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소설 // 그림 // 링크 // 방명록


천양지차! 제6화

10/09/09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천양지차!

제6화 : 조소彫笑



"……의 진실이니라!"

소녀는 그 목소리를 더 이상 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헤드셋을 귀에서 떼어 목으로 미끄러트렸다. 시간은 거의 12시에 가까워지는 한밤중. 마지막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해 시끄러운 가스배출음을 내며 문이 열리자, 소녀는 안경을 밀어올리며 기사에게 슬쩍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람 좋은 인상의 버스기사는 그 가벼운 인사에 씨익 웃으며 노트북을 챙겨 맨 마지막으로 내리는 소녀의 뒤에 한마디를 날렸다.

"허허. 그래. 아직 학생 같은데,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내려온거지?"

소녀는 꽤 묵직해 보이는 여행용 가방를 차에서 끌어내린 뒤, 웃음기 전혀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능력은 없는 주제에 오지랖만 더럽게 넓은 어른과 평생가도 철이 들지 않을 것 같은 꼬맹이 둘이서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러 왔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아……아니."

버스기사는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살기를 느끼고, 소녀의 시선을 피했다. 가슴을 강조하는 탱크탑 셔츠를 입고, 짧은 청바지라는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검은 뿔테안경 너머로 비치는 차가운 눈동자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는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끌며 택시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디로 가시나요?"
"기차역으로.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네이. 알겠습니다. 손님."

소녀는 앞좌석에 앉고 나서, 안경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밀어올렸다.
택시 뒷자석에 던져진 여행가방의 이름표 란에 쓰여있는 글자는, 한조소韓彫笑.
조소가 탄 택시가 한적한 야경 속으로 녹아든다.
퇴마사무소 천양의 냉철한 만능비서이자 선택을 만든 무구장巫具匠인 소녀가, 악마와 함께 춤추는 무대에 새롭게 오르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같은 도시의 기차역에서 정신을 잃고 늘어진 소녀를 끌어안은 천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라? 멀쩡하잖아?"

자칫하면 소멸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펼친 정명술이었다. 하지만 천양은 소멸하기는 커녕, 온몸에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지……?"
"……쌤? 쌤 맞아요?"

아직까지도 불쌍하게 걸레 빤 물에 묶여있던 소묘가 자신의 처지도 잊은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부터 생각하는게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 성격의 소묘였지만, 그 표정에 담긴 놀라움은 이제까지 천양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니, 내가 뭐 어쨌다고 그러는 것이냐……아? 큼, 크흠!"

천양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이의 것이 아니라 청년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천양은 그제서야 자신의 몸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엣? 이게 무슨……."

천양의 몸은 지금까지처럼 소년이 아니라,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천양은 자신의 현계하고 있는 몸을 영력에 맞추어 체격과 나이를 조절하도록 해 두고 있었는데, 급작스럽게 힘이 폭발적으로 불어나자 몸도 대책없이 나이를 먹어버린 모양이었다. 천양은 이제껏 어린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밖에 변하지 않았기에, 건장한 청년의 육체는 거북하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듬직한 몸이라 천양은 헐렁한 도포를 입고 있기를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낮에 입었던 옷을 계속 입고 있었다면, 천양은 신령의 격에 걸맞지 않는 누드쇼를 펼쳤을 것이다.

"쌤 맞군요? 그 모습은 대체……으앗!"

천양이 가볍게 눈길을 보내자 소묘를 묶고 있던 물의 밧줄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소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주술이 풀리자 균형을 잃고 넘어져 하마타면 기차 지붕과 정면으로 키스를 할 뻔 했다.

"쌔앰! 너무해요!"
"아, 으응. 미안하다."

사실은 천양으로서도 오랜만에 흘러넘치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기에, 설마 아무런 행동이나 말도 필요로 하지 않고 의지만으로 주술이 한번에 풀려버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이질적인 천양의 모습에, 소묘는 아직도 미심쩍은지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보디빌더 뺨치는 근육질 몸매는 둘째치고……쌤, 그 여자애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에요?"
"……끄응."

