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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지차! 제1화

10/08/17

태그 : 소녀,퇴마사,악마

천양지차!


제1화 : 무지無知




한여름의 태양 아래,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노인들, 재잘재잘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조용하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뒤섞여, 기차는 피서지가 있는 지방으로 묵묵히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휴가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는 와중에, 객실 구석자리에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진 청년이 책을 손에 펴 들고 있었다. 그저 옆이나 뒤에서 보면 평범하게 독서중인 청년으로 보일 따름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세에 경악했을 것이다. 책의 표면 위를 훑는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끊임없이 달싹이며 인간의 언어가 아닌 저주의 단어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은 검은 표지를 가진, 제목이 없는 책.

그것은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인간이 아닌 존재를 불러내기 위한 책.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는 자신의 혼과 정신을 전부 쏟아 부었다.
이 기차 안에서 그가 잔혹한 죽음을 선사하고 싶은 건 단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불러내려는 것은 수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이 달리는 기차 안 사람들 전부의 목숨.
그렇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무지는 죄.
눈앞에 닥친 위기와 공포를 알아보지 못하고, 막을 생각도 없는 그 아둔함이 죄다.

청년의 이성은 이미 오래전에 망가져 있었기에, 그 폭론의 모순점을 떠올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검은 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물삼아, 그가 자신이 탄 차량의 위칸에 그려놓은 기하학적 모양의 진이 약동했다. 남자의 피로 그려진, 그 검붉은 진에서는 여름 태양빛으로도 밝힐 수 없는 진한 어둠이 연기처럼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앞자리에 머리를 박은 청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청년의 희미하게 남은 이성과 자제심을 살라먹고 하얗고 가느다란 왼팔이 어둠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동정심과 연민을 살라먹고 오른팔이 어둠에서 튀어나왔다.
자신이 미처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을 불러낸 것인가 깨달을 겨를도 없이, 검은 책은 그의 손 안에서 그대로 녹아버렸고 그 순간 그의 껍데기 안쪽에 존재하는 것을 모든것을 갉아먹으며 어둠 속에서 금빛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이는 금빛의 머리칼. 목 아래로 어둠속에 몸을 담근 소녀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녹색 사파이어 빛깔의 눈동자가 태양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차량 아래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오싹한 한기가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저 '에어콘을 세게 틀었나' 정도의 반응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녀를 불러낸 청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은 어느 새 감쪽같이 녹아 자취를 감추었고, 그 청년을 구성하던 모든 요소는 남김없이 소녀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고 어둠속에서 새하얀 나신을 일으키던 순간, 청년은 옷과 짐만 남기고 그 껍데기조차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청년이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건 어둠속의 소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의 회한과 고통, 분노와 아픔은 전부 소녀의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 바뀌었기에.
그가 지워짐으로 해서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복수의 동기와 상대도 함께 증발해 버렸지만 소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단 소환되면, 그 요구가 어떤 것이라도 응해주는 대신 철저하게 대가를 취한다. 설령 대가로 인해 요구 자체가 소멸할지라도.
소녀는 청년의 연민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오른손에 키스를 하며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방식.

기차는 예정된 비극을 향해 철로를 따라 달릴 뿐이었다.



덜컹. 덜컹.
조금 커다란 진동이 몸을 세차게 흔들었고, 선잠에 빠져 있던 여자아이가 앞좌석 모서리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시트의 재질은 푹신했지만, 무방비한 상태에서 정수리와 모서리가 격돌했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그녀는 '으아이코!' 라는 기묘한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배배 꼬았다. 많이 봐준다고 해도 고등학생쯤 되어 보일까. 검은 단발머리에 단정한 이미지의 붉은 색 셔츠, 검은색 스커트 차림이라 교복을 입은 채로 단체 여행이라도 나온 듯 싶었지만, 주변에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옆자리 역시 길다란 플라스틱 가방이 있을 뿐 동행자는 없었다.
그녀가 결국 참다못해 옆자리의 플라스틱 가방을 끌어안고 끙끙거리자 앞좌석에 앉은 인자한 인상의 노부부가 걱정스럽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맹한 태도로 얼버무리고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일 따름이었다. 노부부는 별난 소녀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태도가 성실해 보였기에 '학생, 조심해' 라는 말과 함께 웃음을 머금었다.
이내, 아픔이 진정된 후에도 그녀는 끌어안은 가방을 내려놓는 것을 잠시 잊은 채 멍하니 차창 너머로 흐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또 살짝 정신을 놓았던 것인지, 그녀는 뒤늦게야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하얀 손을 발견했다.

