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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지차! 제3화

10/08/19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천양지차!

제3화 : 신뢰信賴



이미 하늘에 빛 따위는 없었다. 암흑과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었다.
배 아래쪽을 울리는, 사나운 해룡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고, 지면이 흔들렸다. 이페스가 들어올린 브로켈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졌고, 흉악하게 거대한 몸집과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도마뱀 같은 상반신이 겹쳐서 보였다. 그것은 바다를 지배하는 사악한 해룡Sea Dragon의 위용. 도끼창 브로켈의 본모습이었다.
소묘는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났지만, 천양은 오히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아아, 저게 말로만 듣던 서양의 용인가. 진귀한 것을 보았군."

이페스는 둘의 반응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담담하게 명령했다.

"브로켈, 쓸어버려."

브로켈의 거대한 환영은 아래로 고개를 꺾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브로켈의 쩍 벌어진 입에서 터무니없는 양의 시커먼 탁류濁流가 쏟아져 천양과 소묘를 덮쳤다. 두 사람의 모습은 한순간 물에 휩쓸려 버리는 듯 싶었지만──

"돌아가라."

이페스는 물기둥이 두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터무니없는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그것은 분수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폭포를 뒤집어 놓은 듯한 장관이었지만, 이페스는 감탄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눈을 태워버릴 듯한 번개가 사방에서 내리쳤고, 분노에 휩싸인 용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연신 때려댔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천양은 태연히 품속에서 대나무 우산을 꺼내들어 소묘에게 건네주었고, 소묘가 그것을 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늘로 향했던 탁류가 비처럼 땅으로 쏟아졌다. 그것은 굵은 빗줄기였지만 소묘가 들고 있는 낡아보이는 대나무 우산은 태연히 빗방울을 흘려냈고, 이페스는 브로켈을 거두어 다시 도끼창의 형태로 쥔 채 무표정하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구름은 서서히 사라져갔고, 구름 사이로는 빛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날씨는 활짝 개였다.
비 아닌 비가 그치자, 우산 아래에서 나온 천양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페스에게 말했다.

"땅 위에 있을 것들은 땅 위에, 땅 아래 있을 것들은 땅 아래 돌아갈 시간! 너도 네 무기의 본신本身을 보여주었으니, 나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 예의겠지. 똑똑히 봐두라고."

천양은 칼집의 끄트머리를 잡고, 다른 손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칼집을 끼운 뒤 그대로 훑어내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더 이상 칼집은 없었고, 칼집과 똑같은 길이의 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양은 활을 쥐고 이페스를 바라보았다.

"이 활의 이름은 신뢰神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땐, 신에게 모든것을 맡기라는 의미지. 소묘! 선택이다!"
"넷! 쌤!"

소묘는 대나무 우산을 재빨리 접어들었고, 천양과 똑같은 동작으로 우산을 거꾸로 들고 훑어내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우산 대신 화살을 넣어두는 전통이 나타났다. 소묘는 그중에 흰 깃이 달린 화살 한 대를 뽑아 천양에게 건넸고, 천양은 받자마자 조준도 없이 그대로 시위에 걸고 당겨올렸다.

"본래 선택은 칼이 아니라 화살이다. 소모품이지. 선택의 올바른 사용법을 보여주마."

천양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을 이페스에게 겨누고, 짧게 말했다.

"선택, 발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활시위를 떠났다. 이페스는 그것을 보고 브로켈로 쳐내려 했지만,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선택은 단순한 화살이 아니라 천양에 대한 믿음을 구체적인 형태로 벼려낸 신성한 무구巫具였기에 물리적으로 '막는다' 라는 개념이 용납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택은 브로켈을 무시하고 가볍게 날아가 이페스의 오른쪽 어깨를 그대로 꿰뚫었다.

"커헉……."

이페스는 소환 이래 처음 입게 되는 직접적인 타격에, 고통보다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페스는 왼손으로 선택을 뽑아버리려고 손을 가져갔지만, 천양이 지체없이 쏘아낸 두 번째의 선택에 왼쪽 어깨마저 꿰뚫리고 말았다. 두대의 화살은 공명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끔찍한 고통을 부여했다. 이페스는 브로켈을 쥘 힘을 잃었고, 양 허벅지에 화살이 박혔을 때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차 위에 추락하고 말았다.

