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지차!
제5화 : 천양穿楊
자신을 자신이라고 처음 인식하게 된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인간에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신령인 천양도 그 정확한 시점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처음엔 그저 흐릿한 안개 속과 같은 기억 뿐.
시간의 흐름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거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하는 삶.
아니,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애초에 생물조차 아니었으니까.
녹음이 우거진 산의 맨 꼭대기,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자그마한 옹달샘.
산을 흘러 내려가 강으로 합류하는 개울물의 수원水原인 그 샘이, 바로 천양泉壤이었다.
본래 무기물에 불과한 샘에 의지도, 생각도 태어날 리 없다.
하지만 천양은 수년, 수십년, 심지어 수백년동안 산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나무들에게 자신을 제공해왔고, 그러한 세월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천양은 늙은 나무들의 삶과 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천양은 어느새 무기물의 경지를 벗어나, 생물로서의 의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나무들로부터 배운 것을 실천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하며, 그 어디로든 스며드는 물.
천양은 땅 속을 통해 그 어떤 오래된 나무보다 깊게, 그리고 널리 자신을 뻗어나갔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산 전체로 뻗어나가 있었다.
그때부터 천양은 단순히 식물들에게 자신을 제공하지 않았다. 음지에 들고 바위에 막혀 시들시들 죽어가는 꽃과 나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때마다 천양의 의식은 좀 더 뚜렷한 의지로 앞서나간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천양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약자에게 공양하는 행위를 반복함으로 인해 선도仙道의 수련을 했던 것이었다. 그 행위는 선한 업業으로 쌓여 천양의 영격을 높여나갔고, 천양의 베품은 이제 단순하게 숲의 식물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산에 사는 모든 생물에게 속속들이 다다랐다.
천양의 정신은 자유로웠고 사고의 폭은 무한해져서, 그는 결국 산 전체를 아울러 모든 것들을 보살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던 것일까, 천양이 머무르고 있는 샘은 보통의 산짐승들에게 있어서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신비한 샘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천적을 만나도 천양의 샘에서만큼은 목을 축여 자신의 고통이나 상처를 치료할 뿐, 잡아먹거나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동물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천양의 의지였다. 어느새 천양은 동물들의 마음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하는 일마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양은 아직까지 자신에게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정확히 어떤 것이 부족한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산의 생물들에게 베푸는 것만으로는 천양의 영혼은 더 이상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천양은 의외의 손님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물론 천양도 오랜 세월을 보내온 만큼, 사람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천양이 돌보는 나무를 베어다 불에 태우고, 짐승들을 잔뜩 잡아가곤 했기에 천양은 그들의 시야를 돌려 자신의 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양이 있는 샘까지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초로의 남성이었다. 머리칼은 새하얗게 새어 있었고,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냘프게 이어졌다. 천양은 그 인간이 산에서 길을 잃고 어쩌다 보니 자신의 앞까지 온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천양이 산 전체에 쳐 놓은 시야를 돌리는 결계는 어디까지나 살기를 가진 이들에게만 반응하는 것이었기에,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거나 살기를 바라는 존재는 그 어떤 생물이든 천양의 앞까지 길이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천양은 그런 사람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한 눈길로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굳이 산에서 조난당하지 않았더라도 살날이 많지 않아 보였지만, 천양은 자신이 이제껏 해오던대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다른 동물을 도와줄 때처럼 으레 해왔듯이,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천양의 영격은 이미 인간보다 한단계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리 어렵지 않게 모습을 꾸려 다가갈 수 있었다. 왜 길을 헤메던 자신이 산 꼭대기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샘 앞까지 와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노인은, 난데없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랐다.
천양은 노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기에,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노인은 나이가 들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흐릿하게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백발노인이 나타난 것으로만 알았다.
"다, 당신은 누구요?"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이리 오라는 듯한 손짓을 할 뿐이었다. 노인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힘겹게 늙은 몸을 이끌어 샘 앞에 섰다. 샘은 정말 작은 옹달샘이었지만, 퐁퐁 솟아오르는 샘물은 무지개빛으로 물들어 상서로운 기운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노인은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그 샘물을 한모금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아!"
노인은 무심코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샘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무기력했던 늙은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고 머릿속부터 발끝까지 시원한 느낌이 관통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상쾌함이었다. 마치 젊음을 다시 되찾은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기에, 노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천양을 응시했다.
천양은 노인이 기력을 되찾은 것을 확인하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나무들이 마치 비켜서듯 물러섰고, 산 아래로 향하는 지름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나!"
노인은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마을에 내려져오던 전설을 어렴풋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냈다.