"으, 으히아악!"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녹색 눈동자에 예쁘장하게 생긴 자기 나이 또래의 금발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당혹감이 퍼져나갔고, 새하얀 얼굴로 엉터리 영어를 늘어놓고 있었다.

"와… 왓츠 더 매러? 하… 하우? 아, 아니지. 웨얼 아유 프롬? 에? 아냐아냐. 웨얼 유 고? 뭐, 뭐뭐더라."
"아니. 나 여기 말 할줄 알아. 옆자리 앉아도 돼?"
"으, 으에? 예! 예! 싯다운! 응?"

그제서야 외국인처럼 보였던 소녀가 유창한 한국어를 구상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짐을 치웠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미… 미안해요… 괜히 당황해서."
"응 아냐. 괜찮아. 반응이 재미있어서 좋았어. 후훗."
"으. 으으… 부끄러워……."

그녀의 반응을 본 소녀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더니, 갑자기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으, 뭐,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잖아. 만난김에 인사하려는 거야. 여기선 악수하지 않아?"
"아, 아니. 하, 하지만."
"응. 다행이네. 내 이름은 이페스. 네 이름은 뭐라고 해?"

이페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생글거리며 질문했고, 그녀는 어색한 포즈로 머뭇머뭇 손을 내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는 소, 소묘. 백소묘라고 해요. 에, 그러니까 이름이 소묘고 성이 백씨니까, 응, 외국인에게는 소묘 백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그냥 소묘라고 불러도 되지? 어감이 특이한 이름이네."
"예! 고, 고마워요."

이페스의 장난기 넘치는 눈동자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는지 소묘는 자꾸만 눈길을 피했다. 이페스는 그런 소묘의 모습을 보며 연신 피식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야. 아시아는 그렇게 자주 들리는건 아니지만, 올때마다 이 반응은 신선하단 말야. 재미있어. 재미있어."
"으, 으으……."

소묘는 이페스의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고 미약한 신음소리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이페스는 생기넘치는 표정으로 소묘 옆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한쪽 눈만을 뜬 채, 이페스는 갑자기 조용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말야. 그거 알아?"
"응? 네?"

이페스는 소묘의 당황스런 말투는 이제 아예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잠시 후 이 열차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
"헤에……."

소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역력하게 꾸민 티가 나서 이페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일부러 관심있는 듯한 표정 안 지어 보여줘도 돼. 소묘 넌 표정에 다 드러난다구."
"응? 저, 정말이에요?"

황급히 소묘는 자신의 작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려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슬슬 소묘의 기행에도 익숙해진 이페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으음. 사실 이런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듣는 녀석은 흔히들 말하는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겠지. 아마도. 나는 어떤게 정상적인 건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말야."
"…그, 그렇지만!"
"응?"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상대가 누구든, 어떤 이야기든!"

소묘의 표정과 말투는 굉장히 진지했기에 이페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소묘가 아직까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발언이었을 것이었다.

"…이야. 김 샜네. 하필 선택한게 너같이 얼빵한 녀석이라니. 하지만 시간도 거의 다 되어가고, 조건은 충족시켜야 하니…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 앞으로 3분 후, 이 기차에 탄 인간은 전부 죽어."

과장되게 입을 쩍 벌린 소묘를 보고 이페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놀라는 표정 꾸며낼 필요 없다니까. 애초에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니까. 네 노력은 가상하기는 하다만."
"…사, 사고가 일어나요?"
"뭐어. 사고라면 사고겠지. 이유를 따지자면 인재人災지만… 현 시점에선 자연재해 같은 것이 되려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처리되겠지."
"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요?"
"간단해. 내가 너희들을 전부 죽여서 소환의 제물로 삼아."

이페스의 심드렁한 말투에 소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페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에게 감정은 없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니. 이해해.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일은 즐기고 있거든. 나도 일단 악마니까."

