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 ~ Heroless Heroine Holic ~ |
08/01/12 |
태그 : 천사, 사수단, 날개, 깃,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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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oless Heroine Holic ~ 1. 주인공을 찾는 이야기 그래. 이 이야기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없어진] 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어딘가로 가 버렸다. 이 무대에는 이미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나는 누구냐고? 아아. 주인공의 여자친구. 아마도. 일단은 그런 설정이니까. 하지만 주인공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그건 별 의미 없지. 주인공이 사라진 이상, 나는 평범한 여고생 A일 뿐이다. 그 사실엔 어떤 비극도 애처로움도 안타까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현실만이 흘러갈 뿐. 혹자는 말한다. 누구나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 아니냐고. 하지만 녀석은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에서 끌어내려 녀석이 주인공인 세계의 여주인공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자리에 앉히고 말았다. 그것만큼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 빌어먹을 녀석. 얼굴에는 아직 여드름도 안 가신 주제에, 머리도 지지리 안 돌아가 공부는 바닥을 벅벅 기는 주제에. 감히 나의 인생에 쳐들어와 주인공 자리를 꿰차다니. 그런데도 정말로 터무니 없는 이유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순간 난 인생에서 엑스트라로 전락해 버렸다. 녀석을 찾아서 걷어차 주기 전까지는, 나는 계속 주인공도 히로인도 되지 못한 채 출연료의 백분의 일도 못 찾아먹는 조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사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내 남자친구였던, 한 소년을 찾고 있다. 2. 주인공이 사라지기 전의 이야기 "…갔다올게." 그날은 유난히 속이 쓰렸다. 아침밥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생리 기간도 아닌데 괜시리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기에,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우으. 잠깐. 뭐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반문하니, 녀석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응. 곤란한데…" 호흡을 가다듬고, 마치 처음 고백 할때 처럼 발긋한 얼굴을 하고, 녀석은 말했다. "세계를 구하러 갔다올게." 그 바보가 처음 '좋아해' 라고 말했을때, 나는 배꼽이 빠져라 웃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 난 정체불명의 복통도 잊을 만큼 얼이 빠져 버렸기에, 웃을 타이밍을 놓친 채 멍하니 녀석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뭐, 믿지 못해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너한테는 말해두고 가고 싶었어. 암튼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말해도 좀 그렇잖아? 이런 황당한 이야기." …나는 그런 얘기를 여자친구에겐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 니놈이 더 황당하다. 아무튼 벙찐 표정의 나를 보고,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가슴을 쭉 펴고 떠벌인다. "엣헴. 넌 더 기뻐해도 된다고. 세계를 구할 영웅이 네 남자친구야." 잊혀졌던 복통과 동시에 극심한 두통도 찾아왔다. 아이구 내 팔자야. 나는 고통을 꾹꾹 눌러 참고, 등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힘차게 쥐었다. 그리고 앞뒤 볼것 없이 풀스윙! "지랄도 정도껏 해라. 배만 안 아팠으면 넌 뒤졌어." "아야야…" 그런데, 이상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이 정말로 안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농담 아냐? 이건 무슨 보정 효과지? 하지만 다음에 흘러나온 녀석의 말은 나를 쿨 다운 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시 그날?" 에라이 자식아. 나는 녀석의 가운뎃 다리를 힘껏 걷어차줬다. 암튼 남자새끼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툭하면 그날이래. 