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지차!
제4화 : 소묘小卯
그 존재를 처음 느낀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한없이 차가운 시선.
언제나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쁠때든, 슬플때든, 혼자 있을때든, 누군가와 같이 있을때든, 언제나 소녀의 뒤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신경이 너무나 쓰인 나머지, 뒤를 재빨리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거울을 흘끗 쳐다보아도, 소녀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선은 존재했다.
어릴때는 그 시선이 너무도 두려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 너무나 많았다.
엉엉 울며 침대에서 일어나면, 언제나 새하얀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아주었다.
소녀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어 눈을 감고 포근히 잠들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차가운 시선과, 그 시선으로부터 소녀를 감싸주는 하얀 할아버지가 전부였던 어린시절의 기이한 세계.
그것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 엄……마? 아빠? 그게 뭐야?"
소녀의 세계에는 없는 것.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전부 가지고 있는 부모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던 순간, 소녀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하지만 소녀는 결코 실망하지는 않았다.
"나는 말이지, 대신에 정말로 멋진 할아버지가 있어!"
소녀는 언제나 밝게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워낙 타고난 덜렁이라 한없이 넘어지고 구르고 다치면서도, 소녀는 결코 웃음을 잃는 일이 없었다. 매 순간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할아버지에게만 의지하는 일 없이 소녀는 밝게 자라났다.
──소녀가, 그 시선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면하고 상냥한 할아버지를 잃던 그 날까지는.
그 날 이래, 소녀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칼을 손에 쥐었다.
소녀의 이름은 백소묘白小卯.
소녀의 기억에 없는 부모가 물려준
하얗고 작은 토끼라는 뜻의 그 귀여운 이름은
소녀의 운명과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알궂은 이름이었다.
눈을 감으면 강바람을 느낄 수 있는 한적한 지방도시의 여름밤. 정적이 감도는 역의 건물 안. 소묘는 물을 양동이에 가득 담은 채 다음날 운행을 위해 멈춰서 있는 기차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으으, 쏟아지면 안돼, 쏟아지면 안돼……."
실은 두세번쯤 실패한 후의 재도전이라, 소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등에 진 플라스틱 케이스가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졌다. 달리던 도중 손전등을 들고 야간순찰을 도는 역무원과 몇번인가 조우했지만, 소묘의 이마에 강시마냥 우스꽝스럽게 붙어있는 불가시不可視의 부적 덕분에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소묘가 헥헥거리며 기차 맨 끝의 차량에 간신히 찰랑이는 양동이를 내려놓았을 때, 위쪽으로부터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녀석! 무슨 물 길어오는데 한나절이 걸리는거냐!"
"우으으으. 중간에 오다가 쏟는 바람에……. 쌤, 죄송해요."
"……됐다. 너한테 훈계하려 드는 내가 얼간이지. 빨리 주변에 저것들이나 정리해."
소묘가 쭈뼛거리며 위쪽을 올려다보니 차량의 위쪽에는 퇴마도인 선택이 여러자루 박혀 있었고, KEEP OUT, 出入禁止, 들어오지 마시오 등등의 글자가 붓으로 휘갈겨진 가늘고 긴 노란 천이 선택을 휘감아 금줄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형체가 흐릿한 연보라빛 원령靈무리들이 날파리처럼 그 금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리 잡것들이라지만 저렇게 수가 많아서야… 임시변통의 금줄도 슬슬 한계인것 같은데."
금줄의 한가운데 걸터앉아 있는 백발의 소년, 소묘의 스승인 천양은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금줄에 쓰여있는 글자들의 먹이 점점 번져서 노란 천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소묘는 등에서 플라스틱 케이스를 끌러내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끝내드릴게욧!"
소묘는 케이스의 모퉁이를 발끝으로 힘껏 걷어찼고, 그러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선택이 칼집째로 공중에 튀어올랐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것을 낚아챈 소묘는 손잡이를 움켜쥐고 발을 세차게 굴렀다. 그 기세에 금줄 주위를 휘돌고 있던 원령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소묘 쪽을 주목했다. 그것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광경이었지만, 소묘는 선택의 손잡이를 잡고 자신만만하게 뽑아들었다.
"자아, 퇴마의 시간입니다!……어, 어라? 뭔가 허전……엣?"
