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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bird under the moonlight

04/11/17

태그 : 月姬, 타입문, 백합, 시리어스, SM

* * *



「저는 깊고 깊은 어둠, 그 어둠 속에 드리워진 칠흑의 그림자」
『하암』
「심판하고, 속죄하며, 정화합니다」
『난 이유가 듣고 싶다고 했잖아』
「이유.」
『그래.』
「이유라구요」
『바로 그거』
「네,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흐응. 뭐였을지 궁금한걸』
「하지만 별 의미는 없어진 것 같아요. 이젠」
『무슨 뜻이지. 그건?』
「언제부터랄까요.」
『……』
「아마도, 그녀의 손톱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뿌리던 달의 공주가 내린 단죄의 검이.
아니, 불필요한 묘사는 그만두죠. 뭣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죠. 그것은 그저 도구였을 뿐이고, 도구가 부순 것도 도구였을 뿐입니다」
『과연, 역시 공주인가』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이유는 거기서 태어났고, 그것으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녀가. 저를. 죽였을. 때」
『너도 그녀를 좋아해?』
「아뇨. 단지, 그것 뿐. 제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네. 단지. 그것. 뿐. 이어야…」




* * *



뭔가 스위치가 올려지는 느낌. 주위가 다시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습니다. 몸의 모든 감각은 무서울 정도로 빨리 부활했습니다. 저는 재빨리 몸을 굴렸습니다. 차디차게 흰 포석이 산산히 부서져 얼음조각처럼 튀어올랐습니다.
잠시, 아주 잠시 옛날의 싫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저는 잔인할 정도로 높은 밤하늘 아래에서 흰 연기를 내뿜으며 대리석 벽에 기대었습니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세워진,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이었겠죠. 지금은 잊혀진 어떤 신을 위해 바쳐진, 더할나위 없는 정성의 결정체.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이성도 없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 어떤 것'에 의하여 아무것도 아닌 돌덩이처럼 무참히 부서지고 있습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제가 피한 대리석 벽에 다시 한번 손톱이 박히고, 보기 흉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아름답게 세공된 대리석 위의 그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습니다. 저것을 새긴 조각가는 과연 자신의 그림이 저렇게나 허무하게 파괴될 줄 알고, 저 작품을 창조한 걸까요. 과연 그랬을까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하얗게 뿜어져서 주위를 덮는 거친 숨소리들. 이제, 지루한 추격은 끝난 듯 싶습니다. 아무래도, 저 짐승 녀석이 마지막이겠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날카로운 손톱을 피해, 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립니다. 직선으로 일말의 주저도 없이 절 따라 뛰어오르는 멍청한 짐승.

우스워. 정말. 나도 다를 바 없지만.
생각은 짧았고, 몸은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마력을 끌어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든 흑건(黑鍵) 3개가 각각 녀석의 이마 정중앙, 목, 가슴 한가운데를 각각 꿰뚫었습니다. 공중에서 달려오던 속도와 거의 마찬가지로 튕겨나가는 짐승. 포석을 마치 두부처럼 쑤욱 뚫고 들어간 칼날은 녀석의 몸을 그대로 고정시켰고, 몸에서 마력을 폭발적으로 끌어낸 저는 흑건에 주각(鑄刻)을 새겨넣고 그것을 그대로 복부에 꽂아넣었습니다.

한때는 사도에 근접할 정도로 능력을 끌어올려 흡혈충동을 제어해 교회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녀석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며칠전 이성을 모조로 잃고 한 마을을 몰살시키는 바람에 매장기관이 나서게 된 거죠. 지금은 별볼일 없는 짐승에 불과하게 되어 버린, 어리석은 괴물. 마을에서는 선량한 의사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던가요. 실제 정체는 마술사였지만.
마을에 숨어든 흡혈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흡혈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용케 흡혈충동을 참으면서 버텨온 모양이었지만, 결국 결말은 이런 것. 착한 흡혈귀 따위는 없어. 어차피 인간의 피를 탐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존재의의.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한계가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예외는 없어.
저는 착지함과 동시에 흑건에 새겨진 마술각인을 발동시켰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마력을 주입했던 탓인지, 거의 폭발과 맞먹는 열기와 불꽃이 터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흩날리는 법의. 사도조차 되지 못한 녀석에게는 정화의 의식조차 필요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망쳐."

