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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夜

05/06/07

태그 : CROSS†CHANNAL, 다나카 로미오, 우정, 군죠우 학원 방송부, 文萌

白夜 - CROSS†CHANNAL 팬픽


여름.

태양의 열기가 뚝뚝 떨어진다.
찌는듯한 더위가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학교 옥상.
군죠우 학원은 방학중이다.
사람은 없었다.
다만, 높게 솟아오른 방송탑이 빈 옥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소년이 방송탑에 비스듬히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쿠로스 타이치는 잠들어 있었다.

옥상에, 사람은 없었다.
매미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여름의 단편.





여름? 여름이라고?
아니야. 착각이다.

"타이치! 타이치!"

누군가, 밖에서 부르고 있다.
타이치는 그것을 무시하고 몸을 움츠렸다.
아직 더 자고 싶어.

탕탕탕.
세차게 창문을 두드린다.
타이치는 인상을 찡그렸다.

"타이치! 어이, 얼른 일어나!"

옥상인데, 창문을 두드려? 거짓말이겠지.
아냐, 옥상일리가 없다. 왜냐하면…….

"타아이치!"
"끄아아아악!"

타이치는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2층 창문을 두드리며 말을 거는 녀석은! 설사 귀신이라 해도 내
에로책들은 못 줘! 이 타이치님의 가라데로 해치워주겠다!"

그순간, 창문이 열리며 소년의 얼굴이 불쑥 내밀어졌다.

"자, 잠깐 타이…"
"받아라, 엑토플라즘 몬스터! 정의의 타이치 킥!"

타이치는 창문에서 얼굴을 내민 괴인을 향해 다짜고짜 발을 내질렀고, 소
년은 당황하며 다시 머리를 집어넣었다.

"끄악, 누굴 죽일 셈이야? 나야, 나! 토모키라구!"
"이걸 피해내다니, 역시 괴인 토모키… 가 아니라. 토모키?"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소년은, 타이치의 반응에 혀를 찼다. 목에는 목도리
를 두르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토모키는 뚱한 표정으로 타이치를 바라
보았다.

"저기말야. 아줌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사다리를 타고 창문을 통해 나가겠
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에 낸 녀석은 도대체 어디사는 누굴까? 응?"

타이치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머리를 자기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이런, 깜박했어."
"…사람을 죽일 뻔 해놓고 깜빡했다면 다야?"

토모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타이치는 그것을 무시하고 씨익
웃고선 외투를 챙겨입었다. 그리고 침대밑에 손을 넣었다.

"어라, 에로책?"
"어이, 건전한 청소년을 에로마인 취급하지 말라고."

투덜거리며 타이치가 침대 밑에서 꺼낸건 술 두병이었다. 흔들자 맑은 소
리를 내며 찰랑거렸다.

"흐응. 그런데 옷 속에 숨긴 그 불룩한 물건은 뭐지?"

타이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A급 아이돌 누드 화보집… 이 아니라 술안주야."

토모키는 어깨를 으쓱,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게 타이치다워."
"'타이치다운'이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토모키
선생님?"
"아이돌 누드 화보집을 술안주로 먹을 수 있는 에로마인다운."

티격태격하던 두 소년은, 이내 얼굴을 마주보고 크게 웃고는 겨울 밤의 어
둠속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하하하하!"

밤하늘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타이치는 처음 깨달은 것만 같았다.
달려가느라 가빠진 호흡.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그저 즐겁기만 하다.
타이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달려가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다.

군죠우 학원의 세 바보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는, 예의 학교 옥상이었다.
방학중이었지만, 쉽사리 문을 따고 들어온다. 수위는 없다.
타이치와 토모키는 어둠속의 나선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학교 옥상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고 손을 흔들면 그대로 쏟아져
내릴듯한 별무리로 채워진 하늘이 한층 가까워졌다.