양 어깨와 양 허벅지, 총 4개의 화살이 박히게 된 이페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화살이 박힌 피부 근처는 시커멓게 타들어가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소묘는 그 광경을 보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떨리는 팔을 내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천양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본신이 아니라 제물의 몸을 빌려 나타난 화신에 불과해. 저 모습도 과거 제물중 하나일테고. 악마의 겉모습에 동정하지 마."
"……알고 있어요."

소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고, 그 사이 이페스의 몸이 튀어올랐다. 이페스의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고, 뻣뻣한 동작으로 브로켈을 쥐었다. 천양은 피로에 찌든 표정으로 다시 활을 쥐었다.

"억지로 움직이려는 건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천양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난 뒤, 활줄에 아무것도 걸지 않은 채 있는 힘껏 당겼다. 그러자 활에 새겨진 주술문양이 희미한 백색으로 점멸하다가 이윽고 무지개빛으로 찬란하게 빛났고, 천양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페스를 향해 활시위를 놓았다.

"신뢰, 망명忘名."

애초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활이다. 시위가 튕겨지며 팅, 하고 맑은 소리를 울렸지만 아무것도 날아간 것은 없었다. 활에서 나던 빛은 자연히 사라져갔다.
그와 동시에 이페스는 거짓말처럼 동작을 덜컥 멈추었고, 눈동자에는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것이 아니었다. 자만과 우월감으로 빛나는 녹색이 아닌, 겁에 질려 가늘게 떨리는 소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아득히 먼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어둠. 주변을 둘러싼 알 수 없는 열기. 대상을 알 수 없는 찬양. 이유를 알 수 없는 환희. 그 모든 감정이 폭풍처럼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지만, 또한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그녀는 지독히 외로워졌다. 아침마다 맛없는 식사를 내어주던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같이 뒹굴던 형제들이 보고 싶었다. 매일처럼 자신을 욕하고 손찌검하는 아버지라도 보고 싶었다. 아니, 가족이 아닌 그 어떤 누구라도 좋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똑바로 말을 걸어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격양된 광기의 중심에서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안녕? 내 이름은 이페스. 네 이름은 뭐지?"

그 존재는,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전혀 느낄 수 없었고, 그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피웅덩이 속에서 발견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시체의 얼굴을 짓밟으며 꽃피는 황홀한 미소.
손에서 느껴지는 건 피가 엉겨붙은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

당연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악마 ───였다.

누구였지?
그건.



그것으로 과거의 환영은 끝.
그녀의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눈앞에서는 백발의 소년, 천양이 몸을 비틀거리면서 활을 손에서 떨어트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소녀는 소묘라는 이름이었지. 소묘는 뭐라고 외치면서 소년의 몸을 흔들었고,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바닥에 떨어진 활은 칼집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 목소리가 들렸다.

"……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사람인 네 몫이다. ……나의 제자야."
"…네. 쌤은 쉬고 계세요."

소묘는 소년을 공손히 벽에다 기대어 눕히고, 바닥에 떨어진 칼집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바닥의 전통에서, 여러대의 화살 중 단 하나 있던 검은 깃의 화살을 뽑아들었다. 화살은 전통에서 뽑혀나오는 순간 검은 검신을 가진 장도로 변했고, 소묘는 그것을 칼집에 빠르게 밀어넣었다.
그러자, 칼집의 주술문양은 순식간에 색이 검게 바래버렸다. 그리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그녀의 눈동자에 녹색의 빛이 다시 깃들게 하면서 의식을 각성시켰다. 그녀는 천천히 기억해냈다. 그녀는 악마였다. 그리고 눈 앞의 소묘는 퇴마사였고, 자신과는 적대관계였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브로켈은 그녀의 막강한 무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하나만은 떠올릴 수 없었다.
바로, 악마인 그녀 자신의 이름을.

이름을 모른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녀는 자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 힘을 어떻게 쓰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소묘가 검을 쥔 채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퇴마사 백소묘. 지금, ───씨를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 분명, 소묘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소묘는 칼자루를 허리에 붙이고 더더욱 몸을 낮추는 자세를 취했다.

"초조初潮."

