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지차!
제9화 : 악마惡魔
페스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소묘 언니──!"
소묘는 결계 밖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균형을 잃고 휘청이더니, 그대로 무너졌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칠새라, 소묘의 주술에 튕겨났던 사냥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 사냥개 한마리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던 소묘의 허벅지에 날카로운 이빨을 깊게 박아넣었고, 새하얀 살결에 새하얀 피가 튀어올랐다.
"꺄아아아아악!"
그 광경은 달려오던 천양의 시야에도 들어왔지만, 사냥개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빨랐다. 두번째 사냥개는 소묘의 복부를 물었고, 세번째 사냥개는 선택을 쥔 손을 물었다. 선택은 소묘의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만둬어어어!"
조소는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다 결국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세차게 몇바퀴를 구르며 온 몸에 생채기가 나고 다리를 접질렀지만, 조소는 망치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마아! 개자식들아아악, 아아아악!"
조소의 절규가 비통하게 메아리쳤지만, 무수한 사냥개들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신의 눈 앞에 놓인 무력한 사냥감을 충실하게 물어뜯을 따름이었다. 마지막 사냥개가 소묘의 목을 길다란 혀로 휘어감고 입을 벌리는 순간, 소묘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는 넋을 잃고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페스의 귓가에 닿았다.
"응. ……네가 말하는대로 할게."
"어, 언니?"
"'친구'야. 너는, 누구?"
페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영혼에 새겨진 악마의 계약이 남긴 깊은 상처가 되살아나며 소묘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전부 이해했다. 페스는 있는 힘을 전부 쥐어짜내 소묘에게 외쳤다.
"안돼! 언니, 그 말 듣지마!"
하지만 페스의 외침도 소용없이 사냥개는 소묘의 목에 이빨을 깊숙히 박아넣었고, 고개를 약간 트는 순간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소묘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페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닌, 비록 한달간이지만 이 세상에 아무런 연도 없이 다시 태어난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아……아아……."
페스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차라리 소묘가 그냥 목숨을 잃은 거라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악마와 계약한 자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며, 그 순간부터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란 사실을, 페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소묘……."
"소장님?"
소묘가 절명하는 순간, 천양은 그자리에 멈추었다. 이미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달리던 도중 안경을 떨어트려 밟는 바람에 조소의 시야는 흐릿했고, 소묘의 상황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조소는 불길함을 느끼며 천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소장님."
"……내가 쓴 정명술이……강제로, 풀렸다."
조소의 흐릿한 시야에도, 피눈물을 흘리는 천양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니, 피가 흐르는 것은 눈만이 아니었다. 코로, 입으로, 귀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명으로 바꾼 현실이, 원래대로 돌아간 탓이군."
천양은 옷을 물들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조소는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짐작하고, 망치를 들어올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젠장, 젠장, 젠자아아앙!"
조소가 바닥에 망치질을 할때마다 쿵, 쿵 하며 땅 전체가 울렸고, 그녀가 망치를 뗐을 때는 내리진 자리가 갈라지며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마치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물줄기에 몸을 적시며, 소묘는 망치에 기대어 온몸을 떨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어떻게!"
"……끝이 아니다."
"……에?"
쿵.
땅을 내리치던 소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묵직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쿵. 쿵.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북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쿵. 쿵. 쿵.
좀 더 크게 들려오는 소리. 그제서야 확실히 알 수 있는 그 소리는, 다름아닌 누군가의 심장소리였다.
쿵. 쿵. 쿵. 쿵.
그렇다면, 누구의?
쿵. 쿵. 쿵. 쿵. 쿵.
소리가 멈춘다.
공기가 멈춘다.
짐승이 멈춘다.
사람이 멈춘다.
신이 멈춘다.
모든것이 정지한 가운데, 악마가 움직였다.
"햐하하하하!"
꺾어진 소묘의 목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소묘의 목을 물고 있던 사냥개 한 마리의 배가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말 그대로의 의미로 폭발했다.
