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탐정극 제1화 : 실종 |
08/07/08 |
태그 : 탐정, 여름, 비, 아이스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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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릭터 원안 : 아스 일러스트 : 시엣 글 : 로이미르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약간이지만 학교에 늦게 출발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늑장을 부려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이런저런 준비들을 마친 뒤 옷을 후다닥 갈아입고 난 뒤에는 눅눅한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괜스레 침대 옆에서 아직 쿨쿨 자고 있는 예림이를 기분좋게 쓰다듬었을 때, 방금전까지의 상쾌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대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림이의 발 부근에 너덜너덜해진 넥타이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건 분명 내가 아직 매지 않은 교복 넥타이였기 때문이다. "예림아!" 소리를 빽 지르니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는 예림이. 그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려고 침대 위로 뛰어 올랐지만 내 큰 소리에 놀라서 뛰어올라온 엄마가 "어머, 세린이 얘가 아침부터 왜 예림이는 괴롭히고 소란이니. 얼른 학교나 가!" 라고 내 변명을 묵살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다른 넥타이를 꺼내들어 맸다. 엄마 품에 안긴 그 자그만 녀석이 어찌나 그렇게 얄밉게 보이던지. 일부러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는 집을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계시던 아빠가 뭐라고 한것 같았지만, 알게 뭐람. 그리고 나는 대문까지 나와서야 손등에 닿은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비다. 그렇다는 건 다시 집에 들어가서 우산을 가져 가지고 나와야만 한다는 소리였고, 심기가 불편할 부모님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다. ……최악이다. 7월 둘째날의 아침은 그렇게 우울한 시작을 끊고야 말았다. 나는 액땜을 했다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네? 예림이가 없어져요?" 여름방학 시즌이라 보충수업도 단축수업을 하게 되어 3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이 교문으로 쏟아져나오는 시간인 7시 즈음, 정문 즈음에서 전화를 받은 나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지, 점심때 잠깐 외출하려는데 얘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서는… 아직까지 안 들어오고 있지 뭐니." "…벌써 7시에요! 신고라도 하셨어야죠!" "아니 평소에도 이런일 많았잖니. 예림이가 워낙 활발해놔서 금방 놀다 들어오겠지 했는데." "…비가 이렇게 억수같이 오는데요? 됐어요. 제가 찾아볼게요!" "얘, 세린아! 잠깐…" 나는 휴대폰을 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의 퍼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빗속에,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해서 아침의 건으로 속이 좀 상했던지라 돌아가면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실종되는것 까지는 결코 바란 적이 없다. 아직 힘도 없고 어린 녀석이다.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병에 걸리거나 나쁜 녀석에게 유괴라도 당하면 어쩌지? 설마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붐비는 우산의 물결 속에서 발걸음을 분주히 놀렸다. 여기저기 부대끼면서 눈총도 받았지만 고개만 꾸벅거리며 미안하다고 하면서 막 정문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잰걸음을 걷던 나는 사각지대에 서 있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머리로 그 사람을 정면으로 들이받고 말았다. "아얏!" 거의 동시에 터진 비명과 함께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고, 부딪힌 쪽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세게 받았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지만 나는 일단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미, 미안합…" 나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속으로 무심코 중얼거렸다. 예림이? 하지만 나는 금방 그 생각을 지웠다. 절대 그럴리 없다. 그러는 와중에 부딪힌 상대방도 이내 고개를 꾸벅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저도 넋 놓고 있었는걸요." 여자아이 치고도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귀여운 아이는 비에 젖어든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가슴에는 1학년임을 알리는 붉은 색 명찰이 달려 있었고, 흰색으로 권민혜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같은 학년이지만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반인듯 싶었다. "…다음부터 앞좀 잘 보고 다녀." 민혜란 아이의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커다란 키. 언뜻 보아도 170은 훨씬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농구선수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여자아이가, 정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우산을 펼쳐들고 쌀쌀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은 잘 안 보였지만, 명찰이 붉은 색인 것으로 보아 역시 1학년인것 같았다. 