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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지차! 제8화

10/09/13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아주 오래 전, 모든 것에 이름이 붙기 전에 존재한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은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가라앉아버린, 너무나도 오랫동안 목숨을 이어온 존재.
구원도 파괴도 잊은 채 고고히 잠들어있던 그것은, 한가지 욕망을 느끼고 악의로 가득찬 눈동자 하나가 깨어나, 어둠 속에서 희번득거렸다.

그 욕망이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엄청나게 강렬한 것.

「배고프다」

고독蠱毒속에서 키운 비뚤어진 식욕食欲.
너무나도 오랜만에 그의 입맛에 맞는 생명체가 태어난 것을 느끼고, 눈동자는 먹이의 위치를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천양지차!

제8화 : 초조初潮




소묘는 왠지 모르게 둥실둥실 떠올라 있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쌓여있는 수학문제들과 공식을 보다보니, 자연히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다. 어쩌면 살짝 졸았을지도 몰랐다. 소묘는 눈을 비비고 얼굴을 문지르며 기합을 넣었다.

"안돼! 백소묘! 고작 이 정도의 방정식과 함수에 패배해서는!"

하지만 그 순간, 무척이나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예지력에 가까운 영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소묘는 거의 반사적으로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고, 켜지기가 무섭게 10개나 넘는 메세지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려퍼졌다. 소묘는 자신이 있는 곳이 도서실이란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주변에 꾸벅꾸벅 사과를 하며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발신자는 조소. 소묘는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인사는 필요없어. 길게 말할 여유따위 없으니까. 페스가 사무소 옆 공원에서 실종되었다. 지금 당장 사무소로 와. 그럼."

독설을 한바탕 듣게 될 거라고 각오한 소묘는 너무나도 간결한 조소의 통화내용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어……? 에? 페스가……실종? 에에엣?"

그제서야 조소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소묘는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손등에서 악마의 마법진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



"마르베스가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네? 그런데 그 녀석, 저번 이후에 연락도 제대로 받질 않아서 상황이 바뀐걸 모르고 있을텐데. 뭐, 상관없지. 열리지 않는 문 따위는 이제 별로 흥미도 없고. 오히려 그쪽이 부서졌을때, 이쪽이 어떻게 될지 그게 더 궁금한데? 어느 쪽이든, 악마의 선택이란 거겠지."



약 10분 전, 퇴마사무소 천양. 조소는 시계를 흘끗 보고 바쁘게 놀리던 손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페스가 늦네."

조소의 중얼거림에 천양이 서류뭉치를 탁자위에 올려두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내가 마중하러 갔다올까?"
"뭐, 별일 없……."

느슨한 태도로 말하던 조소는 말꼬리를 흐렸다. 조소의 눈동자는, 작업하고 있던 컴퓨터에 뜬 붉은 색의 'Signal Lost' 라는 경고 메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소는 작업하고 있던 서류를 한꺼번에 옆 책상으로 일제히 밀어버리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급작스러운 행동변화에, 천양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래?"
"……시그널 로스트."

조소는 컴퓨터를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고 눈도 돌리지 않으며 대답했다. 조소의 얼굴표정은 어느새 차갑고 사무적인 업무모드가 되어 있었다.

"페스에게 붙여놓은 발신기의 신호가 일정 시간을 기점으로 신호 완전소실. 최악의 상황이에요."
"에?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속 편하게 그 아이를 믿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소장님은. 전 가까운 사이일수록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습니다. 하물며 악마의 그릇으로 만들어졌던 아이입니다. 어떻게 속일지, 혹은 어떤 손길이 뻗쳐올지 몰라요."
"조소, 너."
"자세한 이야기는 됐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간단하게 브리핑하죠. 현재 뜨는 시그널 로스트 메세지는 최악의 메세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발신기는 그 어느 때에도 신호를 전송하며, 본래 파괴되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등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경우 특별한 신호를 내보내 그때의 상황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길지는 않지만 도청 기능까지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그널 로스트 메세지는 그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에만 뜨는 메세지죠."

조소의 차분한 보고를 듣고 있던 천양의 안색은 창백해져갔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시그널 로스트는, 말 그대로 갑자기 발신기가 이 세계에서 사라졌을 경우에만 뜨는 메세지입니다. 완전한 행방불명이죠."
"……하."

