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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지차! 제7화

10/09/11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사냥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언제까지고 기다린다.
사냥꾼은 그들애게 결코 목줄을 채울 수 없다.

바로, 사냥개 그 자신이 사냥감을 판단하는 사냥꾼이기에.


천양지차!

제7화 : 엽견獵犬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페도 소장님."
"페, 페도라니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애 듣는 앞에서."
"왜요. 페도와 페스라니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환상의 부녀로군요."

싸늘하게 내리꽂히는 조소의 시선에 천양은 몸을 움츠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천양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소녀, '페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조소를 바라보았다.

"에, 페도가 뭐야? 아빠 이름은 천양 아니었어? 응? 조소 언니, 페도가 뭔지 가르쳐줘!"
"……이래서야, 놀려먹지도 못하겠군."

조소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새벽 첫 기차를 기다리는 역의 대합실 안. 등산용 배낭을 멘 노인들 몇몇이 있는 TV를 보고 있는 조용한 그곳에서, 야구모자를 눌러쓴 소년을 끌어안고 있는 금발의 외국인 소녀는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소녀에게 페스라는 이름을 준 그 순간, 페스의 체격과 외모는 악마로 나타났을때보다 눈에 띄게 어려져 있었는데 천양은 소녀가 제물이 된 시점의 연령과 걸맞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재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소녀의 몸을 제물로 현계한 이페스는 몇년동안 어둠 속에서 날뛰다가 그 지역의 악마퇴치자에게 당해서 지옥으로 강제추방된 것이기에, 천양의 추측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페스는 보통의 어린아이보다는 키도 크고 성숙해 보였기에 지나치게 갓난아이 같은 행동은 역시 좀 눈에 거슬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소묘가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할 때 악마 이페스의 모습이 자꾸 겹쳐보인다며 천양에게 달라붙는 페스를 억지로 앉혀놓고 머리를 매만져 양갈래머리를 만들어 놓자, 그제야 비로소 행동거지에 어울리는 귀여운 어린애처럼 보였다.
소묘를 처음엔 경계하던 무진장 경계하던 페스는 그 머리모양이 맘에 들었는지 한동안 소묘에게 달라붙었고, 천향은 한숨을 돌리며 눈에 띄는 도포를 대신 평소 복장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뭐어……막 태어난 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니까. 말할 수 있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긴 해도, 이 아이는 내가 아빠란 사실 외에는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사실도 몰라. 처음부터 하나씩 다 가르쳐야 해."

조소는 천양의 변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천양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부탁한 건 아니지만, 페스에게 상식을 교육시키는 건 자신의 일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얼빠진 사제에게 맡겼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소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페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이. 거기 꼬맹이."
"꼬맹이 아냐! 페스야!"
"아. 그래. 페스. 지금까지 몇번이나 물어본 거긴 하지만. 네가 끌어 안고 있는 아빠란 사람 말야, 사실 인간이 아니라는 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 맞니? 인간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라고."
"……틀린말은 아니지만 기분이 좀 이상한데."

조소의 말에 천양은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페스는 주변의 심각한 분위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활짝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응! 아빠는 신령님이잖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대단하잖아?"
"……네 머릿속에서는 신령이 판검사 같은 전도유망한 직업으로 이해되는 모양이네. 됐어. 물어볼 필요도 없겠다."
"헤헤헷."

뭐가 그리 좋은지 천양의 볼에 얼굴을 부비는 페스를 보며, 조소는 페스를 제대로 가르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이성적인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었다.

"쿠~하~음냐음냐."

그리고 그런 천양의 바로 옆자리에서 소묘는 입을 쩍 벌린 채 선택의 케이스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아침에는 페스에게 육체적으로 시달린 터라 피곤이 잔뜩 쌓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소는 그 멍청하게 잠든 얼굴을 바라보자 기껏 풀어졌던 짜증이 다시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소묘의 발을 뒤꿈치로 지긋이 밟아주었다.

"으하우욱! 뭐, 뭐야?"