멋지게 뽑혀나온 건 달랑 손잡이 뿐이었다. 소묘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으, 으우에엣~ 낮에 이페스씨가 부러트린걸 잊고 있었다~"
"이 천하의 둔탱이 제자놈이이잇!"
천양의 질타가 신호타라도 된 듯, 원령의 무리는 일제히 소묘를 향해 날아들었다. 당황한 소묘는 이마에 붙어 있던 불가시의 부적을 떼어들고 던지며 손가락으로 인을 맺고 짧게 외쳤다.
"폭爆!"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무수한 원령의 대열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별 피해를 주지 못하고 원령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원령의 무리는 가슴 서늘하게 하는 귀곡성을 울리며 소묘에게로 일제히 쇄도했다. 선택의 칼집은 본래 신뢰란 이름의 활이긴 했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천양 뿐이었기에 선택이 없는 소묘에게는 그저 무거운 막대기나 다름 없었다.
"쌔애애애앰!"
"젠장,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받아랏!"
한숨을 푹푹 내쉬던 천양은 금줄을 유지하고 있던 선택을 한자루 뽑아서 소묘를 향해 던졌다. 선택은 원령들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날아갔고, 소묘는 칼집을 내밀어 선택을 받을 준비를 했다. 이내 선택은 거짓말처럼 칼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소묘는 한바퀴 돌며 선택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제부터 진짜라구요, 갑니다!"
소묘의 손에서 이번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선택이 제대로 뽑혀나왔다. 하지만 소묘는 그것을 휘두르는 대신 양동이가 있는 쪽으로 물러서더니, 발로 양동이를 걷어차 쓰러트렸다. 양동이가 기울어지며 물이 쏟아지려는 순간, 선택의 칼 끝이 양동이를 향했다.
"선택, 수박水縛!"
소묘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집이 푸른색으로 빛났고, 쏟아지던 물은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잠시 허공에서 머뭇거리고 있더니 수십 줄기로 갈라져 원령의 무리를 향해 일제히 쏘아졌다.
'키이이이익!'
원령의 사이사이로 파고든 가느다란 물줄기는 갈라지고 갈라져서 마치 살아있는 줄처럼 꿈틀거리며 원령들을 하나둘씩 봉해갔다. 물줄기의 움직임은 소묘의 부드러운 칼 놀림을 따라갔고, 용케 그것을 피하고 빠져나가려던 원령들도 결국 소묘가 걷어찬 두번째 양동이의 물에 의해 완벽히 사로잡혔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원령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소묘는 심호흡을 하고 선택을 다시 칼집에 꽂아넣었다.
"다음 삶에는 더 나은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기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소묘는 칼을 뽑아 허공을 가르며 짧게 말했다.
"선택, 참외斬外."
검집의 문양이 흰색으로 번뜩이는가 싶더니, 수박의 주술로 묶인 원령들이 일제히 반으로 잘려나갔다. 한이 담긴 탄식을 남기며 원령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고, 그에따라 수박의 주술도 풀려 원령을 휘감고 있던 물줄기는 물방울이 되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 아닌 비를 맞으며 소묘는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여름에 쓰면 참 입가에 군침에 도는 연계주술이란 말야."
"아주 꼴값을 떤다."
한심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천양의 앞에서 소묘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 건데……."
"얼른 올라오기나 해. 저만한 것들이 또 몰려들어오기 전에. 아, 양동이 하나만 가지고 와."
"네, 넵! 쌤!"
소묘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다시 선택을 갈무리하고, 양동이를 들고 허겁지겁 사다리를 통해 천양이 있는 차량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금줄 너머의 광경을 보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이, 이건……."
금줄 안에는 검붉은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피로 그려져 있으리라 생각되는 그 진은, 금줄 밖까지 사악한 기운을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천양은 골치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것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잡것들이 몰려들었다. 금줄을 쳐놓지 않았다면 아마 옆 도시에서까지 몰려들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그럼 지워버리면 되지 않나요? 쌤의 힘이라면……."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천양이 금줄의 정 중앙에서 벗어나 마법진에 손을 직접 가져다 대자, 붉은색의 전기가 튀어올랐다.
"난 아예 손도 댈 수가 없어. 주술로 지우는 것도 실패했고……혹시나 싶어서 저걸 가져와 봤지만, 아무런 실속도 없었지."
