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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탐정극 제2화 : 질주

08/07/15

태그 : 탐정, 여름, 달리기, 아이스크림


캐릭터 원안 : 아스
일러스트 : 시엣
글 : 로이미르

내딛은 발이 무겁다. 땀에 젖어든 옷가지가 천근만근이다. 시야는 흐릿해지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숨쉬기를 어떻게 하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들이마시고, 들이마시고─ 언제 내쉬는 거야? 제기랄!
눈 주위로 흘러드는 땀을 손으로 훔치면서, 한슬은 소리없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명도 지를 힘이 없어서 가쁜 숨소리만 색색 낼 따름이었다. 한슬은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된 7월의 초입, 아무리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유래없는 습도로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요즘의 날씨다. 그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할때 통풍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신경쓰지 않은 듯한 교복을 입은 채 허우적대며 달리는 자신의 모습은 한슬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웠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일까. 한슬은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한낮의 교실을 떠올렸다.



"에어콘 틀고 있는 거 맞아?"
"말하지 마. 입김 때문에 더 더워."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있는 시간인 점심시간. 열기로 후끈거리는 학생식당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교실에 늘어져 있었다. 시하고등학교 1학년 3반의 여자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라서, 열기로 달아오르는 교실 문이 열리게 되면 반 아이들 모두의 험악한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문을 여닫았다는 이유로 무언의 혹독한 시선에 너덜너덜해진 한슬은 자기 책상에 널브러지며 한숨을 토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뭘 이 정도로. 남자애들 반이었으면 벌써 욕설이나 주먹이 날아갔을걸."
"아니, 그건 좀……잠깐, 엉덩이 치워! 덥단 말야!"

한슬은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책상 위로 걸터앉는 사혜를 밀어냈다. 사혜는 낑낑거리며 등을 떠미는 한슬을 향해 검은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뭐야?"
"아이스크림. 먹기 싫은 모양이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슬은 의자를 드르륵 빼내고 사혜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살짝 허리를 굽혔다.

"불편하시면 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가씨."
"……또 오버한다."

한슬은 책상에 등을 기대고 아이스바를 즐거운 표정으로 할짝거렸다. 사혜는 원하던 대로 한슬의 책상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아이스바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슬의 아이스바가 슬슬 나무 막대 꼭대기를 드러낼 즈음, 한슬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야. 저번 비오는 날 있잖아."
"응?"
"그거, 애초에 네가 나한테 전화해가지고 알려준 거 아니었어? 나랑 똑같은 눈으로 민혜를 보는 애는 처음 봤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식으로."
"바로 그 부분이 문제란 거야."

사혜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한마디만 가지고 세린이인가 하는 애가 개를 찾는다고 멋대로 단정한건 네 쪽이잖아?"
"그, 그건……."
"뭐 확실히 닮긴 닮았어. 특히 절로 쓰다듬고 싶어지는 복슬복슬한 털이라던가."
"…어이."

한슬은 뭔가가 생각난 듯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얼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사실은 그 개 말인데. 별로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고 말았어."
"…뭔데?"
"…그녀석 수컷이래."

한슬의 폭탄발언에, 엔간하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 사혜의 무덤덤한 표정마저 약간 금이 갔다.

"……진짜야?"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야. 어제 산책하다 만난 세린이 본인 입으로 들은거니까."
"…대체 뭣때문에 수캐한테 그런 깜찍한 이름을 붙인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괜히 영리한 개가 아니었어. 개 나이로 중년이 넘은 녀석이라는데?"
"……도대체 품종이 뭐야. 외계종이야?"

그렇게 두 사람이 개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고 있을때, 둘 사이를 비집고 불쑥 비집고 민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뭐야.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해?"

한슬과 민혜 두 사람은 민혜의 복슬복슬한 머리칼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렸다. 그리고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민혜는 영문도 모르고 몸을 돌린 채 움찔거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따름이었다.



사혜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았지만, 한슬이 다시 자리에 똑바로 앉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한슬은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고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민혜의 시선을 피해 혼자말하듯 중얼거렸다.

"날씨 정말 덥네. 뉴스 보니까 폭염주의보가 내렸다고 하더라."
"주의보가 뭐야. 경보도 부족할 판이지."

한슬의 말에 담담하게 맞장구를 치는 사혜는 막상 전혀 더워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민혜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치이. 두 사람 다 내 얘기 들어줄 생각 없는거지?"

