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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탐정극 제4화 : 악의

08/07/31

태그 : 탐정, 악의, 사건


캐릭터 원안 : 아스
일러스트 : 시엣
글 : 로이미르

나는 불행하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학원의 수학강사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만29세의 청년, 박한미는 한탄했다. 남자아이에게 예쁘장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낳아준 부모님에게 투정한 기억도 없고, 인생의 특별한 고비도 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뒤 대학의 수학교육과를 무사히 졸업했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연봉 몇천을 바라본다는 친구들이 약간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학원강사란 직업도 나름 벌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남부럽지 않게 살 만큼의 돈은 모아둔 상태였다. 다만 돈을 어딘가에 쓸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고 있던지라, 제대로 된 전세조차 아닌 하숙 생활을 하는 괴짜이긴 했지만.
한미의 지론은 간단했다. 언젠가는 돈을 쓸 데가 올 것이기에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일반론이긴 했지만 그의 경우는 의식주는 물론이거니와, 기본적인 쾌락을 위해서 지출하는 돈이 너무나 적은 편이었다. 면허도 있고 차를 살 돈도 있으면서 기름값이 아깝다는 이유 하나로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애용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단조롭기 짝이 없는 한미의 생활을 완전히 근본부터 뒤집어 버린 것이, 바로 눈앞에서 그의 속을 벅벅 긁어대는 소녀와의 만남이었다.

"양산."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공주님이나 되는 양 손 벌리지 말란 말이다. 한미는 속으로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손은 익숙하게 가방에서 양산을 꺼내 소녀의 손에 들려주었고,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받아들어 펼쳤다.

"끄응. 이놈의 피부는 왜이리 약한거야. 원래 여자애들은 다 이런가?"

앞에서 중얼거리는 소녀의 이름은 최나현. 소녀는 상당한 미모와 몸매 (특히 가슴) 을 가지고 있는 아직은 앳된 기가 남아있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지만, 태도만은 시종일관 당당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소녀라면, 몇년동안 수험생들을 상대해온 한미가 쉽게 휘둘릴수는 없었다. 나현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왜 그렇게 턱을 벅벅 긁어대? 피부 약하다며?"
"끄응. 수염이 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역시 20년 가까운 습관이란 무섭단 말이야."
"…망상하는 건 자유지만 제발 그런 말은 다른 사람이 안 듣게 해 줄래? 소름 돋거든?"
"도대체 몇번을 말해야 되는거야? 비록 이런 모습이긴 하지만 난 너보다 짬밥 먹을만큼 더 먹은 인생선배라고."

──바로 자기가 32세의 아저씨 (그것도 탐정)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문제로 다툴때마다 한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몇시간동안 끝이 안 보이는 공방을 계속해 보았자 언제나 피곤함만이 남을 뿐.
한숨을 내쉰 한미는 사고의 방향을 빠르게 전환했다.

"바로 저쪽이야."

한미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어떤 위치를 가리켰다. 4차선 도로변에서 외진 골목으로 꺾어지는 부분. 나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뭐. 마지막으로 차가 들어갔던 골목이라고 말할수는 있을거야. 저 안에서 강형사의 차가 발견되었으니까."
"차를 몰고갈 당시 본인이 있었다고 확신할수는 없잖아?"
"당시 경찰 무선기록의 녹취 점검은 이미 끝난 상태야. 강형사로부터 서로 마지막 연락이 있은 뒤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담배를 사러 이 부근의 편의점을 들린적이 있다는 알바생의 증언은 이미 확보했지. 들어보겠어?"

나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증거만 남겨둔 상태면 충분해. 네 능력을 의심할 정도였으면 널 조수로 애초에 고용하지도 않았어."
"…누가 누굴 고용했다굽쇼?"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자."
"당사자에겐 전혀 사소하지 않아!"

그 순간, 갑자기 나현은 가벼운 동작으로 양산을 접어들고, 소리치는 한미를 향해 발걸음도 가볍게 다가가 한미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한미의 팔을 감싸자, 한미는 경악하며 나현을 떼어놓으려 했다.

"백주대낮에 너 미쳤어?"
"어머. 선생님. 왜 이러세요? 오늘 수학과외해주러 오시는 날이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뵈니 반갑네요. 시간도 거의 다 됐는데 같이 들어가요!"
"뭐……?"

당혹감에 휩싸인 한미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문을 던졌지만, 왼쪽 눈을 찡긋거리는 나현의 시선 끝에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한 남자를 발견하고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아차. 그랬지. 일단 들어가자. 그 전에 먹을거라도 사줄까?"
"네~ 선생님 최고!"

부담스럽게 가슴을 자신의 팔에 부벼대는 나현의 행동에 한미는 속으로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삼각김밥 코너 앞에 섰다.