정말 하혈시켜 줘? "실없는 소리나 지껄일 거면, 쿵짝 잘 맞는 네 소꿉친구랑이나 같이 놀아, 이 멍청한 자식아!" 소리를 빽 내질렀는데, 이거 왠지 바보 같아. 괜시리 질투 때분에 히스테리 부리는 속좁은 여자애처럼 보일지도 몰라. 아 젠장. 이건 완전 미스다. 엉망진창이다. 안돼. 나. 멍청이. 지금 울면 진짜 돌이킬 수 없다. 그런데 눈물이란게 참는다고 안 나오는게 아니거든. 결국 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길을 먼저 내려가 버린다. "민희는…" 아. 그래. 그냥 소꿉친구라고. 이젠 변명 듣기도 지겨워. 그렇게 찰싹 붙어 다니면서. 니네들이 뭔 쌍둥이 남매냐. 썅. 자제란 걸 알아 봐. 그 골빈 여자나 너나. 그럴거면 진작에 니네들이 사귀지 그랬어! 짜증나. "민희는, 관계자니까." 녀석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뭐라고 대꾸 할 수도 없다. 무슨 대답을 하든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테니까. 잠시 걸음의 속도를 늦출 수 밖에 없었다. "모든게 끝난 후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널 최우선으로 보호해 달라고 했어. 기왕이면 내가 직접 모든 걸 설명해주고 싶지만… 내가 못 올 경우엔 민희에게 물어봐. 하핫. 그 경우는 생각하기 싫지만." 뭐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장난해? 이렇게까지 날 몰아세우고, 그딴 헛소리나 아직 지껄이는 거야? 난 도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녀석이랑 사귀고 있는 거지? 물음표가 수십개쯤 떠올랐지만 대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나, 갔다올게─" 가을의 거리에 울려퍼지는 한가로운 목소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옷소매로 눈물을 쓱 훔친다음에 뒤를 홱 돌아봤다. "너──!" 어라. 없다. 느긋한 표정으로 손이라도 팔랑팔랑 거리고 있을 터인 그 바보는, 보이지 않았다. 갔나. 정말로 가버렸어? 세계를 구하러. 웃기지도 않는다. 아프다. 침을 삼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복통과 두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아무리 쥐어뜯어도, 그 텅 빈 가슴 속의 아픔은 나아지지 않았다. 난 교복이 더러워 지는 것도 잊은 채, 길가에 주저 앉아서 소리없는 비명만을 내질렀다. 그날 이후, 나는 내 남자친구 유지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4. 주인공이 사라진 후의 이야기 Ⅰ [뉴스 속보입니다. 어젯밤 자정, 약 12시경 북한산 중턱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불명이며, 경찰은 대책 조사반을 편성해 수사중입니다. 현 시간 북한산 등산로는 폐쇄되었으며, 다행히 건물이나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농담이지?" 북한산은 등교길에서 500M도 안 떨어진 곳에 있다. 아침밥이 역류하는 소식과 함께 등교해야 하다니, 내 인생 최악의 아침. 지하가 사라진 지 벌써 1주일 째. 녀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6. 주인공이 사라진 후의 이야기 Ⅲ [급작스럽게 발생한 태풍이 동해를 통해 북상하여 당분간 비가 멈추지 않을 예정입니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오래 머무를 것으로 보이기에, 사실상 가을 장마로 들어선 요즘의 날씨입니다. 밖에 나갈때는 꼭 우산을 착용하시고……] "…비. 안 그치네." 우산을 펴는 것도 지겹다. 반복되는 일상을 상징하는 듯한 저 검은 우산이 현관에서 치워지는 날─ 그 바보도 돌아올까. 2주가 넘었는데. 7. 주인공이 사라진 후의 이야기 Ⅳ 정확히 지하가 사라진 후 2주 하고 3일째였다. 지하의 소꿉친구, 연민희가 접촉해온 건. "헬로우~ 으엑. 오늘도 칙칙한 얼굴. 기분나쁜 일 있어?" 물론. 지금 그 낯짝을 들이미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이야. 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것을 꾹꾹 누르고, 책가방에서 책들을 꺼내어 늘어놓았다. "별로." 무심하게 대꾸해 버리지만, 기분나쁠 정도로 지나친 하이 텐션의 그 바보는 분위기란 걸 읽을 줄 모른다. 뭔데뭔데? 고민 상담 해줄게~ 등등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달라붙는 그 태도란. …묘하게, 내가 아는 다른 바보와 겹쳐지는 모습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닮은 꼴인 녀석들이랄까. 소꿉친구라는 걸 납득 할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지하 녀석, 전학 가서 잘 지낼까~ 궁금하네." 순식간에 속이 확 뒤틀렸다. "…전학은 개뿔." 그래. 일단 지하는 '전학' 간 걸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엉성한 뒷처리다. 