나는 무심코 그 비난하는 듯한 시선에 움찔하고 말았다. "사, 사혜야! 넌 나서지 마!" 그러자 민혜는 홱 돌아서 키 큰 여자아이를 발돋움해 노려보았고, 사혜라고 불린 그 여자아이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고 말았다. "…나는 틀린 말 한거 없어." 나는 그 태도에 속이 쓰리긴 했지만 예림이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다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안!"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는 달리기에 방해가 되는 우산을 접고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냥 달렸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예림이가 걱정이 되어 참을수가 없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민혜를 본 뒤로 더더욱 그 마음이 강해져 왔다. 예림아. 제발 아무일 없이 돌아와줘. 학교에서 우리 동네까지는 뛰면 채 5분 거리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비 때문에 달리기는 힘들었고 주변을 샅샅이 훑다 보니 몇시간이나 지나버린 듯이 느껴졌다. 그 사이 엄마에게 몇번이나 전화가 왔었지만, 아직 예림이는 들어오지 않았고 너나 얼른 들어오라는 내용의 전화였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커다랗게 예림이를 부르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빗줄기는 좀 줄어들었지만 이미 온 몸은 흠뻑 젖은 상태였고, 여전히 예림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서글퍼져서 근처 놀이터의 나무 아래서 우산을 접고 잠시 서 있었다. 넓은 입을 가진 활엽수는 비를 거의 다 막아주고 있었지만, 간혹가다 커다란 물방울들을 내 어깨 위로 뚝뚝 떨구곤 했다. "예림아!" 한번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한번 더 이름을 불러본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다시 전화도 울려 왔기에, 나는 울적한 기분을 꾹꾹 누르며 우산을 다시 펼치고 집 쪽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리고, 가슴에 뭔가 차가운 것이 와 닿는 기분을 느꼈다. "응?"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내 그것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비 속에 떨어진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비탄에 빠진 표정으로 그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는 우리학교 교복의 소녀였다. 아까 봤던 민혜만큼 작은 키에 깡마른 소녀는 절망감 가득한 한숨을 내쉬더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생각했어. 바보같다고 생각했지.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이 비오는 날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걷는 건 좀 아니라고 말야. 하지만 불가항력이었어. 비를 피하기 적당한 나무가 보였고, 그와 동시에 아이스크림을 반값이나 할인해주는 마트가 눈에 들어왔거든. 사실 나는 여기서 집이 멀기 때문에 들릴 일이 잘 없고, 집 근처는 할인마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주택가야. 결정적으로, 마침 교복 주머니에는 750원이 들어있었어. 그런 상황에서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댄 것이…" 소녀는 고개를 더 푹 수그렸다.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소녀의 질문 아닌 질문에 그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소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쪼그려 앉은 채로 나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마음에 안 들어." …내 가슴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까운 아이스크림이 묻은 내 상의 쪽을 가리키는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진심일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내버려 두면 뒤끝도 나쁘고." 소녀는 치마의 물기를 탁탁 털고 자기 우산을 펴들었다. 그리고 내 쪽을 흘깃 올려다보고는 손을 쭉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게." 일어서게 도와달라는 걸까. 잠자코 손을 내밀자 작은 손이 다가와 내 손을 꽉 움켜쥔다. 의외로 힘이 강해서 놀라 팔을 빼려 했지만, 소녀의 힘에 내가 끌려갈 정도였기에 그건 불가능했다. 약간 짖궂은 미소를 짓던 소녀는 흥, 하고 만족한듯 일어서며 내 손을 풀어주었다. 나는 새빨갛게 된 손을 흔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넌 도대체 누구야?" 소녀는 어깨를 쭉 폈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태도 하나하나가 묘한 자신감으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탐정이야."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탐정이라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나는 그애의 가슴께에서 정한슬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빨간 명찰을 보았다."……정한슬?" 이름은 기억이 있다. 입학식때 1학년 학생대표로 나와서 선서를 외치던 아이다. 국어책을 읽는 듯한 어투에도 불구하고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한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 이름이긴 해. 하지만 이름이 그 사람의 전부를 알려주는 건 아니지. 이를테면, 세린이 네가 찾고 있는 예림이라던가." "아, 그건……!" "알고 있어. 네가 기르는 개의 이름이잖아?" "그걸 어떻게……?" 나는 약간 멍한 기분으로 한슬을 바라보았다. 한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부터 계속 너를 봤지. 잃어버린게 있어 찾는다는 건 알겠는데, 이름을 부르는 걸로 봐서 물건은 아닌건 확실하고, 사람을 찾는다기에는 시선이 너무 낮고 찾아다니는 곳도 이상해. 