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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탐정극 제3화 : 냉전

08/07/24

태그 : 탐정, 여름, 싸움, 아이스크림


캐릭터 원안 : 아스
일러스트 : 시엣
글 : 로이미르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여고생 명탐정 정한슬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향해 혼잣말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 더워서 이렇게 헛소리라도 중얼거리고 있지 않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요즈음 날씨인데 말이죠.
지금 저를 둘러싼 이 싸늘한 분위기는 무얼까요. 마치 알프스 산맥의 꼭대기에서 아이스크림을 할짝대고 있는 소녀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으음. 둘 다 화해하는게 어때?"

저는 짐짓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져 보았습니다. 그러자 건방지게 제 책상 위에 비대한 엉덩이로 깔아뭉개고 있는 버릇없는 조수 (개인 설정) 사혜는 제 마음에서 친절한 충고를 무시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화해? 애초에 화해할 사이까지 되었던가?"

너무나도 냉랭한 대답. 저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알프스 산맥 꼭대기의 소녀가 성냥불을 그으려 애쓰는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안돼. 이건 가망이 없어. 그러자 제 뒤에서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부릅뜬 채 온 힘을 모아 화났다는 표정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그래봤자 귀여워 보일 뿐이었지만) 민혜는 제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습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내가 사과할 생각이 없을 거라고 했잖아! 언제나 그렇다구! 제멋대로야! 내 의견은 무시해 버리고선!"

아니, 그런 불평은 제발 본인에게 토로해 주시죠. 마이 페어 레이디. 도대체 이 더운 날씨에 왜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된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덧붙여, 저는 두 사람 모두의 공통된 친구라는 이유로 난데없는 한랭전선의 한가운데에서 시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아아. 그러셔? 그러면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는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로군."
"한슬아. 친구끼리인데 좀 볼 수도 있는거 아냐? 그리고 프라이버시라면 할말이 없는게 누구 쪽인데? 응?"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자상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득한 의식의 저편에서 손짓을 하시는 기분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였던 것일까요. 분명 저번에 함께 달리던 순간에는 세상에 둘도 없을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탐정을 자처하고 있는 저이지만 이런 감정 싸움에는 정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저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면서, 사건의 발단이 된 사혜의 휴대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고작해야 몇분 전이지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어 수업을 막 끝마칠때까지만 해도, 전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일로를 달릴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입가에 침은 좀 닦아라. 좋은 꿈이라도 꿨니?"

물론 졸았던 건 사실이지만, 사혜의 빈정거림대로 진짜 꿈을 꾸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재빨리 입가를 손등으로 스윽 문지르고, 무심한듯 쉬크한 태도로 손가락을 튕겼습니다.

"...난 세상에서 영어 보충수업이 제일 쓸데없는 공부라고 생각해. 시간낭비야."
"오호. 유학파라 그거지."
"…딱히 유학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따라간거지."

아무튼 영국에서는 그다지 좋은 추억도 없었기에 툭 쏘아붙였더니, 사혜는 움찔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대신 뻔뻔스럽게 자기 의자인 양 제 책상에 걸터 앉았지요. 매번 화내는 것도 슬슬 지겨워졌기에, 저는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나저나 말야. 좀 이상해."
"응?"
"저번에 지갑 날치기."
"아아."
"보통 내가 피해자니까 사건 참고인으로 부를만한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걸."
"귀찮지 않아서 더 좋은 것 아냐? 작년 생각해보라고."

저는 사혜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작년의 폭풍과도 같은 사건 뒤, 학교가 끝나자마자 경찰서로 가는 나날의 연속. 무슨 보충수업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내심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하드보일드한 나날을 동경하고 있었지만, 막상 사건이 터진 뒤에는 평온하고 무사안일한 매일이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너무 조용하니까 더 불안한걸."
"그 형사님이 신경써준것 아냐?"

저는 순진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그 말에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편리하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어."
"응?"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면 당연히 처벌을 받지. 하지만 처벌을 하려면 또다시 법을 철저하게 따라야만 해. 그 과정 자체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으니까. 강형사님이 아무리 4차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팔불출 아줌마라고 해도 경찰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한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지. 다른건 몰라도 공사는 확실한 사람이고."

사혜는 짐짓 놀랐다는 눈치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나 무덤덤한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인 아이지만, 실제로는 감정 변화가 매우 풍부한 편입니다. 일부러 그런건지 원래부터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든 싫든 함께한 시간이 늘어나다보니 작은 움직임이나 말투만으로도 어떤 기분인지 쉽게 파악이 가능해지더군요. 보기와는 주변사람들을 언제나 걱정하고 있고, 저도 신세를 많이 진 편이라 고맙게 생각합니다.