…자신이 거부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불꽃 속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남성의 목소리. 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도망쳐."

좀더 똑똑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맹렬하게 타고 있는 불꽃 속에서 그 목소리가 그렇게 똑똑히 들려 올리 없지요. 분명 마술입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겠지요. 저는 여전히 그 폭염으로부터 등지고 서 있습니다.

"도망치거라. 매장기관의 여성이여."

…보고싶지 않습니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음 발견했을때, '도망쳐, 도망쳐, 리제.' 라고 중얼거리며 여린 여자아이의 목을 물어뜯은 상태에서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붉은 빛깔의 가운에서 마을사람들의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저에게 도망치라고 중얼거리며 달려들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흡혈귀란 결국, 그런 거야.
본능이 부르짖는 진실. 혈해(血海)속에 혈의(血衣)를 걸치고 춤추던, 과거라는 이름의 거울 속 자신이 속삭이는, 부동의 사실.
…너무나도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 도망치거라. 내 피가 반응하고 있어."
"…뭐?"

저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폭음과 함께 폭염이 일었습니다.
거대하게 치솟는 불기둥. 저는 그것을 잠시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전언은 짧았습니다.

'그녀가 온다.'

치열하게 자력으로 흡혈충동을 억누르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마술사를 순식간에 무너뜨린
'계기'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태어난 지방의 이 마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만월의 달을 배경으로 유쾌하게 웃어제끼는 그림자가 대답해주었습니다.

"환영식은 마음에 들었어? 시엘."

신전의 첨탑 꼭대기에 발을 걸치고 장난스럽게 흔들거리는 젊은 여성.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태양을 닮은 웃음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죠.

"…알퀘이드 브륜스터드!"

최후의 진조. 진조의 백색 공주. 사도의 처형 집행자. 사사건건 제 일에 간섭하는 귀찮은 흡혈귀.
…또한, 저를 살해하기도 한 장본인입니다.
저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었습니다.

"아냐, 역시 이곳이니 에레이시아라고 불러줘야 하나?"
"시엘이라고 불러주시죠. 알퀘이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뭐어, 그렇지. 너를 위한 무대니까. 너 좋을대로 불러줄게."

저는 이빨을 으득 갈고는 질문했습니다. 저 방약무인한 태도는 예전부터 제가 싫어하던 것이었죠.

"여긴 도대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흐흥- 높은데 올라오니 기분이 좋네~ 이러니까 시엘이 높은데 올라오길 좋아하는 거구나. 헤헷."

알퀘이드는 제 말을 듣는체 마는체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알퀘이드!"
"아아, 말했잖아?"

알퀘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 했습니다.

"시엘이라면 벌써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습니다. 미소와 함께 빛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금빛으로 물드는 마안(魔眼).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멈춘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마을을 피바다로 만든 건 바로 나야. 바로 널 부르기 위해 말이지.”

그와 동시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아까 솟아오르던 불기둥이 용의 형태를 취하고는 칠흑의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만월의 은백 달빛 아래 불꽃을 화려하게 뿌리며 신음을 토하는 용의 모습은 공포를 넘어서 차라리 아름답도록 경이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알퀘이드가 앉아 있는 높디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 닿을 정도의 키를 가진 그 환상적인 괴수는 길다란 숨을 토해내 신전의 건축물을 녹였습니다.

용암보다 더 뜨거운 태고의 불. '열기'란 단어를 응축시켜 만들어진 것 같은 저 가공할 무기.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끔찍한 열기가 훅훅 끼쳐 왔습니다. 저런 것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그야말로 뼈도 남지 않겠죠. 하지만 저에겐 그 괴물보다, 그 괴물을 만들어낸 더욱 끔찍한 괴물의 존재가 더욱 두려웠습니다. 예.
거대한 불꽃의 용이 저를 향해 머리 - 라고 생각되는 부분 - 를 돌렸지만, 저는 그것을 무시하고 알퀘이드를 바라보았습니다.
흰 옷에 특색없는 치마. 그리고 바보같은 웃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을 등진 그녀가 저는 제가 보아왔던 어떤 흉측한 괴물보다 공포스러웠습니다.