'영산에는 영험한 신령님이 살고 계서서, 부정한 마음으로 간 사람에게는 절대로 길을 열어주지 않는단다. 그 어떤 뛰어난 사냥꾼도, 영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본 적이 없지.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면, 숲에서 빙빙 돌다가 평생 나올 수 없게 되니 너도 함부로 영산에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그 전설이 사실이었다니, 노인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천양이 열린 길로 내려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인이 산에 온 목적을 떠올렸을 때,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찼다.
천양은 노인이 알아서 잘 내려가리라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노인의 눈물 섞인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신령님!"
그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 아직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익히지 못한 천양이었지만, 그 말이 감사를 뜻하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감사의 말이 가진 울림이, 그 어떤 때보다 천양의 영혼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노인은 몇번이고 감사한 뒤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양은 그 어느때보다 만족했으면서도, 반면에 그 어느때보다 아쉬움을 느꼈기에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힘을 되찾아 흰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발걸음도 가볍게 산을 내려갔고, 그 모습은 천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천양은 평소처럼 일이 끝난 뒤 다시 샘으로 들어가는 것을 잊은 채, 흰색 도포를 걸친 백발 노인의 모습을 한 자신을 매우 만족스럽게 훑어보았다.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 인간의 말을 해 보았지만, 별 다른 반응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천양은 그저 순수하게 그 말이 가진 울림이 좋았기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뒤, 천양은 산에 둘러친 결계를 치워버렸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람에게 좀 더 감사의 말을 듣고 싶다.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주변의 마을에서는 이미 오를 수 없는 영산에 대한 전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에, 아무도 찾는 이는 없었다. 천양은 그런 연유를 모르고 무작정 기다릴 뿐이었다. 산을 다스리던 자신의 본분마저도 잊고 한없이 기다렸다. 몇년의 세월을 찰나에 가깝게 느꼈던 천양은, 한순간이 억겁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천양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무렵에, 드디어 사람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사람은 조그맣고 어린 아이였다.
산에는 그 아이를 집어삼킬 맹수도 잔뜩 살고 있었기에, 천양은 황급히 동물들과 식물들을 움직여 그 아이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 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 아이는 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걸친 소녀였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다가 샘을 발견한 소녀는, 생긋 웃으며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품 속에서 낑낑거리며 보자기를 꺼내어 들고, 샘 앞에 내려놓았다.
보자기를 펼치니, 거기에는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고기 몇 조각이 정성스럽게 종이에 싸여져 있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정말 있었네!"
소녀는 신기해하며 샘을 바라보더니, 뒤로 살짝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고 합장한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눈을 뜬 소녀는, 주변에 다 들리도록 입에 손을 올리고 크게 소리쳤다.
"신령님, 신령님! 들리시나요?"
천양이 잠시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잠시 숨을 고르고 소녀는 또다시 소리쳤다.
"며칠전에 여기 오셨던 할아버지 기억하세요? 그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에요!"
소녀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힘에 부쳣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소리치는 것을 멈추려고 하진 않았다.
"할아버지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녀의 있는 힘을 다한 감사의 외침은, 산에 길다란 메아리를 울리며 천양의 영혼을 또다시 뒤흔들어 놓았다.
천양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샘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와악! 정말로 계셨네요! 어, 어라? 그런데 할아버지랑 너무 닮으신것 같은데……."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이내 생글거리며 도리질을 했다.
천양은 소녀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의아함만을 느낄 따름이었다.
"아니, 할아버지는 어제 돌아가셨으니 지금 여기 계실리가 없겠죠. 제가 지나친 생각을 했나봐요."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쨌든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기뻐요! 인사드릴게요, 신령님! 어른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때가 되어 헛것을 보신거라고 했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다른사람은 몰라도 저에게 거짓말을 단 한번도 하신적이 없거든요!"
소녀는 생기발랄하게 말하다가 별안간 풀이 푹 죽어서 고개를 늘어트렸다.
"뭐어, 그저께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몸도 좋아지시고 잘 놀아주셔서 좋았는데, 어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놀라버렸지만……그래도 말예요, 신령님에게는 꼭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또다.
천양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말을 알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만은 어떻게든 이해가 되어 오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얼굴, 너무나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셨거든요. 정말로 그냥 깊은 잠이 들어버리신 것 처럼. 그 전까지는 언제나 밤에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주무시곤 해서 걱정이었는데…응. 분명히 좋은 곳에 가셨을 거에요!"
소녀는 밝게 웃으며 가슴을 쭉 폈다.
"그래서, 할아버님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 주신 신령님이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집에서 장례 준비하던 음식을 싸가지고 한달음에 신령님에게 달려왔어요! 헤헷."