네 태도도 그렇고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때 고양이나 개 정도의 애완동물이라고 확신했어." 사실 주변에서 예림이라는 이름을 외치고 다니니 오해해서 경찰에 신고하라는 사람도 보긴 했다. 하지만 귀찮아서 설명을 제대로 해준 적은 없고 어머니와 나 외에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을텐데. "…어떻게 개라고 확신한거야. 애완동물이라면 고양이라던가 다른 동물도 많잖아?" "스스로가 이구아나나 악어나 뱀이라던가 하는 녀석들을 기를것 같은 이미지로 보인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데 말이지." "왜 죄다 미끌거리는 이미지의 녀석들 뿐인거야……." 한슬은 묘하게 기분나쁜 미소를 돌려주며 눈을 빛냈다. "뭐 그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지. 세린이 넌 개를 찾고 싶은 거잖아?" "예림이야." "…사실, 개한테는 별로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예림이라니까!" 나 나름대로 집에 데려왔을때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지었는데 무시받는건 참기 힘들다. 한슬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비가 곧 그치겠는걸. 이제 움직여볼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슬은 우산을 탁탁 치더니 접었다. 나는 당황한 채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직까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 하지만 오늘 밤늦게까지 비가 계속 온다고 일기예보에……." "난 기상청보다는 내 감을 믿거든." 태연스럽게 우산을 접은 채 앞으로 척척 걸어가는 한슬. 나는 당황해서 우산을 들고 뒤를 따라갔다. 그러다보니 어느순간,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진짜야?" 우산을 치워보니 아직 날은 어둑어둑했지만 비는 더이상 내리지 않고 있었다. "뭐, 비라면 지겨워지는 동네에 살고 있었으니까." 약간 착잡한 기색이 드는 한슬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한슬이 자신만만하게 손을 내뻗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확신으로 넘치는 순수함이 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비가 그쳤듯이, 모든게 다 잘 되리라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자, 예림이를 찾으러 가볼까?" 주위가 아까보다 밝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비가 그친 탓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철벅. 나는 폼을 잡은지 몇초도 안되어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진흙탕에 미끄러지는 한슬을 보고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역시 기분 탓이겠지. 어찌어찌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버텨낸 한슬은 헛기침을 하고 성큼성큼 앞장서 나갔지만, 새빨개진 얼굴에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그 모습은 우습다기보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우산을 들고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어디부터 찾을 생각이야?" "응?" 한슬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쪽을 돌아보았다. "찾긴 뭘 찾아?" "…예림이." "너 이미 주변은 다 찾아봤을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내 말에 한슬은 혀를 찼다. "기본이 안 되어 있구만." 이라고 중얼거리는 한슬은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지만, 어딘가에서 헤메고 있을 예림이를 위해 나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사라진 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실종은 실종이야. 실종은 곧 사건이고,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오늘 예림이랑 너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어?" 나는 아침에 있었던 찜찜한 사건을 떠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실마리가 될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을 잡아내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게 바로……." 또다시 (있지도 않은) 작은 가슴을 쭉 펴는 한슬. "탐정이지." 뭐, 여기까지 와서 부정하는 것도 웃기니까 그 황당한 단어에 잠자코 있기로 하자. 나는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아침에 예림이와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흐응. 그랬구나."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한슬은, 난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림이는 영리해?" 난데없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응." 예림이는 딱히 내 개라서가 아니라 상당히 똘똘한 녀석이었으니까. 한슬은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번째 질문을 던졌다. "예림이와 같이 이 주변에 온적 있어?" 그러고보니 엄마가 아버지 양복 드라이 클리닝을 맡기러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종종 같이 따라온 적이 있었다. 내가 그 말을 해주자, 한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뭔가 알아냈어?" "대충 짐작은 가. 하지만 아직 내 추측을 추리로 바꿔줄 논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한슬은 의미불명의 말들을 줄줄 쏟아내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어떻게 할 셈인데?" 