불안정하게 탁자에 올려졌던 서류가 흩날려 사방에 흩어졌지만, 조소도 천양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천양은 문 옆의 모자걸이에 걸려 있던 푸른색 야구모자를 눌러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조소도 문 옆에 세워져 있던 여행가방을 잡아끌고 천양의 뒤를 따라 나섰다.

"시그널 로스트가 발생한 지점은 공원. 정확한 좌표는 이미 제 스마트폰에 전송되어 있으니 바로 가도록 하죠. 소묘에게도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조소는 빠르게 이어서 보고를 했지만, 천양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소는 그에 대해 별다른 불평을 꺼내지 않았다.
천양은 지금, 고요하지만 폭팔적인 분노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상태였으니까.
조소는 자동 반복 메세지 전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한쪽 귀에 통화용 무선 헤드셋을 걸쳤다.
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았기에, 그 누구보다 자신의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10분 전. 경계세계의 공원.

「크르르륵!」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기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들이대고 미친듯이 사냥개 한 마리가 달려왔다. 페스는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아빠───!"

그러자 사냥개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태평스럽게 팔짱을 끼고 페스를 바라보고 있던 마르베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도와줘요! 아빠아아앗!"

게걸스럽게 페스를 삼키려고 드는 사냥개의 이빨이 페스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기 직전, 마르베스는 페스가 입은 원피스의 목깃을 잡고 잽싸게 들어올려 사냥개의 이빨로부터 페스를 벗어나게 했다. 페스는 마르베스의 손에 매달려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르베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페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셔도."
"날 왜……?"
"구해준 건 아닙니다.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마르베스는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고, 페스는 바닥에 구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파……."
"뭔가 이상하네요. 분명 이페스는 당신이 위기에 처하면 악마를 찾을 거라고 했는데. 거기다 악마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을 당신에게 '아빠'라니? 이해할 수가 없네요."
"무슨소린지……모르겠…꺄악!"

마르베스는 페스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찼고, 방금전까지 페스가 있던 자리를 사냥개 한 마리가 가로질러갔다. 결과적으로는 이번에도 마르베스가 페스의 목숨을 구한 것이 되었지만, 페스는 그런걸 생각 하기 힘들 정도로 힘겨워했다.

"아……아윽."
"대답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체 하는 겁니까? 어느 쪽이든 이상하네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닐 당신이 어째서 악마를 받아들여 편해지지 않고 그렇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지."
"아빠……소묘 언니……조소 언니……."
"그러니까 당신을 구해줄 사람은 여기 올 수 없다고 말씀드렸을텐데요!"

마르베스는 이번엔 페스의 등을 걷어찼고, 이번엔 두세마리의 사냥개가 공중에서 엉겨붙어 떨어졌다. 페스는 너무 아프고, 괴롭고, 두려워서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싶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해지고 맑아지는 정신 덕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르베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무리입니다. 오히려 감각이 활성화되어 고통만 더 늘어날 뿐.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도 평소보다 더 심하고 강하게 느껴질텐데요."
"으흑……."
"자, 그러니까 부르시죠. 당신을 낳은 더러운 악마, 무지의 귀공녀, 이페스의 이름을!"

마르베스는 이번엔 아예 페스를 들어올려 걷어찼고, 페스는 멀찌감치 굴러가서 신음도 제대로 못 내고 몸을 꿈틀거렸다. 마르베스는 중절모를 눌러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기 직전까지 불러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저는 이페스의 속셈 따위는 관심도 없지만……. 그럼, 지켜보기로 할까요."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는 페스를, 대여섯마리의 사냥개들이 가까이 다가가 원형으로 둘러싼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거울삼아, 도약했을때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거리까지 왔을 때, 사냥개들은 일제히 공원의 풀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 긴박한 순간, 긴장을 깨는 소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텅빈 공원을 울렸다.

"이 선 너머로 개새끼들은 못 넘어온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약했던 사냥개들은 허공에서 뭔가 투명하고 단단한 것에 부딪혀 일제히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마르베스는 당황햇다기 보다는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튕겨난 사냥개들 사이에 선 소녀를 응시했다.

"이런. 친구들의 역겨운 냄새 덕분에 제 코도 마비되어 당신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나 보군요. 전 당신같은 사람을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사냥의 즐거움을 방해받은 사나운 야수의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페스와 자신의 주변에 줄넘기를 둘러치고 있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소녀는 오히려 마르베스를 향해 태연히 삿대질을 하며 당당하게 외쳤다.

