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나의 시간
한밤의 학교란 을씨년스럽다. 낮의 학교가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들로 가득 차있던 것에 대비되어, 넓은 건물과 대지를 감싼 어둠과 정적은 유난스레 도드라졌다. 그 텅 빈 학교를 보면 차오르는 막연한 공포감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밤의 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건 교사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밤새도록 학교에 남아있는 당직근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사회의 위계질서란 그렇게 녹록치 않은 법이다. 나는 갖은 핑계를 대고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임들의 당직마저 떠안고 속으로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오래된 이야기.
새벽 12시를 넘어가는 시간, 에어컨의 온도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후끈거리는 찜통같은 숙직실에 앉아 하릴없이 시계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것은 고독감이나 두려움 같은 고상한 감정이 아니라, 식욕이라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있으려나. 그 녀석."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오히려 없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스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나는 고민하는 대신 책상의 열쇠꾸러미와 손전등을 챙겨 숙직실을 나섰다.
후텁지근한 늦여름밤의 공기가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지만, 좁은 숙직실에서 틀어박혀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일부러 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선다. 아무래도 여긴 여자고등학교다 보니, 교실을 슬쩍 손전등으로 비출 때마다 부주의하게 벌려놓은 체육복 옷가지라든가 여러모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이 많았지만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무시했다.
숨어서 공부하거나 장난치던 녀석들이 잽싸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들도 빤히 보였지만, 그냥 못 본 척 해주고 만다. 나도 이 모교에서 한때 거쳤던 일이기에, 학생시절에만 만끽할 수 있는 소소한 일탈의 쾌감을 굳이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무척 고지식하고 깐깐한 인간으로 아는 학생들이 들으면 정색을 할 이야기겠지만 어쩔 수 없다. 특히나 여학교의 여교사로서, 한번 얕보이게 되면 끝장이라는 사실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 뒤엔 일부러 학생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건방지거나 재수 없는 교사로 인식되면 그거 나름대로 난감하기 때문에 나도 이미지 관리엔 필사적이다.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전투를 치루는 느낌이랄까.
"……뭐, 그 녀석을 상대하는 것에 비하자면 새발의 피지만."
한숨을 푹 쉬고 나니, 어느새 과학실의 문 앞이었다. 나는 열쇠꾸러미 안에서 과학실의 열쇠를 찾아내서,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코끝을 쏘는 과학실만의 독특한 공기를 맡으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밤인데도 안쪽의 형광등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실험대 앞에서 교복을 입은 소녀가 실험도구를 즐비하게 차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려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야. 오늘은 대체 뭐하는 거니?"
예상여자고등학교 2학년 4반 출석번호 11번 나하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시험관을 들어 보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라면 끓이는 중."
대답은 그것 뿐. 하나는 고개를 숙여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였고, 삼발이 위에 물과 탱탱한 흰 면발이 들어간 비커를 올려놓았다. 인사 한마디 없는 그 뻔뻔함에 나는 화낼 타이밍조차 놓쳐버리고 말았다. 멍한 얼굴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삼발이 위 비커의 물이 끓으면서 안의 면발이 춤추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아도 굶주려 있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하나는 시험관을 들어 올리다 말고 내 쪽을 빤히 쳐다보았고, 나는 다급하게 안경을 고쳐 쓰며 하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흐응. 선생님도 배고프구나."
교사로서의 위신을 세울 틈도 없이, 나는 하나의 확인사살에 고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눈앞에 비커와 유리막대 두 개가 쑥 내밀어졌다.
"2인분 했으니까, 배고프면 선생님도 먹어."
하나는 판결 선고라도 하듯 제 할 말만 마치고, 터벅터벅 다시 실험대로 돌아가 시험관 속의 정체모를 액체를 몇 번 흔들다가 면이 끓는 비커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라면 스프로 짐작되는 그 액체는, 이내 물에 퍼지면서 붉은 색으로 끓어올랐다. 비커 안의 내용물은 이제 제법 라면 같은 구색을 갖추었다.
"…그건 뭘로 만들었니?"
"흐응. 궁금해? 알려줄까요?"
"아니. 됐어."
저렇게 나올 때는, 물어본다고 해서 신통한 대답이 나올리 없다. 게다가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괜스레 기분 나쁜 재료명을 들었다간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좋을 라면 스프의 정체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잘 먹을게."
"……응."
젓가락 대신에 두 개의 유리막대를 집어든 나는 자신 분량의 라면을 역시 비커에 담아서 후루룩 잘도 들이마시고 있는 하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아이였다. 나는 하나가 끓여준 라면을 유리막대로 건져 올리며 하나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직 봄이 지나가지 않았지만 슬슬 더위가 찾아들던 학기 초의 당직일. 그때 왜 한밤의 과학실로 발걸음이 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하나가 실험도구로 요리하고 있던 음식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기겁을 하는 내 앞에서, 하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된장국 끓이는 중."
고작해야 라면을 끓이는 오늘보다도 훨씬 본격적인 재료를 갖추고 있었고, 그때는 실험대라기보다는 조리대라고 부르는 편이 낫게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 음식재료들이 죄다 과학실에 비치된 용기에 담겨있지만 않았으면, 나는 가정실습실에 들어온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선생님 몫은 없어."
그런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충격을 받고 멀거니 하나가 요리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하나에게 어떤 오해를 살 수 있게 보였을지 말이다.
