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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rain Going to Heaven

01/10/28

태그 : 데카메론 프로젝트, 기차, 대산문학상

데카메론 프로젝트 단편

- 제 10 일 (소재 : 기차)

『A Train Going to Heaven』
(2001/10/28 作)


1. 흑설(黑雪)이 내리는 하늘 아래서

이니티움 Initium 역(驛)의 대합실. 창 밖의 하늘은 회청색을 띄고 있었으며, 다
양한 크기의 금속 파이프들이 하늘을 체스판처럼 가로지르며 검은 매연을 토해냈
다. 그로 인해 하늘에선 연방 검은 눈처럼 보이는 검댕들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
다. 창이 열려 있었기에 대합실 안으로도 검은 눈이 날려 들어와 주위를 새카맣게
물들였다. 그것은 구석의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
고 갈색 바바리 코트를 걸친 30대 중반의 신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자와
옷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옷이 아니었다.
그는 자꾸 내려앉는 검댕들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풍스러운 양
피지 위에 쓰여진 발송인 불명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조명이 빈약했지만, 그런 것
을 굳이 따질 게재는 아니었다.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필체가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짧고 간결했다.

「친애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큐리어스 Curious 씨에게.
우선 편지를 읽기 전에 제 부탁을 무조건적으로 들어달라는 무리한 조건을 걸겠
습니다. 보통 사람 이상의 고상함과 품격을 지닌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신 일
이라고 봅니다만, 만약 부탁을 들어줄 자신이 없으시다면 이 편지를 곧 소거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그는 편지를 돌렸다. 뒷면은 약간 급하게 쓴 필체였다.

「무례한 조건을 내건 것을 사죄 드립니다. 내일 모레 아침까지 이니티움 역의 대
합실로 나와 주십시오. 기차표는 편지에 동봉되어 있으니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준비하실 물건은 특별히 없습니다만 , 펜과 노트는 꼭 소지하고 오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럼 그때 꼭 만나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추신 ― 제가 당신에게 약속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수는 삼백 페이지 내외의 백
지로 된 책 한 권입니다.」

동화작가이자 저명한 평론가로 널리 알려진 큐리어스 씨는 마지막으로 검댕을 털
어 내고 편지를 다시 품속에 우겨 넣었다. 백지로 된 책은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후한 보수였다. 게다가 삼백 페이지라니. 일년 내내 바쁘게 일해도 얻기 힘든 물
건이었다. 확실히 그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을 요구하면 어떻
게 한다는 말인가.
길고 긴 고뇌 끝에 결국 그는 편지의 유려한 필체를 믿기로 했다. 글씨는 사람의
인격과 정직성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부리나케 이니티움 역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새카만 대합실의 멍청한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이 오후 5시가 다 넘어가도록
그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큐리어스 씨는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날
짜 외에 시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아까부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편지
를 자꾸만 들여다보던 것이었지, 별 의미가 담긴 행동은 아니었다.
허나 짧은 시계바늘이 9자를 오르락내리락 할 즈음이 되자,그에게도 슬슬 불안감
이 찾아왔다. 혹 누군가 그를 우롱하려고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 아닐까? 그러나
편지를 재차 읽어보곤 곧 그것이 헛된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분명 편
지의 필체엔 절박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뢰인은 의외로 빨리 찾아
왔다.
편지를 다시 한번 집어넣을 즈음, 낯선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큐리어스 씨?"

의뢰인은 여성이었다. 큐리어스 씨는 저도 모르게 벤치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
다. 여인의 복장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오히려 홍등가의 여인이라 생각될 정
도로 세속적이며 유치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큐리어스 씨는 그녀에게서
권위적이며 동시에 청빈스러운 고상함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이니티움 역
의 검고 암울한 풍경에 대조적으로 생동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그는 안도하면서
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녀는 거의 건성으로 악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든 그
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큐리어스 씨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
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심신이 연약해 보이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도
대체 무엇에 대해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가? 해답은 곧 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그런 연후에, 그를 이끌
고 조용한 구석으로 갔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
다.

"내 이름은 칼리오페(그리스 신화의 아홉 뮤즈 여신들 중 한명.서사시를 주관한
다). 올림푸스 대상회 소속 파르나소스 지부(支部)의 서사시 부장입니다."

큐리어스 씨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아폴론 지부장(支部長)에 의해 그 회사로부터 쫓
겨난 처지입니다."

"뭐, 뭐라구요?"