소묘는 벌떡 일어나서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소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 조소야? 나, 나 안 잤어? 잠깐 눈만 감고 있었는데?"
"……입가의 침이나 닦고 거짓말을 하시지."
"으? 으응? 진짜야?"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입가에 가져가는 소묘를 보며, 그 한심함에 조소는 괴롭히고 싶은 마음마저 달아났다. 뭣보다, 천양의 목을 너무 세게 졸라 버둥거리게 하고 있던 페스가 소묘에게로 시선을 돌렸기에 조소는 자신이 손 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깨어난 소묘를 본 페스가 눈동자를 반짝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묘─언─ 니─이── !"
"으켁!"

축 늘어진 천양을 내버려두고 자제를 모르는 페스의 순진한 매달리기 공세가 시작되자, 소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 산소가아~"
"언니, 언니! 소묘언니!"

애처로운 구원의 시선을 보내는 소묘를 무시하고, 시간을 확인한 조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가방의 손잡이를 당겼다. 천양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도 고생이구나. 이 아침에 일찍 준비하고."
"뭐, 어짤 수 없죠. 주말도 끝났고, 오늘은 월요일."

조소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학교에 가는 건 학생의 본분. 아닌가요?"

조소는 이미 교복을 차려입은 상태였고, 와이셔츠 상의에 달린 붉은색 명찰에는 '예상여자고등학교霓裳女子高等學校 한조소' 라는 글자가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천양은 그것을 보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아, 그래. 종종 까먹긴 하지만 너희는 아직 여고생이었지."
"……뭐라고 하셨죠?"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자, 기차도 금방 들어올것 같으니 얼른 움직이자!"

황급히 대합실 문을 열며 나서는 천양의 모습을 보고, 조소는 누구에게도 눈치채지 못하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한번 짓고 여행가방을 끌기 시작했다.

"어, 아빠, 어디가? 페스도 같이 가! 언니도 따라가자!"
"으, 으으, 졸려~ 날 쉬게 해줘어어~"

페스의 무지막지한 힘에 끌려오는 소묘 역시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월요일.
소묘와 조소가 학교에 등교해야 하는 날이었다.

"흐엥~ 주말에 일 후다닥 끝내놓고 강에서 실컷 논 뒤에, 밤새 숙제를 한다는 나의 완벽한 계획이 물거품이 되다니~ 이건 꿈이야~"
"──행 열차가 곧 출발할 출발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이윽고, 소묘의 눈물섞인 목소리는 시끄러운 역내 안내방송에 묻혀버린다.



"그 순간을 최대한 즐겨둬라. 나의 사랑스럽고 건방진 제물."



덜컹거리는 기차 안, 소묘는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해 부스스 눈을 떴지만, 옆자리에는 뚱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조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에 다시 잠을 청했다.

'으, 요즘 너무 고생했나. 환청이 자꾸 들리는 것 같아.'

그런 소묘의 모습을, 무지의 악마는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에, 소묘? 걔 귀엽지 않아?"
"응. 맞아맞아. 같은 여자애가 보기에도 귀엽지! 작은 동물같은 느낌이고."
"아, 하지만 걔랑 수업때 같은 조 되는건 사양할래. 애가 성실하긴 한데, 너무 덜렁대서 결과물이 언제나 엉망진창인지라……."
"우와, 지선이 얼굴 어두워졌어. 그러고보니 저번 음악수업때……."
"……떠올리게 하지 마. 십년치 비웃음을 한꺼번에 산 기분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성격은 좋은데다가, 보고 있으면 귀여우니까 그걸로 됐어."
"되긴 뭐가 돼? 그런 엉망진창인 실수가 고의가 아니라는 점이 더 열받아! 으으…… 괜히 화를 내봤자 나만 나쁜년이 되는 기분이잖아?"
"지선이 너 나쁜년 맞는데?"
"뭐라고오오?"

삐걱삐걱 움직이는 책걸상과, 깔깔거리는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
예상여자고등학교 2학년 1반의 쉬는시간 풍경은 언제나처럼 친숙하고 유쾌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도저히 동참할 수 없는 우울한 소녀가 한명 있었으니──

"저기, 본인 앞에서 떠들지 말아줄래……나 안그래도 힘들어으흐윽."

다름아닌 시끄러운 화제의 당사자, 백소묘였다.