나는 그제서야 화를 내며 이게 무슨 짓이냐며 훈계했지만 나 스스로도 하나에게 대체 뭐에 대해 훈계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에 결국 지리멸렬한 설교가 되어버렸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그것을 끝까지 듣고 있던 하나는 내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 이야기를 정리해볼게. 내가 수업시간 외 과학실 무단출입, 학교 비품 무단사용, 명찰 미착용, 교사에게 반말 사용, 그 외 기타 등등의 잘못을 했으니 당장 중단하고 집에나 가서 자면 한번은 용서해주겠단 이야기지?"
"……그래."
내 장대한 설교를 시험 요점 정리하듯 단번에 정리해버리는 대범함에 나는 지금도 반말을 쓰고 있지 않느냐는 항변을 할 기운마저 잃었다.
"그런데 그거 전부, 교사가 허락해주면 되는 일이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짓을 허락해줄 사람이 어디 있니?"
"있어요."
갑자기 존댓말로 단언하는 하나를 향해, 나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따지고 들었다.
"누구?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당장 물어볼 수도 있어. 말해봐."
"당연히 과학실을 담당하는 화학 선생님이죠."
보통 내가 으름장을 놓으면 아무리 반항심 가득한 시기의 아이들이라도 지레 겁먹기 마련이었는데, 하나는 천연덕스럽게 즉답을 내놓았다. 난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어 동료 교사들의 항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과학실 담당의 화학 선생님, 과학실 담당의…….
난 그러다 문득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허락은 언제 받았는데?"
"방금 전이요."
"선생님 이름은?"
"글쎄. 소…뭐였는데. 이름은 까먹었어."
"그건 나잖아!"
적어도 눈앞에서 훈계하는 선생님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줬으면 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학교 과학실 담당에 화학을 가르치고 있는데다 '소'라는 성씨를 가진 건 나 하나뿐이었다. 이젠 화가 난다기보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난 최후의 반론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언제 너한테 과학실 사용을 허락했는지……"
"아. 국 다 끓었다."
그때까지 있었던 대화의 의의를 무색하게 하는 발언을 던진 하나는, 나를 완벽히 무시하고 실험대 쪽으로 달려갔다. 실험용 스푼과 유리막대를 늘어놓고, '잘 먹겠습니다' 라는 인사까지 하는 하나에게 내 이성은 완벽한 패배를 선언했다.
그냥 앞뒤 안보고 귀라도 잡아끌어 집으로 돌려보낼까, 하고 고민하던 내 눈에 다른 실험대 위에 흐트러져 있는 종이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A4용지에 빼곡히 프린트된 숫자와 문자들. 무엇인지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시간이 적혀 있었다. 이거, 통화기록인가? 흘끗 다른 종이들을 훑어보니, 역시 내용은 같지만 형광펜으로 직직 그어지거나 붉은 색연필로 낙서가 된 것들도 많았다. 그 중 한 장을 집으려고 하다가, 나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뭐지?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과 색만 다를 뿐 같은 모델인 핑크색 핸드폰이었다. 거기에는 리본을 매단 흰 토끼 인형이 달려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내가 그 핸드폰에 손을 뻗는 순간,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불의의 습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하나가 나를 밀치며 책상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내 손 안에 있던 종이가 구겨지면서 찢어졌고, 실험대 위에 쌓여 있던 종이뭉치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실험대 위에서 마치 겁에 질린 작은 동물과도 같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를…건드리지 마."
핸드폰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하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의 그 당당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연약한 아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거짓말이나 연기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위태로운 상태의 아이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자신의 비겁함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가…주세요."
이젠 거의 애원하듯 목소리를 짜내는 하나를 나는 더 이상 직시할 자신이 없어서 몸을 돌리고 말았다.
"미안해."
그 말만 남겨놓고, 나는 도망치듯 과학실을 빠져나왔다. 힐에 유리조각이 밟히는 소리가 났지만, 난 한순간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신없이 숙직실로 돌아온 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 과학실에 들려보니, 전날 밤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실험도구는 전부 제자리에 있었고, 요리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방에 흩뿌려졌던 종이들 역시 한 장도 없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땀이 가득 차도록 꽉 쥐고 있었던 오른손을 펴 보았다. 손 안에는 하나가 달려왔을 때 찢어진 통화기록 용지의 일부가 쥐어져 있었다. 너무 구겨지는 바람에 내용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종이의 내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나와의 만남이 꿈이 아니란 걸 확신시켜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종잇조각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하나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하나를 다시 만나게 된 건, 낮의 학교였다.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했던 나는 하루를 쉬었고, 다음날 학교에서는 수업은 하는둥 마는둥 하고 학생명부를 이 잡듯이 뒤져서 하나의 학년과 반, 신상명세를 꼼꼼히 알아냈다. 마침 그날은 3학년밖에 화학수업을 하지 않았기에, 혹시 하나가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나는 하교하는 시간에 그대로 2학년 4반에 쳐들어갔다.
있었다. 태연스러운 얼굴을 하고, 책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주워 넣고 있는 하나가 보였다. 밤과는 다르게 명찰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하나에게 다가갔다.
"나하나. 선생님 기억하지?"
하나는 고개를 돌리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무심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서 움찔했지만, 하나는 마치 날 처음 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수업시간에 보니까 기억하죠. 무슨 일이시죠?"