천양은 소묘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흘렸다. 곤란한 솔직히 말해, 천양은 당장 악마의 현계를 막고 소녀를 도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려 그대로 실행했을 뿐, 그 다음의 일은 그리 깊게 생각해놓지 않았다. 천양의 생각으로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소멸하거나, 설사 소멸하지 않더라도 신의 자격을 잃고 영력이 회복될때까지 깨어나지 않는 오랜 잠을 잘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사라진다 해도 악마의 그릇이라는 굴레를 벗겨내기 위해 천지를 걸고 자신이 딸이라고 선언한 소녀는 자신이 없더라도 평범한 인간으로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자기 앞가림 하는 것만으로 벅찰 소묘야 무리라고 해도, 은원으로 묶여 퇴마사무소를 책임지고 있는 조소가 어떻게든 해주리라고 믿었다.

"……조소?"

천양은 조소의 얼굴을 떠올리고,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소묘도 천양의 중얼거림에 그재서야 생각이 미쳤는지 품 속의 휴대전화를 꺼내어 들여다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부재중 전화가 세통이에요오……."
"……젠장."

소묘의 울먹거림 섞인 늘어지는 목소리에 천양은 혀를 찼다.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아마 자신의 휴대폰에도 같은 부재중 전화 세통이 걸려있을 터였다. 조소는 전화를 걸었을 때 받지 않으면, 일정 간격을 두고 정확히 두번만 더 건다. 그것은 조소가 보내는 일종의 경고메세지로서, 그 두번의 전화에도 모두 응답이 없을 경우 조소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연락을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이 어디 있든 직접 찾아간다는 의미. 조소의 독기서린 잔소리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령인 천양조차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였다.

"큰일이군.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안심했는데……어떻게 화가 풀릴때까지, 하루만이라도 따돌릴 수 없을까?"

소묘는 천양의 낭패어린 말에 주저앉으며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무리! 무리에요! 조소라면 분명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도청기, 발신기, 도촬 카메라를 잔뜩 붙여뒀을 거라구요! 지금까지 쌤도 조소에게서 도망치는거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잖아요?"
"그렇긴하다만……."

차라리 주술적인 감시가 붙어있는거라면 천양은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을터였지만, 조소의 감시와 추적은 그 헛점을 노려 철저하게 기계와 과학기술 위주로 이루어졌기에 천양은 도저히 대처할 방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드르르르륵, 하는 여행용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텅 빈 역사안에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천양과 소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조소 전용의 등장 배경음이었다.



한편, 까마득한 사상의 건너편에서 소녀 쪽의 '문'을 바라보고 있던 악마 이페스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뭐야, 이 말도 안되는 전개는?"

사실 자신의 힘이 담긴 망각진을 두개나 흡수한 소묘의 마음을 움직여 천양의 정명술 도중 '이페스'란 이름을 무의식중에 내뱉게 만든 건 그녀였지만, 그 장난스러운 행위가 터무니 없는 결과를 낳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대체 뭐냐고, 이건!"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낡은 나무빗장만이 위태롭게 걸려있던 소녀의 '문'은 수많은 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쇠사슬. 얼핏 가늘어 보이면서도 굉장히 끊기 힘든 사슬로 동여매여진 소녀의 문은 쉽사리 열릴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약이 오른 이페스는 왼쪽 눈을 감으며 손을 펼쳤다.

"브로켈! 물어뜯어!"

허공의 마법진에서 거대한 해룡의 머리가 나타나 그 거구에 비하면 비하면 작디작은 철문을 씹어 삼키려는 듯 광폭한 기세로 물어뜯었지만, 문은 격렬하게 흔들릴 뿐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이페스는 왼쪽 눈을 다시 뜨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해룡의 머리는 구슬픈 울음을 길게 울리고 사라졌다.

"역시 이렇게 되면 힘으로는 무리로군. 녀석들과 쌓일 정으로 인한 사슬이야 충분히 끊어내고 현계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는데……이런 골치아픈 짓을 해버리다니. 이래서야 마르베스놈에게 부탁한 일도 쓸모없게 되었잖아?"