"어이. 이봐. 당신이 이 개들 주인이야? 공원에서 조용히 운동이나 하려고 했더니, 개들이 왈왈대 시끄러워 운동을 계속할 수가 있어야지! 개들 단속 제대로 못하나? 죄다 성대수술을 시켜버리든지 원!"

그 소녀의 기백에 감탄한 마르베스는 고개를 으쓱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히 제 소유물이 아니라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경계를 걷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을텐데……뭐, 여기까지 오신 시점에서 보통 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드리도록 하죠."

마르베스는 중절모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 미천한 짐승의 이름은 마르베스. 미력하나마 악마의 한 위를 차지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정지선. 원래 악마같은 녀석들과는 통성명을 안하는 주의지만 어쩔 수 없지."

소묘의 짝궁, 지선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의미죠?"
"난 이름의 힘을 사용하는 정명술사正名術使. 내 이름이 천부적 사기꾼들인 악마에게 멋대로 알려지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호오. 그렇습니까. 하지만 '선'이 들어가는 이름이라……역시 경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군요."

지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르베스를 노려보았다.

"뭐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데, 조용히 운동하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네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저 똥개 무리를 저리 치워주지 않을래?"

지선의 말에 마르베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하군요. 이 친구들은 저보다 오래 전부터 경계에 멋대로 발을 들이는 녀석들을 물어 죽여온 사냥꾼들. 애초부터 제 말을 들을 존재가 아닙니다."
"……하아? 네가 이 아이를 공격하라고 시킨게 아니었어?"

지선은 끊어질듯한 신음소리만을 흘리며 코와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페스를 가리키며 반문했다. 하지만 마르베스는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전혀. 제가 잠시 놀아주기 위해 이 세계로 저 꼬마 아가씨를 초대했을 뿐인데, 멋대로 난폭한 친구들이 공격하기 시작한 겁니다."
"……네 고의성은 전혀 없다고 주장할 셈이야?"
"물론이죠."

지선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인간을 못 죽이게 강력한 제약으로 묶여있군."

마르베스는 처음으로 입가에서 미소를 거두고 중절모를 더 깊숙히 눌러썼다.

"긍정의 답변은 드릴 수 없지만, 재미있는 가설이군요."
"……그래서 굳이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쓴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예의 '악마의 방식'인가. 이런 꼼수를 쓰는 걸 방임할 정도라니, 네놈의 목줄을 쥐고 있는 계약자도 한삼하네."

마르베스의 능청스러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마 자신의 계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강력한 금제가, 그의 말과 행동을 봉인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본래 마르베스가 웃음과 궤변으로 감추고 있던 의도성이 지선으로 인해 강제로 파헤쳐져,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게 그의 심신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웃음기가 사라진 마르베스의 목소리에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당신이 '선'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고작해야 그 작은 범위가 당신 힘의 한계지요. 공격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능력으로, 여기서 달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마르베스가 줄넘기로 만들어진 '선'을 지적하자 지선의 눈썹은 꿈틀거렸다. 고작해야 능력을 단 한번 본 것 만으로도, 저 악마는 단숨에 지선의 능력의 한계와 역량을 짐작해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마르베스가 걷어차 날린 곳은 하필 공원 잔디 위였기에 그녀의 특기인 '선 긋기'에 꽤 여러가지 제약이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운동하러 나왔다 마주친 일이기에, 그녀가 가진 도구라고는 줄넘기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선은 살짝 미소지었다.

"어이, 악마."
"왜 그러십니까?"
"내가 왜 여기 끼어들었다고 생각해?"
"글쎄요. 그 아이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입니까?"
"천만에. 넌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군. 그렇다면 이제부터 똑똑히 알아둬, 악마."

지선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 돈. 그것도 현금이다."
"……뭐라고요?"

그 순간 공중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흰색 봉투가 지선의 눈 앞에 나타났고, 지선은 그것을 낚아채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 보수도 들어왔겠다. 이것으로 안녕이네. 수고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선의 모습은 불길에 휩싸였다.



공원에 도착한 조소와 천양은 페스의 흔적을 찾는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발견하고 허탈해했다. 공원 잔디 위에는 주인 없이 양 손잡이가 묶인 줄넘기가 동그란 원형을 이루고 땅바닥에 놓여져 있었고, 거기에는 돌로 눌러둔 흰 메모지 한 장이 보였다. 메모지 위에는 삐뚤빼둘한 글씨로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넘어올 사람은 현금으로 25만원을 내시오.'