큐리어스 씨는 펄쩍 뛰었다. 이것은 간단히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그 본사에 맞
먹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상회 파르나소스 내부에 정리 해고가 있었다? 그것은 내
일 아침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호외요! 호외' 를 외치며 돌아다닐 소년들의
수입원이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침착
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래서 당신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큐리어스 씨.나는 지금 아폴론 지부장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이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동행을 승낙해 주신 후
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됩니다." 큐리어스 씨는 고집스럽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도 그
럴 것이, 그는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표본같은 이였기 때문
이다. 그는 도박이니 모험이니 하는 것들에 필요 이상의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
었다.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해결해야 하겠지요.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의 호의
를 거절해야겠습니다."
칼리오페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벵그레 미소를 지었는데, 이것은 큐리어
스 씨의 마음속에 쌓인 불신을 봄눈 녹듯 녹아 내리게 했다.

"당신은 폴크 교수께서 보내신 편지도 이미 받으셨을 줄로 압니다. 어차피 제 의
뢰를 거절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상당히 어려운 결심을 하신 듯 하군요."

큐리어스 씨는 궁금했지만, 굳이 폴크 교수의 정체에 대해 질문하지 않음으로서
품위를 지켰다. 칼리오페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그는 그녀의 에메랄드와
같은 눈동자에서 여신의 모습을 보았고, 불현듯 자신이 초라하고 발가벗겨진 조그
만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럼 의뢰비를 올려 드리기로 합시다."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투였다. "좋아-
그럼, 끝없는 페이지를 가진 책은 어떻습니까?"

실상 작가란 족속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내걸기 힘들었다. 큐리어스 씨는
예의상 사양했지만, 몇 번의 사양 끝에 거래는 이루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여
인의 도피행을 도와주는 쪽을 택했다.그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커다란 도박판에 돈
을 건 셈이었다. 그들은 10시 발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고, 오래지 않아 기차는
선로 저편에서 목졸린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위로 뿜어대는 연기와 함께 등장했다.

꾸에에엑―

안개에 휩싸인 선로 저편에서 역동적이며 검고 육중한 몸체를 드러낸 증기 기관
차는 멈추고 나서도 한번 더 목졸린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잠잠해 졌다. 그
들은 기차에 올라탔고, 기차는 예의 그 비명을 내지르며 거체를 스르륵 움직였다.

꾸에에엑―

2. 기차 안에서

철크덩, 철크덩.
육중한증기 기관차의 바퀴는 선로를 굴러가며 굉음을 사방에 뿌렸다. 그 거대함
에 걸맞는 소음이라 할 수 있었다.그 소리가 기차의 객실 내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고막이 파열될 정도의 지독한 소리였으니까.
창 밖을 말없이 내다보던 큐리어스 씨는 조용히 앞자리의 여인에게 질문했다.

"이제 그 이유란 것을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칼리오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한숨과 얼굴에 쓰여지는 깊은 주름에서 큐
리어스 씨는 불길한 느낌을 읽어냈다. 그녀는 말해서는 안될 것을 토해놓듯 힘겨
이, 주저주저 하며 말문을 열었다.

철크덩. 철크덩.
큐리어스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러나 그녀는 거듭 설명했고, 한
편으로 아연해졌다.
"아니, 너무하지 않습니까!" 예의와 법도가 생활신조인 큐리어스 씨라도 이때만
은 차마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올림푸스 상회가 인간들을
파산시킨다고요!누구 맘대로 말입니까! 냉혹한 경제사회엔 법도 윤리도 없다는 말
씀입니까!"

"누차 말씀드렸지만 , 다른 상회들도 찬성한 일입니다. 물론 전 세차게 반대했지
만, 겨우 지부의 일개 부장인 저의 직책으로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칼리오페는 다시 한번 벵그레 웃었다. 큐리어스 씨는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결국 상부에 직접 보고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 결국 지
부장에게 발각되어 이처럼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언론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걸 보면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을 겁니다.그렇다면 언론에 찔러 넣어도 소용없을
터이고, 몸소 본사(本社)로 쳐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아."

어느새 그들의 옆으로 검표원이 다가와 있었다. 큐리어스 씨는 품을 뒤적여 기차
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검표원은 표를 확인하고 지나갔고 , 그들은 이야기를 계
속했다. 검표원은 좌석들을 지나치며 무임승차한 승객들을 창 밖으로 집어던지고
있었다.

"평소 지인이었던 폴크 교수님에게 당신을 추천 받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그야, 당신은 순수한 상상력을 지니신 유일한 작가 분이시니까.."