이녀석, 존댓말 제대로 쓰고 있잖아. 왠지 열 받는다. 하긴 하나는 분명 내 수업을 들은 적이 있을 테지만, 워낙 수수하고 눈에 안 띄는 아이였던지라 나로서는 한밤의 과학실에서 일어난 그 일만 없었더라면 한눈에 보고 알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개의 반에는 한두명씩 꼭 있다. 얼굴을 보면 본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이름과 성격은 흐릿한 그런 아이가. 낮의 나하나는 그런 존재감 없는 아이들 중의 한명이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언제까지 시치미 뗄 셈이야?"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당혹한 표정을 짓는 하나에게, 나는 꾸깃꾸깃 구겨진 종잇조각을 펼쳐보였다.
"정말로 기억 안나?"
"그건……."
처음으로 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내가 숙직하던 날 밤, 과학실에서 만난 적 있었지."
"……죄송해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다른 누군가랑 착각하신 것 같네요."
"착각할 리가 없어."
나는 내 시선을 피하려는 하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나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결국 자포자기한듯 고개를 숙였다.
"결국 제 비밀을… 들켜버리고 말았네요."
"그럼 열쇠도 없는 과학실에 한밤에 어떻게 침입했는지부터 들어볼까."
"제가… 그런 짓을 했었군요?"
"무슨 소리야. 방금 전 실토했잖아. 들켜버렸다면서."
이제야 가면을 벗겨내나 싶었는데, 나는 슬슬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저… 종종 기억이 사라져요."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내 당혹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는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실은 그저께 밤의 기억도 전혀 없어요…! 정신을 차려보면 교복 차림에, 옷은 엉망이 되어 있고……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졸이고 있었단 말이에요! 선생님은 절 보신 건가요?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는 건가요? 제발 알려주세요!"
눈물마저 글썽이며 달라붙자, 내 머릿속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 아이에게 정말 심각한 정신적 문제라도 있는 건가? 물론 거짓말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이 나이 또래 애들은 감수성이 민감하기에 정말 터무니없는 망상에 시달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실제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본적도 있기에, 나는 매우 난처해졌다. 무엇보다 조사하다가 알게 된 하나의 가족사정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불안한 정신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쯤 되면 이미 교사의 영역이 아니라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렇게 고민하며 머뭇거린 순간 내 주의력은 잠시 산만하졌고, 하나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 품안에 파고든 하나는 폴짝 뛰어올라 내 손을 덥석 양손으로 잡았다.
"에잇!"
"뭐, 뭐하는 짓이야!"
앗 하는 사이에 내 손의 종잇조각은 하나의 손으로 들어갔다. 하나는 종잇조각을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이건 몰래 손에 넣은 거라 선생님 손에 있으면 곤란하거든. 그런데 말이지."
허탈하게 빈손을 늘어트린 나에게 하나는 한심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진심으로 믿었던 거야? 내 얘기."
나는 결심했다.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하나의 콧대를 꺾어주겠다고. 그 결심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울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기에, 나는 하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나하나! 거기 얌전히 있어!"
"흐응.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네."
사람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능청스러운 언행. 밤에 만났던 하나의 태도 그대로였다. 나는 하나를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하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를 피해버리고 교실 뒷문으로 가서 나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럼, 먼저 갈게."
나는 하나의 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뒷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막상 나가서 둘러보니 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2학년 4반 교실은 복도 중간쯤에 있어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내가 밖을 내다보기 전에 계단으로 달려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주변의 텅 빈 교실을 모조리 둘러봤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또다시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손을 꽉 쥐었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가 방금 전까지 있었다는 증거는 지금 나에게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질문했다.
나하나는, 대체 어떤 아이지?
그날 이래, 내 개인적인 의문과는 별개로 하나는 낮의 학교생활에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이 행동했다. 친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반 아이들과 교류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따돌림의 대상도 아니었다. 성적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질 정도로 특출난 것도 아니다. 교사의 말에는 성실히 따르는 편이고, 꼬투리도 잡는 법이 없다. 실제로 수업에서 몇 가지 짓궂은 심부름을 시켜보았지만, 하나는 별말 없이 그것을 척척 해왔기에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면박을 주리라 벼르던 나는 꿀 먹은 벙어리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길게 이야기하려고 하면, 하나는 이리저리 수완 좋은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 버렸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나의 문제는 내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기에 당직날 밤에 과학실에서 있던 이야기는 주변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했다. 혹시나 싶어서 동료 교사들에게도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체로 예전의 나와 같이 '그런 학생이 있었나?' 라는 수준이었기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당직교사들에게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우리 학교의 과학실은 차광이 잘 되는 편이라 안쪽에서 불을 켠다고 해도 밖에서 알아볼 도리가 없고, 무엇보다 한밤에 과학실 같은 곳을 일부러 열어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밤의 학교는 나에게 여전히 기분 나빴기에 관리를 맡고 있는 과학실이지만 한밤중에 들려본 건 하나와 만난 그날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나는 낮의 하나에게는 두손두발을 다 들고야 말았다. 결국 나는 직접 밤에 다시 부딪혀보는 수밖에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해서, 당직이 다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대망의 당직날, 나는 수위실의 할아버지가 잠드는 12시가 넘자마자 숙직실에서 뛰쳐나와 과학실로 향했다. 하나가 거기 있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과학실은 굳건히 잠겨 있었지만 열쇠로 제꺽 열어버렸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실험대 앞에서 비커에 담긴 거무스름한 뭔가를 부글부글 끓이고 있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단팥죽 끓이는 중."