고개를 숙인 소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페스는 소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웃고 싶으면 실컷 웃어도 돼. 사실 나 웃는 녀석 목 날리는걸 최고로 좋아하거든. 그거 알아? 웃는 놈 목 자르면 한동안 계속 웃고 있다. 헤헷."

소묘가 고개를 숙인채 품속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지만, 이페스는 더 이상 소묘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무덤덤해진 초록빛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자아. 시간도 되었고, 능력의 발동조건도 채웠고. 그럼 식사를 시작해 보실까. 맨 처음엔 역시…"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된 인물이지만, 소환자의 복수의 대상이었던 녀석을 맨 첫번째로 정했다. 순서에 별 다른 이유는 없고, 단순히 이페스의 취향일 따름이다. 이미 소환 직후에 전 차량을 돌며 그자의 위치를 확인해 둔 상태였기에, 망설임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페스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녀의 어깨를 잡는 작은 손이 있었다.

"뭐하는 짓이야?"

소묘의 손이라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던 이페스는 손을 휘둘러 그 팔 자체를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소묘는 미끄러지듯 굴러서 이페스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미, 미안해요!"

반사적인 외침과 함께 소묘의 왼손에선 누런 종이가 펼쳐졌고, 붉은 색으로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은 선과 점들이 오간 그 종이가 부적이란 것을 이페스가 깨닫기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짧은 방심을 소묘는 놓치지 않았다.

"무의식계無意識界, 소화燒火!"

소묘의 오른손에서 지포 라이터가 켜졌고, 이페스가 보는 눈앞에서 부적은 불타올라 사라졌다. 그 순간, 소묘는 정신을 잃은 채 스르륵 앞으로 무너져 내렸고, 이페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아찔한 감각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고 당황해서 비틀거렸다. 이내 그녀의 눈은 빛이 흐려졌고, 악마로서의 본질을 잃은 육체의 껍데기는 버티지 못하고 소묘의 위에 겹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소녀 둘이 급작스럽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소녀들을 부축하려고 달려가려고 한 순간, 그 차량의 맨 뒷문이 열리며 파란색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은 싱긋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모든 사람들에게 고했다.

"소란 피우지 마. 별것 아니잖아? 그냥 잠들었을 뿐이야."

단 세마디.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혼란과 소동이 거짓말인 것처럼 원래 자신들이 열중하던 일에 각자 몰두하기 시작했다. 방금전 차량 한가운데서 쓰러진 두 소녀를 신경쓰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오직 소년만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서 양손에 각각 소묘에 이페스를 움켜쥐고 소묘가 방금전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짐짝마냥 휙휙 던져넣었다. 명백히 두 소녀보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소년의 터무니없는 괴력과 소녀들에 대한 심한 취급은 충분히 눈에 띄일만도 했지만, 사람들은 마치 그 자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웃고 떠들었다.
소년 역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두 소녀의 몸을 창가쪽 자리에 우겨넣고 자신은 복도쪽 자리에 앉아서 기지개를 켰다.

"정말 손이 많이 가게 하는 녀석일세."

소년이 모자를 벗자, 길고 풍성한 백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모자 안에 도저히 들어있었다고 믿기 힘든 그 머리칼을 한두번 흔드는 것 만으로 깔끔히 정리한 소년은 점퍼에서 핸드폰을 꺼내 넥스트랩을 목에 걸었고,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책 한권을 꺼내 펼쳐들었다. 붉은 표지의 제법 두께가 있는 책으로, 겉면에는 커다란 흰색 글씨로 '이 책 한권으로 영어 완전정복!' 이란 광고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이내 소년은 어깨를 으쓱이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옆자리의 두 소녀들에 대한 일마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때, 이페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악마가, 구토를 일으킬 듯한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악마의 본질이 왜곡되는 감각.
이페스는 타오르는 부적이 눈에 비친 순간, 자신의 존재가 짓눌려 압축되고 단순화되어 눈 앞의 조그만 소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코끼리를 냉장고에 우겨넣는 것 같은 일이었고, 농담처럼 웃어 넘기기에는 정작 찌그러지는 코끼리의 입장인 이페스에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온 정신을 뒤흔드는 어지럼증이 거의 사라지고 시야가 트일 즈음, 이페스의 눈 앞에서는 두 손을 모은 채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 소묘가 있었다.