"의외네."
"뭐가?"
"네가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

일단은 고맙게…….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있던 거야?"
"말하면 상처받을걸."
"…말을 말자."

…저는 고맙다는 말을 사혜의 앞에서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기로 마음속 깊이 결심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라는 속담이 가진 힘에 새삼 감탄하면서 말이죠.

"이건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인데."

그러면서 사혜는 불쑥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습니다. 레드컬러의 폴더 형식 휴대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기종이었기에, 저는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휴대폰이 뭐?"
"거기 앨범 세번째 사진 봐봐."
"응?"

사혜가 시키는대로 버튼을 꾹꾹 눌러 개인 앨범 항목으로 들어가 세번째 사진을 확인한 저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입으로 틀어막았습니다.

"풋!"
"……."
"이, 이거, 이거! 뭐야?"
"……애정이 담긴 여흥이라고 해두지."

그 사진은 다름아닌 민혜의 사진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귀여운 포즈와 표정으로 사진에 어필하려고 애쓰는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만 거기에는 있을리 없는, 하지만 너무나 어울려서 순간적으로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귀여운 강아지의 귀가 쫑긋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저는 쾅쾅 책상을 두드리며 웃음을 억제하다가 녹초가 되어 사혜를 바라보았습니다. 묘하게 뿌듯한 저 표정이라니.

"…포샵으로 수정한거야?"
"뭐…… 컴퓨터로 그 애완견 사진을 뽑아내다가 문득 떠올라서. 너한테 잠깐 보여주고 지울거야."
"하긴. 어울리긴 하지만 본인이 보면 역시 화낼테니까."

왜인지 모르게, 다른 동물이라면 몰라도 민혜는 강아지와 비교당하는 것만은 상당히 싫어했습니다. 귀여운 것들이나 동물은 엄청 좋아해서 방 안을 지극히 소녀스러운 컬렉션으로 가득 채우면서도 말이죠. 그 이유는……

"에~ 뭐야? 뭐야? 요즘에는 왜 나만 빼놓고 놀아?"

……에?
제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민혜가 제 목을 감싸 안으며 불쑥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평소라면 좋아라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었겠지만, 지금은 피가 식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재빨리 종료버튼을 꾹꾹 눌러서 사진만은 초기화면으로 되돌렸지만, 완전히 끄려면 꾹 눌러야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민혜가 제 손에서 사혜의 휴대폰을 채갔습니다.

"어라. 사혜꺼네. 흐응~ 요즈음 사진 뭐 찍었어?"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버튼을 꾹꾹 누르는 민혜. 저는 다급하게 사혜가 그 폰을 다시 챙겨가기를 바라며 올려다 보았지만 사혜는 너무나 당황한 모양인지 잠시 얼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 몇초의 공백.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혜가 손을 뻗으며 "자, 잠깐! 폰 줘! 앨범 보면 안돼!" 라고 외쳤지만 오늘따라 짖궂은 표정을 짓고 있던 민혜는 유연하게 그 손길을 스윽 피하며 "잠깐만 볼게." 라고 말하면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던 저는 파국을 예감했고, 민혜의 움직임이 멈추고, 미소가 지워지며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순간이 오자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거, 누구 장난이야?"

민혜야. 입만 웃고 있어. 조금 무섭다고.

"뭐하는 거야! 이리내!"

민혜의 손에서 폰을 채간 사혜도 그다지 유쾌한 듯한 표정은 아니었지만요.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 더더욱 굳어갔습니다.

"……최악이다."

가운데에서 저는 슬슬 온몸을 감싸는 오한에 전율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양보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고, 서로의 그러한 부분을 건드린 순간이 오고야 만 겁니다. 그리고 시작된 두 친구 사이의 말다툼은 수업 시작까지 채 2분 정도도 남지 않은 이 순간까지 팽팽하게 지속되고 있는 거지요.

"저기, 얘들아. 수업이 곧 시작……."

요즘은 만화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모범생스러운 권유를 던져 보지만, 두 사람의 차가운 눈길에 그대로 묵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슬슬 말도 줄어든 두 사람은 노려보기만을 유지했고, 수업이 시작해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릴때까지 두 사람은 계속 눈싸움을 하고 있었지요.