옥상 중앙에는 자전거가 있었다. 눈부신 은백의 프레임으로 번뜩이는 자전
거. 마치 하늘에서 방금 옥상으로 떨어져 내린 별과 같았다.
그 곁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금발의 소년이 비스듬히 기대어서 타이치들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이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칠흑의 밤하늘을 향해 흩날렸다.
태평한 목소리가 공허한 옥상에 울려퍼진다.

"여어. 기다렸어."

타이치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그 감정에 충실하게, 타이치는 주
먹을 그러쥐었다.

"오랜만이다. 라바."

진정으로 재회를 기뻐하는 목소리. 타이치는 몸을 숙이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금발의 소년은 온화한 표정으로 두 팔을 넓게 벌렸다.

타이치는 맹렬한 속도로 라바라고 부른 소년의 품 안으로 파고들이 명치에
날카로운 어퍼컷을 날렸다.

라바는 팔을 벌린 포즈 그대로 위로 붕 떠서 날아가 대자로 뻗었다.
토모키는 멀찍한 곳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냉정한 판정을 내렸다.

"사쿠라바 히로시 넉다운. 쿠로스 타이치 승."
"도대체 옥상까지 왜 자전거를 끌고온거야! 이 얼간아!"

사쿠라바는 놀라운 회복력으로 부활해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안 되는건가?"
"보통은 안 한다구. 사쿠라바."

토모키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사쿠라바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치가 안 된다고 하면, 그러지 뭐."

사쿠라바는 자전거를 끌고 옥상 끝까지 간 후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밀어
버렸다.

"…미쳤냐! 아래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구!"

타이치는 사쿠라바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사쿠라바는 다시 고꾸라졌다.

"아야야."
"하아. 이래서 부르주아 녀석들은 사고방식부터가 틀려먹었다니까."

연극 대사를 말하듯, 부르주아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발언을 내뱉는 타
이치.

"타이치, 미안하지만 저건 그리 비싸지 않아. 겨우…"
"안돼, 말하지 마! 그걸 듣는다면 나는 분명 비참해지고 말거야! 고물이라
도 건져 팔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그 말에, 사쿠라바는 몸을 뒤집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
소가 떠올랐다.

"…이 하늘, 언제쯤 사라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옥상에 올라오더니 전파라도 수신한거냐!"

외계인 취급을 하며 가라데 포즈를 취하는 타이치를 향해, 사쿠라바는 쓸
쓸한 표정으로 웃는다. 타이치의 얼굴이 굳었다.

"하늘에 시작이 있었다면 끝도 있을거야. 이 하늘이 사라지는 날에도, 돈
같은 것이 필요할까?"
"…사쿠라바. 종말론을 설파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게……"
"돈이 있으면 좋긴 하지."
"배낭여행 중에도 일급 호텔에서 묵는다던가?"

빈정거리는 타이치의 목소리. 하지만 사쿠라바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이를테면……."
"…이를테면?"

사쿠라바의 눈이 가늘어졌다. 타이치는 두꺼운 옷 사이로 파고드는 오한을
느꼈다.

"타이치의 마음 같은 것."
"…죽어라, 이 변태!"
"으그극."

타이치는 발을 들어 사쿠라바의 얼굴을 그대로 뭉개버렸다. 사쿠라바는 두
팔을 버둥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럴때는 보통 사랑이나 우정 같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말해야 하는게 정
상 아니냐!"
"…사쿠라바의 경우에는 두가지 다 만족시키는 대답 아니었을까."

타이치의 잡아죽일듯한 시선을 느낀 토모키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
다. 그런 타이치를 보며, 사쿠라바는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때.
사쿠라바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손에 넣고 싶었다.
당시에는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던 갈망.
그 앞에, 방해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강렬한 통증과 함께, 잠시 눈이 뜨인 순간 사쿠라바는 자신이 얻고
자 했던 아름다운 것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때, 사쿠라바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렸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것을 자신이 더럽혀 버릴 뻔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이,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을 더럽힐 뻔 했다.

사쿠라바는 그날로 자신의 갈망을 미련없이 버렸다.