이페스는 화를 내며 괜시리 소녀의 문 옆에 있던 소묘의 붉은 '문'을 세차게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이페스의 머리 위로 뭔가 붉은 가루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응?"

이페스가 그것을 확인해보니, 그것은 금속의 녹으로 인해 떨어진 가루였다. 이페스는 고개를 들었고, 한줄뿐이긴 하지만 붉은 문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의 고리 하나가 끊어지기 쉽게 녹슬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가 찢어지며 미소가 걸렸다.

"오호라."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로 보기 위해 문과 사슬의 형태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소묘의 마음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형상이었다. 마음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보관하고 있는 '문'은 주변의 인연과 본인의 의지로 만들어진 '사슬'이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녹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더 재미있게 되었네. 애초부터 이 녀석의 마음을 엉망친창으로 만들어 지옥에 떨구는게 목적이었으니까 말이지. 마르베스도 조금 더 힘내줘야겠어."

이페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푹신한 붉은 색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자신의 뿔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매만졌다.

"새로 등장한 녀석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변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 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절망에 물들 그때까지, 내가 만든 인형으로 소꿉놀이나 재미있게 하고 있으라지!"

악마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응? 지금 누군가 웃은것 같은데……."

조소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기차 위에서 사다리를 통해 내려오던 소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손등의 망각진이 빛을 한번 발하자 이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천양은 소묘가 다 내려선 것을 확인하자 소녀를 한 팔로 끌어안고 기차 위에서 한달음에 뛰어내렸다. 착지는 맨발로 가볍게 이루어졌기에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천양은 소묘를 재촉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자, 가자! 지금이라면 아직……."
"도망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군요."

조소의 냉랭한 목소리가 텅 빈 역사의 터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천양과 소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만을 돌렸다.

"조, 조소……? 아직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어떻게……."

실제로 여행가방을 끌고 오는 드르륵 소리가 아직까지 역사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집중해서 듣자, 이내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는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도 않은 채 똑같은 위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둘은 얼굴을 마주보고 얼빠진 신음소리를 흘렸다.

"서, 설마……."
"정말이지, 발전이 없군요. 둘 다. 이런 단순한 트릭에 걸려드는 걸 보면."

조소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주머니에서 작은 컨트롤러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소리는 완전히 사라져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소는 컨트롤러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등 뒤의 여행용 가방을 걷어찼다. 여행용 가방은 옆으로 쓰러졌고, 천양과 소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찔거렸다.

"소리를 녹음해둔 MP3에 스피커를 달아 틀어놨을 뿐입니다."

조소는 어조의 변화 없이 평이하게 말한 뒤, 여행가방 옆의 슬라이드 손잡이를 당겼다. 그 안에는 세개로 분리된 분리된 시커먼 쇠막대가 들어있었고, 조소는 잠깐 사이 손을 슥슥 놀려 그것을 조립했다. 그 길이는 조소의 키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길쭉했고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지만 조소는 무척이나 가볍게 그것을 다루었다. 조소는 완성된 막대기를 가방 안으로 찔러넣었고, 철컥 하고 뭔가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소가 다시 쇠막대를 들어올렸을 때는, 쇠막대 끝에 제법 굵직한 쇠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이제, 누가 봐도 명백히 시커멓고 흉악한 크기의 쇠망치가 되어 있었다.
조소가 그 망치를 왼손으로만 가볍게 들어올려 뭉치 위쪽 부분으로 바닥에 내려찍자, 쿵 하고 가슴을 서늘하게 올리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조소는 망치를 쥐지 않은 오른쪽 손으로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그럼, 어째서 이런 바보 짓거리를 벌였는지 자초지종을 한번 들어보기로 할까요. 일단 소묘부터."

낮에도 전화통화중 몇번이나 울음을 터뜨릴 뻔 했던 소묘는 조소의 시선이 직접 꽂히자 마치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다못한 천양이 끼어들었다.

"조, 조소야. 여기는 사정이……."