"이녀석들! 자리로 안 돌아가고 뭐해!"

약간 나이 지긋한 국어 선생님이 호통을 치고 나서야.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갔습니다. '요즘 애들은 말이지' 이라고 시작되는 선생님의 일장 연설이 끝날때까지도, 두 사람은 절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거라고 믿고 애써 기다렸지만, 그 더할나위 없이 싸늘한 냉전 상황은 하교 직전까지 이어졌고, 저는 그제야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슬아. 청소 끝날때까지 나랑 같이 있을거지? 응?"

이봐. 민혜야. 너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니. 언제부터 스스로가 가진 그 귀여움을 어필했던거야? 평소에 보기 힘든 그 사근사근한 태도에 제 이성은 스르륵 녹아내렸습니다.

"그럼 당연하──"
"……가자."

무덤덤하게 말하는 사혜의 눈 속에는 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당당함에 약간 감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지금까지 이것저것 철저하게 모아 온 저의 치부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할 도리는 없었기에 속이 쓰릴 따름이었습니다.

민혜가 있는 분단이 오늘 청소분단이라는 사실을 왜 잠시 깜박했던 걸까요.
평소 같았다면 저랑 사혜가 민혜를 기다렸다가 같이 하교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전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따라갈 것이냐. 저는 두 절친한 친구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

"가다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평생 따르겠나이다. 마님."

사혜의 선언에 제 고민은 깨끗이 증발했습니다. 저는 발걸음도 가볍게 교실에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응?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네요. 하지만 귓속을 파고든 한 단어가 제 발목을 잡고야 말았습니다.

"파르페! 특대!"

아아. 뒤들 돌아보니 저의 여신 민혜가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눈부신 후광 대신에 쫑긋세운 강아지 귀의 환영이 얼핏얼핏 보이는 건 눈의 착각이겠죠. 아무튼 저는 팔을 활짝 펴고 민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미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어!"

그렇지만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아서 저는 급히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스킨 라빈스. 먹고싶은 대로."

이건……! 그 짠순이로 유명한 사혜가 이런 파격적인 조건이라니……! 역시 여자아이의 자존심 싸움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바로 그자리에서 뒤로 돌아……

"그럼 난 하겐다즈!"

……갈수가 없군요. 민혜의 파격적인 제안에 사혜도 뒤질세라 조건을 올렸고, 저는 경매장에 생각없이 올려놓은 매물이 천정부지로 값이 뛰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과 비슷한 황홀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냉전(冷戰)! 눈 앞에서 별이 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라? 기분이 아니라 진짜로 별이 보이네?

"야 이년들아! 아주 생쑈를 해라. 청소 안 도와줄꺼면 썩 꺼져!"

민혜와 같은 분단인 우리반 반장, 깐깐한 안경녀인 주영이가 제 머리를 빗자루로 두들겼던 겁니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라 꽤나 뒷머리가 아파왔기에, 저는 욱해서 한마디 해주려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민혜를 제외하고 청소를 하던 여자애들 전원이 잡아죽일 듯한 눈초리로 저를 쏘아보고 있었기에 저는 슬그머니 물러서려고 했습니다.

"미안해. 얘들아. 그럼 이만……."
"가긴 어딜 가! 너희들때문에 못했으니 책임져!"

분노한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들어서 저희들에게 청소도구를 떠넘기고는,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교실을 뛰쳐나갔습니다. 폭풍이 지나간 것 처럼 난장판이 된 교실 가운데서, 청소도구를 껴안은 저희 셋은 그대로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먼지를 쓸고, 대걸레로 밀고, 책상을 원래 자리로 밀어놓고 난 뒤, 저희들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흠. 흠."

제가 헛기침을 하자, 두 사람은 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습니다.

"자자. 솔직해지자고. 애초에 별로 싸울 일도 아니었잖아?"
"……그렇지만."
"그래도~"
"둘다 반론 금지!"

저는 짧게 외쳐서 두 사람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입술에 올리고 윙크를 한 뒤, 크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엔간하면 쓰지 않으려 했던 방법이었지만, 두 사람 정도라면 괜찮겠죠.

"자. 그러면 이 탐정님이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 해주지."
"…못 믿겠어."
"…나도."
"어이. 이럴때만 둘이 한마음이 되기야?"

저는 손가락을 튕기고 사혜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고개를 들때마다 왠지 모를 분함이 느껴지지만 지금 그런 치졸한 열등감을 드러낼 때가 아닙니다.