"미안, 미안해요! 원래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페스는 터무니없는 황당함과 함께,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주변에 만연히 느껴지던 기차 안의 수많은 인기척이, 일시에 사라졌다. 기차는 여전히 달리는 와중. 단 한번도 멈춘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연기처럼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여기저기 놓여진 짐도 그대로. 지금 이 기차에 존재하는 건, 아니, 지금 이 순간 세계에 존재하는 건 이페스와 눈앞의 소묘 단 둘뿐이었다.
이페스는 분노에 휩싸여 소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무슨 짓을 한거야."

본래라면 의식이 시작되어야 했을 시간은 지났고,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이 이페스의 온몸울 전율하게 했다. 들떴던 악마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소묘는 난처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니까아, 딱히 숨기려고 했던건 아닌데, 하필이면 이페스씨가 능력 발동 조건으로 절 고르는 바람에, 저는 당황해서, 혹시 제가 퇴마사인걸 들켰나 하고 가슴졸이고 있었는걸요. 휴우."
"퇴…마사…라고?"

그러고보니 들은 기억은 있다. 아시아의 엑소시스트 같은 존재였던가. 하지만 눈 앞에 있는 터무니없이 어리버리한 존재가 자신을 구속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예에. 뭐 일단은 그래요. 쌤에겐 매일 욕만 먹고 있긴 하지만."
"일단은? 일단은 그렇다고? 빌어먹을!"

이페스는 소묘를 들어올린 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지만, 악마다운 이성으로 간신히 분노를 삭혔다.

"대체 이건 무슨 결계야?"
"무의식계. 제 무의식 세계의 투영이에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엔간한 존재는 이 결계세계 안에서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몇백년이나 묵은 산신령이라고 뻐기던 쌤도 처음 이쪽에 왔을때는 1시간 이상 졸도해버렸… 우윽!"
"닥쳐! 네 무의식이 얼마나 멍청한지에 대해 알고 싶은게 아냐.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지? 난 배고프단 말얏!"

결국 이페스는 분노가 담긴 엄청난 힘으로 소묘를 집어던져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차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릴 정도의 힘이었지만, 소묘는 날아가던 와중 고양이처럼 몸을 구부리더니 천장을 밟고 좌석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페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소묘는 좌석 사이에서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플라스틱 케이스는 열린 채 바닥에 쓰러졌고, 어느새 소묘의 등에는 연보라빛 주술각인이 새겨진 검집이 매달려 있었다.

이페스의 앞에서 경의를 표하듯 살풋 고개를 숙인 소묘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내보내 드릴 수 없어요."
"…네놈."
"이페스씨 같은 강대한 존재가 대체 어떤 연유로 여기 불려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퇴마사로서 무고한 희생을 묵과할 수는 없어요. 그것이──"

소묘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품에서 검은 완장을 꺼내 왼팔에 걸어 미끄러트렸다.

"쌤이 운영하는 저희 퇴마사무소의 행동강령입니다!"

귀여운 흰색 유령에 붉은색 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케 할만한 디자인이었지만, 이페스의 마지막 자제심을 끊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 퇴마도退魔刀 선택仙澤으로 당신을…… 에, 어."

말을 이으려던 소묘는 이페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운에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이페스의 머리 뒤쪽에선 사람을 홀릴 듯한 녹색 빛이 번뜩이며 육망성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고 얼굴 표정에선 인간다움이 완벽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아. 명색이 72위位의 악마중 한 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 무지無知의 귀공녀 이페스Ipes가, 고작 인간 여자 엑소시스트 따위에게 능멸을 당할 줄이야.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모멸감이로다."
"에… 이페스씨? 저… 대사……."
"나오거라. 나를 따르는 잔혹한 해룡海龍의 소녀여. 그 이빨을 드러내 나에게 바치라."

마법진으로부터 푸른색 머리칼의 소녀의 실루엣이 슬쩍 비치더니, 실루엣은 이내 물처럼 공중에 산산히 흩어져서 형체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그마한 이페스의 키를 훌쩍 뛰어넘은, 차량의 천장에 맞닿을 정도로 거대한 양날 도끼창. 그것도 위 아래 모두에 서늘한 날이 번뜩이고 있다.

"이 종의 이름은 브로켈Broquel."