소묘가 우울한 표정으로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주변의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옆구리나 등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소묘는 처음엔 꿋꿋하게 참고 견뎌냈지만, 이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으와후학!' 하고 웃음섞인 괴상한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뭐야, 소묘. 오늘은 왜 저기압이야? 주말에 분명히 기차타고 강에 놀러간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소묘는 자신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선을 향해 볼을 부풀렸다.

"우우. 내려가느라 너무 피곤해서 놀러가지도 못하고 그냥 잠들었단말야. 일어나보니까 벌써 서울오는 첫차 시간이었고……첫차타고 학교까지 지각 안하려고 달려오느라 힘들기만 했어."
"……엥? 진짜?"
"……응."

지선은 소묘의 대답에 입을 쩍 벌렸지만, 소묘가 한쪽 눈으로 슬쩍 윙크하자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어~ 소묘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내가 꼭 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얘는 내버려두면 지구멸망 직전까지 멍때리고 있을 애라고."
"그치그치."

지선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자, 소묘는 더이상의 항변을 포기한 표정으로 책상에 널브러졌다.

"그래~ 난 원래 그런 애니까 제발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날 그냥 내버려둬 줬으면 좋겠어."

마침 소묘의 넉아웃을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종소리에, 소녀들은 각자의 자리로 부리나케 흩어졌다.

"어, 종쳤다."
"자리 돌아가자! 다음 시간 국어야. 그 노총각 히스테리."
"비켜!"
"야 내 책상 뛰어넘지 마!"

소묘의 책상 주변에 모여있던 아이들의 요란한 해산에 소묘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책상에 볼을 부볐다.

"살았다아~ 책상에 얼굴을 대고 있으면 시원해~"

해맑은 미소로 책상과 열렬한 포옹을 나누고 있는 소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선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옆자리에 앉아 책상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바보짓 하고 있다가 국어한테 한소리 들어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로 피곤한걸~"

지선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투정하는 소묘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서, 보수는 많이 받았어? 이번 일."
"글쎄. 나도 모르지 뭐. 어차피 쌤 주머니로 들어가 버리니까."
"흐응. 그래도 얼마든 받았을 거 아냐."
"……지선아? 눈빛이 무서워."

지선은 능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소묘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국어시간 내내 푹 자고 싶지 않아? 원래 삼천원이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천원으로 깎아줄게!"
"으윽."

피곤에 찌든 소묘로서는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손익계산에 약한 그녀도 지선의 날강도 같은 수법에 하루이틀 당해온 처지가 아닌지라 일단 확인을 했다.

"그거, 국어시간만이지?"
"물론."

뭘 당연한걸 묻느냐는 듯한 지선의 표정에 소묘는 혀를 찼다. 그러나 교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묘는 주머니에서 천원짜리를 꺼내 지선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부탁해."
"맡겨둬!"

지선은 천원짜리를 챙기며 품속에서 분필을 꺼내들었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교탁으로 뚜벅뚜벅 향하는 교사의 주목을 받지 않게 주의하며, 지선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정지선停止線이 정명으로 명한다. 이 선 너머로 그 누구의 시선도 넘어올 수 없다."

말하는 것과 동시에 지선은 분필로 소묘의 책상 앞쪽에 선을 천천히 그었고, 선이 다 그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소묘는 그대로 책상에 쓰러지듯 무너졌다.

"으햐~ 땡큐. 그럼 난 한숨 푹 잘게~ 쉬는시간에 깨워줘어……쿠울."

소묘는 책상에 엎드리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쉬는시간에 깨우는 건 별도의 요금을 청구……할 예정이었는데 별 수 없네. 알아서 일어날거라 믿어."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해결해 주는 것으로 유명한 주술사, 금전金錢거사의 유일한 제자이자 학교에서 몇 안되는 소묘의 이해자인 지선은 피식 웃으며 소묘의 태평스러운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후,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이 한달이 지났다.
거짓말같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흘러갔다.
평소에도 퇴마 의뢰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지만, 장난전화 한통 없을 정도로 조용한 한달이었다.

그 사이 페스는 주로 조소에 의해 빠르게 이 세상의 상식들을 익혀갔다. 그 속도는 범상치 않아서, 한달 후쯤에는 어느새 대부분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아빠~!"
"물론, 지식과 감성은 별개의 문제지."