하나는 태연스럽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설마 내가 한밤중에 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나는 하나에게 한방 먹였다는 느낌에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동지 섣달도 아닌데 왠 단팥죽이니? 이 여름밤에."
"……이열치열이야. 선생님한테는 줄 생각 없으니 걱정 마."
예전과는 달리 가시 돋은 목소리로 대꾸한 하나는, 알코올램프의 뚜껑을 덮어 불을 끄고 단팥죽이 담긴 비커를 실험대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애들 같은 반응이네. 나는 진즉에 한밤의 과학실에 들려볼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내 존재를 아예 무시해주겠다는 듯이 단팥죽을 우걱우걱 밀어 넣는 하나에게서 눈을 돌려 옆의 실험대를 보아하니, 예전보다 훨씬 더 불어난 듯한 종이뭉치가 날 반겨주었다.
"그거, 보는 건 상관없지만 가져가지는 마."
열심히 먹는 와중에도 날 주시하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하나가 나를 향해 외쳤지만 나는 한귀로 흘려버렸다. 어차피 종이에 인쇄된 통화기록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뭔가 잔뜩 체크된 종이가 반, 전혀 손도 안 댄 종이가 반씩 쌓여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 종이와 함께 봤던, 리본을 매단 토끼가 달려 있는 핑크색 휴대폰이 보이질 않았다.
"……아빠, 인가."
하나가 먹는 소리가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천천히 저장되어 있던 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유쾌한 전화벨 소리가 과학실 안에 울려 퍼졌고, 하나쪽을 돌아보니 하나는 당황해서 단팥죽을 먹던 손도 제대로 닦지 못한 채 교복 뒷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느라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서 조금 더 놀려줄까 생각했지만, 맨 처음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렸던 하나의 눈을 생각하고는 그런 생각을 지웠다.
하나가 간신히 휴대폰의 버튼을 눌러서 전화벨을 껐을 땐, 교복 여기저기에 흉하게 단팥죽이 묻어 있었다. 내 전화기와 자신의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뭐라 말을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하나를 보고, 난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단 휴대폰 소지 자체가 금지니까 말야. 그게 네 폰이 아니라면 너희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해서 번호를 적어온 것뿐이야. 그렇게 허둥댈 필요 없어."
"그렇지만…… 그게, 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됐어. 그것보단 여자애가 옷을 그렇게 더럽히면 어떻게 해. 잠깐 가만히 있어봐."
나는 휴지에 물을 묻혀서 흰 교복에 묻은 얼룩을 대충이나마 닦아냈다. 하나는 품에 휴대폰을 껴안고 있었는데, 여전히 그 휴대폰에는 토끼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내 손길이 닿으면 조금 움찔거리긴 했지만, 하나는 잠시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하나가 약간씩 떨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 됐다. 이제 깨끗해."
"……고마워."
조그만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건넨 하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남은 음식을 마저 먹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반대편에 앉아서 말없이 하나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스푼을 내려놓은 하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묵직한 분위기가 참을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저기, 하나야. 죄인 추궁하러 온 거 아니니까 고개 들어도 돼. 그러면 내가 부담스럽잖니."
"……응."
"그래. 평소처럼 뻔뻔하게 얼굴도 펴고 말이야."
"……뻔뻔한 얼굴 한적 없어."
그제야 조금씩 평정을 찾아가는 하나를 향해,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하나는 그게 보기 싫었던지,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시선을 돌렸다. 나는 하나가 품고 있는 휴대폰의
토끼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인형, 소중한 거야?"
하나는 순식간에 경계심을 품으며 토끼인형을 끌어당겨 품 깊숙이 안았다. 그 반응에, 나는 약간 의자를 빼서 물러서며 손으로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니. 안 빼앗을 테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보면 빼앗으려고 했어."
"그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학교는 휴대폰 사용 금지잖니. 하지만 지금은 수업시간도 아니고 그건 네 아버지 폰이잖아. 괜찮으니까 않으렴."
상처 입은 짐승처럼 경계하는 하나 앞에서, 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안심시키는 말을 해줄 도리밖엔 없었다.
"정말이지?"
"정말이고말고."
그 뒤로도 갖은 말로 어르고 달래서, 나는 간신히 하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달아날 것 같은 태세였기에,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기로 했다.
"그래. 인형 얘기로 돌아와서 말야. 그거 소중한 거라는 건 잘 알겠는데…… 혹시,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거야?"
하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선물 같은 건… 절대로 아냐."
"그럼?"
"…아빠야."
"선물 받은 건 아닌데 아빠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됐어. 몰라도 돼.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테니까."
하나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잠시 끊어졌다. 나는 무거운 대화를 이어나가기에 앞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학생부에서 네 가족사항을 봤어."
"……."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물어볼게. 너희 부모님, 2년 정도 전에 이혼하신 것으로 나와 있더라. 맞니?"
"……."
역시 하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의 침묵이란 것을 표정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나는 같은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너희 어머니께선 순순히 네 양육권을 포기하셨고, 넌 아버지 쪽으로 갔어. 이것도 맞니?"
"엄마는 비겁한 사람이야."
