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 의지라면 어쩔 수 없지. 말리지 않겠다."
"응. 고마워. 오빠. 제멋대로인 부탁을 들어줘서."
"언제는 제멋대로가 아닌 부탁을 했던것처럼 말하지 마라."
"아~ 아. 너무하네. 귀여운 여동생한테."
"그래도……."
백화의 앞에 앉아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 백씨 가문의 장남이자 가주家主인 백월白月은 부채를 접으며 일어섰다.
"……마지막엔 본가에 얼굴을 비춰줘서, 고맙다."
"……응. 오빠."
남매의 짧은 해후가 끝나고 미닫이문이 닫히자, 천양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겠느냐? 이걸로."
"네. 할아버지."
백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걸로 본가와의 연을 완전히 끊었어요. 법적인 관계만 정리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던 백화는 다리를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천양은 황급히 백화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제지했다.
"……화야."
"백화에요. 이름만 불리는 거 싫다고 했죠?"
백화는 눈에 두른 흰 천의 매듭에 손을 가져가며, 천양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백화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존재, 천양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표정도 짓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안된다면 안되요! 특히나 소묘 앞에서는. 그 부탁 들어주지 않으면, 죽어서도 용서 안할거에요?"
백화의 장난기 어린 미소에 천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백화는 지나가는 말투로 여상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아, 그래도 정말 별 수 없네요. 퇴마사니 뭐니 마구 날뛰고 다녔지만, 결국 병은 이길 수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길어봐야 몇년인 시한부 인생이라니, 드라마나 영화같지 않아요? 후훗."
밝게 웃는 백화를 천양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확정된 죽음 앞에 이토록 당당하고 여유 넘치는 태도를 보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백화는 천양의 표정을 보고 미소지으며 천의 매듭을 풀었다. 검은 동자가 보이지 않는 초점없는 새하얀 눈이 천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소묘는 이런 일과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았으면 해요. 그냥, 즐겁게 웃고 떠들고, 친구들과 뛰어놀고, 마음속에 품은 꿈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삶을. 그래서 굳이 제가 본가와 연을 끊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게, 소묘가 이런 일들과 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말이죠……할아버지가 소묘에게 꼭 알려줬으면 하는게 있어요."
백화는 품속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꺼내 귀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말이죠, 퇴마退魔라는게 악마나 마귀를 주술로 얍얍! 하고 물리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퇴마는 마魔를 멀리 떨어트리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 대상은 심마心魔가 아닐까요?"
백화는 흰 천을 말아 주머니에 넣고, 양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천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마라는 건, 마음속에 꼬여드는 사악한 것들이죠. 시기, 교만, 탐욕, 절망, 무력……사람들은 거기에 악마나 마귀의 탓으로 돌려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묻어버리려 해왔지만,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아요. 다들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이거든요."
"그렇지."
"물론 저는 그것들을 전부 필요없다고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속의 마가 너무 커져버리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독毒이 되지요. 저는 그 독을 누그러트리는게 퇴마라고 생각해요."
"마음의 독을 누그러트린다……."
"슬플때는 마음껏 슬퍼해도 되요. 하지만 그 슬픔이 과하면 절망에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 자기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괴롭게 해요. 그게 바로 심마……. 퇴마라고 하는 건, 그런 심마에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우고 등을 두드린 뒤에, '야아! 좀 더 웃어봐!' 라고 밝게 웃으며 다시 걸어갈 힘을 나눠주는, 그런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제 퇴마사로서의 신념이나까──"
백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살짝 윙크를 날렸다.
"절대로, 잊으시면 안돼요?"
소녀퇴마활극 천양지차!
마지막화 : 퇴마退魔
"그래, 아직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히 전해줬다!"
천양은 그렇게 외치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 천양을 원호하듯, 조소가 망치를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고 미끄러졌다.
"하아아앗!"
조소의 검고 긴 쇠망치는 있는 힘껏 머리 위로 올라갔고, 검은 옷의 여인과 대치하고 있던 아이페로스는 당황했다.
"어, 어이! 이 여자는 너희들의 동료가 아닌가?"
하지만 아이페로스의 배려아닌 배려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쇠망치는 중력가속도와 함께 무시무시한 기세로 내리꽂혔다.
"칫!"