아름다운 것은, 지켜보기로 했다. 갈망을 버린 이상, 그것만으로도 사쿠라
바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타이치를 바라보는 사쿠라바는 마냥 행복했다.




잠시 시간이 떠들썩한 흐르고, 토모키는 옥상 한가운데 앉을 자리를 만들
며 타이치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 밤중에 모이자고 한거야?"
"아아, 이유는 곧 찾아올거야."
"…찾아와?"

토모키는 타이치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이 힘겹게 열리며,
또 한명의 소년이 등장했다. 역시 겨울옷을 두껍게 차려입은 소년은,목발을
짚은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타이치는 사쿠라바와 토모키를 돌아보며 윙크했다. 물론 토모키는 그에 대
해 호쾌한 훅으로 대꾸해주었다. 타이치는 얼굴을 문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어서와. 신카와."
"으응."

목발의 소년은, 타이치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보냈다. 사쿠라바와 토모
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서로 눈길을 교환하고 한숨지었다.




대담.

"뭐어? 군죠우 학원의 바보군단에 신카와가 들어와?"
"…스스로 바보라고 지칭해버리면 처량하잖아."
"사실은 사실이니까. 나야 본인의 동의만 있다면 별로 상관하지 않겠어."
"나는 타이치가 좋다면 아무래도."

타이치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신카와를 돌아보았다.

"…라는걸. 만약 너에게 용의가 있다면, 이 우정의 잔을 받아라! 너는 도
원결의로 맺어진 우정이 받아들인, 공명선생이다!"
"뭐야, 삼고초려 같은 거창한 이벤트는 없는건가?"

신카와는 피식 웃으며 타이치의 말에 대꾸했다. 타이치는 잔을 내밀며 고
개를 저었다.

"귀찮으니 생략."
"스킵도 되다니. 편리한 우정이네."

신카와는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나 , 그 손은 잔에 닿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으응. 안돼. 나는 받을 수 없어."

타이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라니. 알고 있잖아? 난 이미 *었어."
"…무슨 소리야?"

타이치에게는, 신카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타이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신카와를 바라보았지만, 사쿠라바와 토모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아. 그도 그렇네. 이미 *어 버렸긴 하다."
"약간, 문제일지도."
"약간이 아니잖아!"

언성을 높이는 토모키. 사쿠라바는 별로 상관 없다는 표정이었다.
타이치는 도대체 신카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

신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타이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이 말을 어디에선가.

어느 때였지?






기억을 돌린다.
어느 찌는 듯한 여름날의 옥상.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어?"
"한가지만 물어볼게."
"……."
"너는 왜 살아 있지?"

쿠로스 타이치는, 그때, 신카와 유타카를 *였던가?





의식을 더 뒤로 당긴다.
더욱 더, 오래된 기억.
숲에 둘러싸인 대저택의 생활.
가득찬 악의와 위선.
힘없는 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유희로 취급되는 끔찍한 나날들.

쿠로스 타이치는 그곳에서, 인간을 잊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날짜를 세지 않았기에 타이치는 시간감각이 무뎌져갔다.
그렇기에, 그때가 언제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기억 저편에 새겨진 이름없는 날.
저녁부터 이른바 '유희'라 불리던 파티에 불려나갔다가 간신히 풀려나 침대
에 널브러져 있었다.
타이치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혐오의 감정조차 이제는 잊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더럽혀진 드레스조차 갈아입지 못한 채로, 그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타이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몸을 움츠렸다.

자신의 방에 찾아 오는 것은 요코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노크 따위는 하
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일 것이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인간의 감정을 거의 잊어가고 잊는 그에게도, 아직까지 공포만은 마음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동물의 본능적인 감각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만족하지 못한 자가 남아있었나?
타이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싫어.
하지만 반항은 불가능하다.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이 폐쇄된 타락의 정원
에서는, 그들만이 법이다.