한슬과 사혜는 맹렬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 과장된 반응에 민혜는 팔을 풀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사실은 말야. 요즘 좀 늘어난 듯 싶어서."
"뭐가?"
"……말하기 좀 그렇지만……."

민혜가 볼을 긁적거리자, 한슬은 피식 웃으며 손을 팔랑거렸다.

"에이. 친구들 사이에 뭘. 마음 놓고 얘기해."
"……같아서."
"응?"
"아니, 사실은 요즘 살이 다시 찌는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라……."

민혜의 말에 한슬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사혜는 그런 한슬을 안쓰러운 눈동자로 흘긋 보고 혀를 찼다.

"제발 살이 붙게 좀 해달라고 매일 기도해도 안 붙는 친구 옆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조금 가혹하다고 보──느으헥?"

사혜는 그녀답지 않은 기괴한 비명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난데없지 민혜가 자신의 옆구리를 꼬집듯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민혜는 묘하게 밝은 표정으로 사혜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사혜 너도 그렇게 안심할 수준은 아닌것 같은데?"

사혜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한슬은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 먹잇감을 찾는 듯한 민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꿈틀거렸다.

"나, 나는 왜?"
"아니, 살 안찌는 것도 운동부족이란 소리를 들은적이 있어."
"그런 소리 금시초문이야! 또 강제로 너의 다이어트 운동에 동참시키려는거지?"

한슬은 사혜네 집이 합기도 도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런 탓인지 고등학교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합기도 4단이라는 치명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민혜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강인한 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멋모르고 민혜가 말하는 '가벼운' 운동에 동참했다가 죽을 고생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닌 한슬로서는 자연히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었다.

"후. 후후. 후후후"

하지만 다이어트란 말에 그늘진 얼굴로 고장난 라디오처럼 망가진 웃음소리를 흘리던 사혜가 반응을 했다. 사혜는 유령처럼 스르륵 한슬의 뒤쪽으로 미끄러지더니 어깨를 꽉 쥐었다. 한슬은 그 손길에서 어두운 악의를 감지하고 흠칫 놀랐다.

"저기, 사혜야?"
"좋아. 대찬성이야. 민혜야, 뭐든 하러가자. 달리기든 팔굽혀펴기든 수영이든 뭐라도 해주지. 자아, 빨리!"
"아니 아직 점심시간인데……."

사혜의 지나치게 적극적인 열의에 민혜마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별건 아니고, 저녁때 한강변에서 조깅이나 할까 했지."
"대찬성이야. 몇시에 어디에서 모이면 돼?"
"잠깐, 나는 별로 생각 없어. 조깅이 아니라 마라톤이 될…읍."
"한슬이 역시 대찬성이라는데?"

입을 틀어막힌 한슬은 반대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열심히 손을 파닥거렸지만, 사혜의 집념에 결국 두 손들고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럼 9시쯤. 방과후 집에가서 좀 쉰 다음에 운동하기 편한 옷차림으로 학교 뒷문쪽 버스정류장에서 보자. 따로 가도 되긴 하지만 셋다 집이 그렇게 먼거 아니잖아? 같이 가는편이 좋지."

민혜가 반론의 여지 없이 깔끔한 계획을 내어놓자, 다른 두 사람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 이유가 불분명한 투지에 불타고 있는 사혜와는 달리, 한슬의 경우는 부정을 아예 포기해버린 것이긴 했지만.

"될대로 되라지……."



그리고 오후 8시 30분, 한슬의 집.

"크아──정한슬! 야! 일어나! 이게 무슨 꼬라지야?"
"…응? 사혜 아냐. 이시간에 왠일이야."
"……이게 아직도 잠이 덜 깼나."

얇은 반팔에 트레이닝복 반바지를 차림으로 한슬의 집에 쳐들어온 사혜는 구깃구깃한 교복을 입은 채 기지개를 켜고 있는 한슬의 모습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씻지도 않고, 옷도 안 갈아입고, 밥만 먹은 뒤 선풍기 틀어놓고 지금까지 뻗어있던 거야?

"니가 무슨 백수 아저씨라도 되냐!"

한슬은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끔벅거리며 하품을 했다.

"하암.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뭐. 대충 살지."
"정말 가지가지한다……."