여인의 견제에 멀리 몸을 빼기도 어려웠던 아이페로스는 슬쩍 몸을 비키는 것으로 조소의 쇠망치를 피하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응?"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을 피하리라 생각했던 여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내리쳐진 쇠망치는 여인의 몸을 통과해 그냥 땅바닥에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조소가 다시 망치를 들어올리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로 여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지나갔기에, 아이페로스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환영……이라고?"
하지만 고위 악마인 자신에게 현실과 하등 다를바 없는 환영이라니,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이페로스는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그것은 이내 땅속에서 터져나오는 물줄기가 흩날리는 물보라에 지워져 버렸다.
"뭘 멍하니 보고있는 거야? 단축제련短縮製鍊, 금월金鉞!"
조소의 외침과 함께 망치에 후려쳐진 물줄기는 일제히 사라졌고, 대신에 붉은 창대에 흉악한 창날을 번득이고 있는 거대한 금빛 도끼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양은 몸을 솟구쳐 그것을 움켜쥐었고, 공중에서 아이페로스를 향해 휘두르기 위해 팔을 뒤로 당겼다. 아이페로스는 불쾌한 표정으로 왼손을 휘둘렀다.
"이 귀찮은 것들이……! 나를 따르는 해룡의 소녀여, 그 이빨을 나에게 바치라!"
그러자 아이페로스의 왼손에서 어둠이 모여들어 형태를 갖추었고, 위아래에 섬뜩한 날을 갖춘 도끼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페로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태도로 도끼창을 천양에게 그대로 집어던졌다.
"부숴버려라! 브로켈!"
천양이 금월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도끼창 브로켈은 자기 스스로 날아와 금월의 도끼날을 가볍게 박살내버렸다. 파편은 그대로 원래 모습인 물로 바뀌어 떨어져 내렸지만, 천양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브로켈의 날을 피하고 다시 땅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떨어지는 물을 향해 비뚤어진 미소를 짓고 있는 조소가 있었다. 조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내리는 물을 향해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제2차 단축제련, 은월銀鉞!"
이번에는 은의 날을 가진 도끼가 허공에 출현했고, 천양은 바닥에 내려서기 전 그것을 잡아들고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페로스에 닿기 직전, 공중에서 쏘아져 내려온 브로켈에 의해 또다시 그 도끼날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바닥에 박힌 브로켈을 회수한 아이페로스는 그다지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조소가 망치를 꼬나쥔 채 또다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더 있다! 제3차 단축제련, 철월鐵鉞!"
이번엔 강철의 날을 한 거대도끼가 모습을 드러냈고, 아이페로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오른손의 초조를 휘둘렀다.
"초조, 탐식貪食."
그러자 암흑 속에서 거대한 촉수가 뻗어져 나와 강철도끼를 휘감았고, 천양은 미련없이 도끼를 놓았다. 초조에서 넘쳐흐른 암흑이 불러낸 촉수는 도끼를 삼키고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고, 아이페로스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파리같이 귀찮은 놈들이군. 브로켈!"
브로켈은 용의 울음소리로 답했고, 아이페로스는 천양과 조소를 가리키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저 놈들을 집어삼켜──"
"그건 안돼요. 악마씨."
아이페로스가 브로켈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아이페로스의 왼팔은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붙잡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전까지 아이페로스와 대치하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빙긋 웃으며 한쪽 손에 쥔 붓을 치켜들었다. 붓? 붓이라고? 아이페로스가 급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하는 사이, 여인의 붓은 브로켈의 자루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잠시 이 아이를 쉬게 해주세요."
그 순간, 브로켈은 부르르 떨더니 창 전체에서는 사악을 거부하는 새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이페로스는 자신의 손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화들짝 브로켈을 내려놓았다.
"뭣──?"
브로켈은 강제로 하늘로 끌려올라갔고, 비통한 용의 울음소리가 사방을 울려댔다. 새하얀 불꽃이 튀기며 이내 거대한 해룡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눈부신 빛이 사방을 채웠고 빛이 사라졌을 때는 이미 브로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소와 천양은 갑자기 새하얀 불꽃에 싸여 사라진 브로켈을 바라보고 잠시 멍해져 있었다. 조소는 불꽃의 여운이 남아있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건……."
"……화룡점정畵龍點睛."
"……네?"
"용종龍種에 한해 무조건적인 역소환을 행하는 주술이다."
천양의 나직한 대꾸에, 조소의 눈이 번뜩였다.
"역소환이라고요? 그렇다면 혹시……."
"그래. 소묘의 어미, 백화가 즐겨쓰던 주술이다."