조소는 한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치켜세웠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군요."
"아아."
"하지만 이 녀석의 장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꽤 급하게 쓰여진 걸로 보이니까. 시급한 상황으로 생각되는군요. 어떻게 할까요?"
"받아라."

천양이 던진 지갑을 받아든 조소는, 빽빽하게 만원짜리만으로 가득 찬 지갑에서 세지도 않고 스물다섯장을 뽑아들었다. 품속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어 천양을 한번 뒤돌아보자, 천양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니다. 전소錢燒!"

돈에 불이 붙음과 동시에, 메세지가 쓰여진 종이도 타들어갔고 그들의 모습도 불길에 싸여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과 교대하듯, 종이봉투를 움켜쥔 지선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아. 아슬아슬했다. 악마놈. 엿이나 먹어보라지."



원래 지선이 서 있던 자리에서는 불길이 사그라들자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천양과 조소의 모습이 나타났다. 감시중에 계속 보아왔던 익숙한 얼굴들이기에, 마르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이런."

조소는 마르베스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페스를 안아올렸다. 페스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조소의 모습을 보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조소는 아무 말도 없이 차분하게 페스의 코와 입 주변의 피를 물티슈로 닦아낸 뒤, 페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잔디에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천양은 그 동안 한번도 페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조소는 묵묵히 여행가방에서 망치를 꺼내 조립했고, 검은 쇠망치가 완성되는 순간, 천양은 그 어떤 사전예고도 없이 발을 구르며 마르베스를 향해 뛰쳐나갔다.

"잠ㄲ──"
"말은 필요 없다."

천양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뒤따라 달려온 조소가 쇠망치를 들어 땅바닥을 내리쳤다.
쿵!
지진이 나는게 아닐까 의심되는 진동이 울려퍼졌고, 조소가 쇠망치를 떼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수류가 폭팔적으로 분출했다. 조소는 그 물을 향해, 나무를 베는 듯한 포즈로 한번 더 쇠망치를 휘두르며 외쳤다.

"최단공정제련最短工程製鍊! 선택!"

그러자 조소의 망치가 닿은 부분부터 물이 뚝 끊겨 날아간듯 사라졌고, 대신 하늘로 향한 수류의 질량을 전부 변환한 듯한 엄청난 수의 칼날이 마르베스를 향해 날아갔다. 마르베스는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 그 칼날들을 피해 움직였지만, 천양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악마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소용없어."

천양은 공중에서 칼날의 무리를 걷어차며 차갑게 선언했다.

"신령 이천양이 셋째 정명인 천양穿楊으로 명한다. 내가 노린 것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그러자 수많은 칼날의 무리는 일제히 흩어졌다가, 공중에서 일제히 제각각 방향을 바꾸어 비처럼 회색의 짐승을 향해 쏘아졌다.

"크, 크아아악!"

지금까지의 태연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르베스의 회색 트렌치코트는 셀수도 없는 칼날에 의해 꿰뚫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천양과 조소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마르베스에게 다가갔을 즈음에는, 그는 바닥에 못박힌 고슴도치 꼴이 되어 있었다. 공원의 잔디는 피로 흥건했고, 마르베스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크, 쿨럭! 멋지군요. 비록 제약에 묶여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를 이렇게까지 제압하실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누구의 사주냐."

천양은 마르베스의 말을 무시하고 담담하게 질문했다. 마르베스는 웃음만 실실 흘릴뿐 대답하지 않았고, 천양이 눈짓을 하자 조소는 검은 쇠망치를 휘둘러 칼날을 후려졌다. 수많은 칼날들은 그 간격을 좁혀가며 마르베스의 몸 사이로 더욱 촘촘히 날을 세워 파고들었다.

"크, 크아아아악!"

마르베스가 상처입은 짐승의 비명을 올렸지만, 천양과 조소 모두 비인간적인 차분함으로 마르베스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마르베스는 결국 달관한 듯 피거품 섞인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이래서 하급 공무원은 피곤하군요. 윗대가리 부탁 들어다 주고 고생은 혼자 다 하니."
"그 이페스인가 하는 악마놈이로군."

천양은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정을 내렸고, 마르베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물어볼 것도 없었던 거 아닙니까?"
"페스를 상처입힌 몫이다."

마르베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유쾌한 듯 웃어제꼈다.

"하하하! 그럼 전 할만큼 했으니 이제 슬슬 물러나도 될 것 같군요."
"누가 쉽게 물러나게 해준다고 했던가?"