큐리어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회청색의 하늘이 아니었다. 기차는 불그스레한 노을이 깔린 황금빛 들판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풍경은 곧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이번에는 하늘이 노르스
름하게 물들어 있었고, 핏빛의 강물이 선로 왼쪽으로 흘러갔다. 큐리어스 씨는 문
득 이 기차의 행선지가 궁금해졌다.솔직히 말해 그는 이 기차가 우크바르나 틀뢴,
혹은 카데드랄 역으로 직행한다 해도 별로 놀랍지는 않을 듯 싶었다.


3. 인간의 광장(廣場)에서

이제 노랗게 익었던 하늘은 허옇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보라색 구름이
하나둘씩 하늘에 응결되어 떠올랐다.그들은 그 모습을 별다른 감흥 없이 바라보았
다. 기차가 질러대던 끔찍스런 소음은 차차 줄어들었다. 주위에 고풍스러운 유럽
식 벽돌집들이 늘어섰고 , 그들 주위로 쌕쌕 바람처럼 지나가던 풍경은 천천히 느
려지기 시작했다.기차는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커다랗게 증기와 소
음을 길게 뿜어내었다.

꾸에에엑―

역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역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기차가 다가가자 기
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세의 바다처럼 쩌억 양쪽으로 갈라지며 흩어졌다.그들은 차
내 방송 없이도 그 역과 도시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아바리티아」였다.

쉬이이익―

도착한 기차는 자신이 물린 안개를 도로 뱉아 놓으려는 듯 사방에 연기를 뿜어대
었다. 그리고 전 열차의 문은 말없이,그러나 모습의 위용에 걸맞게 역동적이며 동
시 다발적으로 활짝 열어 제쳐졌다.칼리오페는 말없이 좌석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
해 걸었고, 그녀에게 고용되었으며 동시에 에스코트를 부탁 받은 처지인 큐리어스
씨는 당연하다는 듯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역 대합실의 모습은 상당히 분주했다. 이니티움 역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활기
가 넘쳐났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큐리어스 씨는 칼리오페를 신경 쓰느라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가 맞군요. 저는, 아니, 우리는 여기서 폴크 교수님을 만나뵈어야 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폴크 교수란 이름이 나왔을 때 점잖은 큐리어스 씨라도 더
이상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고상한 이성의 소유자인 그
는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이어나갈 염치가 마땅치 않았다.그가 우물거리자 그녀는
이내 낌새를 챘다.

"폴크 교수님은 당신께 편지를 써 보내신 분이지요. 저는 당시 급하게 파르나소
스를 나오느라 제 자신의 펜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펜을 하
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다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큐리어스 씨를 보고는 그녀는 벵시레 미소
를 띄움으로써 그의 불안과 의혹을 어느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그녀는 역을 벗어
나며 폴크 교수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폴크 교수는 천
하없는 세기의 모험가이자 둘도 없는 용기의 소유자였고 , 그에 걸맞는 인격과 고
아한 지성의 실천자였다. 결국 큐리어스 씨는 당사자를 만나기 전까지 판단을 재
고해야 했다. 그들은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거리로 나간 그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
다.17세기의 런던을 연상케 하는 목조건물들이 시가지를 빽빽히 채우고 있었는데,
골목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조차 보이질 않았다.어찌된 일인가 하고 큐리어스 씨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칼리오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무
언가 작고 단단한 것이 그들의 몸에 탁 하고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은 무의식중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것은 작은 아이의 머리였다. 새끼 고양이
만큼이나 작디작고 연약해 보이는 꼬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금세 오만상을 찌푸렸
다. 그들은 꼬마의 기분을 달래 사람들이 있는 곳을 물어보려 했으나, 꼬마는 차
마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를 내뱉으며 두 사람 사이로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그들
은 황당함에 앞서 사람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 한다는 의지로 골목길을 손바닥 보
듯 훤히 알고 있는데다 잽싸기까지 한 꼬마를 쫓았다. 그들은 금방 헉헉거리기 시
작했지만 추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이 도저히 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꼬마는 골목의 한 귀퉁이로 돌아 사
라졌다. 두 사람은 허탈한 심정으로 터덜터덜 걸을 도리밖에 없었다. 큐리어스 씨
가 가방을 지익지익 바닥에 끌며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칼리오페는 가까스로 귀
퉁이에 기대어 설 수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온 것도 그때
였다.

"아!"