악몽을 그대로 현실에 재현해낼 수 있는 그 끔찍한 능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그녀는 아름답지만 잔혹한 초월자였습니다. 첨탑에서 저를 굽어보는 그녀는, 이름조차 잊혀진 신의 재림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의 숭배지를 존경할 줄 모르는 불경한 신자를 향해 철퇴를 내리는 냉혹한 달의 여신, 그 자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그 경외감에 진저리를 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

알퀘이드는 그 상황에서도 저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고, 저는 더이상 편안히 담소를 나누고 싶지도, 가만히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매장기관의 일원으로서, 그녀를 더이상 방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어를 포기했군요. 그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진조 알퀘이드 브륜스터드,
당신을 처단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내면에는 묘한 쾌감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전과 상황이 바뀐 현재, '그녀'를 정식으로 처단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로어가 사멸한 지금 그녀를 제대로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치 상황만으로도 흥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옛날 처음 본, ‘사도를 처형하기 위해 살아 움직이는 도구’ 였던 그녀의 압도적인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끈질기게도, 제 머릿속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었지요. 제가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기어나왔을 때도, 그것만은 무엇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요. 추악하게 되어서라도 살고자 하는 경이적인 제 생명력을 지탱하는 일부가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어쩌면 이 상황은 무엇보다 제가 꿈꾸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내 얼굴을 찌푸려야 했습니다.

'…낭패다.'

제 수중에는 현재 그녀를 제압할 개념무장이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이곳에 대해 저에게 알려진 정보는 지극히 단편적인 것 뿐이었고, 진조의 개입은 커녕 사도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되어 있었지요.

'…계획적이었나.'

첨탑 위의 공주는 마치 제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무심하게 던졌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알퀘이드의 손이 내려감과 동시에,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용이 입을 벌리고 커다란 불꽃이 섞인 숨을 토해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용의 움직임에 맞추어 있는 힘을 다해 벽으로 뛰어올랐습니다.
물론 그 높이로 땅바닥에 강처럼 흐르는 불꽃의 양을 감내하기는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저는 손가락에 끼운 흑건을 벽에 박아넣고 그것을 지지대로 뛰어올랐습니다. 그것과 최고조에 달했을때 다시 흑건을 박아넣고 도약. 그러기를 수번 반복해서, 저는 신전의 꼭대기, 반반한 지붕 위에 가볍게 올라섰습니다. 괴물은 아래쪽만을 향하여 불길을 내뿜었고, 저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 괴물을 만들어낸 자 쪽을 상대하는 것이 싸움을 빨리 끝내는 길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저는 지붕과 지붕을 넘나들며 불꽃을 피하고, 그녀가 앉아 있던 첨탑 꼭대기로 몸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제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리는 순간, 복부에 느껴지는 따뜻하면서도 뜨겁게 타오르는 감각. 제 복부를 꿰뚫고 있는 것은 피로 물들어 있는 흰 손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지만 마력을 있는대로 끌어내서 그 순수한 반발력으로 그녀를 튕겨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림없어."

그녀는 금색의 마안을 빛내며 제 머리를 움켜쥐며 제 복부에서 손을 뽑아냈습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어지러울 정도의 출혈. 마치 분수 같이 뿜어져 나오는 피는 그녀의 흰 상의를 붉게 물들여 갔습니다.
저는 머리를 움켜쥐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습니다.

"아아, 이 어찌나 아름다운 광경인지."

알퀘이드는 몽롱한 눈빛으로 손에 가득 묻은 저의 피를 천천히 핥아내려갔습니다. 비록 움직임을 봉쇄당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행동은 제 눈에 똑똑히 들어왔습니다. 그녀가 그 피를 취하는 모습이 얼마나 관능적이었던지, 저는 제 처지를 잠시 잊고 얼굴을 붉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저는 몸의 마력을 제어해 출혈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흑건을 세워서 앞으로 뿌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림없다고 했잖아?"