조소의 안경 너머에서 차가운 안광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조소는 참혹한 독설을 쏟아냈다.

"전 소묘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장님에게 안 물어봤어요. 오지랖 더럽게 넓다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대체 그 웃기지도 않는 꼬락서니는 뭡니까? 드디어 산신령을 포기하고 다른 신령으로 전신傳神하기로 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기껏 전신한다는게 마초의 신령이라니. 그 흉한 꼴을 본 제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봐줄수가 없습니다. 땀냄새 나니 입 열지 말아주세요. 절 바라보지도 마세요. 시야에 들어오는것 조차 끔찍합니다. 이후로 다시 한번 허락없이 끼어들면 그때는 정말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천양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사정없는 인신공격과 매도에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가 되어 입을 다물었고, 조소는 다시 소묘를 바라보았다.

"히끅!"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육하원칙에 따라 차근차근 밟아줄 테니까. 낮에 너무 가볍게 넘어간 모양이지? 괜찮아. 이제는 그렇게 대충 넘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너의 둔감함에 대한 경각심이란 녀석을, 뼛속 깊이 새겨서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줄테니까. 알았지?"
"히이이이이익!"

조소는 소묘의 과민반응에 희미한 비웃음을 입에 걸쳤고, 그 미소를 본 소묘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약 30분간, 하지만 소묘에게 있어서는 영원과도 같은 지옥의 시간이 펼쳐졌다.

"으, 흑, 으흐윽, 흐흑. 나 같은건, 나 같은건."

소묘는 마치 세상을 다 산 듯한 허탈한 표정이 되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천양은 옆에서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영혼의 깊숙한 곳까지 오금이 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소묘를 향한 비난이 끝난 순간, 천양은 안도감보다 공포심이 밀려오는 것에 경악했다.

"으윽."
"자아. 이제 소장님 차례군요."

묘하게 상쾌해진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조소를 보고, 어쩌면 조소는 단순히 자신들을 괴롭히는걸 즐기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조소의 안경 너머에서 빛나는 눈동자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조소가 꺼낸 말은 의외로 폭언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소장님이 성을 주고 딸로 삼은 아이, '페스'인가요?"
"아아. 그래."

조소의 눈동자는 드물게 흥미로 번뜩이고 있었기에, 천양은 당혹스러웠다. 조소는 천양에게 가까이 다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훑기 시작했다.

"금발……새하얀 피부. 이쪽의 아이가 아니군요."
"먼 나라의 아이다."
"이…페스. 용케도 이름을 덮어씌울 수 있었네요."
"그땐 그 방법밖에 없었어. 우연히도 이름을 덧씌울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우연?"

조소는 천양의 말에 코웃음치며 반문했다.

"소장님같은 운명에 묶여있는 존재인 신령이 우연을 말하다니 웃기네요. 이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어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을 따름이지."
"……뭐?"
"아마도 거꾸로일 거에요. 이 아이와 계약한 악마가 이페스였기에 운 좋게 소장님이 이름을 주고 딸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 아이는 소장님에게 이름을 받고 딸이 될 운명이었기에 이페스란 이름을 가진 악마랑 계약했던 거죠."
"그게 무슨……."
"소장님 자신은 모르시겠지만, 소장님의 첫째 정명인 천양天壤은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어요. 다만 그건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 힘이라, 소장님은 그 이름을 알고는 있지만 그 힘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결코 인식하지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해요. 오직 그 정명을 운명이 허락하는 순간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거죠. 그건 신령으로서 존재하는 소장님의 한계에요. 소장님이 자신의 의지로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은 천양泉壤까지에요. 때문에, 이런 제 이야기도 결코 기억에 담아둘 수 없습니다. 아쉽네요. 그 힘은 소장님에게 정말 유용한데."

천양은 벙찐 표정으로 조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조소의 이야기는 반 이상이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고 대부분의 주어와 목적어가 생략된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짐작한 조소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고쳐썼다.