무슨 일인가 하며 힘겹게 가방을 끌며 다가온 큐리어스 씨의 동공도 커다랗게 확
대되었다.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축구장만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여기저기에 다
양한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 보고서야 그것이 천
막이라기 보단 오히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태피를 수배 부풀려 놓은 것처럼 생겼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교수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앞서 호기심이
동했다. 마악 그들이 공터로 들어서려고 할 때, 더할 나위 없다는 듯한 유쾌한 웃
음이 그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와주었소. 큐리어스 씨? 나는 폴크 교수요. 혹은 모험가 폴크로 불리기도 하
지."

검은색의 빛바랜 우산을 오른손에 걸머쥐고 머리에는 중동의 터번을, 상의는 꽉
조이는 셔츠, 아랫도리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인 킬트를 두른 기괴한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내를본 큐리어스 씨는 찾던 사람을 만난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을 느껴야
만 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반가이 그를 맞았다.

"아아, 파르나소스 지부(支部)의 서사시 부장님 아니신가. 오랜만이구만."

"저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큐리어스 씨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마음은
지독히도 갈등을 겪고 있었다.지금 그의 눈앞에 서있는 사내는 그가 알고 있던 규
칙이라던가, 상식이라던가 하는 고정된 틀에 완전히 벗어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두려움까지 자아내고 있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인간의 광장이라네."

단순한 진술에 덧붙여 그 어떤 부연설명도 달지 않은 폴크 교수는 검은 우산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치 찰리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런 동
작이었고, 칼리오페는 물론이고 큐리어스 씨까지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폴크
교수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그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
없이 따랐다.

4. 욕망의 단편(斷片)들 사이에서
폴크 교수는 능숙하게 여러 천막들을 지나쳐 혼란스러운 다색(多色)의 선들이 죽
죽 그어진 천막 앞에 다다랐다. 폴크교수는 칼리오페와 큐리어스 씨에게 인간의
광장을 돌아다니면 본사에 가서 반박할 자료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그리고 당신을 데려오라고 한 이유도 거기 있소. 큐리어스 씨.당신은 그 모습을
그대로 서술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별로 큰 일은 아니지만 , 당신의 글이라면
누구든 믿을 수 있을 터이니.인간들의 파산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보증수표가 된
단 말이오."

장황한 설명을 마친 폴크 교수는 그들을 빨리 들어서라고 재촉했다. 칼리오페는
주저하면서 천막을 들어올렸다. 내부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걱정할 것 없소. 칼리오페. 안으로 들어서면 보일 거요."

칼리오페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폴크 교수
는 큐리어스 씨의 등을 우산으로 쿡쿡 찔러댔다. 큐리어스 씨는 그녀의 보호를 자
처한 처지였기에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는 상궤에 벗어난 것에 상당한 두려
움을 느꼈기 때문에,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암흑에 온몸이 떨고
있었다.그는 부들거리는 두 손으로 가방을 안고서 에멜무지로 발을 집어넣어 보았
다. 당연히 아무런 일도 없었고 , 그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천막의 천을 내리며
슬며시 안으로 들어섰다.

"어이쿠!"

그는 하마타면 사람들의 발에 무참히 밟혀버릴 뻔 했다.그는 가방을 감싸쥐고 이
리저리 굴렀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번쩍 끌어올려졌다. 그는 고개를 돌
렸다.

"칼리오페?"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침울할 대로 침울해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군중
들의 앞쪽을 가리켰다.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대하게 꾸며진 무대 위에는
몇몇의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차를 마시며 현대문학과 철학사상, 자연과학과 신학
등에 대해 진중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어제
꼈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희극을 본다는 듯이. 칼리오페의 얼굴은 너무나 슬프
게 보였다. 큐리어스 씨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펜과 종이를 꺼내 움켜쥔 채 그 광
경을 응시했다.
이제 비웃음의 정도는 극에 달했다. 아예 구르며, 땅바닥을 치며 웃어대는 사람
들이 속출했다. 큐리어스 씨는 입술을 꽉 깨물며 발길을 뒤로 돌렸다. 칼리오페는
잠시간 그 꼴을 바라보다 그의 뒤를 따랐다.

"이게 뭡니까! 폴크 교수! 이게 인간의 파산을 막을 수 있는 자료라구요?"

큐리어스 씨는 폴크 교수를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칼리오페는 침묵했다.폴크 교
수는 혀를 끌끌 찼다.

"모두 다 기록했다면, 분명 그들이 모두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을 터인데."

