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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n Roulette

01/02/15

태그 : 데카메론 프로젝트, 도박, 러시안 룰렛

Russian Roulette. (2001/02/15 作)

데카메론 프로젝트 제2일 (소재 : 도박)

1.

"하스켈 햄프턴. 남. 나이 34세. 맞나?"

그는 우울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카드 내밀어 봐. 그리고 이 앞에 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새까만 가죽잠바를 걸
친 앞의 사내는 인상을 쓰며 그의 신분증명 카드를 나꿔챘다. 구식 검색기가 왱왱
거리는 소음을 내며 작동하는 동안, 그는 눈을 꼭 감고 이 끔찍한 순간이 빨리 지
나가기를 기다렸다. 소음이 멈추는가 싶더니만, 그 사내가 소리질렀다.

"빨리 안비키고 뭐해!"

그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뒤이어 그만큼이나 초체해 보이고 불행해 보이
는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쳐갔다. 얼굴이나 성별따윌 구분할 정신적 여유는 없었
다. 그는 무엇에 끌려가듯이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 더러운 대기석에 풀썩 주저앉
았다. 얼굴도 모를 어떤 자가 그의 번호표를 휙 던지고 사라졌다.
그는 눈을 크게 뜨려 애쓰며 번호표를 바라보았다. - 여기는 빛도 무척이나 희미
했다 - 42. 두 숫자를 합하면 딱 6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좋은 징조
일지도 몰라.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의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 욕설 사이사이로 흐르는
지독한 정적. 그는 한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런 곳에 있게 될 줄은 꿈에도 상
상 하지 못했다. 언제나 주위는 깔끔했고, 활동하기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언제나
유지되었다. 주위의 동료들도 사무적이고 냉랭하긴 했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나름
대로 친절했다. 예의와 규칙도 잘 지켜졌다. 그런데...

왜 쫓겨난거지? 그는 도대체 이유를 납득할수 없었다. 왜?
그는 단순히 연구소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상에서도 쫓겨났다. 일상
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는 정신과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떠돌았다. 이리저리 떠돌
다 보니 기억력은 희미해져 요즘은 과연 자신이 그런곳에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까
지 했다.



2.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앞의
어두운 통로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 손가락만 보이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 그는 번호표를 꼭 쥔채
일어서서 비틀비틀 따라갔다.

따강. 따강.

어두워서 주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감각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통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바닥은 금속제로 되어있는듯 싶었
다. - 물론 짐작이었다 - 그는 탁한 공기에 골이 띵해서 휘청거리며 저 앞의 말없
는 그림자를 따라갔다. 그렇게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이곳에 대한 광고를 본 것이 언제였지? 어제? 그저께? 혹은 오늘 아침? 모르겠다.
기억력의 둔화는 날이 갈수록 점점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러시안 룰렛 도박장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이 악몽같은 상황에서 벗어날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죽음이 지금의 상황보다 나쁘다고
는 전혀 생각치 않았다. 회생. 아니면 편안한 안식이다. 어느 쪽이든 손해볼 것은
없다. 어떤 도박사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터였다.


3.

갑자기 강렬한 빛이 쏟아들어져 왔다. 그는 잠시 빛에 눈이 적응되기를 기다렸다.
앞쪽의 복도는 투명한 재질이었다. 어느새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다. 그는 번호표
를 쥔채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유리가 아닐까 언뜻 생각했지만, 직접 걸어보
니 강화 플라스틱인듯 싶었다. 통로는 처음에는 평평하다가 위로 꺾어졌다.

통로는 어떤 투명한 원통형의 거대한 방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비스듬한 통로를 다 오르자, 불투명한 유색 금속의 문으로 앞이 막혀져 있었다.
그는 문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문의 중앙 부분 즈음에 뭔가가 쓰여있었다.

「Insert Number」

그는 잠시 고민했다. 번호표를 넣으란 건지, 아니면 숫자만을 타이핑해 넣으란
것인지? 그의 고민은 오래잖아 금새 풀렸다. 곧 그 글자 밑으로 작은 틈새가 입을
벌렸기 때문이었다. 주저하다가, 번호표를 집어 넣었다.

문이 열렸다. 조명은 복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문
제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었다. 그가 발을 들여넣고 문이 다시 닫히자 마자, 귀
를 찢을 듯한 함성, 새된소리, 높고 낮은 비명, 환호, 고함, 욕설-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그는 당황해서는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 역시 예의 그 투명한 재질의
것으로 만들어진 듯 싶었으나, 청각적 충격에 주위를 둘러볼 생각은 잠시간 하지
못했다.