천양이 '저거'라고 지칭하며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이페스의 모습을 한 소녀가 피로 그려진 살벌한 마법진 위에서 티없는 표정으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소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쌤이 저 애는 이페스씨 같은 악마가 아니라 완전히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셨잖아요?"
"……뭐, 아직까지는 그렇지. 역시나 진 안에 들어갔다고 꼬리를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는군."
천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금줄의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실속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인간에게 이 진은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있었으니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소묘의 얼굴에 뭔가가 휙 날아들었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소묘는 허우적거렸다.
"으, 으우푸풋! 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걸레지."
"아. 걸레였군요……에, 걸레?"
천양의 담담한 대꾸에 소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묘는 호들갑을 떨며 얼굴에 덮인 걸레를 떼어내고 씩씩거렸다.
"아니, 쌤! 너무한거 아니에요? 어떻게 여자에 얼굴에 걸레를 냅다 집어던질 수가 있어요? 쌤이 무슨 악랄한 계모에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부정하지 않고 고소를 머금는 천양의 모습에 소묘는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천양은 소묘가 들고 올라온 양동이를 향해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고, 아까 소묘가 주술을 걸어 흩뿌렸던 물이 양동이에 빨려 들어가듯 다시 담겼다.
"그걸로 걸레 빨아서 닦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소묘는 온 몸으로 거부의 포즈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잇! 설마 양동이를 가지고 오라고 한게 그것때문이었어요?"
"……그럼 뭣 때문에?"
"아아~ 걸레질하는 퇴마사라니~"
천양의 농담기 없는 반문에 소묘는 양동이를 끌어당기며 무릎을 구부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양과 실랑이를 해봤자 자신이 이긴 기억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소묘는 훌쩍거리며 걸레를 양동이에 담근 후 걸레를 꾹꾹 쥐어짰다. 기껏 복작거리는 대도시를 벗어나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까 했더니, 한밤중 기차 위에서 난데없이 걸레를 빨고 있자니 자기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쌤…할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저렇게 박하게 굴지 않았는데."
소묘의 곁에서, 부모 대신 소묘를 돌봐주었던 할아버지.
그가 바로 퇴마사무소 '천양'의 소장이자 산신령인 이천양이었다.
소묘는 천양이 정확히 어떤 연유로 현계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소묘에게 있어서는 부모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친척조차 없는 소묘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어리광이나 투정을 받아주고 보듬어 주었던 천양은 말 그대로의 진짜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소묘가 시선과 마주하고 영능력을 자각한 이래, 천양은 더 이상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선생님이나 스승님이라고만 부르라고 고집을 피워댔기에, 친근감을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호칭이 '쌤'이었다.
"뭐어, 쌤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조금씩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기에, 소묘는 내심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져 왔다.
"뭘 걸레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어? 얼른 닦지 못해?"
"아, 알겠어요!"
상념에 잠길 시간도 봐주지 않는다니, 정말 매정하기 그지없다. 그런생각을 하며 금줄을 넘어 진에 들어선 순간, 소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상하네, 이 진의 모습……처음 본 것 같지가 않아."
"한숨 자고 나면 시작할테냐?"
"아, 아뇨! 지금 할게요!"
소묘는 황급히 몸을 숙여 걸레를 진의 가까이로 가져갔다.
"뭐, 그럴리가 있나. 내 착각이겠지."
그리고 걸레를 쥔 소묘의 손이 피로 그려진 진에 닿은 순간, 악마는 미소지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지."
까마득한 사상의 건너편. 무지의 악마 이페스는 꼬리를 흔들며 소묘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물론 그 대답은 소묘에게 닿지 않았고, 이페스는 붉은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미소지었다.
"마르베스가 움직이기도 전에 좋은 기회를 얻었군. 이것도 여흥이려니 해야하나?"
악마가 앉아 있는 방의 바닥에는 기묘한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문양은 지금 소묘가 바라보고 있는 마법진의 문양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리고, 소묘의 손등에 그려진 문양도 역시 같은 것이었다. 이페스가 발 뒤축으로 바닥을 한번 걷어차자, 바닥은 순식간에 유리처럼 투명해졌고 그 반대편에는 열심히 걸레로 바닥을 문지르는 소묘의 모습이 손에 잡힐듯이 비쳐 보였다.
"내 망각진Oblivison Sign을 의식할 수 있는 녀석은 없지. 어차피 이 녀석은 더 이상 쓰기 힘드니 문을 옮겨볼까."