요코가 오는, 이곳에서만은 싫어.
타이치는, 절망 속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찰칵.
어떤 말도 없이 문이 열렸다. 순간 타이치는 반쯤 체념해 버렸다.

누군가가, 어색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뭐?
대꾸할 기력도 없는 타이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였다.

소년의 목소리. 타이치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타이치의 눈동자는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이치는 소년의 머뭇거리는 모습을 멍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었다.
소년은, 타이치 쪽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뭔가 말하려고, 몇번이나 우물거리다가 결국 소년은 타이치의 머리맡에 종
이봉지를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

"미안!"

마치 도망치듯, 소년은 문을 세차게 닫았다.
소년은, 다리를 절고 있었다.

"…하."

소년이 나가고, 어둠속을 응시하던 타이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온 몸의 미약한 힘을 끌어내 종이봉지 안의 내용물을 꺼내어 확인
했다.

"──아하하."

실없는 웃음. 그 안에 든 것은 드레스였다. 그것도 순백의.
타이치의 머리카락처럼 새하얀──

"멍청하긴. 내가 맨날 드레스만 입는 줄 안거야? 내가 그걸 입고 즐거워
한다고 생각해?"

타이치의 온 몸에선 다시 힘이 빠져나간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이런 걸 받고 싶다고 했어……."

소리없는 흐느낌. 눈물도 없는 흐느낌. 타이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
마저 깨달을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을 인식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던 어느 때.
괴물이 되어가던 시절.
타이치는 울고 있었다.



"…타이치?"

요코가 타이치의 방에 들어왔을 때는, 타이치는 잠들어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드레스를 꽉 끌어안고.



유쾌한 신카와는 말이 없었다.
냉정한 키리가 울었다.
그날은 유난히도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어느 날이었다.



다시, 의식이 부상한다.
타이치의 눈 앞에는 신카와의 얼굴이 보였다. 눈송이가 하나 둘, 칠흑의
밤하늘에서 천천히 낙하한다. 차가운 눈송이 하나가 타이치의 입가에 와서
닿았다.

"이봐. 신카와."
"응?

타이치의 마음 속에서 어떤 욕망이 끓어올랐다. 이미 잊혀진,오래된 열망.
아주 추악한 감정. 입가가 일그러진다.

"너는, 왜…"

단 한마디의 질문이면 된다. 말하기만 하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타이치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하는거야?"
"……에?"

타이치는 신카와의 뒷머리에 손을 잠시 올리더니, 그대로 후려쳤다.
신카와의 눈앞에서는 별이 번쩍였다.

"으앗!"
"에라, 자식아. 우리가 무슨 관계냐."
"…쿠로스?"

타이치는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을 뻗어올려 하늘을 향했다.

"토모키, 사쿠라바! 내가 누구냐!"
"성희롱 대왕."
"전파소년."

타이치는 두 소년을 발로 걷어찼다.두 소년은 걷어차이면서도 낄낄거렸다.

"나는 너희들의 '친구'라고! 나를 쿠로스 타이치란 이름 대신에 '친구'라
고 불러다오! 나는 모두의 '친구'다아아아! 세계는 러브 앤드 피스, 그리고
우정!"

신카와는, 왠지 그 모습이 너무나도 눈물겹다고 생각했다. 저것은, 장난스
러운 외침이 아니었다. 진심을 담은 절규다. 자신에게 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향해 절규하는 타이치의 간절한 목소리였다.

흥분한 타이치는 두 친구의 목을 부여잡고 옥상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엄청난 힘이었다. 눈이 내리는 옥상을 배경으로, 우스
꽝스러운 세 친구의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바보같은 광경이었다. 저들은 바보였다. 신카와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래도, 부러웠다. 너무나도 부럽다. 상반된 감정 속에서, 신카와는 목에
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삼켰다.

힘이 모두 빠질때까지 괴성을 지르며 옥상을 질주한 타이치는, 돗자리까지
이를 악물고 기어서 술이 가득 채워진 잔을 들어올렸다.