이페스는 무표정하게 브로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도끼창을 들어올렸다. 소묘는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기… 그거 너무 큰데요……."
"네 오만을 찢어발기는 4개의 이빨이 되리라!"

그리고 이페스의 손에서 브로켈이 짧게 회전했다. 동시에,

"으, 으아이앗!"

소묘는 도를 뽑지도 못한 채 뒤로 미끄러졌고, 굉음과 함께 도끼창이 지나간 자리는 말 그대로 찢어발겨졌다. 창문이 깨어져 유리조각들이 흩날리고, 기차를 구성하던 금속 조각들이 일제기 끼익끼익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요동을 쳤다. 운전수도 없이 열심히 달리던 기차는, 잘려진 뒤쪽의 차량이 추진력을 잃기 시작하면서 달리는 차량과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악마의 증표인 검은 뿔과 꼬리를 드러낸 이페스는 무표정하게 도끼창을 소묘에게 내리치며 다가왔다. 도끼창이 스칠때마다 종잇장처럼 잘려져 나가는 시트는 보기만해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차량의 뒤쪽 구석까지 몰린 소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야 물론 결계를 풀 생각이다."

무덤덤한 태도로 도끼창을 내찌르며 이페스가 대답했다. 소묘는 간발의 차로 그 날을 피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 거대한 날이 관성을 무시하고 방향을 그대로 틀어 목을 향해 그대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허리가 꺾어지도록 몸을 비틈과 동시에, 소묘의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떨어졌다.

"…마음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나요?"
"결계란 것은 대개 술자를 죽이면 풀리지."

이페스의 냉랭한 대꾸에 소묘의 표정은 얼어붙었다. 이페스는 브로켈을 휘두르는 손을 늦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고로, 널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그, 그런 야만스런 방법 말고 대, 대화로는 안될까요…… 으, 으히아악!"

이페스는 대답 대신에 소묘의 오른쪽 어깨죽지를 일도양단하려는 기세로 브로켈의 날을 내리쳤고, 소묘는 바람빠지는 비명과 함께 곡예에 가까운 회피동작을 선보여야 했다. 그 광경을 본 이페스는 몸을 한바퀴 돌리며 브로켈을 크게 휘둘렀고, 이번에는 피한 방향과 정 반대인 등 뒤에서 도끼창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게 되었다. 도저히 피할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묘는 손가락으로 특이한 형태의 인印을 맺으며 짧게 외쳤다.

"선택, 수호守頀!"

그러자 등 뒤의 검집에 새겨진 보라색 각인이 빛을 발했고, 도끼창은 검집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멈춰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페스는 혀를 차며 브로켈을 끌어당겼다. 저래보여도 엑소시스트. 꼴에 몸을 지킬 마법 쯤은 어느정도 익히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내 이페스의 초록색 눈동자는 눈부신 빛을 발했고, 그녀의 머리 위쪽을 맴돌던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더더욱 강해졌다. 그 알량한 잔재주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될 전율과 절망. 이페스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소묘는 대치한 이래 처음으로 앞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기차의 복도 가운데서, 너덜너덜한 양쪽 의자의 팔걸이에 몸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무릎을 꿇은 자세. 마치 목을 베어달라고 하는 듯한 기괴한 자세였다. 이페스는 그 동작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잠시 멈칫거렸고, 소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 손으로 팔걸이를 세차게 잡으며 크게 외쳤다.

"선택, 발發──"

이페스는 소묘의 외침에 흠칫 놀라 브로켈을 들고 경계했다. 그러자 이내 엄청난 힘의 흐름이 소묘의 등에 걸린 검집에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묘의 검집에 새겨진 각인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칼자루 끝이 자신의 미간을 정확히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페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제서야 소묘는 주술의 완성을 고하는 두번째 외침을 토해냈다.

"사射!"

쾅!
소묘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각인에 새겨진 푸른 빛이 폭발했다. 검집의 주술각인에 모인 힘은 전부 그녀의 퇴마도, 선택에 전달되었고 선택은 그 순간 말 그대로 '발사' 되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물리법칙이 선택을 쏘아낸 검집과 그것을 등에 진 소묘를 세차게 강타했고,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소묘는 하마타면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한편, 쏘아져 오는 선택을 바라본 이페스는 브로켈을 들어올려 바닥에 세차게 내리꽂아 자신의 앞에 박아버렸다. 이페스는 설마 칼을 그대로 쏘아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불의의 일격을 받은 셈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에 그대로 막기로 한 것이었다.