질척한 액체가 흑건을 쥔 손 위로 흩뿌려졌습니다. 그녀가 제 얼굴을 가까이 당기며 스스로 흑건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저는 피를 울컥 토해내며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철갑작용(鐵甲作用)의 봉쇄가 목적인가.'

저는 속으로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제가 토해낸 피를 뒤집어쓴 알퀘이드는 말 그대로 피에 젖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제게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시엘. 분명히 어림없다고 말했는데도 실수를 저지르다니. 나쁜 아이로군."
"…쿠, 쿨럭. 제가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죠?"

피 섞인 잰기침. 내장이 심하게 상한 모양이었습니다. 알퀘이드는 완전히 풀린 눈으로 저를 응시했습니다.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네. 그렇다면 역시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겠지?"
"큭?"
"아하하핫!"

갑자기 손아귀의 힘이 강해지나 했더니, 그녀는 제 얼굴을 움켜쥔 그대로 첨탑 위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충격으로 제 상처는 더욱더 벌어졌지만 더이상 나올 피도 없는지 피는 뿜어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가죽처럼 두껍고 단단하고 무거운 바람이 등을 후려치고, 날카롭게 할퀴고 있었습니다.
미칠듯한 고통과, 공포와 분노가 연이어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시야는 흐릿해져 갔습니다. 피를 너무나도 흘렸던 탓일까요, 아니면 이 격통을 정신이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가는 저에게, 의식의 끈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려왔던 것은 그녀의 광기에 찬 생생한 웃음소리.
저는 그대로 어두운 무의식의 바다로 추락했습니다.


* * *



철컹.
키르르르륵.
듣기 싫은 쇳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몸의 감각들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고, 저는 눈을 힘겹게 떴습니다. 저는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주위의 돌벽과 돌바닥은 차가움 외에 어떤 감각도 느끼게 하기 함들었습니다. 몸의 상태는 지극히 양호. 시선을 떨구어 보니 배가 뚫렸던 상처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의 역시 방금 빤 것처럼 깨끗한 상태.
제가 꿈을 꾸었던 것일까요, 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손목과 발목에 채여져 있는 차가운 금속의 수갑이 그 추측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금속 수갑은 엄청나게 두꺼웠지만 무게 자체는 상당히 가벼웠고, 각각 그 끝에 달린 쇠사슬은 천장과 바닥에 복잡하게 연결되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쇠사슬의 굵기 따위야 문제가 되지 않았으련만… 저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마력의 운용이 아예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래서야 완전히 무력합니다. 시험삼아 힘을 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곤란한 상황.

"어라, 이제 일어난 거야?"

기다리다 지친듯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는 목소리지요. 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사슬은 꽉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여유가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갖은 감정을 꾹꾹 누르며 저는 그녀의 이름을 또다시 입에 올렸습니다.

"알퀘이드 브륜스터드…"
"아아, 그 버릇없는 눈초리."

알퀘이드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이마를 눌렀습니다.

"난, 네게 그 의자에서 일어나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걸."

키르르르륵.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귓가를 쟁쟁히 울리는 쇳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우더니, 두줄의 쇠사슬이 허리께를 가로질러 휘감았습니다.

"크으으읏."

저는 이를 악문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그 쇠사슬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휘감겨 들어서, 의자에 제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문제라면 그 조임이 한계 이상으로 계속된다는 것. 교차하는 2개의 쇠사슬은 의자와 함께 제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세차게 압박해 왔고, 제 입에서는 결국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습니다.