「키엑!」
짧은 비명을 남기고, 사냥개는 고깃덩어리와 피의 조각이 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진득하고 비릿한 체액과 암녹색의 피가 소묘에게 사정없이 흩뿌려졌지만, 소묘는 별로 신경쓰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었다. 소묘는 두눈을 감은 채 사냥개를 주렁주렁 달고있는 몸을 일으켰고, 그녀가 움직일때마다 사냥개는 풍선처럼 우스꽝스럽게 부풀어오르더니 맥없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그 잔해는 일제히 결계 위로도 흩뿌려졌고, 사냥개는 죽은 잔해조차 결계를 넘지 못하고 결계의 보이지 않는 벽 위로 흩뿌려져 살점과 체액과 피가 엉겨붙은 끔찍한 잔해물들이 공중에 줄줄 흐르게 되었다.
두려움을 느끼고 꽁지를 빼던 마지막 사냥개마저 화려하게 터져나간 뒤, 소묘는 엇나간 목을 맞추었다. 목에서는 뼈가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소묘의 옷은 체액과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군데군데 사냥개의 이빨에 구멍이 난데다 소묘의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소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바닥에 꽂힌 선택을 집어들었고, 그것을 두 손가락으로 훓어내렸다. 그러자 소묘의 손가락 사이가 길게 찢어지며 상처가 났고, 그 피가 선택에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선택은 손잡이 부분부터 땀처럼 끈적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 피가 흘러내려 칼 끝에 닿을 즈음엔, 선택은 붉은 도신을 가진 검이 되어 있었다. 소묘는 입을 열었다.
"그래. 이게 바로 '초조'로군."
소묘가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칼을 한번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사냥개들의 시체 파편과 체액, 피들이 부글부글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제히 끓어올랐다. 그것은 검은 연기로 화해 소묘가 쥔 칼 끝에 모여들었고, 연기가 칼을 휘감자 칼은 검은색의 광택없는 도신으로 변해 있었다.
"아아. 이것이 아주 오래된 것의 시선이 가진 힘인가. 마음에 들어."
페스는 확신했다. 소묘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그것'은 소묘가 아닌, 사악하고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그것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천양도, 조소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소묘, 아니 소묘의 몸을 차지한 악마는 두 눈을 떴다. 그 두 눈동자는, 욕망으로 들끓는 찬란한 에메랄드 빛의 녹색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초조를 내리꽂은 악마는 덜덜 떨고 있는 페스를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히 몇백년 만에 몸을 바꾸어 보니 참으로 유쾌한걸. 그간 즐거웠나, '친구'여?"
"너……너 같은 거, 친구 아냐! 소묘 언니를 돌려줘!"
페스는 떨면서도 눈물섞인 목소리로 외쳤고, 악마는 그 모습에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엉망진창이 된 네 얼굴은 역시 귀엽구나. 사교의 신도들에게 능욕당하며 지어보이던 표정은 정말 걸작이었는데. 자, 그럼 악마의 거래를 제안할까. 이 녀석 대신 네가 다시 나의 몸이 되고 영혼의 껍질이 되어 쓰이겠느냐?"
페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지만,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맘대로 해. 난 어차피 죽었던 사람이야. 하지만, 소묘 언닌, 소묘 언니만큼은……."
"하지만, 거절하겠다."
악마는 극상의 미소를 지으며 기가 막혀 말도 못 꺼내는 페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뒤 페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수, 숨막……."
"더이상 너에게는 볼 일이 없어. 다만 네 덕분에 이 몸을 얻은 건 사실이니,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내 수많은 이름중 이페스란 이름은 너에게 넘겨주겠다. 그리고 그 이름과 함께 새로 얻은 생애의 평생을 후회와 고통 속에 기며 살아라. 그것이 이 무지의 귀공녀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햐하하하핫!"
