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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지차! 제2화

10/08/18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천양지차!

제2화 : 선택選擇



"귀가 가렵군."

소묘의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백발의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책을 덮었다. 사실 방금 전 미세하지만 쨍, 하는 맑은 소리가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울려퍼졌기에 이미 책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소년은 머리를 감싸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선택을 깨먹은 건가. 이녀석."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에 건 핸드폰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자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소년은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올렸다. 그러자 수화기 저편에서 약간 다급하게 느껴지는 소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조소입니다. 소장님, 방금 선택이 부러졌더군요."
"아아. 나도 소리로 알었어."
"소묘는 어떤가요?"
"무사해.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지."
"……."
"뭐, 이번에도 내가 갈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날 믿지?"
"……네. 소장님. 그럼 소묘에게 전언좀 부탁드립니다."

소년은 조소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전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 휴대폰의 슬라이드를 내렸다. 느릿느릿한 몸동작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소년은 옆자리를 슬쩍 보았는데, 이페스의 몸에선 녹색의 사악한 기운이 흉흉하게 감돌고 있었고 소묘의 머리카락과 옷 여기저기는 시시각각 픽픽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깊지는 않지만 생채기까지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숨결도 가빠진 것이, 예사 상태는 아닌 것 처럼 보였지만 소년은 왠지 떨떠름한 표정을 보였다.

"……정말, 미덥지 못하단 말이지."

소년은 선택이 들어있는 케이스로 다가가 짧게 두번,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으히야으와잇!"

엄청난 풍압으로 인해 날려가면서 브로켈의 찌르기를 허우적거리며 피하고 있던 소묘는, 칼집이 가볍게 두번,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자 만면에 화색을 띄웠다.

"쌤!"

하지만 안도는 빈틈을 낳았고, 이페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찔렀던 브로켈을 거두는 대신, 날의 평평한 부분을 소묘에게 휘둘렀다. 소묘는 칼집을 들어 막으며 몸을 웅크리긴 했지만, 압도적의 힘의 차이는 그녀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귓가를 멍멍하게 만드는 쇳소리와 함께 포탄처럼 튕겨나간 소묘는 그대로 차량 끝까지 날아갔고, 문에 세차게 충돌한 뒤에야 비행을 멈추었다.

"꺄……아으읏."

소묘의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별이 눈에서 튀어올랐다. 거기다 가슴을 급격하게 덮친 통증 때문에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고, 숨이 막혀서 호흡을 고를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소묘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브로켈의 파상공세를 몇번 더 피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도저히 못 버텨, 한계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묘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 공격을 기다렸지만, 이상하게 이페스는 브로켈을 거두더니 공격을 멈추어 버렸다. 소묘는 칼집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면서 차량의 문에 기대었다.

"케, 켈록. 갑자기 무슨 변덕이시죠."
"방금전 널 날려버렸을 때."

이페스는 브로켈을 비스듬히 세우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 세계가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소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무표정했던 이페스의 입가에 악마의 미소가 걸렸다.

"고로, 이 세계는 너의 의식에 의해서 유지되는 결계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내 말이 맞는가?"
"그, 그그 그거, 함정 아닐까요오."

소묘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참 설득력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고, 이페스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이페스는 비스듬히 세운 브로켈을 들어올리다가 가볍게 공중에 튕겨올렸고, 거대한 도끼창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이페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을 뻗어 역수로 브로켈의 가운데를 낚아챈 뒤, 천천히 왼팔을 뒤로 당겼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투척 준비 동작이었다.

"직접 확인해 볼까 하는데."
"부, 분명히 죽이지 않는다고──"
"물론. 나는 너에게 불멸을 약속한 악마. 하지만 사지가 온전한 상태로 불멸을 약속한 기억은 없다. 반항하면 귀찮기도 하고, 팔다리 한두개쯤 잘라서 얌전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으에! 거, 거짓말쟁이! 그게 뭐에요!"
"악마에게 거짓말쟁이라니, 최고의 칭찬이군. 너에겐 보답을 주도록 하겠다."
"보답…이라뇨?"
"이거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브로켈이 이페스의 손에서 뛰쳐나갔다. 엄청난 마력의 추진력으로 인해 소리조차 뛰어넘은 속도로 날아간 브로켈은, 소묘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부러진 선택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뒤늦게 따라온 소리가 엄청난 폭음과 폭풍을 토해냈고, 소묘는 자신의 오른팔이 망가진 인형의 팔처럼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뒤이어 찾아온 격통에 소묘가 기절하지 않은 것은 소묘의 정신력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속 편하게 기절할 여유가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꺄, 꺄아아아아악!"