"끄아아악!"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고통, 기절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거대한 돌문 사이에 끼어 짓눌리는 참혹한 기분. 스스로의 비명조차 자신에게 안 들릴 정도로 정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내가 특별히 신경써서 만든 도구들이야. 기뻐해주는 것 같네. 시엘.”
“도, 도대체 어디가 기뻐한다는… 아아아악!”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했고, 또한 수없이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란 것에 익숙해지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악에 받쳐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안 지르려 노력했지만, 상식을 뛰어넘은 고통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비명을 지를 힘조차 떨어져 갔을 때에야 쇠사슬은 느슨해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의자에 축 늘어졌습니다. 아까의 갑자기 복부 쪽이 당겨와 피가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상처는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아, 하악, 쿨럭."

찌릿한 통각이 마약처럼 전신에 퍼져갔습니다. 복부의 상처로부터 느릿느릿 퍼져나가는 그 독기는 감각을 차차 마비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조이던 쇠사슬은 느슨해졌지만, 이미 전신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가 후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열려진 턱에서는 피가 섞인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이를 악물다가 혀마저 깨물어버린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그 입을 닫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차라리 기절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알퀘이드의 장난기 섞인 붉은 눈동자가 다가와 그것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숨만을 몰아쉬며 그녀의 눈을 증오를 담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지금의 저에겐 그것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알퀘이드는 가볍게 코웃음 쳤습니다.

“아직까지 독기가 빠지지 않다니. 역시 시엘이네. 뭐 난 너의 그런 점을 높이 사지만 말야.”

전신을 휩싼 무력감 속에서도 유일하게 생생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알퀘이드에 대한 증오. 그것만이 지금의 저를 눈뜨고 있게 만들었습니다. 알퀘이드는 금빛의 마안을 발동시키며 천천히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 눈바로 앞에서 천천히 허리를 구부렸습니다.

제 얼굴을 들어올려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 저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난폭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기에. 그녀는 그 상태로 입을 제 귓가에 가져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습니다.

“모두 널 위해 준비한 거야. 말했잖아? 시엘.”

알퀘이드의 가녀린 두 팔이 제 어깨에 걸쳐졌고, 그녀는 얼굴을 더욱 아래로 내렸습니다. 목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가 했더니, 곧 피부에 닿는 예리한 치아의 감각.

“으흑.”

그야말로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감촉이 강렬한 느낌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제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따스한 감촉을 남기며 그녀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천천히 고통이 사라지며 몽롱한 기분이 찾아왔습니다. 이래서는 안돼, 라고 되뇌이면서도 흡혈행위가 지속될수록 그러한 저항감은 줄어들어 갔습니다.
이대로는 그녀의 노예가 되고 말거야.
머릿속에선 거부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몸은 황홀경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저는 필사의 의지를 짜내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꽉 깨물었습니다. 부르르 떨리는 전신. 입가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알퀘이드가 흡혈행위를 중단했습니다.

“…아.”

스스로 듣기에도 안타까운 신음소리. 이미 제 본능은 알퀘이드의 흡혈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타오르는 듯한 목. 이성은 그 충동에 거부하려고 발악했습니다.
안 돼. 안 돼. 지배당한다.

스륵.

그 순간 목에 닿는 따스하고 뭉클한 감촉. 그녀의 혀가 제 목에 흘러내리는 피를 혀로 핥고 있었습니다. 제 얼굴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달아올랐습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깨끗이 핥고 나서 피식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가 묘하게 매력적이라서 저는 차마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정신이 그녀의 피에 잠식당해 버린 걸까요.

“아아. 이거 아깝잖아.”

갑자기 다시 얼굴을 들이대는 알퀘이드. 그녀는 순식간에 저의 입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그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핥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모든 이성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그에 멈추지 않고, 혀로 제 입술을 열더니 억지로 혀를 집어넣었습니다. 이미 제 이성의 존재는 희미해진 터라, 저는 혼미한, 그리고 즐거운 기분으로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습니다.

미약한 이성의 명령 따위로는 이제 거의 몸을 통제하기 불가능했습니다. 알퀘이드가 혀를 떼자 혈액이 섞인 붉은 타액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하아. 하아…….”

저는 상기된 얼굴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최후의 이성은 차마 말하길 거부했습니다만, 본능은 그녀에게 계속하도록 요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본분도, 목적도, 그녀에 대한 살의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미약한 자존심은 겨우 반항의 말을 끄집어냈습니다.