"…뭘로 할래? 경찰이야?"
"응. 저는 마요네즈 참치요. 그러니까 사복형사. 시야에 들어온것만 두명."
"으음. 그럼 역시 나는 비빔밥으로 할까. 어떻게?"
"네. 그럼 사가죠. 다리오기 전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빠져서."

남들이 주의깊에 들었다면 미친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대사를 서로 교환한 두 사람은 삼각김밥과 아이스크림을 대충 집어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왔던 길로 돌아가, 주택가가 즐비한 골목 쪽으로 빠졌다. 골목을 돌아 그늘로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떨어졌고, 한미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하필 이런 설정이야? 솔직히 원조교제로 밖에 안 보일텐데……."
"닮지도 않았는데 아빠나 오빠라는 편이 더 웃겨. 어차피 나는 별로 상관 없으니까."
"…내 쪽의 사회적 평판은 고려 안해주십니까?"

한숨을 내쉰 한미는 머리를 벅벅 긁고나서 주택가의 담장에 등을 기대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형사 마주치면 그냥 혼자서 돌입하지 않았어? 오늘은 또 왜 드문 짓을…"

한미는 말을 하다 멈추고 나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현은 약간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린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런 나현의 모습을 보는 것은 한미로서도 처음이었기에,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니 그게. 거의 나도 모르게 무심코 느껴져서 말야. 나도 모르게 흥분했지 뭐야. 그렇게 짜릿한 감정을 느끼기도 참 오랜만이었거든."

주어를 생략한 나현의 말은 야릇한 궁금증만을 불러 일으켰고, 한미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나현은 고개를 흔든 뒤,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순수한 악의."




나현은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한미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한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몸에 안 좋은데."
"미안하지만 난 이게 없으면 생각이 잘 안 돌아가."

나현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주변을 감돈다.

"너 말야. 어떤 경우에 열이 받냐?"
"바로 이런 경우지."

한미는 질문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눈앞에서 어린 여자애가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경우."

나현은 한방 먹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뭐. 지극히 너다운 발상인데. 알았어. 다음부터 네 앞에서 피는건 삼가지."

나현은 기댄 벽에 담뱃불을 눌러서 꺼버린 뒤, 손가락으로 꽁초를 튕겨 담장 너머로 날려보냈다.

"아무튼 살다보면 괜시리 열받는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지. 받을거 다 받아먹고 끝까지 튕겨대는 여자나, 기껏 생고생해서 정보 건네면 돈 떼먹으려 드는 의뢰인이나, 아침 댓바람부터 여자애 가슴이나 집적대는 욕구불만 또라이 등등. 열받는 일들이 셀수도 없게 널려있어."

'아, 그 녀석은 손가락을 부러뜨려 버렸어.' 라고 담담하게 덧붙여 나현을 보여 한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말야. 그것들은 죄다 어떤 이유가 있어. 단지 핑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야. 탐정 일이란게 겉은 번드르르해도 궁극적으로는 사람 뒤 밟는게 일이다보니, 이런저런 더러운 꼴을 많이 보지만 그 놈들의 공통점은 죄다 변명을 해댄다는거야."
"변명?"
"그러니까 이런거지. 이놈은 코가 이상하게 생겨서 짜증나, 재수없게 쏘아봤어, 자리를 안 양보해줘 같은 어이없는 이유를 대면서 주먹을 날리는 경우?"

나현은 품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현란하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거기엔 악의가 없어. 순수한 충동이지. 나중에 변명을 이래저래 붙여 둘러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거지."
"그게 네가 느낀 악의는 뭐가 틀린데?"
"이유가 없어."
"응?"

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에서 돌리던 담배를 튕겨올려 물었다. 꽤나 익숙한 솜씨였다. 한미는 그것을 말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나현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충동에 변명을 하지 않는다는 거지. 요즘 많지 않아? 묻지마 범죄. 그런건 동기고 결과고 추리를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어. 어느날 한 남자가 지나가는 여자를 식칼로 쑤셨어. 서로 얼굴 하나 모르는 상태지. 범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은 안 나와. '그냥' 이라는 대답뿐이지. 경찰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붙이려고 해. 안그러면 조서를 쓸 수 없으니까. 정 안되면 정신감정을 해서 '이놈은 맛이 가서 그렇다'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하지. 내가 볼때 그건 그냥 뻘짓이야."

한미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나현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깨물며 바닥을 쏘아보았다.

"그저 순수한 악의 ── 자고 싶다, 먹고 싶다, 섹스하고 싶다, 라는 것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악의를 가진 놈들이 있다고. 그건 존재 자체가 공포지. 그걸 어떤 병명이나 유형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것은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하는 짓이고. 난 천성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악의에 유난히 민감한것 같아. 그런 놈들이 날 바라보면 아주 온몸이 찌릿찌릿하지.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런데 아까는 분명 사복형사 두명이라고……."