한슬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야,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는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어?" "…당사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무시하고, 한슬은 품에서 휴대폰을 가볍게 꺼내들고 한손으로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잠깐, 당사자라면 예림이? 예림이는 개잖아. 개한테 전화를 한다고? 도대체 뭐야? 내가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슬은 맡겨 두라는듯 손을 휘휘 내저을 따름이었다. "…아. 여보세요? 응. 나야. 한슬이. 미안하지만 지금 물어볼게 좀 있는데 말야. 뭐? 옆에 누가 있다고? 걔는 없는셈 쳐.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서 한슬은 주욱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때로는 유쾌하게 웃기도 하면서, 정말 보고만 있어도 즐겁다는 느낌이 전해져오는 통화였다. "아. 응. 알았어. 고마워. 다음에 맛있는거 사줄게. 그럼 끊는다~" 휴대폰의 폴더를 닫은 한슬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접은 우산의 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는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지금 뭐 한거야?" "탐문수사." "…전혀 상관없는 사람하고 그저 수다를 떤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렇게 보였다면 할 수 없지만." 한슬은 기지개를 쭈욱 켜고, 침침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럼 예림이는 나 혼자 데려오기로 하지." 승리감이 어린 미소와 함께 또박거리며 아스팔트를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얼마나 얄밉던지. 나는 자기도 모르게 성큼성큼 보폭을 넓혀 한슬을 약간 앞지르고 말았다. "예림이는 내 애완동물이야! 애초에 네가 멋대로 왜 찾고 말고 난리야?" 한슬은 내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을 딱 멈추었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예림이에게 있어 너는 뭘까?" "그, 그건……!"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듯한 기분이었다. 예림이에게 있어 나는 어떤 존재일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의 의미가 커다란 채찍이 되어 나를 후려갈기는 듯 했다. 나는 내 멋대로 그 애를 걱정하고 찾으려고만 했지, 정작 그 아이는 내가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는게 맞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자신이 없어져 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쯤이었을텐데."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스쳐 지나가는 한슬. 나는 결국 발을 멈추고 말았다. 애초부터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던 것 아닐까.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한슬아." "…뭐, 그렇게 인상쓸 필요 없어." 돌아서면서 슬쩍 윙크하는 한슬의 모습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내 들려온 소리에 나는 모든 것을 납득햇다. "왕!" "저녀석에게 넌 나름대로 좋은 주인이었던 것 같은데?" 세탁소 앞. 복슬복슬한 털이 물기에 약간 젖어 있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꼬리를 흔드는 예림이가 있었다. 나는 우산을 던지며 기쁨에 차서 외쳤다. "예림아!" "왕!" 반가운듯이 짧게 짖고는 내 품 안으로 뛰어드는 예림이. 아직까지도 축축해서 교복이 젖어왔지만, 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그런건 까맣게 잊고 가슴에 파고들며 얼굴을 할짝이는 녀석을 쓰다듬어주었다. 잠시 둘 모두 기분이 진정된 후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는데, 한슬은 무시당해서 기분이 나빴는지 약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미안미안. 너무 좋아서……." "참 빨리도 알아챈다." 한슬의 목소리에도 퉁명스러운 기운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눈만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진짜로 닮았네." "응? 무슨 소리야?" "아니. 아무것도 아냐. 신경쓰지 마." 핸드폰을 뒤로 숨기며 황급히 손을 젓는 한슬의 모습이 수상하긴 했지만, 예림이를 찾아준 것 만으로도 고마웠기에 나는 그 외의 것들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한슬은 어깨를 으쓱하고, 품 속을 뒤적이더니 뭔가 너덜너덜한 천 같은 것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예림이가 집을 뛰쳐나와 여기로 온 이유지." "아." 나는 그제서야 그 천이, 아침에 예림이가 물어뜯어 망가졌던 넥타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설마 이것 때문에 예림이가? "세린이 네 말대로 영리한 개야. 너한테 혼나자마자 그 넥타이를 고쳐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이쪽으로 달려온 거지. 사실은 너랑 만나기 전에 문 닫힌 세탁소 앞에서 넥타이를 물고 끙끙대고 있는 걸 발견하고 비오는 동안만 옆 가게에 맡겨달라고 했어." "하필이면 세탁소 앞에?" "글쎄, 그녀석 나름대로는 옷가지를 가져가는 이곳에 가져오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나야 개가 되어 볼 수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네 이야기를 듣고 짐작한 것에 불과하지만." 하긴 교복도 가끔 클리닝 맡기러 온 적이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나는 품에 안긴 예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맑은 눈에 물어보았다. "정말 그런거니?" "왕!" 정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짧게 한번 짖는 예림이. 