“…이…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제가… 굴복할…….”
“틀렸어. 시엘. 속마음과 말이 다르잖아.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텐데.”

알퀘이드는 싸늘한 미소를 짓고 냉정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녀는 곧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습니다.
희미한 달빛에 흐트러지는 아름다운 금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네 몸이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시험해볼까?”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는 알퀘이드. 그녀는 손톱을 접고 손을 내밀어 느릿느릿한 손길로 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미쳐버릴 정도의 여유와 간격을 두고, 찬찬히, 그러나 확실하게 제 몸을 농락했습니다. 가슴, 피로 얼룩진 복부, 그리고 허벅지로 내려오는 부드러운 손길. 법의 위로도 느껴지는 그 농밀한 애무. 저는 그 황홀함에 다시 혀를 깨물고 싶어졌습니다.

“읍, 으흑. 윽.”

숨죽인 신음소리. 알퀘이드는 제 신음소리를 듣고 비웃음을 띄웠습니다.

“그러나까 말했잖아? 시엘.”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법의를 걷어 올리고 비부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저는 몸을 뒤틀며 저항했습니다. 아니, 저항했다고 하기보다는 반응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죠. 손과 발은 수갑에 채워져 고정되어 있었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한 반응이었습니다.

“흐응. 이래도 말야?”
“아흑, 흐윽! 아, 알퀘이드…! 그, 그만두…….”
“여전히 말은 그렇게 해도 말야. 다리 사이로 흐르는 저건 뭔데. 실금(失禁)이라도 한거야?”
“우, 으으윽.”
“걱정마. 시엘. 아직 밤은 길단 말이지…….”

알퀘이드는 손가락을 핥으며 요염한 표정으로 달빛 아래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음월(淫月).

밤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공포와 그에 못지않은 흥분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피투성이로 웃고 있는 알퀘이드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저의 추악한 모습.
그것이, 밤의 종말.



* * *




저는 눈을 떴습니다.
깊은 늪 속에 잠겼다가 힘겹게 떠오르는 느낌.

“하, 하악, 하아아.”

온 몸이 흠뻑 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거친 숨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습니다. 얇은 잠옷이 온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어서 기분 나쁜 촉감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는 고요한 방 안. 제 숨소리만이 반사되어 귀에 울렸습니다. 지금쯤 제 얼굴은 무슨 색일까요.
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습니다.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그 생생한 감각은 아직도 희미한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
…알퀘이드가….
아녜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걸까요.
머리만 이불 밖으로 내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꿈속의 장면들만 생생하게 다시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오를 뿐이었습니다.
달아오른 몸은 아직도 진정될 줄 모르… 아니. 아닙니다.
이런저런 망상을 하며 침대 기둥에 머리를 부딪히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부엌 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 목소리는 제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는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데, 마치 대화를 나누는 투였습니다. 저는 몸을 기울여서 말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자아자아. 당근 더 많이 드세요. 고양이씨.”
“…….”
“에? 이제 충분하다구요? 아뇨. 아까 수고하셨는데 얼마든지 더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
“제가 먹을거요? 에헤헤. 마스터 몰래 숨겨둔 분량이 있거든요.”
“…….”
“우읏. 벌써 가시겠다니. 아직 많이 남았는데…….”
“…….”
“부엌 창문으로 나가시겠다니, 저도 문 정도는 열 수 있다구요!”
“…….”
“뭐 정 그러시다면 하는 수 없죠. 다음에도 시간 나시면 부탁드려요. 고양이씨!”

조용한 발소리, 그리고 창문이 열리는 소리. 저는 침대 모서리를 쥐고 하마타면 으스러뜨릴 뻔 했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기분. 아, 안돼죠. 치밀한 복수를 위해서는 참을성이 필수죠.
저는 이불을 슬며시 빠져나와 소리없이 달려서 부엌의 사각지대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잘 가요. 고양이씨~ 다음에 또 와주세요~”

열려진 창문을 향해 말발굽을 흔드는 소녀. 눈치빠르게 새벽의 어스름 사이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검은 고양이. 전자 쪽은 아직 제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저는 슬쩍 몸을 내밀어 바닥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잔뜩 쌓인 사진들.