피조차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상처 부위를 말끔히 태우며 소묘의 팔을 다른 뒤 문에 박힌 브로켈은 지옥의 불길에 감싸인 채 아직까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아하하, 아파, 으흑, 쌤, 빨리, 으흐윽, 바보멍청이, 으으으윽,"

소묘는 머릿속 전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고통 속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잘린 팔을 향해 후들거리는 오른손을 뻗다가,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에?"

소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히 방금전 브로켈에 의해 잘려진 손은 지금 뻗고 있는 오른손──

"환각이다. 거짓말쟁이의 방식이지."

미소짓는 이페스의 얼굴이 코 앞에 보였다. 이페스의 손은 완전히 무방비하게 뻗은 소묘의 오른손을 붙잡았고,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소묘의 손등은 지글지글하는 소리와 함께 피부가 말 그대로 끓어올랐다.
소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며 이페스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페스의 엄청난 힘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피부는 이내 들끓기를 멈추고, 붉게 피부가 부풀어올라 이페스의 머리 위쪽에서 빛나는 마법진과 똑같은 모양의 문양을 그려내었다. 마치 달구어진 바늘로 피부를 꿰는 듯한 고통이 지속되었기에 소묘의 입에서도 결국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고통이 가셨을 즈음에는, 손등의 문양은 어느새 가라앉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소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숙한 곳에 틀어박혔을 것이란 사실을.

"그것은 악마의 낙인. 너의 고귀한 생명을 능멸하고 거짓 불멸을 약속하는 악마의 선물이다."
"아…아파요."
"이제 쉽게 죽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아파해도 된다. 도와주도록 하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이페스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소묘의 손목을 비틀었다.

"아아아악!"

소묘의 오른팔 관절은 완전히 꺾이며 그대로 부러졌다. 이페스는 멈추지 않고 소묘의 어깨에 팔을 대고 당겼고, 어깨마저 순식간에 탈구되어 덜렁거렸다. 그제서야 이페스는 손을 놓았고, 소묘는 후들거리는 몸을 문에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페스는 벽에 박힌 브로켈을 뽑아들고 자신의 발 앞에 박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지. 결계를 풀어라."
"그러면, 절 놔주시는 건가요?"
"아니. 널 용서할 생각은 없다."

이페스는 가볍게 부정했다. 소묘는 왼손으로 칼집을 꽉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 제가 순순히 결계를 풀어드릴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요?"
"적어도 네 육체가 더 이상 고통받는 건 면하게 도와줄 수 있다."
"…자비심이 넘치시네요."
"물론이지. 그런데 팔은 다 나았나?"
"에, 팔… 이요? 방금전에 부러뜨려놓고선… 무…슨."

오른팔을 가리키며 화를 버럭 내려던 소묘는, 어느새 자신의 오른팔에서 더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무의식계에서 받는 데미지는 전부 소묘의 몸에 그대로 반영되는지라, 이토록 빨리 회복될리는 만무했다.

"설마 또 환각…"
"아니,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다."

어느새 얼굴을 맞댈 정도로 거리를 좁힌 이페스는 아까와 똑같은 포즈로 소묘의 오른팔을 잡았고, 소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 부러트릴 생각이다. 이미 한번 겪은 고통의 공포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고, 이페스가 다시 팔을 부러트렸을 때 소묘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페스는 비명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부러진 팔 째로 소묘의 자그마한 몸을 들어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눈물만을 글썽이며 온 몸을 뒤트는 소묘의 귓가에, 이페스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내 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난 네가 미칠 때까지 이 고문을 반복할 것이다. 더 강하게도, 더 약하게도 하지 않아. 이것과 똑같은 고통을 네 팔이 나을때마다 반복한다. 네 이성이 참렬慘烈한 꼴로 붕괴될 때까지."
"아……으."
"하지만 네가 이쯤에서 포기하고 결계를 푼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그때는 브로켈로 깔끔하게 널 베어주겠다."