소묘의 모습을 한 악마는 페스의 목을 놓고 몸을 빙글 돌려 조소와 천양이 있는 쪽을 향했다.
"낡은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도다! 무지와 원초의 공포를 선사하는 악마, 아이페로스Ayperos! 너희들의 절망에 머리숙여 인사하지."
"……촌극이 따로 없군."
조소가 땅에서 뽑아낸 비 아닌 비로, 피로 물든 얼굴을 씻어낸 천양은 차분하게 말했다. 악마, 아이페로스는 그런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햐하하하핫! 그러시겠지! 터무니없이 유쾌해서 참을수가 없군! 왜 그 오래된 것이 이 몸을 눈독들였는지 이해하겠어. 단순히 마력이 넘쳐난다 하는 정도가 아니야. 이건 무한정으로 퍼올릴 수 있는 우물이라고!"
조소는 폭소하는 아이페로스를 향해 망치를 치켜들었지만, 천양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손을 들어 조소를 제지했다.
"……아서라. 나도 너도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큭."
조소는 이를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지만, 발을 내디디진 않았다. 아이페로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자못 유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야, 이건 의외로군. 미친듯이 울고불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황파악을 잘 하고 있잖아? 그런 점은 확실히 인간이 아니구나. 역시 연륜이란건 대단하군. 햐하하하하!"
그렇게 배를 쥐고 미친듯이 웃어제끼던 아이페로스는 문득 뭔가 떠올렸다는 듯이 웃음을 멈추더니, 손가락을 딱 소리나게 튕겼다. 그러자 사냥개의 이빨로 인해 구멍이 숭숭 뚫리고 소묘의 피와 사냥개들의 살점과 체액으로 인해 더럽혀진 옷이 검은색 불길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새하얀 제복으로 거듭났다.
"기분전환으로 새 옷을 입어봤어. 난 흰 옷을 좋아하거든?"
아이페로스는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손에 든 초조를 흔들거렸다. 장난스러운 동작 속에 어린, 숨막히는 살기.
"──뭐──"
앗 하는 사이에 아이페로스는 조소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초조의 칼날 끝을 조소의 이마에 들이댔다.
"그리고, 새 옷을 입고 건방진 눈동자를 가진 녀석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건 더 좋아하지. 햐핫!"
어떻게 반응할 사이도 없이, 초조의 칼날 끝은 조소의 머리를 관통해 지나갔다. 하지만 피는 조금도 튀지 않았다. 검은 칼날은 마치 환영처럼 조소의 머리를 통과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페로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상쾌한 표정으로 초조의 날을 한껏 휘저은 뒤에 뽑아냈다.
"──어라."
다음 순간, 조소는 자신이 살아있는 생물의 뱃속 안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후텁지근하고, 끈적하고, 미끌미끌한 어두운 공간 안에 자신은 홀로 떨어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뱃속의 소화액이 그녀의 손발을 녹여갔다. 그것은 무려 일주일 간이나 긴 시간동안 이루어졌고, 고통과 고독에 미쳐 가면서도 조소의 감각은 생생하게 깨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그것은 1초도 지나지 않은 찰나의 시간.
"윽──"
이번에는 수많은 사냥개들이다. 바늘 하나 없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사냥개들은 잔인하게 이빨을 박아넣고 물어뜯었다. 그리고 절명하는 그 순간까지, 조소는 고통 하나하나를 느껴야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역시 시간은 전혀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다음 순간에는, 무수한 촉수가 조소의 팔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세계에는 그것들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악의로 가득차 있었다.
"아──"
그런 것이 수십, 수백회가 거듭되자 조소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조소의 정신은 뿌리부터 철저하게 파괴되어갔다.
조소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조소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아이페로스는 박수를 쳤다.
"햐하핫! 정말 훌륭하네. 곧 아름다운 무지를 얻게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지. 인간에게 지성이란 이름의 선악과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좀 더 아름다운 역사를 아로새길 수 있었을텐데 말야."