천양의 말에 조소의 망치가 한번 더 내리쳐졌으나, 이번에 그녀의 망치는 칼날에 닿지 못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짐승의 앞발이, 망치의 자루를 꼭 쥐고 그녀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베스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여유를 되찾았고,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나더니 거대한 괴물의 강인한 턱과 이빨이 되었다.

"그럼 제 역할은 여기서 끝입니다. 저를 신경쓰기보다는, 당신들과 꼬마 아가씨 걱정이나 하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럼, 즐거웠습니다."

그림자의 턱은 수많은 칼날째로 마르베스를 입 안에 넘고 씹어삼켰고, 피를 사방에 잔뜩 튀기며 마르베스를 삼킨 그림자는 스스로를 그림자 안으로 밀어넣고 돌연 잠잠해졌다. 천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참 더러운 퇴장이군."
"소장님, 저기!"

조소가 다급하게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예의 흉측한 '사냥개'들이 지선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벽 주변에 잔뜩 모여들어 있었다. 그 수는 결코 무시할 만한 정도의 숫자가 아니었기에, 천양은 혀를 찼다.

"조소야. 아까같이는 무리겠지?"

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단순 제련이긴 해도 100개나 만들어 버렸던지라……."

그렇게 말하는 조소의 팔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잠시 이성의 끈이 끊어진 탓에, 너무 무리하게 힘을 남발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조소는 별로 낙담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저 '정지선'은 저쪽에서 새로운 정명술을 쓰거나 일부러 해지하지 않는 이상, 계속 유효해요. 소묘도 곧 도착할테니, 그때를 노려 돌파하면 됩니다. 페스도 안전해요."
"……그래."

하지만 이때 천양은, 지나치게 쉽게 풀린데다 잘 맞아들어간다는 일에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협박이나 강제의 수단으로 빈틈을 노려 이런 궁지까지 몰아넣었으면서, 악마가 그대로 도망친다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그때, 천양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의 존재를 깨달았다. 바다내음과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로부터 풍겨오는 냄새. 천양은 불안감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였지?

천양의 켜켜히 쌓인 기억의 단편속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눌러 두었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급작스럽게 부상했다. 이 비릿한 냄새. 저 기괴한 번들거림을 가진 이형의 괴물들. 천양의 낮빛은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소장님?"
"……소묘를."
"네?"
"소묘를 오지 못하게 해! 여기 와서는 안돼!"

천양은 소리를 지르며 사냥개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떤 수단을 써도 좋으니, 소묘보고 여기 오지 말라고 햇!"
"하지만 소장님!"

그러나 조소의 말도, 천양의 질주도 소용없이, 지선의 결계 안쪽에서 불꽃이 타올랐고, 폭발음과 함께 결계의 벽에 꾸역꾸역 달라붙어 있던 사냥개들이 날아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페스를 끌어안은 채 오른손에는 선택을, 왼손에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여러장의 부적을 낀 소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고생 퇴마사, 백소묘 등장입니다!"
"소묘 언니……."

그때쯤에는 어느정도 정신을 회복한 페스가 소묘의 품에 안겨왔고, 소묘는 그런 페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생긋 웃어보였다.

"걱정마! 널 괴롭히는 것들은 이 소묘 언니가 죄다 날려버려줄게!"

기쁜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페스를 본 소묘는 힘을 얻은 듯 몸을 빙글 돌렸다.

"조금만 기다리렴! 언니가 길을 뚫고 쌤과 조소 언니를 데려올테니깐!"

눈 앞에는 천양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면서 뭔가를 외치고 있었지만, 소묘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기에 소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쌤이 왜 저러시지? 어쨌든, 갑니다!"

그 순간, 옆에서 결계 밖으로 달려나가려던 소묘를 보던 페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소묘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천양이 저렇게 큰 소리로 "멍청아, 나오지 마라! 제발!" 이라고 호통을 쳐대고 있는데, 소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페스는 소묘의 양 손등에서 각각 붉은색과 녹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모양의 문양을 발견했다. 의미를 알수 없었지만 확 끼쳐오는 불길함에, 페스는 손을 흔들며 소묘에게 그것을 말하려고 했다.

"소묘 언니──!"
"응?"

페스의 목소리를 들은 소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결계 밖으로 몸을 내 뻗은 뒤였다. 그리고 결계 밖의 땅에 발이 닫는 순간, 소묘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몸 안으로 파고드는 냉기를 느꼈다.