사혜는 혀를 차면서도 내심 씁쓸했다. 한슬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란 작자는 영국에서 교수까지 해먹으면서 딸은 2년전 한국에 이런 꼴로 혼자 내팽겨쳐놓고 따로 돌보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가정부를 고용해주긴 했지만, 한슬이 몇달도 안되어 계속 내치는 바람에 자취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지라 몇끼를 내리 굶고 다니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중학교때 가장 먼저 친해졌던 사혜가 한슬의 사정을 알고나서 지금까지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뒷바라지를 해왔던 것이기에, 사혜로서는 마냥 한심하다고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꼬질꼬질한 상태로 밖에 싸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발딱 인나! 스탠드 업!"
"발음 구려~"
"……죽인다."

사혜는 비틀거리는 한슬을 욕실에 던져넣으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딱 5분 준다. 얼른 세수하고 머리 정도만 감고 나와. 시간 없으니 그냥 교복 입고 가자."
"엑──!"
"아까 건조대 보니까 여벌 걸려 있던데? 이 난장판에서 옷 찾고 갈아입는거 기다려줄 여유 없어. 어, 벌써 30초나 지났다."
"자, 잠깐만!"

허둥지둥 머리끈을 풀어던지며 물을 트는 한슬. 사혜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돌려 희미한 미소을 지었다.



9시. 약속장소인 시하고 뒷문 버스정류장 앞.

"하, 한슬아? 그 꼴이 뭐야?"
"……쪽팔리니까 묻지 마."

제대로 말리지도 않아서 달려오다 엉망이 된 머리와 교복 차림으로 나타난 한슬을 보고 민혜는 처음에 기겁했지만, 사혜의 해명을 듣고 키득거렸다. 한슬은 얼굴을 가리고 한탄했다.

"아, 죽고 싶다."
"괜찮아. 페브리즈 듬뿍 뿌리고 왔으니 최소한 냄새는 안 날거야."
"……퍽이나 위로가 되는걸."

한슬은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붙였지만, 사혜는 가볍게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민혜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싸해지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저, 저기. 사혜는 그렇게 입고 있으니 농구선수 같아!"
"……아아."

사혜는 여고생치고는 상당히 장신인 180이라는 키였고, 운동복을 입고 나니 민혜의 말대로 농구선수 같은 폼이 제법 났다. 실제로도 농구부나 배구부 같은 곳에서 스카웃 권유가 입학시에 있긴 했지만, 운동신경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조용히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컴플렉스를 가질 정도로 무조건 키만 불쑥 큰 멀대같은 체형도 아니라, 꾸미고 다니면 상당히 스타일이 좋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도 관리에 나름 신경쓰고 있었는데, 방심한 사이에 뱃살이……."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자. 운동하러 가야지. 운동."

마침 버스가 때맞춰 도착했기에, 의욕 제로인 한슬을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사혜와 민혜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 꼴이다.
한슬은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민혜의 가벼운 조깅은 짧은 준비운동을 끝내고 즉시 시작되었고, 민혜의 빠른 페이스에 맞춰 달리려다보니 가뜩이나 지구력이 떨어지는 한슬은 마치 마라톤이라도 뛰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인 모양이다. 이제는 더이상 숨이 가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기분이다.

"게다가 인생의 즐거운 추억들이 차례차례 눈앞에 펼쳐져…… 이게 말로만 듣던 러너스 하이인가?"
"──아니야! 그건 러너스 하이가 아니라 주마등이라고! 정신차려, 한슬아!"

달리다가 널브러쳐 침을 흘리며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한슬을 풀밭에 눕힌 민혜와 사혜는 다급하게 한슬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주변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모여들기 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한슬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자, 사혜는 입술을 깨물고 휴대폰을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구급차라도 불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이라는 번호를 막 누르려는 순간, 작은 손이 사혜의 팔목을 쥐었다. 그리고 밭은 기침과 함께, 한슬이 몸을 일으켰다.

"쿠, 켈록, 케헥. 으으. 아냐. 관둬. 병원은 안돼. 콜록!"
"……괜찮은거야?"
"아. 흠흠. 아아. 괜찮아."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크게 몇번 한 뒤, 한슬은 팔을 붕붕 휘둘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나아졌어."
"…미, 미안해. 한슬아. 내가 무리하게 운동하자고 끌고와서……."