소묘의 말에 검은 한층 더 짙은 어둠을 뿌려댔고, 기분나쁜 소리로 울어댔다. 소묘는 칼의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짓누르고 있다가, 힘을 풀며 고했다.

"발견拔見──"

그 순간, 칼은 뛰쳐나오면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사방에 토해냈고, 소묘의 몸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암흑은 모든 것을 삼켰고, 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늘어났다.
악마조차 돌아보지 못할 정도의 새카만 칠흑 속에서, '이페스'는 증오로 희번덕거리는 거대한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 눈동자는 검은 불길에 싸여 있었고,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복에 휩싸여 자신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을 먹잇감으로 하기 위해 끊임없이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악마라 할 지라도 예외는 없을 터. 이름을 되찾은 이페스는 늘어난 영원의 시간 동안 소멸의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발소리와 함께 그 불타오르는 눈은 닫혔고, 소묘는 칼자루를 쥔 채 이페스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영원이었던 시간은 급속하게 수축했다. 소묘는 짧게 고했다.

"이페스씨, 돌아가세요."
"……네놈."

이페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소묘가 쥔 칼자루에 시선을 돌리고 몸서리를 쳤다. 칼자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곳만큼은 절대로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뭐야……그건."
"이름은 저도 몰라요. 다만 그 어떤 악마보다 오래되고 사악한 존재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너는 그것을……다루는 건가?"

소묘는 난처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룰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세요?"
"……."
"저는 단지 시선을 돌리게 할 수 있을 뿐이에요."

이페스는 이를 갈았지만, 소묘의 미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그 입에도 올리기 껄끄러운 존재의 시선을 언제든 이페스에게 돌릴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 이페스는 결국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악마의 방식……."
"네. 익숙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페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약간의 공복과 자존심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에 없었다. 악마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포기하지. 돌아간다."
"현명한 결정이세요. 이 아이도 데려가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소묘의 뒤쪽에서 푸른 머리칼의 조그만 소녀가 뛰쳐나와 이페스에게 비틀거리며 안겼다. 그 소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그 떨림은 아무래도 쉽게 멎을 것 같지 않았다. 이페스는 소묘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브로켈을 이 꼴로 만들다니. 기억해두지."

이페스가 등을 돌리자, 붉은색의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통 움직이지 않으려는 브로켈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문 앞에 선 이페스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소묘를 바라보았다.

"너, 뭔가 잊은 것은 없나?"
"네? 글쎄요. 전부 돌려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아. 그렇단 말이지."

이페스는 소묘의 의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 애초에 '모르게 되는' 계약이다. 그것이 '무지'의 이름을 가진 악마, 이페스의 방식.
이페스는 그녀를 향해 악마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볼 때까지 즐거운 시간 되기를 바란다. '친구'여."

소묘의 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이페스와 꼭 닮은 얼굴을 했지만, 악마의 뿔이 없는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페스가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고, 그래서 이페스를 꼭 기다리겠노라 마음먹었다. 소묘는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페스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저는 이페스씨랑 친구먹은 적 없거든요~ 다신 오지 마세요~"

붉은 문이 닫힌 순간, 어둠은 마치 마개가 빠진 세면대의 물처럼 한 점에 집중되어 일제히 빨려 들어갔다. 소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새카만 날을 칼집 안으로 밀어넣으며 짧게 중얼거렸다.

"──납도納道."

그와 동시에, 소묘가 칼을 뽑아 베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이페스와 브로켈의 모습이 허물어져 어둠으로 변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제서야 소묘는 긴장을 풀고 무너졌고, 소묘가 온 정신을 다해 유지시키고 있던 무의식계가 풀렸다.



"핫!"

눈을 번쩍 뜬 소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 자리에는 무척이나 피곤한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잠을 막 청하려는 천양의 모습이 보였기에, 소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점퍼가 유난히 헐렁해 보이는 건 신경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쌔, 쌤. 수고 많으셨어요. 헤헷."
"어이구 삭신이야… 수고고 자시고 난 자련다. 아, 그러고보니 정신없어서 조소의 전언을 깜박했네."
"에? 예에에엣? 뭐였는데요?"
"……선택은 하나가 아니지만, 네 목숨은 하나야."