그는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린 뒤에 소리가 들려오는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까
마득히 높은 위쪽 - 아마도 관람석인듯 싶었다 - 에서 그런 소리가 터져나온것 같
았다. 비록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작게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각양각색의
복장에 목소리도, 부르짖는 말들도 다 달랐다. 그들은 모두 그를 쳐다보고 열심히
소리질러대고 있었다.

그는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경우를 체험한듯 싶었다. 어디서였지?

그는 말라가는 기억의 샘을 쥐어짰다. 그래. 그는 연구실에서 실험용 생물 - 흰
색 생쥐였는지, 검은색 생쥐였는지 - 을 어떤 상황에 몰아넣고 격한 토론을 벌이
던 동료들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어떤 연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
금의 상황과 비슷하게 생각된다. 단지 다른점이 있다면 그는 이제 생쥐란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뭘 보나."

그는 침착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그리 먼 곳에서 들리지는 않았다. 아
주 가까운 곳이었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다."

그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방 중앙에는 웬 탁
자가 놓여있다. 희안한 재질이다. 그는 다가갔다. 탁탁.

발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그제서야 주위의 소음이 멈추
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음장치가 작동되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서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앉아."

그는 거역할수 없는 어떤 종류의 감정에 입각해서 -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탁자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모습은 특이했다. 아니, 어찌보면 다른 의미에서 통속적 이었다. 기다란
가죽 코트에, 깊게 눌러쓴 챙있는 모자, 그리고 징이 박혀있는 구두. 그는 예전에
보았던 Shoot-'em-up 종류의 옛 필름을 생각했다. 앞의 사내는 그러한 종류의 영
화에서 튀어나온 총잡이들 중 한명처럼 보였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탁자와 의자의 재질은... 그래, '나무'였다. 정말 보기 힘
든 물건이었다. 그 나무 탁자 위에는 구식 권총 두자루가 놓여있었다. 딱 여섯발
을 넣을수 있는. 그는 그 총에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앞의 사내가 저지했다.

"42번. 하스켈 햄프턴 인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의가 뭘까? 저자는 왜 올라온 거지? 단순한 탈출 방지
를 위한 고용병인가? 아니면 또다른 참가자?

"맞는 모양이군."

"......"

사내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말했다.

"하스켈 햄프턴. 나이 34세. 약 1개월 전까지 아넬 기업 화학 연구소 1등급 연구
원직에 머물러 있었고, 현재는 퇴출 후 도피생활 중. 가족은 없고, 독신."

그는 사내가 좔좔 읊어대는 자신의 기록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
나가버린 과거의 파편들일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 잃게될지
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걸치고 있는 유일한 의복인 흰색 연구복 - 쫓겨났을때 연구소가 그
에게 남겨준 유일한 것이었지만, 이젠 흰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 위의 가슴께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흰 금속판 위에 금빛으로 도금해 파넣은 그
이름들은, 이제는 오물과 먼지로 더럽혀져 원래의 철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것은 꼭 'H---el ---p---' 처럼 보였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목숨을 건 도
박을 하는 이가 뭘 도와달라고? 그는 손가락으로 이름표를 문질러 더러운 것들을
닦아냈다. 앞의 사내는 그가 무엇을 하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싶었다. 그러면
감시자 따위는 아니로군.

"나는 나를 Shooter라고 부른다."

그는 눈을 껌벅였다. 의역하면 쏘는 자, 앞으로 나아가는 자이기도 했다. 별명일
뿐, 진짜 이름일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저자의 별명 따위
가 지금의 나에게 무슨 상관이람? 그는 총을 향해 손을 옮겼다. 그러나 사내, 슈
터가 제지했다.

"잠깐. 너는 너 자신에게 뭐라고 불리나."

그는 흐릿한 눈으로 슈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슈터의 얼굴엔 챙모자가 깊게 씌
워져 있어 표정을 관찰하기 힘들었다. 슈터는 무미건조하지만, 또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별명(Nick Name)따위를 말하는게 아니다. 어차피 자신에게 태어나면서 주
어지는 이름도 본래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 토릭스 가(家)에 태어났다
면 네 성은 햄프턴이 아니라 토릭스가 되었을테지. 만약 변변치 못한 집에 태어났
다면 그냥 아무데서나 불리는 존- 토미- 따위의 싸구려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테지.
난 그런 껍데기 이름을 말하는게 아니야. 네 자아에서 지금 자각하는 너의 진짜이
름(Real Name)을 말해보란 것이다. 이를테면 너는 한달 전까지만 해도 너 자신을
연구원이라고 불렀을 테지.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네 자신에게 뭐라고 불리지."