천양은 그리운 눈길을 하고 브로켈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페로스는 천양의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쥔 여인, 백화를 바라보았다.
"제물을 낳은 여자는 이미 죽었잖아? 네 녀석은 대체 뭐야?"
"어머나, 드디어 악마씨에게 제 말이 들리기 시작했나보네요."
"닥쳐! 내 질문에나 대답해라! 환영!"
아이페로스는 여인을 향해 초조를 휘둘렀고, 백화는 아이페로스의 손을 놓으며 품 속에서 다시 은장도를 꺼내들어 초조의 날을 미끄러트렸다. 백화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환영이라니, 심하네요. 저는 당신의 앞에 분명히 있는데."
"시끄럿! 네가 환영이 아니라면 어째서 나에게만 보이는거지? 난 왜 너를 쓰러트릴 수 없지?"
아이페로스의 말에, 백화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란 거지?"
"당신에게만 보이는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
"소묘에게만 보이는 걸, 당신이 같이 보고 있을 뿐이에요."
아이페로스는 힘겨루기마저 잊고 멍한 표정으로 백화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제 목소리까지 들린다는 건, 당신이 소묘와 점점 동화하고 있다는 거죠. 뭐, 악마씨에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악마란 원래 그런거잖아요?"
백화는 은장도를 천천히 내렸고, 아이페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 맞추어 초조를 내렸다. 그리고, 백화의 말에 대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태어나는 것."
"네. 맞아요."
백화는 은장도를 양손에 품었고, 손을 다시 펼치자 그 안에는 아이페로스가 소묘의 마음 속에서 움켜쥐어 부숴버렸다고 생각한 빛이 있었다. 아이페로스는 그것에 놀라 한발짝 뒤로 물러섰고, 그런 아이페로스를 압박하듯 백화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악마씨가 쥐고 있는 그것만큼은, 정말로 이계에서 태어난 것이지만 말이에요."
"……너……는."
"악마씨에게는 아무래도 좋겠지만, 소묘에게는 너무 소중한, 으으,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런 엄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니까──악마씨가 소묘와 함께 있는 이상, 저를 무시하거나 눈을 돌리거나 하는 건 불가능해요."
"말도 안……돼."
"말이 되고 안되고는, 해봐야 알죠. 에잇!"
백화는 초조를 쥐지 않은 아이페로스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 안에 자신이 쥐고 있던 빛을 담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감아주었다. 아이페로스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백화는 그렇게 빛을 품게 한 손을 들어 입술에 가볍게 가져다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렴. 나의 사랑스러운 딸, 소묘야."
"크, 크아아아아아악!"
아이페로스에게는 너무나도 괴로운 빛이 빛났고, 그 빛이 사라지고 아이페로스가 눈을 떴을 때, 백화의 모습은 이미 눈 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신, 백화와 같은 디자인의 정장을 입고, 백화가 눈에 두르고 있던 흰 천을 꼭 움켜쥔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다름아닌 아이페로스에 의해 집어삼켜졌던 백소묘였다.
"엄마……고마웠어요."
소묘는 잠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옷의 소매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고 손에 든 흰 천을 꼭 쥐어 허공을 향해 후려쳤다. 그러자 그 천은 순식간에 소묘의 퇴마도, 선택의 모습을 취했다.
소묘는 선책을 허공에 한번 흩뿌린 뒤, 아이페로스에게 칼 끝을 향하고 말했다.
"자아. 감상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 오랜만이네요. 이페──"
"아이페로스다."
"아, 아이페로스 씨!"
"네놈은 끝까지……."
아이페로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아이페로스의 머리 뒤에서는 그녀를 상징하는 망각의 마법진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상징인 검은 뿔과 꼬리가 드러났고, 사악함이 온 몸에서 풍겨져 나왔다.
하지만 소묘는 그에 주눅들지 않고 선택의 날을 고정시켰다.
"악마인 아이페로스씨와 인간인 저, 어느쪽이 그 몸을 차지할지──지금부터, '선택'하도록 하죠!"
다음 순간, 선택과 초조가 불꽃을 튀기며 서로 부딪혔다.
"소장님, 저건……."
조소는 망치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분노하며 칼을 휘두르는 악마화된 아이페로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양은 희미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걱정마라. 소묘는, 반드시 돌아올거다."
"왜! 왜! 왜! 허상에 불과한 네놈을 이길 수 없는거지?"
