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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강제

07/03/06

태그 : 모엣코 컴퍼니, 레이, 리니아

......아. 뜬금없이 모엣코 컴퍼니 팬픽이라니.
슬럼프중에 휘갈긴거라 날림이지만 올려봅니다.
요즘 코드기어스를 열심히 시청중이라 중간에 나오는 기어스는 웃어넘겨주세요 (........)

리니아 루트의 큰 내용누설이 있으니 안 보실 분들은 백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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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as for Happiness
행복을 위한 강제
































와인의 빛깔은 붉다.
그 색은, 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진했다.

레이는 글라스를 들어 그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시큼한 향이 입 안으로 퍼지고, 목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와인병의 라벨은 꽤 고급스러운 프린팅으로,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레이는 술을 음미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단지, 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와인을 마시는 기본적인 작법 같은 것은 몽땅 무시한 채, 레이는 기계적으로 병을 비우고 있었다.
선이 가는 그의 얼굴에 달빛이 호선을 그린다. 감겨있는 눈이 살풋 떨려온다.

그리고, 빛이 영글었다.

"윽..."

흐느낌을 죽이기 위해, 레이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남부제도 제2563호 섬, 모엣코 컴퍼니의 호위 메이드 최종 훈련 공정 시험 연락 해상 훈련소 ── 모엣코지마.
레이는 이 섬의 소장인 칸자키 타카히로가 과거 몸담았던 컴퍼니의 부대, PIXIES의 멤버였으며, 칸자키 타카히로가 극동일몰과 싸워 인간을 뛰어넘는 [너서리 크라임]의 힘을 상실하게 된 [붉은 날], 그를 지키고 두 눈을 잃었다.

그것이 타카히로가 알고 있는 전부.
아니, 기억하고 있는 전부라고 해야겠지.
레이는 실소를 머금었다.

[세계의 끝을 보는 소녀].
레이는, 타카히로의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랜 추억 속의 그 소녀의 마음을 간직한 채 만들어진 첫번째 안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간직하고 만들어진 [그]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보다 [그녀]에 가까운, 리니아가 만들어졌기에.

하지만 그녀와 너무나도 가까운, 순수한 만큼 아무런 힘도 없는 리니아가 이미 너무나 변해버린 타카히로와 조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게다가 둘 모두,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레이는, 자신이 리니아의 행복을 만들어주리라 결심했다. 그녀와 타카히로를 지키기 위해 불완전한 자신을 혹사해가며 강해지려 했다.
리니아는 그. 그는 리니아였으니까.

희생?
우스운 말이다.
자신이 없더라도, 타카히로의 곁에는 리니아가 있다.
후회할 겨를은 없다.
타카히로가 자신을 미워해도, 리니아가 자신을 동정해도, 그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국 타카히로에게 리니아를 맡길 수 있었다.
잊혀진 기억의 키워드와 함께.
바람이 불어, 시간을 다시 새기기 시작해가면 분명 레이가 원하던 행복에...

"...내가... 원해?"

취기가 돌기는 커녕, 더더욱 차가워진 머리를 느끼며 레이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밤이 끝나면, AC 컴퍼니로 돌아간다.
약속된 그날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행복?"

정말로 가소롭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N계획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몸. 쌓여진 죄악. 그 힘은 결국 자신을 집어삼켜 무(無)로 되돌리고 말리라.
...터무니없는 위선이다.

"...위선이 아니에요."

문이 벌컥 열리면서, 가느다랗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주머니에 찔러넣은 한쪽 손에서 칠흑이 영글기 시작했다.

"우, 우으윽!"

주위를 잠식한 살기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마는 그림자.
레이는 침입자의 정체를 깨닫고 살기를 거두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리, 리니아?"
"미, 미안해요. 레이씨. 고의는 아니었는데, 지나가다가 누군가의 슬픔이 느껴져서... 문득 깨닫고 보니 기억이..."

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방심했군. 설마 폐기된줄 알았던 액티브싱크(Activesync) 기능이 작동했을 줄이야. 프로텍트가 걸려있는 기억이 내것으로 갱신된 건가."
"......"

리니아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일어서서, 굳은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모든걸 알고 나니 내 꼴이 그렇게 우스워?"

레이는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타카히로씨라면, 분명 기억해주실 거에요. 설령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분명히 이해해줄..."
"닥쳐!"

레이의 손에서 일어난 암흑이 테이블의 술병을 휩쓸어 날려버렸다.