“랄라~ 이제 마스터의 부끄러운 사진들을 숨겨놓고 복사해서 위협용으로 써야지~♪”

…저 사진에 찍힌 것들이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몸을 날려 그 사진들을 나꿔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잠시 지나치게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소녀쪽이 먼저 무거운 입을 간신히 열었습니다.

“…에,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스터?”
“네에. 아주 잘 잤답니다. 세븐.”

속마음을 숨긴 일그러진 웃음들. 세븐의 눈은 제 손에 들린 사진으로 이내 옮겨가고는 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저는 생긋 웃으며 흑건을 소환해서 사진을 꿰어 세븐의 바로 뒤쪽 벽에 박았습니다.
이내 발동한 화장식전으로 활활 불타는 사진들. 그 사진들을 보며 세븐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갔습니다.

“네에. 정말 재미있는꿈도 꾸었죠.”
“…아, 아아. 그게 말이죠. 마스터. 그게 실은…”
“…아직 변명을 할 입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요? 그 입, 당분간 못 놀리게 해드리죠.”
“아, 아악, 마, 마스터 죄송해요오오!”
“문답무용!”

팍팍팍팍.
연달아 박히는 4개의 투검(投劍).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저로서는 집안의 물건에 대한 애정보다는 세븐에 대한 분노가 앞섰기에, 눈에 이미 보이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커다랗게 외쳤습니다.

“멈추지 않으면 숨겨둔 당근은 모두 압수입니다아앗!”
“마, 마스터~ 너, 너무해요오오!”
“잔말이 많습니다!”

그렇게 광란의 새벽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명, 애원, 폭설, 폭력이 뒤섞인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고, 저는 세븐과 등을 맞대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았습니다.

“하아, 하아, 하아.”
“에우우~ 어우에요, 아으어. 으엥.”
“하아, 시, 시끄러워요. 하아…….”

긴 한숨. 안 그래도 체력을 소진한 밤이었는데, 새벽에도 무리를 해서 매우 피곤했습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지라, 샤워나 하고 다시 잠을 청할까, 하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습니다. 급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

“시엘~ 놀러왔어~”

바보 같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여성의 목소리. 저는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바람에 세븐이 미끄러져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칭얼댔지만, 저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현관에는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어제의 꿈에 대비되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녀가 그렇게 빛나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웃음’의 순수한 의미만을 정제해서 떠올린 그 모습이란. 차마 언어로서 표현 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존재 중에서 ‘공주’란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는 백색의 흡혈희, 알퀘이드 브륜스터드 단 한 명뿐이란 걸 되새길 수 있게 되었죠.

“시엘, 왜 그래?”
“예, 에에?”
“왜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저는 당혹스러운 기분이 되었습니다. 뭔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듯한 미묘한 기분. 저는 황급히 얼굴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그, 그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잘못 보신 겁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주말인데 여기 와서 뭐하는 거죠? 토오노군과 데이트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말에 알퀘이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 너무 귀여워서 끌어안아 주고 싶어! 아아, 저 입술을 내밀고 토라진 표정이…….
…….
…아니, 뭔가 확실히 벗어나 버린 것 같습니다. 토오노군에게서나 느낄 만한 감정을 저 여자에게서 느낄 줄이야. 하지만 토오노군이 강아지처럼 귀엽다면 알퀘이드는 고양이처럼 귀엽다고나 할까요.
상당히 틀립니다. 틀리다구요. 그렇게 폭주하는 저의 상념은 알퀘이드가 입을 열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키가 무슨 일인지 침대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해. 몸이 많이 아픈가봐. 놀아준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할 때 알퀘이드의 얼굴은 정말로 쓸쓸해 보였습니다. 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어두운 표정.
사실 그녀를 그녀답게 만들어 주고 존재의의를 부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가 살아갈 이유를 찾게 만든 소년이기도 하니까요. 제 마음도 따라서 우울하게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부러 만면에 웃음을 띄웠습니다.