"잠시 이쪽으로 숙여볼래?"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혜. 뭔가 귓속말이라도 해주리라 생각했는지,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쪽이 아니지. 저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사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습니다.

"자, 잠까……아읍."


사혜는 뭔가 말하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저는 끝까지 듣는 대신 제 입술을 사혜의 입술 위에다 포갰습니다. 잠시 버둥거리긴 했지만, 잡고 있는 목덜미가 달아오르고 힘이 빠지는 것을 봐서는 이미 저항의 의지 상실.
거의 저한테 기대어 쓰러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저는 사혜를 풀어주었습니다.

"……어어어. 지지, 지금, 무무무, 무슨."

새빨개진 얼굴로 허우적거리는 민혜. 키도 저보다 작으니까 더 쉽겠네요. 제가 한발짝 다가가자 무의식중에 물러서긴 했지만, 이내 책상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들바들 떠는 민혜를 끌어안았고, 민혜의 버둥거림은 사혜보다 더 오래 가긴 했지만 결국 축 늘어지고야 말았지요.

저는 새빨갛게 되어 쓰러진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때. 두 사람 다 기분 풀렸어?"
"……."
"……."

두 사람 다 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걸로 적어도 제 앞에서 둘이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것으로 사건은 무사히 해결."
"어디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물마저 약간씩 글썽거리고 있는 두 사람은 한마음 한뜻으로 저에게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사혜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완전히 돌리고 있었고, 민혜는 씩씩거리면서 제 가슴을 쿡쿡 찔렀습니다.

"정한슬! 도대체 무슨 짓이야?"
"기분전환."
"기분전환이라고……?"

허탈한 듯한 민혜의 반문에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릴때부터 아빠한테 이렇게 해주면 꼼짝도 못했는걸. 너희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면서 말야."
"──야!"

이번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습니다. 그후로 저는 10분 가까이 두 사람에게 긴 설교를 들어야만 했고, 다시는 두 사람에게 방금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왜 네 아버지가 널 곁에서 떼어놓으려 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사혜는 공허한 눈을 하고 담담하게 중얼거렸습니다. 아까부터 절대 저와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요? 저는 어깨를 으쓱 했습니다. 민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너무하잖아. 서양에서는 키스가 가벼운 인사라고는 들었지만 이건 좀……."

민혜의 말에 저는 단호하게 부정했습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해주지 않는 거라고. 영국에 있을때도 인사로 하는 가벼운 키스 같은걸 별로 달가워하진 않았어."

그러자 사혜는 왠지 더 얼빠진 표정이 되어 "그래… 키스. 부모님도 어릴때 입술에 해준적은 없었는데……." 라고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민혜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피식 웃더니 쉬는 시간에 사혜가 언제나 그랬듯이 제 책상 위에 걸터앉았습니다.

"……왠지 싸웠던 것이 바보 같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중얼거리는 민혜. 저는 그 말에 무언의 미소로 동의했습니다. 모든 싸움은 막상 흥분한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부끄럽고 시시하게 느껴지죠.

"그래. 좋아……좋아하면 뭘 해도 괜찮은건가……."

사혜는 아직까지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저런 사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말 드문 기회였으니까요. 그래, 이번 기회에 저 얼빠진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둬야지, 라고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교실의 미닫이문이 열어제껴졌고, 저는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손에서 놓칠 뻔 했습니다. 사혜도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고, 민혜도 황급하게 책상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이내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전혀 의외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한슬 언니? 언니!"

근처의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급하게 뛰어들어와, 숨을 몰아쉬는 것 치고는 상당히 침착하게 저를 불렀습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긴 했지만, 의외의 등장이라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 아이가 수업도 안 끝난 이 시간에 어째서 여기에?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아이의 선언에 저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언니, 우리 엄마가 실종됐어요."

저는 신음을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잠시간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도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거죠. 사혜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경악한 듯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민혜가 귀를 쫑긋거리며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듯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저기, 한슬아. 쟤는 누구야? 쟤네 엄마는 또 누구길래 너한테 찾아와서……"
"……아줌마야."
"응?"
"저번에 만났던 강정규 형사님. 저 애는 형사님 딸이야."

제 중얼거림에 민혜의 얼굴이 굳어버렸습니다. 교실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햇빛이 목덜미를 쿡쿡 따갑게 찔러 옵니다.
……이번 여름의 무더위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막간극 : 동기(動機)

"……형사가?"
"그래."