"미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본래 믿음이 부족해서 약해진 소장님의 힘은, 만약 첫째 정명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죠. 소중한 사람을 되살리는 것은 물론, 지금처럼 관계없는 사람을 가족이라는 유대로 묶어 전폭적인 신뢰를 얻으면 되니까요. 뭐 악마도 아니니까 설마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오지랖 넓은만큼 걱정도 많은 소장님이 그런 식으로 사용하리라 상상하긴 힘들지만."
"……네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됐어요. 여기까지만 하죠. 어차피 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제 이야기는 전부 잊어주세요. 그냥 방관자의 푸념이라고 해 두죠."

조소는 말을 딱 자른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띄웠다.

"아아, 정말 보기 좋네요? 그렇게 어린 애를 딸로 삼아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신뢰를 얻어 힘이 펄펄 나나보죠? 이 페도필리아 마초 신령이! 앞으로도 그런 어미없는 씨를 계속 뿌리고 다니실 생각이라면, 다음 해 동아시아 신령회의때 소문을 거하게 내드리죠."
"그, 그것만은 제발 참아줘! 그랬다간 헛소문이라 해도 백년은 넘게 떠들어 댈거라고 그 꼰대들은!"

천양은 온 몸으로 격렬하게 부정의 제스처를 취하며 조소에게 사정했다. 하지만 조소는 매정하게 뒤돌아서며 검은 쇠망치를 어깨에 걸쳤다.

"글쎄요? 그건 앞으로 소장님 태도에 따라 달렸죠."
"크윽……."

그렇지 않아도 조소에게 잡힌 약점과 추문이 한두개가 아니었는데, 더 큰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된 천양은 절망했다. 조소는 여행가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옆의 슬라이드 손잡이를 당겨 구멍을 닫았다. 조소는 왼손에 쇠망치를 비스듬히 걸치고, 오른손으로 여행가방을 끌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내일을 위해 잠은 자둬야 하니 근처의 모텔 하나를 예약해 뒀으니 따라 오시죠. 올 때 소묘도 주워오시고."
"그, 그래."

구석에서 플라스틱 케이스를 끌어안고 선택과 대화를 나누는 자폐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소묘를 어깨에 들쳐업고, 천양은 황급히 조소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소의 걸음이 딱 멈추자, 천양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왜, 왜?"
"아. 중요한 것을 깜박했네요."

조소는 그 어느때보다 눈에서 강렬한 시선을 뿜어내며 말했다.

"당장 원래대로 돌아오세요."
"어? 응? 왜? 이게 더 힘쓰기도 편한데."
"설마 여자애 둘을 양쪽에 꿰찬 채, 그 우락부락한 꼬락서니를 하고 모텔에 들어가면 어떤 사단이 날 지 몰라서 하시는 말은 아니시겠죠?"
"적당히 주술로 눈속임을 하면……"

처음 해본 청년 모습이 나름 마음에 들기 시작했던 천양은 반문했지만, 조소의 차가운 눈초리 앞에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외형 문제에 있어서, 조소의 입장은 더할나위 없이 확고했다.

"안됩니다. 제가 꼴 보기 싫거든요."

그렇게 할말만 남긴 조소는 상쾌한 동작으로 뒤돌았고,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태도에는 지금 모습 그대로 따라온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기에, 천양은 한숨을 내쉬고 평소 자신이 하고 있던 소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어차피 신통력을 이용해 무게를 줄이고 있었기에, 소녀 둘이 더 무겁게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꼴이 조금 우스워졌을 뿐이지.

"뭐어…이 편이 영력도 절약되니 좋긴 하지만……."

인간 소녀에게 휘둘리는 신령의 입장에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끼면서 천양은 조소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기에 천양은 조소가 지금 엄청나게 헤벌쭉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마 조소 자신 외엔, 앞으로도 영원히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차가운 독설가 소녀인 한조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어린 남자아이 애호가란 사실을.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6화 : 엽견獵犬
"……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내 주변에는 이상성욕자들밖에 없는 것 같……으아이얏! 양쪽에서 잡아당기지 마요! 다시는 말 안꺼낼게요! 누구한테도 말 안할게요! 히이잉~"

목록으로 돌아간다

방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