민혜는 무릎을 꿇고 한슬의 곁에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아주 펑펑 울것만 같은 기세였기에, 한슬은 민혜를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오기 부리느라 좀 무리했는걸. 나야말로 걱정 끼쳐서 미안해."
"정말?"
"정말."

민혜는 그 말에 안심한 듯 자신도 한슬을 꼭 끌어안았다.

"다행이야."

사혜는 뻘쭘한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서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부지불식간에 잡은 것이라고 해도, 그새 새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슬은 뭔가를 붙잡는 힘만은 엄청나게 셌다. 언젠가 한슬이 지나가는 말투로 얘기해주었던 그 이유는──

"아. 미안. 또 너무 세게 쥐었어?"

한슬이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자, 사혜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튕겨 일어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왜 그래?"
"아니. 왠지 모르게."

사혜는 무안한 기분에 괜시리 한슬의 머리를 쥐어박고 빙글빙글 돌렸다.

"뭐하는 짓이야!"
"이 바보야. 한번만 더 무리했단 봐라. 가만 안 둘거야."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사혜의 진심어린 말에 한슬은 피식 웃고 말았다.

"걱정마."
"흥."

붉게 달아오른 손목을 쓰다듬으며, 사혜는 코웃음을 쳤다. 한슬이 무사히 깨어나자 주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떠나갔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과 부모님 손을 잡고 산책나온 아이들이 간간히 지나갈 따름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옷가지 사이로 강바람이 스며들자, 온몸을 차가운 기운이 관통하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세 사람은 풀밭에 앉아 말없이 그 기분을 만끽했다.

"이제 집에 들어갈까?"

셋중 누가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새삼스레 부끄러워져서 금방 풀어버리긴 했지만, 가로등에 비춰지는 강의 수면이, 왁자지껄한 그들의 모습을 담고 조용히 흔들렸다.





"그런데 말야. 왜 그렇게 정색을 한거야?"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돌아가는 길에, 민혜가 물었다. 한슬은 가볍게 다리를 들면서 걷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뭘?"
"병원 말야. 병원에 나쁜 기억이라도 있는거야? 그렇게까지 표정이 바뀔 정도면."
"아아. 그거."

한슬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런건 아닌데. 내가 병원에 감기라도 걸려서 가게 되면 펄쩍 뛰면서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달려올 곤란한 사람이 있어서 말야."

한슬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을 저었고, 사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민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나는 잘 모르겠는데. 혹시 물어보면 실례되는 사람이야?"
"전혀. 대충 한국에서의 내 보호자뻘 되는 사람인걸. 다만 문제는……."
"문제는?"

한슬은 강변을 걷다가 난데없이 주차장 앞에서 멈춰섰다. 차들이 죽 늘어선 그 사이에서, 한슬으 한 곳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에?"
"아냐. 시간도 슬슬 늦었는데 빨리 가자. 얘기는 나중에."

한슬은 난데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빨리해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빨라진 페이스에, 민혜와 한슬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동안 걷는다 싶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는 하는 넓은 공터까지 오자 한슬은 잠시 멈춰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
"한슬아. 괜찮아?"
"물론!"

허리와 가슴을 쭉 펴고 한슬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까는 왜……."
"오늘은 내가 아이스크림 쏠게! 저기 건너편 편의점 가서 먹고 가자!"


난데없이 지갑을 꺼내들고 팡팡 두드리며 호언장담하는 한슬. 왠지 묘하게 거동이 수상했지만, 말하고 싶지 않는 것을 억지로 캐내고 싶은 생각은 둘 모두 전혀 없었기에 조용히 한슬의 의견에 찬성하고 말았다. 기쁜 표정으로 한슬이 지갑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어?"

지갑이 사라졌다.
그다지 특색이 없는 검은 가죽지갑이었기에, 당사자인 한슬을 제외한 두 사람은 잠시 지갑이 사라진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뒤늦게 이상을 깨달은 민혜가 제일 먼저 반응했고, 재빨리 한슬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저기 한슬이 지갑!"

돌아보니, 열심히 뒤쪽으로 달리는 검은 트레이닝복의 남자가 왼쪽 주머니에 지갑을 쑤셔넣고 있었다. 그제야 세 사람 모두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터무니없지만, 세 사람은 눈앞에서 지갑을 날치기 당한것이다.

"도둑이야아앗!"