나는 괜시리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예림이가 대견스러워서 다시 한번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사랑스럽고 따뜻한 이 생물이 앞으로도 쭈욱 내 곁에 있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다 손에 들린 너덜너덜한 넥타이를 바라보면서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고작 이것 때문에 이 아이를 걱정하게 하다니. 나도 참 바보 같았지. "저기, 감동을 만끽하는 순간에 미안하지만 정리할건 정리하는게 어때?" "정리라니?" "새삼스럽지만, 난 의뢰를 받았고 그걸 나름 충실히 수행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보수가 필요해. 난 공짜로 일 안하는 주의거든." …감동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발견한걸 숨겨놓고 쇼한거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었지만, 이 기분으로 굳이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한슬이 아니면 예림이가 어떤 생각으로 집을 나갔는지도 모르고 발견한 뒤 화만 내서 엉망진창인 하루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지. "뭘 원하는데?" 약간 긴장했지만, 의외로 한슬의 입에서는 소박한 답이 튀어나왔다. "아이스크림." 뭐야. 고작 그거였어? 긴장이 탁 풀린 표정으로 한슬을 바라보자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뭐야. 내가 엄청난 거라도 요구할 줄 알았어?" "사실은 조금." "조금 정도가 아닌 얼굴이었는데. 나는 의뢰인이 감당할 수 없는 보수는 바라지 않는다고." "아까 네 아이스크림을 떨군 것도 있으니까 말야. 뭐 먹고 싶은데?" 그 말 한마디에 한슬의 얼굴이 엄청나게 밝게 변했다. 약간 무서울 정도다. "하겐다즈!" 윽, 즉답이다. 꽤 통 크게 노는데. 하지만 그정도라면 현재 가지고 있는 내 용돈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한손으로는 예림이를 안고, 편의점에 가서 하겐다즈 한통을 사와 봉지를 건네주었다. 한슬은 아까까지와는 달리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고마워~" 라며 싱글거렸다. "그럼 난 집에 가볼게. 늦어서 어머니가 걱정하실거야."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슬슬 가로등이 켜질 시간이다. 안그래도 아까부터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슬은 내가 아까 던졌던 우산을 예림이를 안지 않은 쪽 손에 쥐어주며 당부했다. "곧 다시 비가 쏟아질거야. 우산 잊지 말고 가져가." "……고마워." 한슬은 골목을 돌면서 우산을 펼쳐들고 손을 흔들었다. "하겐다즈 잘 먹을게~ 또 무슨 일 있으면 1학년 3반으로 찾아와!" 라면서 끝까지 자기 PR을 잊지 않는 모습에는 그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한슬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조금씩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을 펴들면서 기막혀했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걸어다니는 일기예보라도 되는건가?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에 끼잉거리는 예림이의 턱을 간지럽혀 본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여고생 탐정이라니 무슨 만화도 아니고 말이지. "네. 엄마? 죄송해요. 방금 예림이 찾았어요. 네. 금방 들어갈게요." 하지만 세상은 넓고, 저렇게 유쾌한 괴짜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앞으로 일부러 만나러 갈 일은 없겠지만, 비오는 날 예림이를 보면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통화를 끝낸 나는 예림이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왕!" 빗속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예림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때보다 가벼웠다. ![]() 한슬이 골목을 돌아 우산을 펼치자 비가 가볍게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가볍게 발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다음 골목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두개의 우산에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 우산의 주인들이 익숙한 얼굴이란 것을 확인한 뒤에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한슬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비닐봉지를 치켜들었다. "아, 안녕.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어떻게 우연히 만났네. 같이 먹으러 가지 않을래?" 한슬은 억지 웃음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언제나처럼 딱딱한 사혜의 얼굴이 유난히 살벌하게 보이는 건 기분탓이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봉지에 뭐가 들었을까 눈을 굴리며 깜박이는 민혜의 모습에 방금전에 본 강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풋!" 결국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뿜어낸 한슬은 사혜의 손에 의해 억지로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호오. 뭐가 그리 즐거우실까. 꼬마 탐정씨는." "누가 꼬마야!" 붕붕 주먹을 휘두르지만 한슬의 짧은 키와 팔다리로는 사혜에게 절대 닿지 않는다. 사혜는 우월감에 젖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고, 민혜는 그 모습을 보고 키들거렸다. "…난 말야. 누가 날 내려다보는게 제일 싫어." "호오. 묘한 우연인데. 나는 누군가를 내려다보는게 제일 좋아." 사혜는 주먹과 함께 내밀어진 아이스크림 봉지를 손쉽게 빼앗았고, 한슬은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울상이 되어 손을 저었다. "돌려줘~" 하지만 사혜가 손을 치켜들면 봉지는 거의 2M 높이에 달했고, 한슬이 우산을 쥔 채 폴짝폴짝 뛰는 것 만으로 아이스크림을 탈환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민혜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혜 너 말야!" "아, 비 심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한슬이 참다못해 화를 내려는 순간, 민혜가 중얼거렸다. 