"...레이씨."
"네가 뭘 알아! 응? 내가 알던 타카히로는 저렇게 물러터진데다 사람좋은 바보가 아니었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만큼 냉정하고, 고결하고, 강했지. 계속 잠들어 있던 네가 그를 다 안다는 듯 지껄이지 말라고!"
"레이!"
"아. 아아. 물론 지금의 그라면 이 바보같은 이야기도 믿어줄지 몰라.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헌신은 뭐가 되는거야? 그와 함께 픽시즈에서 힘든 나날을 헤쳐나왔어. 그의 옆에서, 그를 동경하며, 그를..."

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니아의 슬픈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너는 나. 나는 너인걸.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겠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거였군."
"하지만 전... 레이씨 말대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은 눈까지 잃어 가면서 타카히로씨를 지켜줬지만, 전..."

리니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레이는 머리를 감싸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를 맴도는 소리없는 흐느낌 속에서, 레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됐어. 지금까지 고민한 나를 바보로 만드는군. 지금 그에게 필요한건 과거의 상처인 레이가 아니라 순수한 영혼인 리니아 ─ 상처입은 그의 마음과 영혼에 구원을 가져다 줄 존재인 너일텐데... 여태껏 그것만을 위해서 움직인 주제에 이제와서 이런 투정이나 부리고 있다니, 나도 터무니없는 녀석이다."

그런 레이의 손에, 리니아의 작은 손이 겹쳐졌다. 레이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리니아의 의지가 담긴 눈빛이, 레이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같이 행복해 질 수 있어요. 분명."

레이는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언제나 꿈꾸던 것. 절대 닿을 수 없는 것.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여겼던 그 닿지 않을 미래를, 리니아는 태연스럽게 말해보였다.
레이는 얼굴근육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후, 후후훗."
"왜, 왜 웃으시죠?"

레이는 정말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내가 너라는 게 실감이 났거든."
"에?"
"그리고 확실히 깨달았어. 타카히로의 곁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레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 리니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리니아의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고정시켰다. 그제야, 리니아는 레이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채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건! 안돼요! 하지마세..."
"RAY-0001 프로토타입 이머전시 코드, [기아스(Geas)] 발동."
"아..."

리니아의 낮은 탄식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레이는 빠르게 말했다.

"과거와 관련된 기억에 다시 프로텍트를 걸어라. 덧붙여 기억이 돌아온 후 나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는 삭제해라. 이 두 명령을 수행한 후 자동으로 1시간의 수면모드에 들어간다. 이상으로 강제인식명령 3개를 모두 충족, 코드[기아스(Geas)]해제."
"레...이...씨..."

힘겹게 눈을 뜨려고 노력하는 리니아의 의지와는 달리, 그녀의 몸은 오래지 않아 기동을 멈추고 수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눈에는,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리니아. 아직은 행복한 꿈을 꿀 시간이야. 타카히로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레이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발걸음이 타카히로의 침실로 향했다.

"아, 바보 안드로이드! 또 내 침대에서!"
"타, 타카히로씨? 오, 오늘은 저도 잘 모르는 일..."
"에에잇, 얼른 나갓!"
"소, 소장니이이임? 납득이 되는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쩌요?"
"키, 키리시마, 진정해!"
"어머나~ 쥔장도 꽤 하는걸. 부러운데~"
"카즈사, 네놈은 어째서 천장에서 나타나는 거냐?!"

자아. 타카히로. 기억해 내.

헬기의 프로펠러가 공기를 찢어내어 소음을 사방에 흩뿌린다.
레이는 헬기의 문을 연 채로, 작아져 가는 모엣코지마를 응시한다.
그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어선다.

따뜻하지만, 곧 부서져버릴 그 작은 행복이 깨어지기 전에.

레이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리니아를 위해 너를 부숴버리겠어.

이내 섬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에? 에에?"
"리니아? 갑자기 왜 눈물을..."
"그,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타카히로와 함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헬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리니아는, 눈물을 쓱 훔치며 중얼거렸다.

"...정말 바보에요.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 고물 안드로이드."
"...타카히로씨도 바보에요."
"큭! 어째서!"
"비밀이에요."

그것은 소녀가 간직한 비밀.
마지막 순간까지 숨기고 싶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

'당신 역시 가지고 있는 거죠? 그 마음을. 또 하나의 [나]. 레이씨...'

리니아는 헬리포트에 선 채,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수평선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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