한가한 주말, 소묘와 함께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사무실에서 지출만 가득한 회계장부와 씨름하고 있던 조소는 천양에게 달라붙는 페스를 보고 투덜거렸다. 천양은 페스를 진정시킨 뒤 책상 너머의 조소에게 시선을 향했다.

"소묘는 왜 같이 안 왔지?"
"그 바보녀석, 쉬는시간에 잠만 내리 자고 평소에는 뒹굴거리며 놀다가 숙제가 한가득 밀려버렸거든요. 지금 산더미같은 그거 다 처리하느라 휴대폰도 꺼두고 있어요.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오늘은 나오지 않을거래나 뭐래나."
"너무 소묘다워 할 말이 없군."

천양은 조소의 비아냥거림 섞인 대답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헤에. 소묘 언니 이번에도 숙제 밀렸구나. 저번주에는 하루면 충분하지! 라고 당당하게 얘기했는데."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스가 눈을 크게 뜨며 말하자, 조소는 회계장부의 대충 휘갈겨진 숫자들을 보며 컴퓨터에 빠르게 입력하는 와중에서도 페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언니 보고 닮으면 안된다. 알았지?"
"응! 조소 언니!"
"기왕이면 거기 그 아빠도 닮지 말고."
"으응!"
"……어이."

하지만 페스는 천양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날리며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세상 그 누구보다 아빠가 제일 좋아!"
"……결국, 닮고 싶지는 않다는 거냐."

묘하게 얼굴에 그늘이 진 천양은 회전의자에 몸을 파묻었고, 페스는 가라앉은 공기에 애써 방글방글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손바닥을 쳤다.

"아, 맞아! 어제 아빠한테 받은 용돈, 아직 안 썼어! 소묘 언니랑 아빠, 목 마르지 않아? 내가 공원 앞 슈퍼에 가서 마실거 사올게!"
"어. 좋아. 나는 다이어트 콜라로."

조소는 고개도 들지 않고 페스의 말에 대꾸했다. 천양은 페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페스, 혼자 다녀올 수 있겠니?"
"응! 괜찮아! 아빠. 지금까지 잘 다녀왔잖아?"

천양은 페스의 천진난만한 미소에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로,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아이다. 저 아이의 맹목적인 신뢰 덕택에, 최근 천양은 최고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렴."
"응! 내것도 사올거야!"

서랍에서 지갑을 챙기고 계단으로 종종걸음으로 내려가는 페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소의 날카로운 비난이 천양의 귀에 꽂혔다.

"페도필리아 신령님. 얼굴이 아주 퍼지셨군요."
"누, 누가!"
"할일 없으시면 정리 끝난 장부나 제자리에 돌려 놓아주시죠. 어린 딸 뒷모습 침흘리며 바라보는 꼴을 구경하자니 뱃속이 뒤틀릴 지경이네요."

천양은 조소의 독설에 꿍얼대면서도 서류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익숙해진 사무실 새 식구와의 주말 오후는,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리라 누구나 믿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모두가 방심하게 될 그 짧은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냥개가, 한껏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못 해먹을 짓이군요."

여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회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던 중년남자가, 공원 벤치에 앉아 중얼거렸다. 그는 옷 색깔과 같은 회색의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며,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말을 이어갔다.

"사냥감도 취향에 안 맞고 말이죠. 애초에 뭔가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의욕없어 보이는 말투와는 달리, 그는 묵직한 몸을 벤치에서 일으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래도 말이죠."

어느새, 공원 주변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음산할 정도의 공허함만이, 텅 빈 공원을 감싸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걸이가 빨라짐과 동시에, 입가가 찢어지며 귀에 걸렸고, 날카로운 이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 자체는 아주 좋아한답니다."

남자는 뒤이어 손을 땅에 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손이 아니었다. 강인한 앞발이었다. 회색의 털을 가진 부정형의 짐승이 된 남자는, 이 공원에서 움직이는 단 한명의 존재, 금발의 어린 소녀, 페스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 달려나갔다.

"꺄앗?"