어떻게 같은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이야기 한마디 없이 전학을 가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애들은 나름대로 사정을 상상하고 납득하는 모양이지만 난 어이가 없었다. 그 '전학' 다음날 도망치듯 이사간 지하네 가족에 대해서는 더 할말이 없다. '너 남자친구랑 헤어졌냐?' 라고 태평하게 묻는 우리 엄마는 차지하더라도, 소꿉친구란 녀석이 전학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는다는 건… 제정신일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고보니, 너 이사간 걔네 집 주소는 알아?" "…적당히 하고 네 자리로 돌아가 줄래? 미안하지만 곧 수업 시작이야."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는데도, 저 가증스러울 정도의 포커 페이스는 변하지 않는다. "아항~ 주소도 안 알려 줬구나? 그래도 여자친구라면서? 헤헹. 나는 알고 있는데. 어쩔까나아. 알려줘?" 끓어오르던 화는, 민희의 그 말에 착 가라앉았다. 그러고보니 지하 녀석, '관계자'니 뭐니 했었지. 나는 말없이 민희를 노려보았고, 민희는 내 눈길에 두손을 들고 몸서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우와- 무셔. 이거 순순히 불지 않고는 못 버티겠는데."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펼쳐진 내 교과서 위에 민희는 글자를 휘갈겼다. 그리고 나서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로 뛰어갔다. 물론, 손가락을 치켜들며 생긋 웃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남자애한테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저 재수없을 따름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교과서로 시선을 떨구었다. [학교 옥상 물탱크 뒤, 12시 45분] …이건 신종 도전장이냐?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본 순간, 나는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의, 잘 모르는 여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 가────── "반드시 와. 너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어." 귓가에 입을 대고 빽 소리질러도 그정도 크기의 목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고막이 징징 울리는 느낌에 펄쩍 뛰어올랐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들리지 않은 거야? 이 끔찍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하지만 난 그 표정들에 대답을 들려줄만한 기운도 남지 않았기에 그대로 책상에 널브러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나 같은건 잊은듯이 즐겁게 떠들고 있는 민희의 모습이 내 비참한 기분을 가중시켰다. 그럼, 이젠 오기다. 나도 성깔 있는 여자라고. 8. 주인공에 대해 듣는 이야기 12시 43분. 연민희가 예고한 시간에서 앞으로 2분 남았다. 나는 교정의 인적 드문 곳에서 딸기우유와 크림빵을 먹으며 트림을 했다. 지하를 찾고는 싶지만, 그 뻔한 설정의 조역에게 머리를 숙이고 싶지는 않다. 기왕이면 그쪽에서 몸이 달아 날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우유곽과 빵봉지를 버리러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물탱크와 키스할 뻔 했다. "뭐, 뭐야?" 어느새 내 눈 앞에는 옥상에 있던 커다란 물탱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비아냥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말했잖아. 너한테 거부할 권리는 없다고." 민희의 목소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는 12시 45분에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저년, 결벽증 있는게 틀림없어. "나의 깃은 트랜스포트 페더 Transport Feather ─ 물체를 전이하지. 적용반경은 지름 약 1km의 구. 물체의 종류와 크기는 상관없어." 민희는 물탱크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지독한 경멸의 눈초리로. "정말. 넌 최악이야." 다짜고짜 그렇게 들이대 봤자 내가 대답해줄 말은 없다. 민희는 여전히 냉랭하게 나를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어째서 지하가 너 같은 녀석을 여자친구로 삼았는지, 또 목숨을 걸면서까지 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 아무런 자각도, 진지함도, 신중함도, 현명함도 없는 녀석이잖아." 으음.