"허상이라, 고, 말하셔, 도!"
소묘는 초조의 검은 칼날을 힘겹게 밀어내며 대꾸했다. 소묘와 아이페로스는 있는 힘을 다해 서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거울의 움직임과 같아서 대치하기는 하되 그 누구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저에게는 제가 진짜고, 아이페로스씨가 허상인걸요!"
"닥쳐! 기껏해야 괴물의 먹이로 태어난 주제에!"
아이페로스는 악마답지 않게 흥분하며 초조를 휘둘렀다. 소묘와 동화가 너무나 깊게 이루어진 탓인지, 아이페로스는 이성적인 통제를 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에 반해 소묘는 차분하게 아이페로스의 공세를 부드럽게 흘려내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을 공유하기에 동일해진 기량을 유용하게 활용한 탓이었다. 소묘는 아이페로스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페로스씨의 말이 맞아요.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먹이로 보는 그 시선에 붙들려 살았어요. 그 어떤 순간도 쉬지 않고 말이죠. 초조로 봉인했을 때조차, 저는 언제나 그것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 나약한 녀석이 삶을 이야기하는거냐? 너는 어차피 힘이 떨어지면 그것에 잡아먹힐 운명이라고!"
소묘는 초조를 흘려내며 선택의 날을 아이페로스의 목으로 미끄러트렸다. 아이페로스는 고개를 숙여 뿔로 선택을 쳐내고, 조소에게 초조의 칼날을 향했다.
"사람이라면, 모두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경우가 틀려! 네놈에게는 이해가 불가능한, 차원이 틀린 공포란 말이다!"
초조의 칼날은 소묘의 목젖에 닿았고, 거기서는 흉측한 촉수들이 스멀거리며 기어나와 소묘의 목을 움켜쥐려 들었다. 하지만, 소묘는 순간,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가요?"
"뭐?"
"그런 공포를, 저는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계속 겪어왔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이 어떻게 되었어야 정상 아닐까요?"
"……너."
무지의 악마, 아이페로스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공포를 느꼈다. 소묘의 웃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인간의 웃음과도 틀렸다. 그것은 영혼을 뒤흔드는 아득한 광기狂氣를 품고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분명히 말씀드렸을텐데요? 저는 그것을 '다룰 수 없다'고. 그저,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을 뿐만이라고요."
"설마……."
"그런데 아이페로스씨는 그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했죠? 정말로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당신을 노리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나요? 정말 다루거나, 이해했던게 아니라──"
소묘는 촉수와 어둠과 칼날에 두려워하지 않고, 초조에 목을 가져다 대며 아이페로스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저, 그럴수 있다고 '착각'했던 건 아닌가요?"
그 순간, 아이페로스의 영혼을 공포가 잠식했고, 악마가 점하고 있던 정신적 우위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아이페로스가 소묘의 뒤에서 희번득거리는 거대한 눈동자를 목격한 것과 동시에 초조는 형태를 잃고 어둠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둠에서 태어난 무수한 촉수들이 악마의 몸을 휘감았고, 아이페로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묘와 자신의 위치가 바뀐 뒤였다. 아이페로스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빛을 발하며 발버둥쳤지만 촉수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은 그녀의 모든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초조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소묘를 향해, 아이페로스는 분노와 절망으로 절규했다.
"크아아아악! 네놈! 인간, 인간 따위가! 나를! 이 무지의 귀공녀를! 감히!"
"죄송해요. 아이페로스씨."
소묘는 손에 쥔 날 없는 칼, 초조를 거두어들이며 나직하게 선언했다.
"더이상, 당신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습니다."
"크햐아아아아아아아악──!"
자신과 꼭 닮은 흰 제복의 소녀가 무수한 촉수에 휘감겨 어둠속으로 끌려가는 것을 눈에 담으며, 소묘는 초조의 손잡이를 돌려 자신의 아랫배을 향해 찔러넣었다.
"초조, 납도."
소묘의 손등에서 악마가 새긴 마법진들이 사라지며, 어둠은 걷혔다.
소묘는 눈을 떴다.
"헉?"
눈을 뜬 소묘의 시야를 맨 처음 가득 채운 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인 어린 소녀의 얼굴이었다. 코가 맞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기겁한 소묘가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페스는 소묘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하자 소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 잠깐?"
"언니, 언니! 소묘 언니! 걱정했어! 소묘 언니를,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고, 악마에게 빼앗기는 줄 알고……흐흑, 으흐윽!"