펑!
그리고 또 한번의 폭음이 기차 안을 흔들었다. 그 여파로 파편과 먼지가 흩날리는 와중에 소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브로켈과 함께 무릎을 꿇은 이페스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헤에. 아까랑 반대가 되었네요?"
"네……놈."

이페스의 오산은 단 하나. 선택의 발사가 순수한 물리력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었다. 유형무형의 그 어떤 주술적 공격도 방어태세를 굳힌 이페스에게 타격을 입히기 힘들었을 터이지만,소묘가 사용한 선택의 발사는 추진력을 얻기 위한 힘이 주술력이었을 뿐, 날아가는 힘 자체는 완벽하게 순수한 운동 에너지였던 것이 허를 찌르는 공격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검술대회에서 발사한 총을 맞은 격이었기에, 이페스는 선택이 브로켈과 부딪히는 엄청난 충격만으로 브로켈의 위쪽 도끼날과 함께 바닥을 부수며 뒤로 밀려나갔고 급기야 무릎까지 꿇게 된 것이었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좀 드셨나요?"

소묘는 아픔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긴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는 태도로 이페스에게 말을 걸었고, 이페스는 멍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택, 귀환貴還!"

소묘의 손짓과 함께 선택은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긴 호를 그리며 날아와 소묘의 앞에 떨어져 박혔다. 소묘는 가벼운 동작으로 칼을 뽑아들어 천천히 날 끝을 내려 이페스에게 향했다.

"대화와 대립. 이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이페스는 소묘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뭔가를 웅얼거렸다.

"……한다."
"예? 잘 안들리는데요."
"……철회한다."
"뭘 말이죠?"

이페스는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눈동자로 담담하게 말했다.

"널 죽이겠다는 말을 철회한다."
"그거 기쁘네요. 대화로 해결하겠다는 뜻인가요?"
"너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에, 호의는 기쁘지만 갑작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소묘의 반응을 무시하고, 이페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멸은 악마의 사냥감에게 찍히는 낙인. 너는 살아있는 채로 사지를 찢기고 탐욕스러운 악마들에게 던져질 것이며, 네 몸과 정신은 영원히 능욕될 것이다."
"……에……저기……결계는……."
"결계를 푸는 방법 따위는 천천히 네 머릿속에서 뽑아내면 그만이다. 가자. 브로켈."

낮지만 위협적인 용의 표호가 깔렸고, 이페스를 감싼 분위기는 또 한번 일변했다. 이페스는 느릿하지만 강력한 힘을 담아 브로켈을 들어올렸다.

"받아라."
"으, 녜?"

위압적인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선택을 들어올린 소묘는, 있는 힘껏 치켜올려진 브로켈을 보며 엄청난 후회에 시달렸다. 미처 고민할 시간도 없이 단두대의 날처럼 브로켈의 도끼날이 소묘를 덮쳤고, 소묘는 선택을 들어올려 브로켈을 흘러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페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끝이다."

브로켈의 또다시 방향은 급격하게 틀어져 선택과 직각으로 맞물렸고, 그 엄청난 질량의 차이를 이기지 못한 선택의 날은 불꽃을 튀기며 잘려서 날아갔다. 브로켈의 날은 선택을 자르고도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해 시트를 가르며 박혀 들어갔고, 소묘는 어깨가 부서질 듯한 통증보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황당함을 느꼈다.

"이게 뭐야아!"

물론 상황은 무척이나 명백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악마 앞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박살났다. 단지 그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소묘는 자루만 달랑 남은 선택을 들고, 흉흉한 도끼창의 날을 피해 미친듯이 다음 차량을 향해 도망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쌔애애앰! 완벽한 시나리오라면서욧! 이런 전개는 예상에 없었잖아요! 책임져요! 도와줘요! 으흐아아앙!"

퇴마사와 악마의 목숨을 건 술래잡기는, 그제서야 본격적인 시작을 고하고 있었다.



>> 천양지차! 다음 이야기! 제2화 :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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