페스는 뭐가 일어났는지 알 수도 없는 사이, 눈 앞에 회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거구의 중년 사내가 보이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소녀의 입 위에 가져다 대고 막아 소리를 못 지르게 했다. 페스는 너무나도 당황해서 눈물만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남자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소개 정도는 해 두기로 합시다. 그런다고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이 끝나자, 그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들고 일어나서 그의 중절모를 약간 들어올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페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형태로 만나뵙게 되어 정말 죄송하군요."
"우, 우읍!"

남자의 중절모 아래에서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야수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페스는 그 눈동자를 보고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그녀는 지금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 형용할 수 없이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페스는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이 미천한 짐승의 이름은, '마르베스'라고 합니다. 잠시 실례하지요."

수왕獸王의 별명을 가진 악마는 그렇게 공손한 목소리를 날린 뒤, 별안간 소녀의 입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야수의 눈동자에 속박되어 떨고 있던 페스는 무력하게 마르베스의 손길에 맡겨질 수 밖에 없었다.

"으으웁!"

악마의 입이 소녀의 입술을 잔인하게 덮쳤고, 앙다문 이빨 사이로 끈적한 액체를 흘려넣었다.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페스는 발버둥쳤지만, 마르베스의 힘은 엄청나게 조여왔고 액체는 인간을 홀리는 달콤한 향기를 풍겨왔기에 결과적으로는 그 액체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으켁, 커헉!"

목적을 달성한 악마는 페스가 기침을 하며 콜록거리자, 그녀에게서 입을 떼고 품에 안은 채 잠시 내버려두었다. 마르베스는 정말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으, 으흑, 으흐윽. 이게, 뭐, 콜록, 케헥."

마르베스는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페스를 바라보았지만, 페스는 온 몸에 뜨거운 기운이 급작스럽게 치밀어 올라 괴로워했다.

"아아. 그건 잠시뿐이에요. 금방 괜찮아질겁니다."
"하아. 하아. 하아."

페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마르베스는 페스를 가만히 공원의 바닥에 내려놓았고, 정신적인 압박이 덜해지자 페스는 열과 고통이 거짓말처럼 가시는 것을 느꼈다.

"……어……라. 기분이 이상……해. 눈 앞이……."
"어때요. 눈 앞이 밝아지고 기분이 상쾌하죠? 인간이라면 평생 가도 먹어볼 수 없는 신들의 음료입니다. 영력을 강제로 개화시키고, 인간과 신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멋진 음료입니다. 당신이 사들고 온 그 탄산음료를과는 비교도 안되는 훌륭한 맛이죠."
"음료……수."

페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공원에 왜 나왔는지 깨닫고, 품에 꼭 안고 있던 음료수 봉지를 바라보았다. 페스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려내렸다.

"아빠……언니……."
"아무리 불러도 그들은 여기 올 수 없습니다. 이미 당신과 제가 있는 곳은 인간과 신의 영역 사이에 걸쳐있는 경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출입이 불가능하죠. 언제나 경계를 걷는 짐승들 외에는."

마르베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코를 자극하는 시큼한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낮게 크르릉 거리는 소리가 공원 전체에 깔리기 시작했다. 마르베스는 그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냄새를 맡은 모양이군요. '경계의 사냥개들'. 사실 개라고 하기엔 모습이 좀 볼품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평소에는 얌전한 친구들입니다."
"아, 아아아……."
"당신처럼, 겁없이 경계에 들어서는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여기저기,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사냥개들'. 그것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악어의 피부에 뱀의 혓바닥을 가지고 있었고, 개와의 공통점이라고는 다리가 넷 달린 짐승이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마르베스는 그들을 마치 강아지 무리라도 되는 양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페스는 온몸을 덜덜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저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더할나위 없이 명백해 보였기에.

"아, 이건 여담입니다만, 저친구들은 앞을 보지 못해요. 대신 코가 아주 좋답니다. 그러니까."

마르베스는 페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소리를 꽉 눌러 참고 있어도, 소용 없어요?"

어느새 공원 안을 가득 메운 사냥개들이, 어슬렁어슬렁 하나둘씩 페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페스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명으로 폭발시켰다.

"오, 오지마아아아아아아앗!"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사방의 사냥개들은 소녀를 향해 긴 혀를 널름거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바야흐로, 오랜 시간을 고대하던 그들의 거침없는 사냥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8화 : 초조初潮
"……우와……변태가 또 늘어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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