큐리어스 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교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큐리어스 씨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가
방을 번쩍 들더니 천막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수가 외쳤다.

"어디로 가는 거요?"
"내가 직접 천막을 찾겠소! 따라오지 마시오! 교수."

교수는 우산을 바닥에 박아놓고고개를 끄덕였다.칼리오페는 황급히 큐리어스 씨
의 뒤를 따랐다. 교수는 그저 사람좋게 벙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새하얀 천막을 찾아낸 큐리어스 씨는 그것을 확 제치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그
의 눈앞에 널따란 마당이 펼쳐졌다. 웅장한 기와집의 마당이었다. 대청마루엔 머
리가 새하얀 노인이 길다란 담뱃대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기대를 가지고 노인에게로 다가갔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간 그는 기대가 완전히 무
너지는 것을 느꼈다.
대청마루 위의 현판엔 `純粹' 라고 멋들어진 필체로 휘갈겨져 있었다. 노인은 대
청마루에 누워 있었는데,그 발치엔 크기가 황소 만한 호랑이 한 마리와 조그만 고
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고양이만 목에 밧줄을 걸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인은 연신 고양이의 머리를 담뱃대로 후려갈기며 `울어봐, 울어봐 요
놈아' 라고 외쳤다. 고양이가 도망치려고 야옹거리며 몸을 비틀자 목줄을 꽉 쥐고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호랑이의 등을 툭툭 건드리자 호랑이는 으르렁
거렸는데, 그 소리가 다 죽어 가는 소리라 고양이의 목소리보다 작게 울렸다. 그
래도 노인은 귀가 먹었는지 고양이를 후려갈기며 `이 정도도 못혀?' 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큐리어스 씨는 환멸감을 느꼈다. 그는 다시 펜과 종이를 꾸깃거리며 천
막을 나섰다. 그래서 그는 칼리오페가 고양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장면을 놓
치고 말았다.

"어떠셨소? 만족할 자료는 찾으신 거요?"

큐리어스 씨는 자괴감과 허탈감에 대답하지 못했다. 더 이상 찾아 볼 의욕도 생
기지 않았다. 벌써 수십 여 개째, 그는 처음에 성급히 따라나선 자신의 행동을 지
독히 후회하고 있었다. `왜 인간 따위의 파산을 막아야 하는가?'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올랐다.허나 칼리오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희망으로 빛
나고 있었다.

"큐리어스 씨. 당신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했군
요. 실상, 이 광장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광장이 아니라, 인간들의 욕망들을
투사한 광장입니다. 그러나 눈을 약간만 돌리면 그 반대의 면이 생생하게 보입니
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폴크 교수님, 정말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폴크 교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을 뿐이었다. 큐리어스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칼리오페를 바라보았지만,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밝고 순수해 보
였다. 그 얼굴에서 어찌 거짓이 나올 수 있으랴. 그는 말없이 자신의 가방을 들어
올렸다. 폴크 교수는 그제야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몸을 홱 돌
리더니 다시 우산을 돌리며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큐리어스 씨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릴 도리밖에 없었다. 칼리오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더욱 신나게 웃어제꼈다. 교수는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5. 하늘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큐리어스 씨와 칼리오페는 아바리티아 역으로 돌아가 기차를 잡아탔다. 물론 기
차표를 역에서 사는 것은 잊지 않았다.이번엔 증기 기관차 대신에 좀더 조용한 디
젤 기관차가 역으로 다가와 멈추었고, 그들은 편안한 기분으로 마음의 휴식을 가
졌다.
하얗던 하늘이 푸르게, 아이보리 빛으로, 혹은 청자의 은은한 빛으로 변해가기를
대여섯번 반복할 즈음. 큐리어스 씨는 인간의 광장에서 보았던 일들을 완전히 이
해해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의문스러운 점이 한가
지 남아 있었다.

"저, 칼리오페?"
"왜 그러시죠?"
"어, 폴크 교수님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예? 아. 상당히 오래지요. 그러나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그러십니까."

큐리어스 씨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혹 그 폴크 교수란 작자
가 바로 그녀를 쫓아내고 본사로 찾아가게 만든 장본인인 파르나소스 지부장 아폴
론과 동일인물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의문을 품기 시작한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언급될 바
는 아니다.
좌석 위에 설치된 스피커들이 일제히 크륵거리는 잡읍을 내기 시작했다. 차내 방
송이었다.

「다음 역은 카일룸― 크르륵― 카일룸― 역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차는 카일룸 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올림푸스 상회 본사가 있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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