한슬이 길게 소리치며 발을 내딛었고, 민혜는 이미 가볍게 달리기 시작한 뒤였다. 사혜는 가장 뒤늦게 움직였지만, 다리가 긴 탓에 두 사람을 따라잡는 건 쉬웠다.
그리고, 난데없이 밤의 강가를 배경으로 한 남자와 세 소녀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검은 트레이닝복의 남자는 그다지 달리기가 빠른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녀들과 거리를 유지할 정도는 충분했다. 거기다 적절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주변 지형에 익숙한지 슬쩍슬쩍 시야의 사각에 숨어가며 잘도 도망쳤고, 방금 전 막 격렬한 운동을 끝냈던 소녀들은 죽을 맛이었다.

"감히 한슬이 지갑을 훔쳐가다니. 용서 못해."

자못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숨 한번 안 고르는 민혜를 제외하고. 민혜는 지구 끝까지라도 눈앞의 남자를 쫓을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아까 한번 쓰러지기까지 했던 한슬은 말할바도 없고, 사혜도 슬슬 다리에 무리를 느끼고 있었다. 사혜는 숨이 턱에 받히는 것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가다간 이쪽이 먼저 쓰러지게 된다. 민혜의 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혜와 한슬이 멈추게 된다면 두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 남자를 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한슬이 달리다가 크게 휘청였다. 하마타면 쓰러질 뻔 했기에 사혜는 멈추고 부축해주려 했지만, 한슬은 손을 뿌리치고 다시 가쁜 숨을 내뱉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찾아야 돼, 하악, 저기, 사진. 엄마, 사진이, 하악. 쿨럭."

한슬이 토해내는 말들을 듣자 사혜는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느껴보기 힘들었던 순수한 분노였다. 사혜는 사력을 다해 민혜를 따라가 바싹 붙었다.

"……들었지?"
"……응."

평소에는 귀여워 보일 뿐인 민혜의 눈동자가 조용하고 날카롭게 빛났다. 사혜는 그 눈에 안심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민혜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뒤떨어지더라도, 뒤돌아보지, 마. 한슬이랑, 나는, 이미, 한계……"

사혜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속도를 줄였고, 이미 한참 뒤떨어져 달려오는 한슬을 부축했다. 한슬은 사혜가 감싸안자마자 무너졌고, 풀린 눈동자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혹시나 하고 사혜는 뒤를 돌아보았다. 민혜는 결코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좋아. 저 애라면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

다리 밑으로 달리던 검은 트레이닝복이 슬슬 속도가 떨어지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기둥 뒤에서 나타난 파란 옷의 남자에게 오른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던져주고 자신은 도로쪽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갑을 받아든 파란 옷은 검은 트레이닝복의 남자가 달리던 강변의 코스로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민혜는 잠시 어느쪽을 쫓아야 할지 망설였지만, 역시 지갑 쪽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파란옷의 남자를 뒤쫒았다.

"안……돼."

끊어질듯 갸냘프게 숨을 내쉬고 있던 한슬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 장면을 보고 손을 뻗었다. 옆에서 한슬을 부축하고 있던 사혜는 당황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 그만둬! 넌 좀 쉬어."
"아, 안돼. 민혜한테, 케헥. 말해야 해."

순간적으로 한슬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돌아왔다.

"지갑을 가진 녀석은 검은 옷 쪽이야."
"뭐? 하지만……."
"설명할 시간 없어. 나는 힘이 없으니까 네가 민혜한테 전해줘."

한슬의 눈동자를 보고, 사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사혜는 한슬을 잠시 풀밭에 뉘여놓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민혜야! 검은 옷이야!"

그 말에, 열심히 달리던 민혜는 멈칫했다. 민혜의 이성은 파란 옷을 뒤쫓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혜는 다음 순간, 주저없이 돌아서서 도로 쪽으로 뛰어올랐다. 아직 검은 옷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고, 민혜의 체력과 순발력이면 충분히 쫓을 수 있는 거리였다. 민혜는 자신이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저 친구를 믿는거야."

나직하게 중얼거린 민혜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속도를 늦추고 있던 검은 트레이닝복의 남자가 민혜에게 따라잡히는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깅 두번 했다간 황천길 가겠다……."
"……동감이야."

그제야 숨을 좀 돌린 한슬의 푸념 섞인 넋두리에 드물게 사혜가 동의했다. 둘 다 체력적으로는 완전 녹초가 된 채 축 늘어져 있으려니, 민혜가 도로 위쪽에서 주르륵 둘이 있는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민혜는 약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혜야! 괜찮아?"