그렇게 웃던 소녀의 눈에, 급작스럽게 눈물이 고이자 천양은 당황했다. 자신이 뭔가 위협적인 일이라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소녀는 눈물을 저고리 끝으로 쓱쓱 닦아내고서는,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으, 으으. 할아버지가 저보고 절대 울지 말라고 했는데. 약속했는데. 신령님이, 하, 할아버지랑, 너무, 너무 닮아서, 왠지, 참기가, 히, 힘들어서! 우, 우윽!"
천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본능으로 깨달았다. 천양은 팔을 벌려, 소녀를 품 안에 안아주었다. 억지로 울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소녀는, 천양의 품 안에 들어오자 결국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으, 으와아아앙! 하, 할아버지! 으아아아앙! 왜, 왜! 흐아아아앙!"
자신을 두고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한껏 토해내는 소녀의 눈물과 통곡. 부모도 받아내주지 못한 그것을 받으며, 천양은 자신의 영혼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천양은 끌어안은 소녀로부터 사람들의 복잡다양한 생각과 행동과 말들을 읽어냈다.
천양은 말없이 품 안의 소녀를 울음이 그칠 때 까지 끌어안고 있었고, 소녀의 훌쩍임이 진정되자 품에서 떼어놓으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은 소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미소와 꼭 닮은 것이었기에, 소녀는 다시 한번 가슴 속이 울컥거려 왔지만 그것을 가라앉히며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저고리 소매로 쓱쓱 문질러댔다.
"미, 미안해요! 신령님."
"아니. 괜찮다.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단다."
"신령님……?"
천양은 소녀의 기억 속에서 꺼낸 할아버지의 말들로 소녀를 위로해주었다. 소녀의 맑은 눈동자가 주는 신뢰감이 천양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었다. 천양은 다시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소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젠 집에 갈 시간이지 않니?"
소녀는 깜짝 놀라며 복장을 추스렸다.
"아, 맞아요! 너무 늦으면 엄마도 아빠도 이놈의 계집애가 또 어딜! 이러면서 화내실거에요. 시간 빼앗아 죄송했습니다. 신령님! 전 이만 가볼게요!"
소녀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쾌하고 씩씩한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발길을 휙 돌려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아, 제가 가져온 음식들은 꼭 드셔야 해요?"
천양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소녀는 먼발치에서 공손히 목례했다.
"안녕히 계세요! 신령님!"
소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무사히 산 밖의 마을길로 향한 것을 확인한 뒤에 천양은 보자기로 손을 가져갔다. 잘 익은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집어든 천양은, 그것을 살펴보다가 한입 베어물었다. 천양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 천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그을 향한 신뢰의 맛이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천양'이라는 신령으로서의 제대로 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게 되면서, 그를 섬기는 사당이 산 이곳저곳에 세워지게 되었고, 그를 따르는 만신萬신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역사는 천양에게는 무정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의 힘으로 나라 전체를 덮친 전화戰火를 피하기엔 무리였다.
그 잔인한 세월의 흐름 앞에서, 천양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산신령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줄어갔고, 산골마을 사람들의 수 자체가 적어졌다.
비바람에 해진 사당을 찾는 이는 더 이상 없었고, 아직도 그를 꿈에서 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정도만이 그와 연결을 맺고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력한 도움으로는 천양은 만족할 수 없었고 천양의 힘은 날이 갈수록 줄어서, 그 영격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 천양은 소묘의 어머니이자 자신을 모시는 최후의 만신이 된 퇴마사 소녀, 백화白火을 만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까마득한 과거에 자신에게 공양물인 사과를 주었던 소녀를 너무나도 닮았던 그녀. 보통 무당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다른 만신들과는 달리, 백화는 흔치않게 퇴마를 업으로 삼고 있는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아주 어렸을때부터 천양과 함께 해왔다.
하지만 그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지, 백화는 갓난아이였던 소묘만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제껏 자신이 도와주고 함께 했던 이들의 죽음을 수없이 경험했던 천양이건만, 그때만큼은 정말로 절망에 잠겼다.
소묘가 시선과 마주해 목숨을 잃을 뻔한 날.
이번에야말로 소중한 존재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한 천양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두번째 정명을 사용해서, 그 시선을 칼 안에 봉인했다.
그것이 바로 소묘의 검은 칼, 초조.
그때 흐트러진 정기와 현격하게 낮아진 영격 덕분에, 천양은 자신이 언제나 유지하고 있던 노인의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소년의 모습을 택했다. 지금도 힘을 과하게 사용하면 그 모습조차도 유지하기 힘들기에, 더 작고 어린 모습을 택해 정기를 회복하곤 했다.