밀폐되고 좁아 터진 사무실 안에서 선풍기 한대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좌우로 바람을 뿌려대고 있었다. 상당히 피곤에 지쳐 보이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풍기가 자신을 향하자 일어서서 뒤의 스위치를 꾹 눌러 고정으로 해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놓여 있던 라면그릇을 다시 손에 집어들고 후후 면발을 불었다.

"거기 교통지도계 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지금 은평서 형사과정이 서를 아주 발칵 뒤집어 놨다더라. 난데없이 형사 실종이라니. 요즘같은 시절에 무슨 일인지 원. 조직 폭력배 항쟁에라도 말려들었나? 아, 그런데 왜 이 더운 여름에 하필 불어터진 신라면이야?"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고생쯤으로 되어 보이는 소녀는 자신에게 바람이 오지 않자 오만상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선풍기 목을 드르륵 돌려놓은 뒤, 청년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청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리를 감싸쥐었고, 소녀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몸을 던졌고, 순간 소녀의 풍만한 가슴은 출렁거렸다. 청년은 아픔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라면그릇을 집어드는 소녀를 모습을 응시했다.

"요새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 녀석이 미쳤군. 더위 먹었냐? 물어보나 마나 돈이 떨어져서 그렇지. 전기랑 수도, 가스 안 끊긴 것 만으로 다행으로 여겨. 젊은 놈이 이것저것 불평하기만 하고. 내가 너만할때는 말이지──."

결국은 일이 될 만한걸 찾아오라는 이야기군. 청년은 혀를 찼다. 하지만 야간 학원 강사로 겨우 연명해가는 처지에 자신도 돈에 대해선 변변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속으로 궁시렁거릴 따름이었다.

"──그런고로, 이번달 광열비는 네가 내라."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건데! 그리고 나도 돈 없어!"

청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소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하숙 빼지 그래? 어차피 일주일중 하루이틀밖에 못들어가잖아."
"……그 돈으로 여기와서 눌러살라고?"
"강요가 아니라 권유지."

청년은 소녀의 악마와도 같은 미소에 질려버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말없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소녀도 다시 별말 없이 라면을 먹었다. 후루룩.
서로 슬슬 익숙해져 버린 일상이었다.

"그나저나 형사 실종이라. 별로 돈이 될 만한 일도 아닌것 같은데."
"그거야 사람에 따라 틀리지."
"응?"
"실종된 사람이 강정규 형사거든."

소녀의 젓가락이 멈췄다.

"…진짜야?"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는 벌떡 일어서며 젓가락을 집어던졌다.

"얌마, 그걸 왜 지금 말해!"
"으악! 말로 해. 말로."

소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실없는 소리라면 애초에 네가 입에 담지도 않았겠군. 나도 더워서 머리 회전력이 떨어졌나보다."

소녀는 옷장을 벌컥 열고 대충 훑더니, 안에서 흰색 블라우스를 꺼내들고는 다른 한손으로 상의 와이셔츠 단추를 툭툭 풀기 시작했다. 청년을 기겁을 하며 젓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뭐하는 짓이야!"
"뭐긴. 옷 갈아입……아."

문득 생각난 듯이 소녀는 손사레를 쳤다.

"대충 나가 있어. 귀찮으면 그냥 있던가."

청년은 후닥닥 밖으로 뛰쳐나가 문을 쾅 닫아제꼈다. 그리고 문에 기대어 천천히 늘어졌다.

"도대체 저 아이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슬쩍 올려다본 문의 팻말에는, '벽광 해결사 사무소' 라고 작게 적혀 있었다. 그 팻말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문이 벌컥 열렸다.

"으앗!"

하마타면 앞쪽으로 그대로 쓰러질 뻔한 청년은 허우적대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의 등 뒤에서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녀가 한심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 어쩌다가 이런 녀석을 조수로 두게 된건지 알 수가 없군."
"……네가 협박했거든?"
"뭐, 됐어. 오랜만에 좀 움직여 보자고."
"갑자기 왜?"

소녀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돈이 될 만한 사건의 냄새가 나."
"……잘도 그런 얼굴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 입 안 다물어?"

청년은 계단을 내려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한창 무더위를 뿜어대는 한여름의 날씨였지만, 조만간 태풍이라도 불어닥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감은 불길한 것에 한해서만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야! 빨리 안 내려와?"

먼저 계단을 내려가서 멍하니 있는 청년에게 소리를 치는 소녀. 그 모습에 청년은 쓴웃음을 짓고,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소녀탐정극 제4화 :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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