이페스는 소묘에게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브로켈은 베인 대상이 훗날 치르게 될 업을 먹어치운다. 간단히 말해, 모든 사람이 본래 가진 수명을 무시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송두리채 빼앗는 것── 즉, 이 계약을 무시하고 온전히 죽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지."
"……."
"뭐, 그렇다고 계약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죽음과 동시에 네 영혼은 마계로 떨어지겠지만 말이야. 적어도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고통받다가 미쳐버리고 싶지는 않겠지? 현명한 선택을 원해."
"……가………요."
"잘 안 들려. 좀 더 분명하게 말해주렴."

이페스는 녹색 눈동자가 빛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두 소녀의 몸은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였다. 어느쪽을 선택해도 최악의 결과를 낳는 악마의 유혹이었기에, 이페스는 소묘가 어느쪽을 선택하던 즐거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곧은 의지를 꺾는 것도, 타락한 의지를 짓밟는 것도 악마의 화신인 그녀에게 있어선 감미로운 양식이었다.

"너무………다고……생각……요."
"으응? 너무하다고?"
"너무……"

소묘의 심호흡이 커지며 부러진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페스는 슬슬 회복되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별로 놀라지 않은 채 여차하면 팔을 부러트릴 수 있게 힘을 주었지만, 소묘는 오른팔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가깝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신가요?"
"제안은 기각이군."
"악마의 방식은 익숙하니까요."
"그래?"

이페스는 담담하게 다시 팔을 꺾어 버렸다. 소묘의 오른팔은 복합골절을 일으키며 듣기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지만, 이번에 소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페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은땀만 흘리고 있는 소묘의 모습에 혹시 벌써 자결이라도 한게 아닐까 의심스러워 한 손으로는 소묘의 오른팔을 들어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소묘의 턱을 잡고 들어올려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리고 이페스가 보게 된 건, 뭔가를 입에 잔뜩 물고 볼을 부풀려 다람쥐같은 꼴을 한 소묘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이었다.

"푸핫!"

소묘는 혀를 깨물어 입에 머금고 있었던 피를 한번에 입 밖으로 토해냈고, 순간적으로 이페스는 시야를 빼앗겼다. 보통의 액체라면 악마인 그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을 터였지만, 피는 달랐다. 처녀의 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주술이나 의식의 매개로 쓰였던 역사가 존재했다. 그 상징성은 세월과 사람들의 믿음 속에 겹겹히 쌓여 유형무형의 힘을 부여했고, 근본적으로 같은 기원을 가진 악마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페스는 알 수 없었지만, 본래 소묘의 특기는 물과 관련된 주술. 소묘는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이페스의 시야를 방해하는 주술을 완성시킨 상태였다. 소묘는 얼얼한 혀를 입천장에 문지르며 혀 짧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히고 아까 부며히 마해조? 너무 가까다고."

아직도 소묘는 이페스의 손에 잡혀있는 상태였지만, 소묘의 왼손은 자유로웠다. 그리고 자유로운 왼손에는, 어느새인가 부러져서 손잡이만 남은 선택이 끼워져 있었다. 소묘는 힘겨운 미소를 짓고 왼손을 들어올려 칼 손잡이 끝을 이페스의 복부 쪽에 가져다 댔다. 이페스는 그대로 소묘를 집어던지려 했지만, 소묘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선택. 발사."

단 두마디. 충전시간이 짧은 만큼 그다지 강한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페스가 소묘를 놓고 뒤로 몇발자국 정도 밀려나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페스가 눈의 피를 씻어낼 즈음에는 소묘는 선택의 검집만 손에 꽉 쥔 채 다음 기차칸의 문을 열어제치는 중이었다.

"아아아, 그래! 더욱 더 도망쳐라! 나를 화나게 해라! 애태우게 해라! 그리고 발버둥치며 나를 즐겁게 해라!"

이페스는 공복감과 분노, 즐거움이 뒤섞인 노호를 토해냈고, 브로켈을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기차칸의 문을 날려버렸다. 소묘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오는 철제 문짝을 간발의 차로 피하고,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채 차량 두세칸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차량 사이의 짧은 공간 안에 마련된 화장실을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어 남은 피로 화장실 문 앞에 삐뚤빼뚤한 문양을 그려냈다. 그 작업이 끝나고 잽싸게 화장실로 뛰어들어 문을 닫은 소묘는 그제서야 벽에 기대어 한숨을 돌렸다.

"정말, 악마랑은 말이 안 통하네……하긴, 애초에 말이 통하면 악마는 아니겠지."