걱정하며 일어서려는 한슬을 주저앉히며, 민혜는 배시시 웃었다.

"아. 응. 한슬아. 여기 네 지갑."

민혜는 검은색 지갑을 한슬의 손에 쥐어주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한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민혜의 작은 몸을 꽉 껴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하하. 아냐. 난 별로 한거 없는걸."

민혜는 슬쩍 한슬의 품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은 약간 쑥쓰러워 보였다. 사혜는 그 얼굴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사실을 질문했다.

"아, 네가 지갑을 찾아왔다면 그 도둑은 어떻게 한 거야? 설마 부상이라도 입혀 놓은 건……?"
"그건……"
"그 다음부턴 내가 설명하지."

민혜의 뒤로 난데없이 알로하 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선글라스 여성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사혜와 한슬의 얼굴은 일제히 딱딱하게 굳어갔다. 둘 모두 익히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안녕. 탐정놀이 꼬마와 그 조수 아가씨. 오랜만이네."

선글라스를 튕겨 올리면, 거기에는 시원스럽게 생겼지만 날카로운 눈동자가 윙크를 하고 있었다. 민혜는 당황해서 앞뒤로 마주보았다.

"뭐, 뭐야.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거야?"
"알다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한슬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인물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그렇지 않나요? 서울특별시 은평경찰서 강력1팀의 강정규 형사님?"
"형사 언니라고 불러."
"…저희만한 딸을 키우는 분에게 언니라고 부르는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에엑?"

한슬의 말에 깜짝 놀라는 민혜. 무리도 아니다. 아무튼 얼굴만은 20대 후반이라고 우겨도 좋을 동안의 40대 후반 여형사였으니까. 하는 짓은 푼수 아줌마 그 자체다만. 속으로 잔뜩 불평을 투덜거린 한슬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그 알로하 셔츠 패션은 뭐에요. 딸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요?"
"난 안 부끄러운데 딸년이 부끄럽대."
"……크악! 역시 형사님과는 얘기가 안 통해요! 이 4차원 아줌마 같으니!"

한슬은 툴툴거리며 머리칼을 쥐어뜯었고, 정규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너네집 아직 은평구 시하동이잖아. 학교 끝난지도 한참 되었는데 뭣하러 교복 입고 싸돌아댕겨?"
"그건… 말하자면 좀 길지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네요."

한슬이 고개를 슬쩍 돌려 외면하자 정규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한슬의 양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이게 뭐하는…"
"욘석아. 내가 사고 치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왜 언니 말을 그리 안들을까."
"사고는 뭐가요! 전 그냥 운동하러 왔다가 지갑을 도둑맞은건데!"
"그래도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입이 요 입이냐?"
"아야, 아야야얏!"

잠시간의 실랑이가 끝나고 한슬은 부어오른 볼을 문지르며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 아저씨랑 판박이네요. 아줌마도.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더 혼나볼래?"

한슬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혜는 그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아까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으셨어요. 형사님. 도둑은 어떻게 된거죠?"

정규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지만, 사혜의 단호한 눈동자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녀석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오늘 일제검문날이거든. 근처에 있던 순애를 무전으로 불러서 맡겨놨지. 아마 파란 옷 입은 녀석도 금방 잡혔을걸."
"형사님 말이 맞아. 내가 그 사람 뒤따라 잡자마자 나한테 경찰수첩 보여주고 수갑 채워서 무전 쳤거든. 내용은 잘 모르지만 금방 까만 차가 와서 뒷자리에 그 사람을 밀어넣었어. 아 맞아. 운전하는 언니 굉장히 귀엽게 생겼었는데."

정규의 말에 맞장구치는 민혜의 이야기에 한슬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애 언니도 와 있었어요? 형사과 떠났다고 들은거 같은데."
"응. 진작에 타서 여청계로 발령났지. 오늘은 일제검문날이라 겸사겸사 나온것 뿐. 야. 근데 왜 순애는 언니고 나는 아줌마야? 은근히 열받네."
"…형사님 나이 생각하세요. 순애 언니는 스물다섯이고 형사님은…"
"스톱. 스톱. 거기까지."