한미는 말끝을 흐렸다. 설마 싶었지만 기분나쁜 가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나현은 그런 한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중 한명. 그런 미친놈이 경찰이야."

한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나현은 이번엔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질문했다.

"형사 아줌씨도 재수 드럽게 묘한 일에 뛰어든 모양인데. 어떻게 할래?"
"뭘?"
"이 일. 건드릴거야? 솔직히 의뢰인이 있는것도 아니고 딱히 내키지 않는데."
"…무슨 소리야? 애초에 날 끌고 온건 나현이 너고, 형사님에게는 빚도 있잖아?"
"빚도 살아 있어야 갚지."

나현의 냉담한 반응에 한미는 입맛이 썼다. 나현과 같이 커다란 사건에 휘말렸다가 엉뚱하게 국제경찰에 의해 용의자로 수배되어 곤욕을 치렀던 한미를 도와줬던 이가 바로 실종된 강정규 형사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짧게 고민한 한미는 고개를 들고 나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의뢰하지. 형사 실종 사건."
"──뭐?"
"왜. 조수는 탐정에게 의뢰할 수 없나?"

한미의 당돌한 질문에 나현은 고개를 잠시 숙이고 몸을 움찔거리더니, 고개를 드는 순간 시뻘개진 얼굴로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한미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했지만, 나현은 한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으하. 푸히힛. 이놈 진짜 걸작이네. 좋아. 좋다구."

웃음기가 좀 그친 뒤, 나현은 입가에 흐른 침을 슥 손등에 문질러 닦고 한미를 향해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진짜 웃겼다. 겁좀 줄까 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할 줄이야. 교과서같은 괴짜 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멋진걸?"
"……."
"얌마. 내 지론이 뭐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위험을 감수하면 그만큼 얻는것도 많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일을 그냥 넘어가? 안될 말이지."

한미는 고개를 돌리고 묵묵하게 나현이 쏟아내는 말들을 감내하고 있었다. 나현은 씹어물던 담배를 뱉어버린뒤 발로 꾹꾹 누르고, 한미에게 양산을 던졌다.

"가자. 이제부터 좀 더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한미는 양산을 짐에 쑤셔넣으며 다시금 한탄을 내뱉었다.
나는 불행하다, 라고.

그렇게 한명의 소녀탐정과 조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간극 : 호감(好感)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어 죄송했습니다. 민수영이라고 해요."

비록 좀 늦긴 했지만, 교문을 나서면서 수영은 고개를 숙이며 민혜에게 공손한 태도로 자기소개를 했다. 민혜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아, 아냐. 어차피 나이차이도 한살밖에 안나는데 그렇게 예의 차릴것 없잖아? 편하게 대해줘."
"네? 괜찮겠어요?"
"……왜 묘하게 내 쪽을 보면서 물어보는 거지."

사혜는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수영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한슬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들었다.

"자자. 둘다 적당히 하자고."
"한슬 언니 부탁이라면."
"……난 저녀석 마음에 안 들어."
"사혜얏!"

한슬이 소리를 빽 내지르자, 사혜는 말문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교실에서의 일 탓인지, 사혜는 교실에서 나온 뒤로는 계속해서 한슬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아무튼, 갑자기 아줌마가 실종되었다는게 무슨 소리야?"

강정규 형사의 딸, 수영은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말 그대로에요. 사라졌어요."
"도대체 언제? 며칠전 한강 근처에서 뵈었을 때까지만 해도…"
"…바로 그날이에요."

수영은 한슬의 말을 자르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슬 언니랑 친구분들이 엄마를 만난 뒤, 삼촌과 통화하고 서로 돌아가던 도중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다음날 엄마가 타고 간 차만 발견되었죠. 그리고 아직까지도 어디에 계시는지 경찰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것 같아요. 적어도 삼촌의 이야기로는 말이죠."

한슬은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못 믿겠다는 거네? 아저씨라도."
"경찰이니까요."

수영은 불신감이라기보다 확신을 담아 대꾸했다. 한슬은 그 태도에 식은땀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경찰이신데 그건 좀……"
"바로 그 당사자가 저한테 어릴때부터 확실하게 주입시켜 놓은 건데요?"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이 없지."

혀를 차는 한슬을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던 수영은 걸음을 갑자기 멈추더니, 한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혜가 발끈하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수영은 차분한 태도로 한슬에게 말했다.

"탐정으로서의 한슬 언니에게 의뢰할게요. 저희 엄마를 찾아주세요."

그 당돌한 선언에 주변은 잠시 조용해졌다. 한슬은 입을 다물었고, 민혜는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고, 사혜는 짜증이 폭발 직전임을 느꼈다. 결국 참을 수 없게 된 사혜는 한슬의 머리를 딱 붙잡고 민혜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뭐, 뭐하는 짓이야?"