하나는 침묵을 깨고 똑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순수한 분노만이 담겨 있었기에, 나는 하나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럼, 어머니의 얘기는 이만 하기로 하자. 너희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
"아버지께선 이혼한 뒤 몇 개월 정도만 너와 함께 살다가, 별안간 해외 파견을 가셨어. 널 내버려두고 말이야."
"아니야!"
하나는 빽 소리를 내지르며 주먹으로 실험대를 내리쳤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실험대 위의 집기들이 일제히 깨질 듯 진동했다. 나는 내심 태연한 척 하려 애썼지만 아까보다 더 분노에 휩싸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하나에게 섬찟함마저 느꼈다.
"선생님이 뭘 알아! 선생님이! 중학교 때 학교 선생님도 의사들도 상담원들도 다 마찬가지야! 아빠가 나쁘다고만 하고, 내가 충격 받았을 거라고만 말하고, 내가 진짜 뭣 때문에 힘든지 알기나 해?"
일제히 쌓인 분노를 토해내는 작은 소녀 앞에서, 나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주는 게 최선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악에 받쳐 계속해서 소리 질렀다.
"아무도 몰라! 단 한명도! 분명 아빠는 바보야. 비겁한 엄마에게서 돈 한 푼 못 받아내고, 오히려 내 양육권을 위해 위자료도 가져다 바쳤어! 그런데도 맨날 바보처럼 싱글거리며 웃기만 하고, 회사에서는 괄시받기만 했다고! 그런데 그런 바보 멍청이 아빠가, 날 그냥 두고 도망쳤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
이제 하나는 울고 있었다. 속에 쌓였던 응어리를 토해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으, 으흑, 아, 아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리 얘기해도, 전혀 믿어주지 않았, 어. 어흐흑, 그래서 나도,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흐끅, 싶어서, 얼마나, 괴로웠는, 데, 아, 아무나 막말이나 내뱉고, 다, 다 죽어버려! 으, 으아아아아앙!"
나는 더 이상 그 광경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목 놓아 울고 있는 그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하나는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며 엉엉 울었다. 나는 어떤 말로도 하나에게 맺힌 이 응어리는 풀어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를 꽉 안아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데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었다. 나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하나의 얼굴을 대충 닦아주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하나는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해. 옷, 더럽혀서……."
"괜찮아. 그것보다 얼굴이나 세면대 가서 어떻게 해봐. 가관이라구?"
"으, 으응."
급하게 세면대로 달려가는 하나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휴지로 옷을 대충 닦아냈다. 뭐, 이걸로 하나의 속이 완전히 시원해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분풀이는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다 쓴 휴지를 휴지통에 집어넣고 하나를 뒤로 한 채 과학실의 문 쪽을 향했다.
그러자 다급한 하나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서, 선생님! 그냥 가는 거야?"
"설거지까지 해줄 생각은 없거든.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치워야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을 텐데."
"그, 그게 아니라 더 물어보지 않는 거야?"
"넌 말할 생각 없다며? 적어도 지금은."
"그건……."
"말해두지만 난 언젠가 네 입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거야. 이렇게 밤마다 과학실에 오는 이유도 밝혀낼 테고. 그리고 그때까지의 모든 잘못에 대해서 제대로 된 네 사과를 듣고 난 뒤엔 다시는 못 오게 할 거야. 어때. 괜찮은 계획이지?"
하나는 기가 막힌 듯 잠시 대답이 없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무슨 소리야. 나는 착한 사람이야. 가슴도 포함해서."
"……그런 바보 같을 정도로 사람 좋은 면도 아빠를 꼭 닮았어."
"도저히 칭찬으로 안 들리는데. 아무튼 난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찾아올 거야."
"……맘대로 해."
나는 하나의 마지막 말을 흘려버리고 과학실의 문을 나섰다. 밤의 과학실에서 있었던 하나와의 두 번째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머지않아 두 번째의 만남은 세 번째가 되고, 세 번째는 네 번째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횟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일상으로 변해갔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많은 것을 듣게 되었다.
하나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과학실에 출입한다는 것. 매일처럼 하나가 쓰는 실험도구는 죄다 실험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비품이라 그걸로 음식을 만들어 먹어도 별 탈은 없다는 것. 실험용기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법은 중학교 때의 절친한 친구가 알려줬다는 것. 재료는 매일처럼 근처 편의점을 전전해 공수해온다는 것. 그런 별것 아닌 이야기들과,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듣게 되었다.
"아빠는 말야, 하나라는 내 이름을 지어줬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나는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하나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엄청 싫어했어. 놀림 받기 딱 좋잖아. 뒤집어도 똑같은 이름이고 말이지. 그래서 하루는 엉엉 울면서 아빠에게 가서 떼를 썼어. 이름이 장난 같다고. 더 예쁜 이름으로 바꿔달라고."
"그랬더니?"
"아빠는 처음으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화를 냈어. 난 그때까지 다정한 얼굴의 아빠밖에 본 적이 없어서, 오줌을 지릴 정도로 깜짝 놀랐었지. 그 이후로 머리가 좀 클 때까지, 난 이름에 관해서 아빠한테 한 마디도 안했어. 다정한 아빠가 또 무섭게 변할까봐 두려웠거든."
"흐응."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물어봤었지. 내 이름을 지은 이유를 말야. 아빠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해줬어."