정규는 올렸던 선글라스를 다시 내려쓰고 한슬의 손을 잡아당겼다. 한슬은 그 손에 이끌려 일어나긴 했지만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통에 제대로 설수 없었다. 사혜가 달려가서 부축하려 했지만, 정규가 먼저 한슬의 허리를 잡고 끌어올렸다.

"엇차."
"뭐, 뭐하는 거에요?"
"뭐하긴. 업어주려는 거지. 아직 못 걷잖아? 가까운데 차 주차해뒀으니까 집까지 태워주마. 나도 서 들렸다 퇴근해야되고."
"그런거 필요 없…"
"아, 거기 한슬이 친구 두 사람도 집이 시하동이지? 따라와. 같이 태워줄테니."
"그냥 냅두라니까요! 우리끼리도 충분히 갈 수 있어요!"
"가는길에 팥빙수를 사주려고 했는데."
"……얘들아 힘들지 않니? 우리 친절하신 형사 언니 차 타고 집에 가자."

갑작스러운 한슬의 태도 변화에 사혜와 민혜는 서로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을 도리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차 안. 잠시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정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여고생들 앞에서 현직 경찰관이 뭐하는 짓이죠?"

옆자리에서 들려온 퉁명스러운 한슬의 목소리에, 정규는 움찔 손을 움츠리며 담배를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칫."
"생각좀 하고 사세요. 아줌마."

일말의 자비도 없이 쏘아붙이는 한슬. 정규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툴툴거렸지만 한슬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뒷자리의 민혜가 고개를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아까 어떻게 검은 옷이 진짜 지갑을 가지고 있다고 안거야?"
"응? 그거? 간단한 거야."

한슬은 사혜와 민혜 두 사람 쪽으로 상반신을 돌렸다. 그런 뒤에 왼손에 있는 100원짜리를 보여준 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한슬이 빙긋 웃으면서 오른쪽 손을 펴니, 그 손바닥 위에는 역시 100원짜리가 놓여 있었다.
민혜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사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왼손에 있던 100원은…?"
"그야 물론."

사혜는 왼손을 천천히 폈다. 왼손 안에는 아까 숨겼던 100원짜리가 그대로 있었다. 민혜는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뭐야. 그냥 오른손에 미리 가지고 있었던 것 뿐이잖아. 난 또 마술인줄 알고…"
"바로 그거야."

한슬이 동전 두개를 합쳐서 손에 쥐고 흔들며 단언했다.

"그게 아까 일어났던 일이지."
"응?"
"마술사가 아닌 한 왼쪽 손에 있던 동전을 오른쪽 손으로 옮기는 일 같은건 할 수 없지. 그런데 아까 달리던 녀석은 분명 왼쪽 주머니에 내 지갑을 쑤셔넣어 놓고선, 오른쪽 주머니에게 지갑을 꺼내 보란듯이 던져줬단 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민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짝거렸다.

"그렇게 급하게 달리는 와중에 그걸 본거야?"
"뭐… 탐정의 기본 소양이지."

어깨를 으쓱하며 가슴을 펴는 한슬. 사혜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고 정규는 운전하는 와중에도 손을 뻗어 한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얌마. 위험한 탐정놀이는 작작 해두랬지! 자꾸 사람 걱정하게 할래?"
"아얏! 아줌마야말로 조심하시죠!"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을 보며 웃던 민혜는 갑자기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외쳤다.

"형사님! 핸들! 핸들! 앞에 차가!"
"어? 뭐? 으앗!"
"꺄아아아악!"

그렇게 시끌벅적한 네 사람을 태운 차는, 밤의 도로를 감싼 어둠 사이로 마지막 질주를 재촉했다.



막간극 : 통화(通話)

정규는 핸들을 꺾어서 차를 돌렸다. 대기등이 깜박이고, 문의 시정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사혜와 민혜는 각자의 집에 내려준 상태라, 정규의 옆자리에는 한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규는 다시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 꼬나물며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한슬 쪽을 바라보았다.

"안 내리냐?"

한슬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다. 정규는 라이터를 탁탁 두드리고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거냐? 오늘 그렇게 신나게 달리고 놀았으면 됐지."

정규는 의자를 눕히고 뒤로 길게 누웠다. 한슬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아줌마야말로 뭔가 하실 얘기 없어요?"
"응? 없는데."

태연자약한 태도로 부정하고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 정규를 탐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한슬은 고개를 저었다.