그리고 천양의 의식은 찰나에 수없는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에 다다랐다,
어떤 의미로는 최악의 상태.
소묘와 같은 나이지만,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만능비서이자 무구장巫具匠인 소녀, 한조소韓彫笑의 활약 덕분에 이제껏 소묘의 핵폭탄급 실수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잘 넘겨 왔다.
하지만 지금은 조소가 없다.
소묘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상황에, 악마가 현계하기 직전이라는 위태위태한 전개다.
천양은 이를 악물고 현재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신뢰는 낮에 펑펑 써대었기에 지금 자신의 영력으로는 도저히 사용이 불가능하다.
오직 무의식계 안에서만 제어가 가능한 소묘의 초조도 비슷한 처지.
선택이 몇자루 남아있긴 하지만, 천양에게 있어서 신뢰로 쏘지 못하는 선택은 소묘가 사용하는 것 보다도 못하다.
기껏해야 원령의 무리에도 버티기 어려웠던 금줄의 효과에 뭔가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하고 있을수도 없는 것이, 계약도 없이 현계하는 악마가 대체 얼마나 커다란 패악을 끼칠지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것을 제외하면, 천양에게 있어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소묘야. 금줄 밖으로 나가라.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
천양의 긴장한 목소리에, 소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쌤, 이번엔 진짜로 안돼요! 설마 첫번째나 두번째 정명을 쓰셨다간……."
"시끄럽다! 패서 날리기 전에 얼른 나갓!"
"싫어요. 쌤이 안 나가시면 저도 안 나갈 거에요! 여차하면 저도 초조를 뽑으면──"
"닥쳐라! 정신나간 녀석아!"
천양은 눈에 불을 켜며 진심으로 화를 냈다. 소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위압감에 밀려 몇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쌤……."
"네 어미가 남겨준 목숨, 그리 쉽게 버리게 할 것 같으냐! 헛소리 말고 당장 튀어나가!"
소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굳었다.
"쌤! 그 얘기는!"
"됐어! 듣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난 너만을 위해 정명을 쓰려는게 아니다. 너는 안 들리느냐? 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천양에게는, 아까부터 귓가에 따가울 정도로 들리고 있었다.
신뢰의 주술로 보았던 소녀의 최후.
악마를 부르기 전, 소녀의 마지막 절규를.
그 도움을 원하는 간절한 울음섞인 목소리를.
천양은 도저히 그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좋아. 네가 가지 않겠다면 맘대로 해라. 하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묶어라!"
천양이 발을 구르자, 걸레를 빨았던 양동이에서 소묘가 썼던 수박의 주술과 똑같은 물줄기가 튀어나와 소묘의 몸을 휘감았다. 그 감촉에 소묘는 얼굴을 찌푸리며 온갖 인상을 썼다.
"으흐아앙, 하필 왜 걸레빤 물로 묶는거에요!"
소묘의 애원을 한귀로 흘리며, 천양은 소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천양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 한 단어 단어를 힘있게 내뱉었다.
"신령 이천양이 두번째 정명인 천양泉壤으로 명한다! 저 아이의 영혼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니라!"
천양泉壤은 저승과 이승을 잇는 이름.
천양이 발한 정명은 소녀의 악마와 속박된 과거의 고리를 끊고 현재와 온전히 연결되었다.
천양은 그에 멈추지 않고, 거듭해 정명술을 펼쳤다.
저 아이가 소묘로부터 받은 이페스라는 이름은 이미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덮어쓴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천양은 흐려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령 이천양이 첫번째 정명인 천양天壤으로 명한다! 나, 이천양은 저 아이에게 '성'과 '이름'을 내린다!"
"……에? 쌤?"
"내가 주는 성은 '이李', 내가주는 이름은 '페스'. 고로 저 아이의 성명을 '이페스'라 한다!"
"에에에에에에?"
소묘의 비명같은 의문사가 하늘로 떠올랐고, 천양은 스러지는 혈향과 검은 안개 안에서 무너지는 소녀의 몸을 받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정명술을 유지한 채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내가 성과 이름을 준 이 아이는 나의 딸로 삼는다. 이는 천지에 고하는 부동의 진실이니라!"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6화 : 조소彫笑
"아, 알았어요!"
"알기는 뭘."
"쌤은 로리타 컴플렉스란 사실을!"
"……뭐가 어쩌고 저째?"
"이번 이야기만 봐도 쌤이랑 얽히는 애들은 전부 어린 여자애들 뿌……으아아익! 쌤! 아파요! 잘못했어요!"목록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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