그의 눈은 다시 맑아졌고, 연구원으로 있을때의 생기가 되돌아왔다. 진짜 이름이
라고?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지금의 내가 나에게 붙일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
Gambler. 갬블러다."

그로서는 거의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슈터는 고개를 끄떡였다.

"벙어리는 아니었군. 좋아. 자기 이름도 알지 못하는 멍청이도 아니고." 그는 혹
시나 하고 슈터의 얼굴을 흘끔 보았지만, 표정의 변화라고는 여전히 찾아볼수 없
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도박이란 무슨 게임이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도박은 확률의 게임. 특히나 지금 하려는 러시안 룰렛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는 대답하려 했지만, 왠지 그 대답은 그의 목에 턱 걸려버렸다.
슈터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와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진짜이름을 가진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지. 곧 알게 되겠군."

그는 슈터의 말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슈터는 말했다.

"자, 이제 시작이다."

결국 슈터는 또다른 참가자였던 모양이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라. 둘다 실탄으로 6발이 장전되어 있으니까 직접 5발을 빼내
야 한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도박사다. 그는 주저없이 바로 앞쪽에 있는 것을 골랐다.그
것은 꽤나 묵직했다. 그는 어설프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익숙한 듯한 솜씨로 실탄
을 빼내었다.

"안전장치도 없다고 경고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고급스럽게 살아온 놈들이 더
잘하는군. 너도 시뮬레이션을 해본 모양이지."

사실이었다. 그는 애써 웃음을 띄우려 했다. 놀이문화는 안전하면서도 더욱더 쾌
락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발전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의미에서, -정신적 의미에서-
그것은 확실이 퇴폐적이고 통속적이라 말할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건 놀이가 아니다. 진짜 실탄이다.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이제 그는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도 잊어가고 있었다. 그의 모든 정신은, 이 생사
를 건 도박을 '즐기는' 데 신경이 모아져 있었다.

그때 어떤 의심이 스쳐갔다. 이안에 든 것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그것을 물으려고 입을 떼었지만, 그 전에 슈터는 대답이라도 하듯 남아있는
두번째 총을 들어올리고 실린더를 돌리며 능숙한 솜씨로 실탄들을 빼냈다. 슈터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없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도박은 이 내손에 쥐어진 차가운 것이면, 족하다. 그는 승
산없는 모험을 하는 도박사는 아니었다. 슈터는 말했다.

"발 밑을 봐라. 스위치가 있다."

사실이었다. 그것은 손바닥 만한 크기의 것으로, 붉은 등이 연방 점멸을 반복했
다. "그것을 누르면 카운트가 시작된다. 실린더를 돌리고, 공이치기를 올리고, 0
이 되면 쏘는거지. 쏘지 않으면..." 슈터는 말을 이었다. "죽느니만 못하게 될걸."
그는 역시 모험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주저없이 그것을 밟았다. 어디선가 기계적
인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Ten.】

그는 공이치기를 올렸다. 슈터도 마찬가지였다.

【Nine.】

실린더를 돌렸다. 핑그르르- 예상외로 잘 돌아갔다.

【Eight.】

"아까의 질문에 대답할수 있겠나."

【Seven.】

그는 실린더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은채 고개를 흔들었다.

【Six.】

"힌트를 주지."

【Five.】

그는 눈을 뜨고 슈터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대신에 손가락
에 약간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Four.】

"지금까지 이 러시안 룰렛에선,"

【Three.】

"무슨일이 있더라도, 오직"

【Two.】

"한 구의 시체만 실려나갔지." 슈터는 말을 끝맺었다. 그것은 확률의 법칙이 적
용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One.】

어째서? 그는 슈터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총알을 바라보았
다. 그것은 모두...

【Zero.】

그제서야 그는 도박이 무슨 게임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말을 할 시간이 부족했으
므로,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4.

총알은 화약의 힘으로 총구에서 튀어 나왔다. 연한 피부를 뚫고 들어가, 단단한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는, 두부같이 연한 회백색의 덩어리를 통과해, 반대쪽 두개
골에 구멍을 더 내며 피와 함께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날아가
던 총알은, 특수 강화 플라스틱으로 된 벽에 부딪혀 운동에너지를 거의 다 전달하
고 힘을 잃고 바닥으로 튕겼다. 그리고 핏자국을 남기며 또르르 굴렀다. 그날의
러시안 룰렛 역시 단 한명의 희생자만 낸 채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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