"드디어 틈이 생겼다."



그리고, 정적.

"에?"

결계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없는 고요.
자기 자신의 모습도 확인할 수 없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소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뭐, 뭐야? 함정인가?"

흉측한 개의 모습도, 천양의 모습도, 조소의 모습도, 페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데도, 뼛속까지 시린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에게 그렇게까지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소묘가 검은 칼, 초조를 사용할 때 언제나 보아 왔던 광경인 것이다.
소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초조……윽."

초조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 소묘는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어……라."

그리고, 허벅지로 끈적한 뭔가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피."

소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왜?
소묘는 마음 속으로 질문했다.

이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일어날 일도 아니다.
그저, 언젠가 일어났던 일이다.

소묘의 마음 속에서 몇겹이고 두껍게 쌓여 있던 공포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강제로 쥐어뜯기려 하고 있었다. 소묘는 그것을 거부하려고 애썼지만, 비릿한 냄새가, 어둠이, 그런 저항을 억누르고 그녀의 마음 속을 억누르고 있던 사슬을 하나 둘씩 풀어버렸다.

"……무서워."

소묘가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알아 갈수록 두려운 것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마음속을 침범했다.
그 공포는 소묘의 기억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얻었다.

"눈……."

눈이 있었다.
악어처럼 생겨 눈이 없었던 사냥개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 희번득거리는 외눈을 그녀에게 향했다.

"눈이 있었어."

그리고 소묘를 바라보는 외눈의 사냥개는 한마리 더 늘어났다. 소묘는 암흑 속에 떠다니는 눈동자를 피해 한발짝 물러섰다. 물컹하고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소묘가 뒤를 바라보니, 거기도 그 불쾌한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날 봤어."

소묘의 마음속에 침범한 공포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눈동자의 갯수는 늘어만 갔다. 세개, 네개, 다섯, 여섯, 수십개, 수백개, 기하급수적인 눈동자는 세계를 가득 채웠고, 새하얀 나신의 소묘를 바라보는 무한의 눈동자가 있었다. 소묘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를 내질렀다.

"싫엇──!"

그리고 소묘의 외침에 세계는 다시 암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카만 칼이 칼날을 그녀의 목젖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붉은 칼이다.
피의 빛깔을 한 칼끝은, 소묘를 향하고 있었다.
칼은 날카로움.
시선의 은유.

결국, 소묘가 태어난 순간부터 바라보던 눈동자가 간직한 것은 단 하나의 욕망 뿐.
소묘를 「먹는」것 뿐이었다.



"아아. 이제야 이해했다. 그것이야말로 인지人知의 영역을 넘어선 공포의 지배자. 아주 오래된 것Great Old One이었군. 애초부터 인간에게 불리울 이름은 없고, 영원을 초월해 존재하게 될 그것. 넌 가련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그것의 먹이로 선택된 것이었구나."



소묘는 그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소묘의 마음속 사슬이 또 하나 무거운 소리를 내며 녹슬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초조初潮의 의미도 이해했다. 그것은 본래 초경初經의 다른 말. 저 신령은 네가 처음으로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나타난 그것을, 초조初祖란 이름에 담았군. 그리고 그 시선을 고정시켜 너의 피와 함께 칼의 형태로 왜곡시켰다. 거기에 음이 같은 초조初潮란 이름을 덧씌우고 봉해버렸어. 대신에 그것이 네 정신적 성장을 막아버렸군."



이번엔 천양이 걸어놓은 소묘의 마음속 사슬이 산산히 바스라졌다.
소묘는 공포 속에 자기 자신을 잃고, 기억이 마모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이름마저 흐릿해져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달콤하게 그런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자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불안한 너이지만, 나는 그 무엇도 묻지 않고 너에게 손을 뻗어주겠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잊은 너를 환영한다. 너의 그 아름다운 무지無知는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영혼의 식량이 되어, 우리는 친구로서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름마저 잊은 소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네가 말하는대로 할게. '친구'야. 너는, 누구?"

소녀의 대답은, 소녀의 마음을 보호하고 있던 마지막 사슬을 끊어버렸다.



악마는, 사슬이 완전히 사라진 붉은 문을 열어 그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것을 움켜쥐며 천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이름은 이페스. 무지의 악마다."

콰직.
손에 들어온 빛을 산산조각낸 악마는,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 천양지차! 제9화 : 악마惡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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