"우저어어엉은!"

옥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타이치의 우렁찬 목소리.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토모키가 그 뒤를 이었다.

"댓가를!"

사쿠라바도 그에 뒤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요구하지!"

그리고 세 친구는, 신카와를 돌아보았다.
의미없는 유희. 그 말이 신카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가,술잔을 들어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않는 거겠지?"

의미없는 유희에도 만족해한다. 신카와는 그렇기에 잔을 들어올렸다.
챙.
맑은 소리와 함께, 네 소년의 잔이 충돌했다.

눈이, 그들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듯이 하늘에서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술잔에도, 맨손에도 눈송이들이 하나둘 날아들어 녹아갔고, 추위는 어느새
느껴지지 않았다.

"정학~ 정학이에요~ 교내에서 음주라니, 자칫하면 퇴학이에요~"

모두 한번에 잔을 들이키려는 순간, 느릿느릿하지만 걱정이 담긴 소녀의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토모키의 안색은 아직 술을 한 모
금도 입에 대지 않았으면서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누나?"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쓰며, 시마 토모키의 누나이자 군죠우 학원 방송부
부장인 미야스미 미사토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미사토의 등 뒤로 스르륵 미끄러져 눈을 번뜩이는 타이치.
미사토는 그 상황에서도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토모키는 위
험을 느끼고 누나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타이치가 한발 더 빨랐다.

"아직, 아직, 학생, 인, 데… 읍──"
"어, 어이, 타이치! 뭐 하는 짓이야?"

미사토의 입에 억지로 술병을 기울이기 시작한 타이치는, 토모키의 방해에
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음을 띄웠다.

"푸──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사토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타이
치는 술병을 미사토의 입에서 떼어놓았다.

"제 2억마리의 원더풀 라이프들이 유영하는 사랑스러운 액체의 맛을 본 이
상, 미미 선배도 공범입니다."
"…게엑. 농담이란 걸 알고 있어도 토할 것 같아. 누나, 괜찮아?"

토모키는 황급히 자신의 누나를 감싸며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타
이치는 그 광경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야유했다.

"우─ 시스콘 녀석."
"시, 시끄러!"

토모키는 미사토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며 필사적으로 타이치의
말을 부정했지만, 설득력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오직
미사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이었다.

"적당히 해두시죠. 쿠로스 선배."

키리가 예의 냉랭한 포즈로 걸어와서는,타이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되는 상관 없습니다만, 유타카를 이상한 길로
끌어들이지 말아주세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날카로운 눈으로 파악하는, 그러나 속마음은 여린 아이. 사
쿠라 키리. 타이치는 신카와 쪽을 향해 슬쩍 눈치를 주고는, 키리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낮게 목소리를 깔며 뉴스 해설자
의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브라콘까지 포착되었습니다. 솔로국의 타이치 대변인은 남매가 없는 세상
에서 살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하셨습니다. 아아, 인생 괴롭구나."

"쿠로스… 타이치……! 당신이란 인간은……!"

키리는 주먹을 쥐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신카와
의 팔이 올려지자, 그녀는 힘을 쫙 뺄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괜찮지 않을까? 이런 것도. 다른 사람들도 와 있겠지? 모두 같이
즐기자구."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옥상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녀들이 뛰어들었
다.

"선배니임~ 미키미키입니다. 요오. 키리찡의 보호자로 따라왔습니다앗."
"저기, 난 이런 곳에 별로 오고싶지 않았다구, 정말."
"…타이치다."

귀여운 미키의 목소리, 퉁명스러운 토우코의 목소리, 묘하게 기쁜 듯한 요
코의 목소리.
그 목소리들을 듣고 있자니 타이치는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오오! 나의 귀여운 아기고양이들이 외로운 밤을 달래주러 왔구나!"

다음 순간, 타이치는 무수한 타격을 받고 차가운 옥상에 널브러졌다. 생사
여부는 불명. 토모키와 사쿠라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자아! 모두들 정좌하고 술잔을 받으세요!"