"뭐라고 했는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라서 그렇게 지었대. 정말 유치하지? 그런데 내가 어릴 때 그걸 물어봤을 때 화낸 걸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더라고. 그때 화를 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기 성씨를 생각 안하고 지은 이름이라 후회했대. 조금 더 예쁜 이름을 지어줄 걸 그랬지, 하고 말야. 참 바보 같지?"
"나는 독립성 강해보이는 느낌이라 좋은데."
"그러고보니 선생님 이름은 뭐였죠? 애들도 자꾸 소 선생님 소 선생님 하니까 이름을 자꾸 까먹네요."
"……그렇게 부른 녀석들 다 데려와."
하나와 자주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하나는 평소에는 거의 반말을 하다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나 거짓말을 할 때만 존댓말을 썼다. 일부로인지 버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하나의 엔간한 거짓말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다만, 낮에 하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사실은 께름칙했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새 음식을 나눠먹기까지 하게 된 현재. 하나와의 만남에 대한 긴 상념을 끝마친 나는 라면을 다 먹고 유리막대를 내려놓았다. 수프의 정체는 다 먹고 난 다음에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느끼하지도 않고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하나는 진즉에 자기 몫을 해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서 씻으려고 비커를 가져갔는데, 하나가 갑자기 내가 들고 있던 비커를 낚아채갔다.
"오늘은 내가 선생님 것까지 씻어줄게."
"웬일로?"
나는 정말로 놀라서 물었다. 내가 처음 얻어먹기 시작한 이래로, 서로의 그릇은 각자 씻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작위적인 미소를 나에게 지어 보였다.
"어머. 선생님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씨에요."
"…가지가지 한다."
그렇지만 모처럼 고집 센 하나가 베풀어준 호의를 거절하기도 아까웠기에, 나는 그대로 비커를 넘기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산처럼 쌓아놓고, 그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던 실험대 위의 종이뭉치가 한 장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하나야."
"……잠시만 기다려줘. 이것만 끝마치고."
묘하게 착 가라앉은 하나의 목소리에,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밤은 뭔가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과학실 안에서 혼자 바쁘게 움직여 실험도구들을 정리해 넣은 하나는, 내 앞의 의자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기에, 나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 할 수 없었다. 하나는 뜸을 들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두 번째로 여기 왔다가 떠나가기 전 했던 말, 기억해?"
"…그래."
비록 스스로 까맣게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지만 말이지. 과학실에 매일처럼 들리는 와중에 하나와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즐거웠기에, 나는 일부러 하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나 과학실에 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 내 속마음을 꿰뚫어보듯이, 하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전부 할게."
"……갑자기 왜?"
"설마, 선생님이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건 아니지?"
내 반문에 하나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맞받아쳤다. 날이 서 있는 듯한 그 태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는 품에서 언제나 애지중지하던 토끼인형이 달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아빠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야."
나는 하나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하나가 울부짖던 그날 밤, 하나의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난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하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선생님만큼은 끝까지 들어줬으면 하지만…도저히 듣지 못하겠으면 중간에 말해줘. 그만둘 테니까."
"……그래."
하나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2년 전의 이야기야. 그땐 위자료 때문에 원래 살던 집의 전세도 빼버리고 단칸방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아빠랑 함께 사는 매일매일은 정말 즐거웠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내가 중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아빠도 마침 회사가 일찍 끝나 중간에 만나기로 했어. 나는 아빠랑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갔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하나의 눈에, 아련한 회한이 스쳐갔다.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집 근처 골목에서 숨어 있다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걸 좋아하셨어. 아빠는 자기가 잘 숨는다고 생각하시지만, 난 평소에 아빠가 자주 숨는 골목 같은 건 전부 알고 있었어. 약속장소에 안 보이길래, 난 아빠가 골목에서 내가 오길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지. 이번엔 내가 놀래켜 줄까 싶어서, 몰래몰래 골목 어귀로 다가갔어. 아니나다를까, 아빠는 거기 있었지. 내가 생일날 골라준 이 핑크색 휴대폰을 들고 말야."
나는 무심코 하나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휴대폰 자체는 하나가 하나의 아빠를 위해 골라준 것이었다. 그럼 토끼 인형은 대체 뭐지? 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이, 하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빠의 모습이 좀 이상했어. 휴대폰이 전혀 울리지 않는데도, 이상하다는 듯이 휴대폰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계시는 거야. 나는 그 광경이 이상해서, 뛰쳐나가려다가 잠시 기다렸어. 생각해보면, 난 그때 엄청난 실수를 한 거야."
"대체 무슨……."
"아빠는 고민하다가 울리지도 않은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고, 그걸로 끝이었어. 내가 보는 눈앞에서 아빠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지. 나는 내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엉덩방아를 찧었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나는 아빠가 있던 장소를 향해 울면서 뛰어갔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부르면서 울어도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지. 내가 그 좁은 골목에서 결국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아빠의 휴대폰과, 그 옆에 떨어져 있던 이 토끼 인형뿐이었어."
나는 하나의 이야기에 기어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잠깐, 너, 설마."
"응. 그 설마가 사실이야. 이 토끼 인형이……"
하나는 휴대폰을 들어 올려 사랑스럽게 토끼 인형을 어루만졌다.
"내 아빠야."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엉터리 이야기다. 이딴 결론이 날 리가 없어. 그런 생각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하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응. 역시 선생님도 믿기 어려운 거구나. 전 괜찮아요. 어차피 익숙해졌는걸요."