소묘는 밖에서 들리는 엄청난 폭음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을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며 칼집을 쥐지 않은 손으로 짧게 목례 자세를 취했다.

"쌤. 번번히 죄송해요. 그래도 여기가 제일 안전한지라……실례합니다!"

소묘의 태도는 상당히 정중했다. 물론, 목례가 화장실 변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정중해 보였을 터였다. 그녀는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은 뒤, 칼집을 두 손으로 받을어 변기 안에 담그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나직하게 기원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께 비나이다. 부디 제 앞에 나타나 고민을 들어주시옵소서. 비나이다……."

임시변통의 불가시不可示 결계는 분명 오래지 않아 간파당할 터였지만, 소묘는 잡념을 애써 떨쳐냈다. 순수하고 간절한 소망만이 신을 불러낼 수 있었기에, 소묘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던 노부부를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이 장소도,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두 잊었다. 그녀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간절히 원했을 따름이다. 압도적이고 불합리하게 강한 악의에 대항할,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힘을 가진 존재의 도움을.



그리고, 그 존재는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반응했다.

"늦어."

밖에서 소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발의 소년의 모습은 투명한 물이 되어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소묘의 무의식계 안에서는 소묘가 있던 화장실 전체가 브로켈에 의해서 두동강이 났다. 만약 소묘가 서 있는 상태였다면, 허리부터 두 동강이 났을 터였다. 하지만 소묘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뒤늦게 의식을 차렸고,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눈 앞에 보인 것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거대한 도끼창의 그림자였다. 소묘는 반사적으로 벽 옆의 빨간 버튼에 손을 누르며 비명처럼 외쳤다.

"쌤, 지금이에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변기로 물이 세차게 흘러들었지만, 이페스는 소묘의 그 행동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브로켈을 그대로 내리쳤다.

그리고, 이페스는 오늘에만 들어 두번째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브로켈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의 틈새에 꽉 끼어버리기라도 한 것 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페스는 쇳조각이라도 두부처럼 잘라낼 터인 브로켈이 어딘가 끼어서 멈춰버렸다는 상상은 할 수 없었고, 소묘에게 브로켈을 멈출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페스의 궁금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브로켈 밑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이렇게 큰 도끼는 금이나 은으로 못 바꿔줘. 한두번 해주니까 날 금은방 할배로 아는 모양인데, 작작 좀 하라고."

맑고 투명한 소년의 목소리. 이페스는 공중에 떠서 브로켈을 끌어당기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변기 위에 불량스러운 자세로 걸터 앉은 흰 도포의 백발 소년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소묘의 칼집이 들려 있었고, 칼집의 주술문양은 녹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직업병이 도졌군. 이거 실례. 네가 서양에서 온 악마인가? 먼길 왔을 텐데 본의 아니게 초면부터 꼴사나운 모습 보여 미안하군 그래."

이페스는 말없이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향했고, 그 끝에선 소리도 없이 무수한 녹색의 마법진이 떠올라 눈부신 빛의 화살을 흩뿌렸다. 지금까지 소묘와 싸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악마가 가진 무한한 마력을 퍼부어대는 물량공세였다. 하지만 소년은 태연스럽게 손에 든 칼집을 가볍게 휘두르며 읊조렸다.

"지켜라."

그러자 소년을 중심으로 해서 반투명의 연한 막이 반원형으로 펼쳐졌고, 이페스의 마법은 전부 비껴나가 주변을 폭격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달리던 기차의 선로 주변에서 폭발이 일어나 기차가 크게 흔들려서 소묘가 꺄아꺄아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옷자락에 매달렸지만, 소년은 매몰차게 소묘를 뿌리쳤다.

"이 아둔한 놈아. 내가 화장실에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내가 무슨 측간신이라도 되는 줄 아냐? 물이 있는 곳이 화장실 뿐이더냐?"
"쌔앰~ 하지만 전 화장실에서 가장 집중이 잘 되니까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히이잉."
"쯧… 내가 너한테 얘기하느니 벽이랑 대화를 하겠다."

소년과 소묘 사이의 사소한 실랑이가 잠잠해지고 폭발로 인한 연기가 걷힐 즈음, 이페스는 브로켈 날 끝으로 소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대체 뭐지?"

그러자 소묘는 신나서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우리 쌤은 말이죠! 우, 우읍!"