아니나다를까, 우산을 들고 서 있어도 주변에서 빗방울이 튕겨 들어와 어딘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교복을 몽땅 적실것만 같은 폭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왕 얘기도 나왔으니 같이 우리집에나 가자. 아이스크림도 먹고 비도 좀 피할겸. 여기서 제일 가깝잖아?" "그래, 그러자!" "……끄응." 반갑게 찬성하는 민혜와는 달리 오만상을 찌푸리는 한슬. 그런 한슬에게 민혜는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장난인걸. 장난. 아 맞아. 나 궁금한게 있는데." "응?" "좀 전에 나한테 이상한 내용의 전화 했었잖아.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옷가지를 망가뜨렸으면 어떻게 했을 거냐고. 근데 그거 왜 물어본 거야?" "……아. 그, 그게 말이지……." 한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아무리 성격 좋은 민혜라도 그자리에서 자신을 날려버릴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혜의 순진한 눈을 보면서 거짓말할 자신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한슬을 구해준 건 민혜의 주머니에서 울린 전화벨이었다. "아. 집에서 전화왔다. 미안하지만 잠시 전화 받을게. 사혜네 집에 놀러갔다 온다고 해야지~" 어떻게 상황을 벗어난 한슬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사혜가 팔을 잡아끄는 통에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뭐, 뭐야? 갑작스레." "…민혜한테 안 들리게 하려면 조용히 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는 사혜의 모습에 한슬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사혜는 전화 통화중인 민혜의 사각에서 한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 의뢰 한 건 했지?" "아니. 한건이라기 보다는 애완동물 기르든 데 있어서 상담이라든가 조언을 해줬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으로…" "…그런데 말야. 자기를 애완견이랑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걸 알면 민혜는 어떻게 생각할까?" 앗, 하는 사이에 한슬의 핸드폰을 빼앗아 개의 사진을 확인한 사혜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한슬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대체 그런걸 다 어떻게 안거야…" "민혜에 대한 일이라면 어떻게든 아는 법이 있지." "…니가 그냥 탐정하세요…" 두사람이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민혜의 통화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사혜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거래하자." "거래?" "네 핸드폰의 그 사진을 나한테 전송해줘. 대신 나는 입다물고 있을게." "싫어! 또 내 약점으로 이용해 먹을거잖아!" "그럼 지금 당장 말할까?" "……그건 더 싫어." "현명한 선택을 바란다. 시간은 1분 줄게." 사혜는 한슬의 어깨를 툭툭 쳤고, 민혜는 통화를 끝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두 사람 무슨 얘기했어?" "비밀." "치사해~" "민혜가 굳이 듣고 싶다면 말해줄수도 있는데 말야." 태연스러운 사혜의 목소리에 한슬은 번개같이 사진을 전송했고, 속으로는 쓰라린 눈물을 흘렸다. 막 입을 열려던 사혜는 한슬로부터 온 문자를 흘긋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역시 비밀 얘기니까 안 될것 같아." "으응. 그럼 할 수 없지. 아, 한슬아. 아까 하던 얘긴데 말야~" 민혜의 말에 한슬은 화들짝 놀랐지만, 사혜가 민혜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걸자 민혜는 곧 그 이야기를 잊고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슬은 사혜에게 빚까지 지게 된 셈이라 내심 찜찜했지만, 아이스크림 봉지로 시선을 향하고는 곧 낙천적인 기분이 되었다. "뭐, 쓸데없는 걱정이려나." 한슬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고 앞으로 한발짝 내딛다가, 불쑥 튀어나온 옆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파란 우산에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뭐, 뭐지?" "아, 미안해요! 제가 좀 정신없이 바쁜터라." 한손에는 우산 손잡이와 가방을 동시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든 채 머쓱하게 웃는 청년이 한슬의 눈앞에 있었다. 한슬은 단순하게 놀란 것 뿐이었으므로 인상 좋은 청년의 공손한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 괜찮아요." "그러면 실례해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다시 우산과 가방을 꽉 쥐고 달리기 시작하는 청년. 한슬은 참 바빠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멈춰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금방 갈테니 기다려~" 그 소리에, 달리던 청년이 딱 멈췄다. 휴대폰에서는 그를 매도하는 폭언이 쏟아졌지만, 청년은 그것마저 잊고 친구들을 향해 종종걸음을 걷는 한슬의 뒷모습에 못박힌듯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목소리. 분명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우연의 일치겠지." "야 이 느려터진 자식아──!" "예이예이. 다 와갑니다요.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수화기 저편에서는 이미 화가 폭발해버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청년은 귀가 징징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빗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 소녀탐정극 제2화 : 질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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