"그, 그게……."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아빠한테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걸. 그럼,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 아, 그러고 보니 과학실에 오는 이유는 아직 말하지 않았네. 이건 좀 덜 황당한 이야기니까 들어주었으면 좋겠어. 괜찮을까? 선생님."
"괜찮아."
나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나는 쓰라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생님도 내가 낮에 지금이랑 상당히 다른 거 알지?"
"그래."
"아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낮의 그건 전부 거짓말이야. 필사적으로 일상을 연기하고 있는 거지. 거짓말도, 연기도 처음에는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의무감으로 계속 하다보면, 나도 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지 헷갈리게 돼."
"하나야……."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일상이, 나에겐 전부 가짜야. 하지만 나의 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고 비일상인걸. 그 사이를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다보면, 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생겨.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아빠를 이렇게 만든 녀석을 찾는 작업을 매일처럼 하고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그냥 이 상태의 아빠라도 데리고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세상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어."
하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건 아빠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잖아? 그래서 난 있는 힘껏 비일상도 연기했어. 여러 가지 수단을 써서 한밤의 과학실로 숨어들어가 혼자 요리를 해먹으면서 아빠를 위한 작업을 계속했지. 그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특별한 시간이었어."
나는 처음 하나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나는 그때의 하나에게 대체 어떤 존재로 비춰졌던 것일까.
"그런데 선생님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비일상을 박살내고, 그것마저 일상으로 만들어 줬어. 하지만 연기를 계속해야 하던 낮과는 달라. 비록 밤의 아주 짧은 시간뿐이지만, 선생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내 진짜 일상이었어."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함께 나눈 실없는 대화들, 오고가는 장난, 함께 먹는 음식, 그건 전부 2년 전에 하나가 아버지와 함께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저 하나와 만나는 것이 즐거웠을 따름이었는데, 하나는…….
"선생님.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어."
나는 이런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만약에 거절한다면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을 상처를 받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나는 하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하나는 조용히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하나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나야말로 너랑 만나서 즐거웠어."
하나는 내 품에서 벗어나 평소처럼의 억지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은 또 특별한 날이 될 거야. 이것도 다 선생님 덕이야."
"그게 무슨 소리니?"
"아빠를 그렇게 만든 녀석, 드디어 찾았거든. 드디어 아빠를 원래대로……"
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품속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기묘한 벨소리.
나는 내 휴대폰을 꺼내 생전 처음 보는 것인 양 바라보았다. 그 벨소리는 클래식 같기도, 아니면 음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자음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소리였다. 이 새벽에 누구일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 라는 이상한 번호가 눈에 확 띄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발신자 표시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고민도 잠시, 휴대폰의 벨소리는 재촉하듯 끊이지 않았기에 나는 일단 전화를 받으려고 통화 버튼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 있는 하나의 얼굴을 보고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하나는 창백한 얼굴로 뭐라고 외치고 있는데도, 텔레비전의 소리를 전부 내려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내 쪽에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입이 딱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문득 하나의 아버지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떠올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나는 그런 내 앞에서 다급하게 전화기의 버튼을 눌러 귀에다 가져다 댔고, 내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 직후, 나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한 뒤 휴대폰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나는 지체하지 않고 내 휴대폰을 집어 들어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을 노리다니……망할 녀석."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았다.
"저기. 하나야. 방금 전에 리본을 매단 하얀 토끼가 회중시계를 타고 공중을 날아와 내 손에서 휴대폰을 떨어트리는 걸 봤는데 말야.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게……아니 그분이 혹시 네 아버님이셨니?"
하나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빠 맞아. 아마 앞으로 또 볼 일은 없겠지만."
"잘 생기셨더라."
"……난 선생님의 미적 기준을 이해 못하겠어."
하나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고 나면, 방금 전에 있었던 초현실적인 일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스커트 자락을 털고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가는 거니?"
"……아빠 아직 안 죽었거든."
"그런데 그 원수는 대체 누구야?"
"무서운 녀석이야. 가까이 가면 위험해. 지금은 거의 미쳐 있지. 아까 선생님한테 전화 거는 걸 보고 확신했어."
하나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 대고 뭔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느새 하나의 핸드폰에 매달려 있던 토끼 인형은 사라진 채 줄만 덜렁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못 본 척 했다.
"어쨌든 선생님이랑 밤에 과학실에서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네."
"그러게. 그래도 좀 아쉽지만."
"……선생님. 미안."
"응?"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하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과학실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밖의 열쇠 말고도 안쪽에서 나가는 것은 밤에 전자자물쇠로 잠겨 지지만, 하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아빠, 열어줘!"
열려라 참깨 주문도 아닌데, 전자자물쇠가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쉽사리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나는 그제서야 뒤늦게 하나의 뒤를 좆았지만, 한 발짝 앞에서 문은 냉정하게 닫히고 말았다. 그리 두껍지는 않은 문 밖에서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닫아줘!"
또다시 팅 하는 소리가 전자자물쇠에서 울려 퍼졌다. 난 다급하게 자물쇠를 조작했지만 무슨 수를 쓴 건지 열리질 않았다. 이걸로 열쇠도 없이 과학실을 드나든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지만, 나는 하나도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과학실의 문을 두드렸다.
"하나야! 하나야! 이거 당장 열어!"
"걱정 마세요."
밖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이 방해되면 곤란하니까 잠시 잠가두는 거에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하나도 괜찮지 않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문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이야. 제발. 혼자 가지 마.