소년의 손에 입이 틀어막힌 소묘는 꿀밤을 몇대 맞고서야 잠잠해졌다. 소년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 이페스를 향했다.

"불민한 제자때문에 소개가 늦었군. 난 퇴마사무소 '천양泉壤'의 소장, 이천양李穿楊이라 한다. 그쪽은?"
"나는 무지의 귀공녀 이페스. 나는 네 이름 따위에는 관심 없어. 넌 대체 뭐지? 신이라기에는 너무 약하고, 정령이라기에는 너무 강해."
"뭐어……확실히 서양 말에는 딱히 나 같은 존재를 칭하는 단어가 없는 것 같긴 했다만."

천양은 자신이 요즘 공부하던 영어책을 떠올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풀 죽어 있던 소묘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쌔, 쌤은 600년도 더 묵은……아니, 나이드신……으으, 그냥 그정도로 연륜이 깊으신 산신령님이세요! 원래는 영산靈山의 수원水原에 깃들어 계셔서 거느리는 만신萬神도 많고 그러졌지만 지금은 사당도 무너지고 신통력도 많이 줄어들어서 그저 그렇……우앙! 일일히 쿡쿡 찌르지 마세욧!"
"…한마디만 더 떠들면 입안에 쑤셔넣어 줄테다."
"……."

천양의 협박에 소묘가 다시 잠잠해지자, 이페스는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흠. 본래 자연에 깃든 정령이었다 신앙을 얻어 신에 가까운 힘을 얻었다는 건가. 그것을 이곳에선 신령神靈이라 하는 모양이군."
"뭐, 조야한 언어로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 신령이 악마인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내가 먹어치울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너 따위가 상관할 일이 아냐."
"상관이 많으니까 문제야."

이페스의 말에 천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 악마들이 먹어치우는 것이 인간의 생명과 영혼이라면, 신령인 내가 필요한 건 그들의 믿음이다. 그런데 말이지. 이 믿음이란 놈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서 정말 곤란해. 너희는 인간의 껍데기를 박살내고 생명을 취한 뒤 그 안의 영혼을 꺼내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들로부터 신뢰를 찬찬히 얻고 그들에게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믿음과 감사를 받아야만 공복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낭비다."
"맞아. 정말로…… 귀찮은 일이지. 요즘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난 언젠가 신성을 잃고 잊혀져 버릴테고."

천양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태도에는 더이상 아무도 찾지 않게 된 신으로서의 한탄과 고뇌가 어려 있었기에, 소묘는 뭔가 위로의 말을 꺼내려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러자 천양은 피식 쓴웃음를 지으며 소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하지만 말이지. 그대를 내버려 두고 인간들을 죽도록 방관한다면, 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믿어주는 녀석의 신뢰를 잃게 될 거야. 그것만은 견딜 수 없지."
"쌔앰……."

소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양을 바라보았지만, 천양은 고개를 휙 돌리며 이페스를 노려보았다.

"그 신뢰의 맛이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거든!"
"이해할 수 없군."
"애초에 너에게 이해를 바란적도 없다! 자아, 구구절절한 말은 내던지고 신나게 판을 벌여보자. 네게 천양지차天壤之差를 가르쳐주마!"

천양은 호통을 내지르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칼자루를 이페스에게 향했다. 달리는 기차의 바람이 그의 도포자락을 미친듯이 펄럭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페스는 브로켈을 하늘로 치켜올리며 뇌까렸다.

"브로켈. 네 모습을 드러내라."

하늘이 찢어졌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소리가 고막을 멍멍하게 했다. 하늘을 검은 그림자가 뒤덮는다.
소묘는 뒤늦게 귓가를 틀어막으며, 그 압도적인 힘의 현현을 지켜보았다.

"으, 으오오옷!"

어느새 신령과 악마의 싸움이라는 신화적 전장의 한 가운데에 있게 된 소묘에게는, 입을 쩍 벌리고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3화 : 신뢰信賴

"쌔, 쌔애앰! 이거, 이상해요! 명백히 이상하다구요!"
"……뭐가."
"분명 이 이야기는 귀여운 소녀 퇴마사 백소묘의 본격 퇴마활극 아니었어요? 쌤이 멋있는 장면은 다 가져가고, 뭔가 이상해요!"
"……언제부터 그런 이야기였는데?"
"너, 너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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