“토오노군이니까.”
“에?”
“토오노군이니까, 별일 없을 거에요.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예요.”

저는 속으로 우울해지는 감정을 삭이고 밝게 웃음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 또한 저를 위해서. 그녀는 다행히도 제 말에 곧 밝게 웃어주었습니다.

“역시나 그렇겠지? 시키니까.”
“네에.”
“고마워, 시엘. 안 그래도 렌이 세븐과 놀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는데 말야. 나도 오늘은 시엘 집
에서 좀 뒹굴거려 볼까나~”

저는 한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놈의 도둑고양이가! 아니나 다를까, 알퀘이드의 치맛자락 뒤로 살랑거리는 검은 고양이의 꼬리가 보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갑자기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어젯밤의 기억. 어젯밤의… 알퀘이드의… 어젯밤… 알퀘이드…….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 알퀘이드의 의아한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시엘, 아까부터 무슨 일이야? 너도 어디 아파?”
“아, 아아뇨!”

저는 고개를 맹렬히 흔들며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걱정스런 얼굴로 손을 올리더니 제 머리에 손바닥을 댔습니다. 당연하게도, 제 얼굴의 온도는 더더욱 올라갔습니다.

“헤에. 뜨거운걸.”
“트, 트틀립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뿐이에요! 전 잠시 머리를 식히러 샤워나 하고 오겠습니다.”
“흐응. 그런거였어? 어쩐지 아까부터 땀냄새도 심하게 난다 했지.”
“이, 일부러 킁킁대지 마요! 바보 흡혈귀!”

저는 얼른 고개를 돌려서 종종걸음으로 알퀘이드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한시 바삐 차가운 물에 샤워나 하면서 어젯밤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야겠습니다.

“잠깐 기다려줘요. 샤워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세븐. 쓸데없는 말 꺼냈다가는 알죠?”
“네, 넵! 마스터!”

세븐은 거수까지 붙이면서 커다랗게 대답했습니다. 뭐어. 쓸데없는 걱정이야 할 필요 없겠죠. 욕실에서 잠옷을 벗어서 걸어놓고 샤워기의 손잡이를 당기려는 순간, 예의 대책없이 순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다, 달라붙지 마세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헤에. 역시 시엘은 몸매도 좋네.”
"잠깐, 여기서 당연스럽다는 듯이 옷을 훌훌 벗지 마세요! 여긴 제 집 안이라구요!“
“하지만 이왕 놀러온 김에, 가만히 있는 건 재미없잖아? 뭣보다 둘이서 목욕하는데 좁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저는 단지 샤워를 하러 들어왔을 뿐인…….”
“아무렴 어때. 내가 등이라도 밀어줄까~?”

차마 거울을 볼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 제 얼굴은 아마 붉은 물감통에 머리 전체를 담갔다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 같습니다. 아아, 미안해요. 토오노군. 아주 잠깐이지만, 오늘 토오노군이 알퀘이드와 데이트를 가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로 생각되어 버렸어요. 그래도 역시, 상냥하니까, 용서해 주겠죠.

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기의 물을 조절중인 난감한 공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꿈속의 기억 속에서 오래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끄집어 낼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나눴던 제대로 된 거의 유일한 대화라 더욱 기억에 남았는지도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애증이란 이름일지 몰라도, 저 역시 그녀를 좋아한다고요. 백일몽에 불과한 감정일지 모르지만, 그녀를 사랑한다고요.

너무 커져서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비누방울과 같은 행복의 편린들.

“꺄아, 너무 물이 차가워!”
“바보같이! 너무 세게 틀어서 다 튀잖아요!”
“에잇~!”
“그렇다고 이쪽으로 돌리지 마요!”





잡으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 한 마리가, 엉성하게 만들어진 새장에서 파닥거립니다.

언젠가 달아나겠죠.

하지만, 지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영원한 행복 따위는 믿지 않아요.

단지 이 순간 행복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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