한슬이 난데없는 행동에 버둥거렸지만, 사혜는 그것을 무시하고 담담하게 질문했다.

"어때. 민혜야. 네가 보기에 한슬이가 지금까지 어떤 날카로운 통찰력이나 직관력을 보여준 적이 있어?"
"그, 글쎄.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급작스럽더라도 하나쯤은 떠올려줘!"

민혜가 말을 얼버무리자 한슬은 소리를 질러댔지만, 사혜는 말을 이었다.

"대답하기 어렵다면 질문을 달리할게. 이 녀석이 정말 탐정 같은 걸 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어? 솔직하게 대답해 줘."

민혜는 난처한 얼굴로 한슬과 사혜를 번갈라 바라보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그, 그건 아닌것 같아. 역시. 나에게 있어서 한슬이는 머리도 좋고 재미있는 친구이긴 하지만, 그런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걸."

한슬은 축 늘어져서 한숨을 내쉬었고, 사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는데?"
"……그렇겠지."
"결국 경찰들의 일이야. 우리 같은 평범한 여학생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아무도 한슬이가 탐정이 되길 원하지 않아."

사혜는 딱 잘라 단언했지만, 그들을 지켜보던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무슨 근거로?"

사혜는 있는대로 인상을 썼지만, 수영도 보통 아이는 아니라 사혜의 살벌한 눈길에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대꾸했다.

"적어도 저는 원하고 있으니까요. 탐정 정한슬을."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슬은 고개를 갑자기 쳐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정말?"

사혜는 다급하게 한슬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한슬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놀랄만한 몸놀림으로 사혜의 손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영의 손을 꼭 붙잡고, 다시한번 질문했다.

"내가 탐정이 되어주길 원한단 말야?"
"네."

수영의 짤막한 대답에 한슬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수영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췄다. 민혜는 한슬의 돌발 행동에 펄쩍 뛰었고, 사혜는 처참한 표정으로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기뻐. 정말 좋아."

생글거리며 입을 떼는 한슬. 정작 키스를 당한 당사자인 수영은 익숙한 모양인지 담담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스윽 문지른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너, 너너, 또!"
"왜 그래? 아까 너희들에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을 뿐인걸."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아무한테나……!"
"무슨 소리야? 아무한테나가 아냐. 내가 좋아하는 상대일 경우에만, 이야."

한슬은 사혜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이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호오. 그러고보니 그 반응이 수상쩍은데. 설마 네가 나를……."
"무, 무무무, 무슨 소리얏!"

흥분해서 주먹을 쥐어 박으려는 사혜를 슬쩍슬쩍 여유 넘치게 피하는 한슬을 바라보고 있던 민혜는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 수영아. 이런말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째 두 사람 관계가 평소랑 거꾸로가 된 기분인데?"

수영은 민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대로 보신거에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응?"
"제가 처음 두 사람을 봤을때도 저런 느낌이었지요."

민혜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수영은 조용히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혹시 like라는 영단어를 아세요?"
"응. 알지. 좋아한다는 뜻 아냐?"
"네. 맞아요. 하지만 그 단어에 다른 뜻도 있다는 것 알고 계시죠?"
"어떤 것과 닮은… 이란 뜻도 가지고 있었지. 아마."
"한슬 언니는 like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으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는 민혜에게, 수영은 설명조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구나 어릴때부터 좋아하는 것이 되기를 원하죠.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느니, 가수가 되겠다느니, 과학자가 되겠다느니. 하지만 현실과 개인의 능력은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결국은 자신에게 맞는 길을 걸어가죠."
"그게 당연한거 아냐?"
"하지만 그 좋아한다는 감정을 단순한 호감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 대상이 되어버리는 사람도 존재해요. 그건 이미 단순한 감정을 뛰어넘은 의지이고, 어떻게 보면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을 포괄하는 단어가 바로 like."
"자, 잠깐만, 그러면 한슬이가 그런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수영은 대답하는 대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탐정이라고?"
"그래요. 한슬 언니의 그것은 의지나 능력을 뛰어넘어서 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요. 자신의 사고패턴, 행동패턴, 그 모든 것을 자신이 탐정이라고 하는 상황에 몰입해 바꿔버리는 거죠. 탐정이라고 자각중인 한슬 언니는…"

사혜는 그 커다란 키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달리 한슬에게 거의 농락당한다 싶을 정도로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혜는 혀를 내둘렀다. 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고인걸요."
"……좀 다른 의미로 동감이야."

나현과 한미가 사건으로 뛰어드는 순간, 머지않아 그들과 함께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될 또 한명의 소녀탐정인 한슬은 사혜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즐겁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 소녀탐정극 제5화 :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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