갑자기 튀어나온 호쾌한 여성의 목소리. 그것은 술에 취한 미사토의 목소
리였다. 미사토는 목에 둘렀던 목도리를 풀어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주먹을
불끈 쥐어 휘두르며 강변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각박한 현대의 도시사회. 인간불신풍조가 만
연하는 이 삭막한 시대에, 여기 이 군죠우 학원에서는 아름다운 우정의 꽃
이 찬란하게 피었습니다!
비록 바보들이긴 하지만, 바보인만큼 순수하기에, 잘났다고 외쳐대는 그
어떤 우민들보다 현세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자질을 지녔던 것입니다!
저희는, 그것을 단지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에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
다! 동참하는 겁니다. 자아, 가죠!
우리 군죠우 학원 방송부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이 불합리한 세상에!"
"누, 누나?"

토모키는 누나의 새로운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고 약간은 기뻤다. 이 사
람이, 타이치로 인해서 이 정도로 마음을 풀고 있었구나. 토모키로서는, 아
주 복잡한 감정이었다.

'타이치, 누나를 믿지 마. 배신당할거야.'

그런데도, 타이치는 자신조차 외면했던 미사토를 따르고 부활동을 도왔다.
사실, 미사토를 누구보다도 돕고 싶었던 것은, 토모키 자신이었다. 그런데
도 고작 바라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토모키는, 상처입으면서도 미사토에게 다가가는 타이치를 바라보며 괴로워
했다. 진짜로 싫어했던 건, 타이치도 미사토도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토모키는 쓴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타이치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자아, 모두들 잔을 들어올려라!"

타이치의 구령에 따라, 모두는 둥글게 모여앉아 술을 채운 잔들을 들어올
렸다. 미사토가 상기된 얼굴로 잔을 들어올리자, 토모키도 주저하며 잔을
들었다.
뭐,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거지.
토모키는 체념했다.

순백의 눈이 하늘을 뒤덮어 감싸는 학교의 옥상.

"방송부의 번영 같은 것은 너무 뻔한 멘트이고,또한 오늘은 방송부가 아닌
사람도 있으니, 오늘은 이몸, 쿠로스 타이치를 위해 건배해 주셨으면 합니
다. 영원한 우정을 위해!"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타이치는 잔을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선글라스가 미끄러졌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눈부신 밤.
눈보다 더 흰 백색의 태양.
희디 흰 낮의 밤.

"아아윽, 아아아윽."

쿠로스 타이치는, 얼굴을 감싸쥐고 오열했다.
백일몽.
꿈이라면, 잔혹한 꿈이다.

여름. 끝나지 않는 여름.
한낮의 학교 옥상 위에서, 타이치는 쓰러져 울부짖었다.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마이크.
그 상황에서도, 타이치는 방송을 멈출 수 없었다.

세상을 향해 소리쳐야만 했다.

그것만이, 타이치의 유일한 ──





순백의 눈이 하늘을 뒤덮어 감싸는 학교의 옥상.
모두 잔을 하나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페케군."

미사토는 상냥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타이치."

토모키는, 멋적으면서도 친근함을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쿠로스 선배."

미키는 웃음과 함께 그 이름을 불렀다.

"타이치."

요코는 나직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타이치……."

토우코는 입을 비죽거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

"쿠로스 타이치…"

키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 이름을 불렀다.

"타이치!"

사쿠라바는 힘차게 그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모두는 함께 외쳤다.

"군죠우 학원 방송부원 쿠로스 타이치를 위하여!"

쨍.
모두들 잔을 부딪혔다.

그곳에, 타이치는 없었다.
겨울밤. 미사토의 제의로, 그들은 다시 학교 옥상에 모이게 되었다.
방송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다음 방송이 언제일지, 다음부터는 방송이
들릴지 안 들릴지도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눈송이는 굵어지고, 추운 겨울밤은 깊어져갔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바라보고,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활동을 즐
겼다.
물론, 묵묵부답인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지만 표정만은 따뜻했다.