"왜 강변에 차를 대놓고 있으셨던 거죠? 관할도 아니고 근무도 아니시면서."
"어라, 너 내 차번호 기억하고 있었냐?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네."
"……말하기 싫으시면 됐어요. 제가 알아낼테니까."
"너 임마, 또!"

정규는 몸을 튕겨 일으키며 소리쳤지만, 한슬은 어느새 문을 열고 밖에 나선 뒤였다. 한슬은 문을 닫기 전에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었다.

"아저씨한테 전해주세요. 신경써주는 건 고맙지만 더 이상은 사양하겠다고."
"정한슬!"
"아. 담배 떨어졌네요. 건강에 나쁘니까 피지 말랬죠?"

무심코 아래쪽을 보니, 발치에 아까 물었던 담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까 일어서서 외칠때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정규가 그것을 주워 고개를 다시 들었을때는 이미 한슬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끄응. 내 딸년도 그렇지만 저 나이대 여자애들 다루기 진짜 힘들구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담배를 바라보던 정규는 그것을 창밖으로 휙 집어던져 버렸다.

"……내가 드러워서 안 핀다. 안 펴.":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의자를 당긴 정규는 서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후진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기에, 정규는 휴대폰을 왼쪽 손에 집어들고 오른손만으로 핸들을 잡았다.

"네, 여보세요?"
"누님. 접니다. 정운이."

수화기 너머로 침착한 느낌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규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그녀는 일단 피식피식 웃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앗─! 천하의 은평서 형사과장님이 말단 형사에게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손이 떨려서 휴대폰 오래 잡고 있지도 못하겠구만요. 용건 있으시면 빨리 끝내주시죠."
"……누님. 공사는 철저히 구분해달라고 말한건 누님 아니셨습니까? 분명히 이 폰으로 걸었을때는 완전히 개인적인 용무라고 미리 말씀드렸는데요."
"깜박했슴다. 지금 차 빼느라 정신없어서 뭘로 받았는지도 헷갈려서. 근데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좀 전에 이순애 순경에게 연락을 받아서요. 한슬이가 도난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도난사건은 개뿔. 순애한테 시켜서 그자식들 민증까보라니까 못까서 털어보니 중딩놈들이더라고. 그냥 애들 삥 뜯는 수준의 사건이야. 보아하니 몇번 절도로 잡힌적 있어서 잡히더라도 어떻게 피해보려고 머리좀 돌린 모양인데 오십보백보지. 한슬이가 어려리고 만만해 보여서 노린 모양인데 별로 걱정할 필요 없…."
"──누님!"

짧지만 단호한 외침에 정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누님이라도 말은 주의해 주세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의 딸아이입니다."
"여기다 딸을 홀로 버려뒀다는 것 만으로도 별로 존경할만한 상대는 안 된다고 생각해."
"……."

수화기 너머로는 잠시 기분나쁜 침묵이 흘렀다. 정규는 엑셀을 밟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이예이. 제 부주의 맞습니다. 남매끼리 감정싸움은 그만하자. 다 내 잘못이지."
"아니에요. 제가 누님께 무리한 부탁을 했나봅니다. 죄송할 따름이군요."
"어차피 더 이상은 무리야. 한슬이는 벌써 내가 따라다니는걸 눈치챈것 같던데."
"……정말입니까?"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걔 아버지 닮아서 머리는 진짜 좋은것 같아. 작년 사건때도 느꼈지만 말이지."
"……다시는 그런 일에 휘말리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동감이야."

정규는 차를 잠시 멈춘 뒤 에어콘을 끄고 창을 내렸다. 열대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뜨거운 공기가 차안으로 훅훅 끼쳐들어왔다.

"……아직 애 아버지한테선 연락 없어?"
"……네. 아직 실종 상태입니다. 한슬이는 모르고 있겠죠?"
"알리가 없지. 그애가 자진해서 연락을 한적이 없으니."
"…아무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좀 귀찮으시더라도 그 애 주변좀 살펴 주시고요."
"어련히. 나 운전해야되니 끊는다."
"네. 누님. 좋은 밤 되세요."

4차선 도로로 차를 달리기 시작하면, 열풍이 그나마 시원한 바람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만은 어쩔 수 없다. 정규는 핸드폰을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내가 이러니 담배를 끊을수가 없지. 젠장."

신호를 기다리는 그녀의 차에서는 희뿌연 담배연기가 창문을 넘어 밤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 소녀탐정극 제3화 :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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