그 말을 들은 소묘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그건 조소가 최고로 화났을 때 꺼내는 말 중 하나였다. 다급한 마음이 든 소묘는 천양의 몸을 마구 힘들었지만, 이미 천양은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소묘는 당황해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쩌지. 지금 전화라도 해야 할까. 으아아아……아?"

소묘는 선 그대로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천양 때문에 지금까지 전혀 신경쓰지 못했지만, 오른쪽 창가의 구석 자리에는 짐짝 모양으로 기대어 조용히 잠든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 소녀는 소묘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절대 이 장소에 있을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소묘는 몇번이나 눈을 비비고 확인했지만, 소녀의 모습은 환영도 뭣도 아니었다. 소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꺄아아악! 이페스씨, 분명히 돌려보냈는데! 왜 여기에 있지? 뭐야? 어찌된거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쌤! 쌤! 일어나봐요! 지금 퍼질러 잘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으아아아앙!"

소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기차의 승객들은 갑자기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서는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소묘의 눈물은 결국 차장이 달려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소묘는 차장까지 나타나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눈물을 멈추고 대신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신령과 악마를 빼닮은 소녀는 세상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날 줄을 몰랐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진정을 찾은 소묘는 두 사람의 태평한 얼굴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축 늘어졌다.

"끔찍해……."

무엇보다도 끔찍한 상황은 이 상황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조소에게 전화로 보고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은 소묘는 다시금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소리를 냈다.

"아으으으……."

그 순간, 소묘의 오른쪽 손등에서 녹색의 마법진이 아주 잠깐 빛났지만, 소묘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떨어진 사상의 저편에서, 체스판을 바라보던 악마는 미소짓고 있었다. 악마는 체스판 위의 검은색 폰을 집어들고 그것으로 상대방 진영의 흰색 말들을 모두 휘저어 쓰러트렸다. 악마는 난장판이 된 체스판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폰을 상대편 진영 맨 마지막 칸에 내려놓았다.

"──이걸로 프로모션Promotion 성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지의 귀공녀 이페스, 그 형언할 수 없는 사악의 결정체인 악마는 체스판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악마를 우습게 보면 곤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마르베스Marbes."
"기본적인 게임의 룰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주제에, 편리한 룰만 이용하려 하는 당신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우습게 보일만도 하겠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너편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대꾸했다. 말투 자체는 부드럽지만, 그 안에 담긴 빈정거림은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이페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거렸다.

"그으래? 그렇다면, 넌 어떻게 생각해? 브로켈."

이번엔 대꾸하는 목소리가 없었다. 다만, 이페스의 등 뒤에서 거대한 도끼창이 허공에서 나타나 체스판을 반으로 쪼개버렸을 따름이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도끼창은 땅에 깊숙히 파고 들어가서도 그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마르베스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날아들었다.

"역시, 당신은 최악最惡이군요."
"헤에, 칭찬해주는거야? 의외인데."
"그뿐이겠습니까. 악랄, 비열, 비겁, 음란, 저열,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악의를 담아 당신에게 비난의 꽃다발을 선사하고 싶군요."

이페스의 눈동자는 휘둥그래졌다.

"그만한 찬사를 당신같은 짐승에게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당신, 나에게 호감 있어?"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뭐, 그렇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부탁한 일, 해주겠어?"

잠시간의 침묵을 두었다가, 마르베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받아들이죠."
"고마워."
"대신, 전심전력을 다해 망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르베스의 진심어린 단언에 이페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믿음직스러운걸."
"그럼 역겨운 대화는 이걸로 끝입니까?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뵐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콰드득, 하고 뭔가를 삼켜 부수는 소리와 함께 체스판 앞에서 느껴지던 기척과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페스는 기지개를 켜고, 부서진 체스판을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마치──천사와 같았다.

"그럼, 진짜 악마의 방식을 애송이에게 맛보여주도록 할까."

잠들어 있던 소녀의 입가에, 이페스와 똑같은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것은 새로운 비극을 약속하는 악마의 미소.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기차는 수많은 사람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그 안에 품은 채 뜨겁게 달구어진 선로를 묵묵히 달려갈 따름이었다.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4화 : 소묘小卯
"오오. 충분히 활약했잖아. 다음화 제목이라 눈에도 띄고. 이정도면 충분하지?"
"쌤, 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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