미사토는 아련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엉망진창이던 부. 자신이 도피처로 삼고자 시작했던 부활동.
단지 한 소년에게 내민 호의가, 이들을 이렇게 묶게 되었다.
오직 한 소년의 힘으로, 방송부는 결속을 되찾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 소년에게 감사했다.

달이 휘영청 걸린 밤 하늘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크륵.
그때, 사쿠라바는 라디오에서 들리는 미묘한 잡음을 들었다.

"모두, 잠시 조용히 해봐."

아무도 사쿠라바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사쿠라바는 라디오 곁으로 터
벅터벅 걸어가서 주파수를 맞추었다.

"치- 지익. 치- 에. 치- 그럼. 마지막으로 우정을 위해 건배하겠습니다.
치치칙. 혼자 건배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하하하. 혹시나 이 방송을 같이
듣고 있는 친구분들이 계시다면 잔을 들어올려 주세요. 우정은 소중한 거에
요. 잘 간직하시길."

사쿠라바는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돌아보았고, 그 순수한 미소는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우정은─"

그 순간, 잡음이 심해져서 더 이상 타이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러나 사쿠라바와 토모키는 자신들이 다음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빈 잔을 들어올렸다.

"─댓가를─"

토모키는, 타이치가 좋은 친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였다.
하지만, 그저 친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요구하지 않아."

사쿠라바는 타이치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건강
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는 또 한명, 타이치의 친구를 대신해 키리는 잔을
들어올렸다.

"…우정은…댓가를…요구하지……않……아."

흐느낌 속에서 그녀는 겨우 말을 마쳤다. 키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눈물은, 단지 신카와 유타카만을 위한 것일까?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
다. 미키가 말없이, 그런 키리를 뒤에서 감싸안았다.
그녀들의 우정 역시,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 관계였다.

그리고, 세명의 잔이 부딪혔다.

쨍.





"우정은… 댓가를 요구하지 않지. 응."

타이치는 허공을 향해 빈 잔을 들어 건배했다. 복잡한 감정이 타이치의 마
음속에서 들끓었지만, 타이치는 그것을 억눌렀다.

"오늘의 방송은 정말로 끝."

타이치는 술잔을 채워서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손이 닿는 쪽에 있는 물
건은 카레빵의 박스.
털썩 앉아서 카레빵의 봉지를 주욱 뜯는다.

"술안주가 카레빵이라니. 이렇게 먹는 사람은 나뿐일까."

뭐어, 아무래도 좋다.
타이치는 한입에 술을 들이키고 카레빵을 베어물었다.
그리고, 그늘 밑에서 길게 누웠다. 빈 술잔은 머리맡에 내려놓는다.

"몇잔째일까."

타이치는 마음속으로 답을 내놓았다.

X잔.

X는 미지수. 또한 그 모양은, 교차한다. 크로스(Cross)한다.
우정이란 이름의 채널이 교차한 적이 있었다. 도원결의라고? 참으로 바보
같은 이유로 들어올린 잔들. 그러나 타이치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토모키, 그리고 사쿠라바.
바보같은 나의 친구들.

그리고, 또 한명의 친구.
신카와 유타카.

그 이름을 떠올릴때마다, 타이치는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가득한 회한, 아쉬움, 그리고 이제는 잊혀진 해묵은 원망.
그러나, 타이치는 그와 함께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
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어. 넌 행복한 녀석이야."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지.

타이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뭐라도, 어떤 방법이라도 좋다.
단지 꿈속이라도 좋았다. 그들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웃고, 떠들고 싶
었다.

상처입힐 거리에 미치지 않는, 이 먼 발치에서.
타이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꾼다.

새하얀.
아주 새하얀.
지독히 새하얀 밤의 꿈을 꾸었다.
그가, 언제까지나 기다리던 그런 순백의 밤.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는, 마냥 즐거운, 꿈같은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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