"으응. 그래. 언니는 이제 괜찮아."
정신없이 자신의 품 안에서 우는 페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보니, 망치를 끌고 오는 조소와, 뚱한 표정의 천양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썜. 퇴마 완료! 했어요. 헤헷."
천양은 그런 소묘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못난 제자놈 같으니."
천양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채 결계 쪽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얼굴에서 백화의 모습을 봤던 것일까. 소묘는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소묘의 눈 앞에 알이 깨진 안경을 걸친 조소의 얼굴이 들이밀어지자, 소묘의 모든 고민과 상념은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히, 히이이이익."
"백소묘양. 언제나처럼의 구호를 외워 봅니다. 실시."
"서, 선택은 하나가 아니지만, 제 목숨은 하나입니다!"
"그으러십니까아? 맨날 외우게 하는데도 왜 자꾸 까먹죠?"
"으, 으아으아……미, 미안……,"
바들바들 떨며 두 손을 모아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소묘를 보고, 조소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안경알을 밀어 올리더니 홱 몸을 돌려 천양이 있는 결계 쪽으로 걸어갔다.
"……으, 으에?"
"그래도 오늘은, 정말 수고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으, 응!"
조소의 솔직한 고백에, 소묘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페스를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천양과 소녀들에 결계 안으로 모두 들어오자, 조소는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 스물다섯장을 뽑아들었다.
"왕복 50만원이라니……무슨 비행기값도 아니고, 정말 터무니없는 운임이란 말야."
조소가 붙인 지폐가 불에 타들어가자, 불꽃이 그들을 감쌌고, 경계세계의 공원은 적막에 다시 남겨졌다.
"엥?"
돌아온 천양 일행의 눈에 비친 건, 물에빠진 생쥐 꼴이 되어 흰 봉투를 거머쥐고 있는 불만 가득한 지선의 모습이었다. 소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선을 향해 질문했다.
"지, 지선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지선은 씩씩거리며 공원 바닥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지선이 손가락질 하는 방향에는 잔디가 움푹 패여 물이 고여 있었고, 그것은 유성우가 쏟아진 뒤의 크레이터라도 되는 양 공원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조소는 창백한 얼굴로 깨진 안경을 밀어올렸다.
"저건……."
"그래! 보나마나 조소 네 짓이겠지! 경계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고! 분명히 종이 뒷면에 주의사항을 써놨는데 좀 얌전히 싸웠으면 어디 덧나!"
조소는 고개를 돌려버리며 웅얼거렸다.
"……아니, 뒷면 같은거 전혀 안 봤는데."
"……아휴, 내가 못살아. 난데없이 땅이 갈라지면서 물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물벼락 맞고, 공원의 사람들 다 도망가고, 경찰서랑 소방서에 신고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도 너희 올 때까지 결계 유지하려고 경찰관 아저씨들 앞에서 갖은 변명 늘어놓느라 죽는줄 알았다고!"
"으으, 지선아. 미안."
소묘는 조소 대신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지만, 그런 소묘에 눈에 지선의 손바닥이 쑥 내밀어졌다. 소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예정에 없는 고생에 봉사까지 해줬으니, 추가 요금."
그러자 잠자코 있던 조소가 눈동자를 빛내며 소묘와 지선 사이를 가로막았다.
"못 내. 죽어도 못 내. 벌써 50만원이나 지출했는데 여기서 더 달라고?"
"그것도 충분히 저렴했다고 생각하는데?"
"저렴하긴 개뿔이!"
"뭐야, 그럼 그것까지 정가로 받아 볼까?"
옥신각신하기 시작한 두 소녀를 뒤로 하고, 소묘와 페스, 천양은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선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천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잠깐! 돈 문제는 해결하고 가셔야죠!"
"우리 회계랑 알아서 해결해. 지갑도 거기 있고."
"잠깐, 소장님!"
"좋아. 회계님. 우리는 합리적인 조건에 따른 협상을 계속해 볼까?"
"으윽……! 소장님, 소묘! 둘 다 나중에 가만두지 않을거야──!"
조소의 한맺힌 절규를 들으며, 세 사람은 집으로 걸어가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슬픈 일을 잊지는 말되, 거기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웃으며 나아가자.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퇴마행退魔行이다.
>> 소녀퇴마활극 천양지차! 끝.
"……이제서야 이 부제가 붙는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알게 뭐냐. 어차피 마지막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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