이페스는 몸을 일으켜 창문 너머로 비쳐 보이는 듯한 소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앗, 따거!"
소묘는 순간적으로 손등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고 황급히 손을 뗐다. 걸레가 손에서 떨어져 내렸고, 곁에서 소묘를 지켜보던 천양은 자세를 고치며 정색했다.
"무슨 일이지? 설마 소묘 너에게도 거부반응을 일으킨거냐?"
"아, 아뇨. 뭔가 따끔해서요. 벌레가 물었나봐요. 헤헷."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혀를 쑥 내미는 소묘를 향해, 천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놀래키지 마라."
"쌤은 사람 아니잖아요?"
"……뭐라고?"
"아, 아니에요! 농담. 농담."
순간, 손을 휘휘 저으며 걸레를 주으려던 소묘는 바닥의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쌔, 쌤! 마법진이, 마법진이?"
"응?"
천양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도 이내 표정이 바뀌고 말았다.
"문양이…지워진다?"
마치 타고 남은 재가 바람에 흩날리듯, 기차 위에 그려진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소묘의 손등 위에 붉은 색으로 같은 문양이 한층 더 그려지는 것은, 천양도, 소묘도 눈치챌 수 없었다.
이페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 앞의 문을 쓰다듬었다. 두꺼운 금속 체인으로 칭칭 동여매어지고, 거기다가 수많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는 그 문은, 새빨간 색 눈에 띄는 외형이 이페스가 지옥으로 돌아올 때 사용했던 문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뭐어, 그리 쉽게 열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애초에 준비한 문은 따로 있으니까."
이페스가 시선을 돌리자, 사슬문 옆에 낡은 철문이 하나 보였다. 그 철문에 걸려있는 건 나무빗장 하나 뿐이고,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당장에 부서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페스는 그 문을 부수는 대신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문고리를 두드려 나직하게 말했다.
"일어나렴. 나의 '친구'.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이름을 잃은 소녀는 눈을 떴다.
등에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것일까?
전혀 기억에 없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생소한 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마치 난생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듯한 위화감에, 소녀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몇번이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눈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소녀와 흰 옷을 입은 소년이 자신을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겁이 덜컥 나서 제대로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뒤로 끌다가, 등에 뭔가 닿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그녀의 등에 닿은 것은 다름아닌 서슬푸른 칼이었다. 날이 아니라 면에 닿았기에 베이진 않았지만, 칼의 존재와 그 칼을 휘감고 있는 노란색 천이 주변을 빙 둘러싸듯 막고 있다는 사실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뭐야? 너희들은 누구야? 여긴 어디지?"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 앞의 독특한 복장을 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들은 어깨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소녀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방금 저 아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넌 알겠느냐?"
"아뇨. 전혀. 처음 듣는 말인데요? 그래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응?"
천양이 의아한 표정을 돌려주자 소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저런 상황에 할 말이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정도 아닐까요?"
"그건 대체 무슨 논리냐."
"논리라기보다는 약속이죠. 약속."
"……."
천양은 입을 다물었다. 소묘의 주장은 엉터리였지만, 깨어난 소녀의 표정만 봐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천양은 신뢰의 주술인 망명으로 이페스의 이름과 함께 의식을 날려버렸을때 엿보았던, 제물이 되기 전 소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중동 지방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정체불명의 사교邪敎집단에 팔려가 의식의 희생양이 되기 직전에 절망 속에서 '진짜 악마'를 불러내고 말았던 기구한 소녀의 운명을.
지금 이 소녀가, 바로 그 소녀란 말인가?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했지만, 천양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악마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이며, 타락의 화신이다. 천양이 지금껏 제대로 본 악마는 얼마 없었지만, 그 많지 않은 조우로도 천양은 악마의 본질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천양은 겁에 질린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명正名을 쓰겠다. 소묘 너는 잠시 물러나 있거라."
"무리하시는거 아니에요?"
"흥."
천양은 코웃음을 치며 도포를 펄럭였다.
"미숙한 제자 놈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는 아니야. 멋대로 끼어들지나 마라."
이름 모를 소녀도 그제야 말이 안 통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 수 없는 말로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양 팔로 몸을 감싼 채 불안감에 싸인 얼굴로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양은 소녀를 위협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천양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신령 이천양이 네번째 정명인 천양闡揚으로 명命한다. 진실만을 답해라."