"다 끝났나."
천양은 조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페로스는 코웃음을 치며 초조의 칼 끝을 천양에게 향했다.
"하아?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좀 더 절망해 보라고. 신령. 이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거기밖에 안 되는건가? 먼저 죽어버린 아이들이 불쌍하군. 네놈처럼 뻔뻔한 것에게 의지하다니."
천양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명이 한번 깨트려져, 그 반향으로 쏟아진 신벌로 인해 그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천양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내 아이들은 의지하지 않는다."
"입만 살았군. 다음은 네 차례다."
아이페로스는 흥이 깨졌다는 표정으로 녹색의 눈동자를 천양에게 향했다. 천양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천양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애초부터, 신령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정말로 씩씩한 아이들이다. 그저 내 오랜 미련이 그 아이들을 붙잡고 있었을 따름이지."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특별히 잘게 썰어 아주 오래된 것의 먹이로 삼아주지. 기분나쁜 녀석. 앞으로 그 어떤 윤회전생도 너에겐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것에 별 흥미는 없다."
천양은 팔짱을 끼고 완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페로스는 초조를 끌어당겼다.
"초조."
새카만 칠흑이 칼에서 흘러나왔고, 새빨간 칼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이페로스는 초조를 손가락에 미끄러트렸다.
"발拔──"
그 순간, 천양은 있는 힘을 다해 발을 구르며 호통을 뽑아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잠에서 깨어나라, 이 답답한 제자놈아!"
이름을 잃어버린 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무척이나 상냥한 할아버지가 매일처럼 어린 자신을 돌보아주는 꿈이었다. 가끔씩 무서운 시선이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언제나 돌아보면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소녀는 밝은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언제였을까. 소녀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을 때, 소녀는 급작스럽게 아랫배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허벅지에 흐르는 피의 감촉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 너머,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눈동자의 존재를 처음 직시했다.
눈은 하나가 아니었다. 무수하게 감긴 눈 중에 단 하나가,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 잠들어 있어야 할 그것은 소녀가 태어난 이래 언제나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먹음직스럽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눈의 존재는 말하고 있었다.
소녀의 인생은 단지 먹히기 위해서 존재했다고.
소녀는 그 공포를 견딜 수 없어서 그대로 쓰러졌고, 그녀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오래된 것의 사악함을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는 흉측한 이물들이 어둠 속에서 촉수를, 코를, 손을, 꼬리를, 그림자를 뻗어 그녀를 위대한 것의 먹이로 바치려 했다.
견딜 수 없게 된 소녀는 언제나처럼의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나타나 주었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깎아내 소녀를 시선으로부터 지켜냈다.
정말로, 고마웠지만, 또한 미안했다.
자신은 그 어떤것도 준 적이 없는데.
그런 목숨을 건 호의를 받을 만큼 좋은 아이가 아닌데.
소녀의 꿈은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이번에 태어나는 아이, 이름을 뭘로 할까요?'
'글쎄, 여자아이니까, 정말로 귀여운 이름을 지어주자.'
'이름은──'
그 이름은, 소묘가 아니었다.
에?
소녀의 작은 의문은,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해소되었다.
그 순간에도, 눈동자는, 소녀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를 낳고 받아든 의사는, 소녀의 뒤에서 주시하고 있는 눈동자를 흘끗 본 것 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미쳐버렸다. 옆에 있던 간호사도,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의사도, 미쳐가는 사람들 속에 그녀를 품에 안은 어머니도, 그 어머니를 감싼 아버지도.
전부 공평하게 압도적인 공포의 제물이 되어버렸다.
비이성적인 상황 속에서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했던 부모들도, 시선의 끝에 몰려든 사악한 이형의 존재들에게 갈갈히 찢겨버렸다. 병원 전체는 피와 공포의 축제장이 되었고, 아무리 울어도 소녀를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애기야, 괜찮아? 나, 보이니?'
