬시길."
발소리, 문을 닫는 메마른 소리가 텅 빈 방안에 여운을 남긴다.
"……."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은 핑계가 필요했을 뿐.
그때, 뜨거운 감촉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뭐야. 눈물?"
바보같다. 이게 뭐야. 도대체 뭘 위한 눈물이지.
그래도, 눈물은 참을 수 없게 흐른다.
그저 고요히, 뺨을 타고 흐르는 그 눈물은,
마치 피와도 같이.
슬픔 따윈 없는,
그런 투명한 감정의 눈물이었다.
어느 나른한 오후.
나는 우리 안에 갇혀서 죽어간 새하얀 토끼를 떠올리며,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
창문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 있던 검은 고양이는 이내 환영처럼 사라져갔다.
"뭐야~ 렌. 시엘네 집에 놀러가자고? 뭐어… 어차피 할 일도 없어졌고. 시엘이나 괴롭혀 줘야지. 시키는 바보야! 흥!"
"……."
고양이 두 마리가, 태양 아래를 걷고 있다.
검은 고양이는 이내 등 뒤의 거대한 저택을 한번 흘낏 돌아봤지만, 손을 흔드는 하얀 여자의 목소리에 그것을 뒤로 하고 앞으로 달린다.
Epilogue
알퀘이드가 시엘을 따라 욕실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세븐은, 검은 고양이를 향해 말발굽을 들어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나이스 타이밍에요, 고양이씨!"
"……."
"에? 혼자서만 도망친것 같아 미안해서 그랬다구요? 아뇨아뇨. 괜찮아요. 저희 사이에 그런 쪼잔한 일로. 아하하하."
"……."
"그럼 당근 혹시 남았냐구요? 아아, 물론이에요♪ 고마운 손님이 오셨는데 아낄 필요 없죠. 어젯밤 일도 있고……."
"세브으으으은! 꺄아악, 알퀘이드, 그만, 그만해요!"
"에에잇! 시엘이 시키 몫까지 즐겁게 해 주지 않으면 곤란해~"
"그런 터무니 없는 논리가 세상에……."
"아아, 맛있는 당근☆"
"……(야금야금)"
욕실에서 들리는 대화를 BGM 삼아서, 세븐과 렌은 담소를 나누며 접시에 쌓아놓은 당근을 맛있게 해치우고 있었다.
한적한 하루는, 그렇게 유쾌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남겨진 소년의 독백.
"……어이어이. 나만 혼자 궁상 떤 것 같잖아."
정답. 목록으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