천양이 쓰는 정명술正名術은 자신의 이름에 담긴 본질의 힘인 정명력正名力을 다른 사람이나 현상에 강요하는 주술의 일종이었다. 순전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름의 힘만을 사용하기에, 보통 사람은 태어났을때 지음받은 단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해 하나의 술을 쓸 수 밖에 없는 반면, 신령인 천양의 경우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부여한 여러 의미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삼아 다룰 수 있었다.
그 천양이 가진 네번째 정명인 천양闡揚은 드러내어 밝히는 힘을 가졌다. 그 정명을 밝히고 하는 질문은 영혼에 직접 묻는 것이기에 대답에 거짓말은 용납되지 않으며, 불완전한 음성언어와는 달리 그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있었다.
"묻겠다. 너는 악마인가?"
소녀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천양은 그것이 거짓이 아닌 온전한 사실이라는 것을 즉시 이해할 수 있었다. 천양은 정명술을 거두지 않은 채 재차 질문했다.
"묻겠다. 너는 사람인가?"
소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천양으로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천양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묻겠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소녀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이름……?"
천양의 정명술이 유지되고 있기에 천양도, 소묘도 소녀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지금까지와 같이 바로 대답하지를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천양은 혀를 차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역시……저 아이는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군.'
천양은 자신의 추측을 내심 확신했다. 지금은 아마도 천양 이외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을 터인, 이페스를 소환한 청년. 애초에 천양의 의뢰인이기도 했던 그의 몸과 영혼을 제물로 삼아서 이페스는 과거에 역시 제물로 삼았던 소녀의 몸을 만들어냈다. 본래 그 존재는 악마의 몸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해도 악마의 힘과 마력에 견딜 수 있게 완전히 텅 비어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을 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악마의 힘의 상당부분을 사용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보통 악마는 충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소환해제될때 그릇을 부수고 자신의 힘을 되찾아 돌아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힘의 일부라고는 해도, 악마가 자신의 힘을 온전히 회수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돌려주었는지, 적당히 복제했는지는 몰라도 옛날 자신이 제물로 삼았던 소녀의 영혼까지 몸에 담아두고 돌아갔다.
때문에 본래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사라졌을 소녀는, 까마득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대꾸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 그런 자신의 복잡한 존재이유 때문일 것이다.
'기구한 일이다.'
천양은 자신의 등 뒤에서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소묘를 흘낏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의미로는 소묘 역시 저 소녀랑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였기에. 그런 존재에게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이 가는건 천성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저렇게 밝게 웃고는 있지만, 소묘는……
"아, 이름이라고 하니까 말이죠. '이페스'라는 이름은 역시 특이했──"
소묘가 밝게 웃으며 중얼거린 말에, 천양의 고뇌는 한순간에 싹 날아가고 말았다.
"입다물고가만히있으랬더니이놈잇!"
열이 머리 끝까지 치뻗은 통에 천양은 숨도 안쉬고 절규와도 같은 분노의 외침을 토해냈고, 소묘는 사색이 되어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었다.
"이……페스. 이름……. 이페…스? 알고…있……친구."
소녀는 멍한 표정으로 소묘가 말한 '이페스'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소녀를 둘러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어디선가 갓 뿌려진 듯한 혈향이 몰려왔고, 사악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양은 그 광경을 보고 펄쩍 뛰었다.
"이녀석앗! 이름이 없는 존재에게 하필 악마의 이름을 던져주면 어떻게 하냐! 그것도 진실을 밝히는 정명을 사용하는 와중엣!"
이름은 본질을 반영하는 것. 애초에 악마의 그릇으로 만들어진 소녀에게 악마의 이름을 준다는 것은, 악마에게 현계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쌔, 쌔애애앰! 죄, 죄송해요오오옷!"
"이게 죄송한 정도로 끝날 문제냐아아아앗!"
밤하늘을 향해 사제의 공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천양은 머리를 감싸쥐고서 탄식했다.
그래. 잠시 감상에 빠져서 소묘의 본질을 완전히 잊고 말았던 것이다.
백소묘란 소녀는,
천성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는,
터무니없는 덜렁이란 사실을.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5화 : 천양穿楊
"……."
"……."
"너도 무안해서 별로 할 말이 없지?"
"……네에.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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