하지만 새하얀 불꽃이 있었다. 모든 사악과 어둠을 태워버리는 새하얀 불꽃이 소녀의 주변을 감쌌다. 그 불꽃은 소녀에게 더할나위 없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뜻한 불꽃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와, 소녀를 들어안고 말을 걸어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널 부모님의 품에 안겨줄 수 없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전부 제 탓인걸요.
제가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병원에 있는 사람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무도 죽지 않았을 거에요.
'그러지 마.'
네?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말라고.'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요.
'으응. 그래도 느낄 수 있는걸. 만져보면 알 수 있고.'
눈에 흰 천을 두른 검은 정장의 여인은, 소녀에게 주변을 둘러싼 새하얀 불꽃 만큼이나 따뜻한 온기를 소녀에게 전해주었다.
'자신을 책망하지 말고, 슬픈 얼굴만 짓지 말고, 좀 더 웃으며 세상을 사는거야.'
여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탓인지 소녀를 지켜보는 사악한 눈동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언니와……'할아버지'가 널 지켜줄게.'
소녀는, 그때 처음, 천양의 모습을 보았다.
백색의 도포를 걸친, 온화한 백발의 노인은, 여인과 너무나도 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 순간, 여인의 이름을 깨달았고, 소리를 내어 불렀다.
'엄, 마──'
산신령 이천양의 마지막 만신이자, 백씨 가문의 차녀인 눈 먼 퇴마사.
새하얀 불꽃이란 뜻의 백화白火란 이름을 지닌 그녀는, 소녀를 향해 활짝 미소지었다.
쩡.
맑은 쇳소리와 함께, 천양을 향한 아이페로스의 일격은 공중에서 멈추었다.
"──뭐?"
아이페로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칼, 초조를 멈추고 있는 쇠붙이를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 어이없게도, 손가락 길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은장도의 날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은장도를 쥐고 있는 건 천양이 아니라, 아이페로스가 한번도 본 기억이 없는 어떤 여성이었다.
"넌, 대체 누구야?"
검은색 정장에, 눈에는 흰색 천을 휘감고 있는 독특한 복장의 백발 여인은 아이페로스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아이페로스는 연달아 초조를 휘둘렀지만, 번번히 빨려들듯이 그 작은 은장도에 막혀버렸다.
"이런……터무니없는, 일이……."
아이페로스의 그 반응을 보고, 천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왔구나, 바보 제자놈."
물론 천양의 눈에 백발 여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양의 시야에는, 아이페로스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을 굴렀다.
"너는 또 언제까지 퍼질러져 있을 셈이냐?"
그러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조소가, 움찔 하더니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여인의 존재가 아무래도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잠시 물러나 있던 아이페로스가, 터무니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 그건 불가능해! 시간을 수백배로 늘려 동안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도록, 뇌를 휘저어 놨는데!"
조소는 망치를 지팡이 삼아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사나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어설퍼, 어설프다고. 악마주제에 상상력도 참 빈약하군. 겨우 이것밖에 못해?"
조소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인상은 있는대로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가에 걸린 비웃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면 더 철저하게, 영겁에 걸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괴롭혔을거야. 제발 죽여달라고 절규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얏!"
조소는 그렇게 외치며 왼발로 망치의 머리를 걷어차 왼쪽 어깨에 걸쳐들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은장도를 빼든 여인에게 가로막혀 아이페로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천양은 한발을 내디디며 아이페로스를 향해 손가락을 향했다. 바람도 없는데 천양의 긴 백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퇴마의 시간이다! 자아, 구구절절한 말은 내던지고 판을 벌여보자. 네게 천양지차를 다시 가르쳐주마!"
>> 천양지차! 마지막 이야기! 퇴마退魔
"……우와. 전체적으로 여주인공 취급이 악취미야……."
"……네가 여주인공이라고 말한적 있던가?"
"에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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