"모든 게 금방 끝날 거에요. 다 잘 될 거에요. 일이 잘 풀리면, 오늘이 아빠가 사라진 2주년 같은 꿀꿀한 날이 아니라, 아빠가 제 곁에 돌아온 기념일로 할 수 있다구요! 만약 잘 되면 선생님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좋은 생각 아니에요?"
너 알고 있어? 아까부터 죄다 마음에도 없는 말,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잖아.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나한테 말해줘. 이 과학실 안에서는 무슨 터무니없는 이야기든 들어줬잖아. 약속이건 뭐건 취소할게.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돌아와.
나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르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손발에 힘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하나의 말에, 나는 문을 두드릴 힘조차 잃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향해 하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선생님이랑 다시 한 번 만나서, 과학실에서 또 맛있는 것 해드릴 거에요. 라면 스프 만드는 법도 가르쳐 드릴게요. 그러니까 꼭 기다려 주세요. 아셨죠? 꼭이에요!"
하나는 말을 마치고 가볍게 과학실 문을 노크하듯 두 번 두드렸다. 그게 신호였는지, 하나의 발걸음이 문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하나의 목소리는, "간다, 아빠!" 라는 짧은 외침이었다.
그리고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고, 잠깐 쉬었다가 간헐적으로 들리다가, 창문이 깨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정적과 거의 동시에, 전자자물쇠에서 다시 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혹여 하나가 열어준 건 아닐까 반색했지만, 자물쇠는 그저 원래대로 열리도록 돌아와 있을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작해서 밖으로 나가니, 달빛에 희미하게 비춰지는 복도의 벽 여기저기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그슬려 있고 과학실의 문 쪽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변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야! 하나야! 어디 있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있는 힘을 짜내 목소리를 냈지만, 대답은 그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복도를 배회하던 나는, 깨져 있는 창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창문이 깨져서, 사람 한두명쯤이 드나들 큰 구멍이 생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직 굳지도 않은 피가 창문의 유리에 방울져 맺혀 있었기에, 나는 섬찟함을 느꼈다.
"혹시……!"
손이 베이는 것도 상관없이 깨진 창문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나는 몸을 아래로 굽혔다. 과학실이 있는 곳은 건물 중에서도 제일 높은 5층. 사람이 떨어졌다간 온전하기 힘든 높이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의 이름을 외치며 아래쪽을 훑어보았지만, 워낙에 어둡기도 하고 안경도 흐릿한 상태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거의 구르듯 계단을 내려가서 현관으로 뛰쳐나갔지만, 밖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뭔가가 발길에 채여서 나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물건은 다름이 아니라 새카맣게 타버린 휴대폰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하나의 휴대폰이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원래 무채색에다가 기종도 전혀 다른 것이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 버렸다.
결국, 하나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다시 과학실을 향해 올라갔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하나와 나는 같은 장소에서 웃고 떠들고 했었는데, 이제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하릴없이 과학실의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는데, 문득 하나가 정리한 실험도구 생각이 나서 그쪽 찬장을 열었더니, 조그만 종잇조각 하나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주워든 나는 경악했다. 그 종잇조각은 하나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가지고 나왔지만 이내 하나에게 도로 빼앗긴 것이었다. 이젠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깃구깃해진 종이 위에는 하나의 글씨체로 짧은 메시지가 적여 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단 3줄의 메시지. 하지만 그것을 보자 왠지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져 나와서 나는 그 조그만 종잇조각을 붙들고 오열했다. 아침에 출근한 교사들이 그슬린 복도와 깨진 유리창에 깜짝 놀라 과학실로 들어왔을 즈음에는, 난 울다가 지쳐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하나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시 평범한 일상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난 너무나 소중한 비일상을 잃어버렸기에, 솔직히 말해 기뻐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소 선생.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어?"
"……글쎄요. 저야말로 알고 싶네요."
동료 교사들이 질문공세를 퍼부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과학실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로서는 대답해 줄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쓴웃음으로 대처할 뿐.
하나의 경우는 정학도 퇴학도 아닌 난데없는 '전학'으로 처리되어 있었기에 난 깜짝 놀랐다. 이미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자신이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미리 준비해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학교에서 나하나라는 아이는 사라져 버렸고, 나를 뺀 모든 사람이 그녀를 이내 잊었다.
나? 나는 그날 이후 매일 밤 과학실에 들러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있다. 하나가 매번 요리하는데 쓰던 실험도구들로 말이다.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심지어 살았는지도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가 마지막에 자신을 걸고 나를 안심시키려 했던 거짓말 전부를 믿어보기로 했다. 반드시 돌아와서 같이 하겠다는 그 말. 요리를 가르쳐 주겠다던 말. 아빠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말. 나는 한마디도 잊지 않고 있다.
하나가 돌아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해 줄 수 있는, 오직 하나만이 사랑했던 그 일상을 유지시켜주고 싶다. 나와 하나의 시간을 지키기 위한 첫걸음으로, 난 물을 담은 비커를 삼발이에 올리고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였다. 언젠가 조금 멍하게 보이지만 잘생긴 중년 아저씨와 담백한 표정의 교복 소녀가 과학실에 찾아와 나에게 뭘 하는 중이냐고 묻게 된다면, 아마 나는 기쁘게 웃으며 짧게 대답할 것이다.
"커피 끓이는 중."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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