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지적받는 건 언제나 뼈아픈 경험이지만, 그 결점을 모두 갖추었다고 생각해왔던 사람의 입에서 듣는다는 건 더욱더 괴로운 경험이었다. "…너, 지하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어?" "몰라.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뭐?" 나의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민희의 페이스가 조금 흐트러졌다. 옳다꾸나. 나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뭘 해왔는지 알 바 아냐. 그녀석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지.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충실했고, 불만도 가지지 않았으며, 또한 완벽하게 해냈어. 내 말이 틀려?" "…무, 무슨 소리야. 네가 뭘 알…" "하지만, 정말로 사람 좋은 바보라 자신의 일보다 다른 사람을 더 우선했겠지. 그 결과는 생각하지 않고. 굳은 신념은 없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녀석이니까. 난 때때로 녀석한테 생각하는 머리라는게 있는지 의심스러웠다구." "지하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소리를 빽 지르며 주먹으로 물탱크를 두드리는 민희.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의 허공으로부터 물이 한바가지 쏟아져 내렸다. 민희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물탱크를 후려쳤다. "지하는… 지하는 너 때문에…! 내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는데! 어째서 너란 녀석은 그렇게 태평할 수 있는거야? 이 빌어먹을 년아!" "…아. 일단 진정하고." 나는 축축하게 젖어버린 머리칼과 교복의 물을 털어내며 조용히 대꾸했다. 그녀의 울분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묻어두기로 하자. "얌전히 네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 그 이후에는 나도 이야기를 좀 전개하게 해줘. 서로서로 공평한 거래지?" "…끝까지 시덥지 않은 소리를 나불…" "닥쳐." 나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평소와 같은 말투로 진전이 없는 민희와의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뭐, 뭐야?" 내 고압적인 태도가 의외였는지, 민희는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리 히어로가 사라져서 비운의 히로인이 된 나라도, 기껏해야 내 인생 변두리의 엑스트라 - 이를테면 남자친구의 소꿉친구 A양 따위가 멋대로 비중 팍팍 늘어나는 일 따윈 절대사양이거든?" 난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민희를 노려보았다.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민희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 대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으쓱했다. 나는 태연스레 대꾸했다. "풍만한 가슴에서." "……." "…아, 미안.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줘.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라고." 나는 민희의 심각한 표정에 손을 휘휘 저었다. 소꿉친구란 뻔한 설정답게 민희의 가슴은 고등학생 치고는 참으로 유아틱하긴 했지만, 놀리고자 한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이라니까. "…문득 사람 몸의 일부만 [전송] 시켜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졌어. 시험해봐도 되려나? 마침 좋은 실험대상이 눈 앞에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를테면 네 자신감의 원천이라던가." 우와, 살기가 눈에 보이고 있어. 그것도 시커먼 색. 왠지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나는 황급히 수습했다. "전송실패로 오목가슴이 되어버리는 일은 사양하겠어. 섣부른 발언에 대해선 사과할게. 나도 사실은 지하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으니까. 녀석, 데이트 중에도 종종 도망치듯 사라지곤 했었거든." "…그럼 아까 그 태도는 뭐야?" "……미안." 사실은 널 질투하고 있었거든, 이라고 대답하는건 입이 찢어져도 못하지. 대신 나는 솔직하게 사과하기로 했다. 민희는 못 미더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나치게 흥분해서 미안. 지하의 부탁도 잊고 그만 감정에 휩쓸려 버렸어." 결국 너도 평소에 나에게 감정 있었다는 소리잖아?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괜찮아." 결국 서로 한방씩 먹인 셈이니, 비긴거지. 민희와 나는 암묵적인 합의의 눈길을 교환했다. 난 순간적으로 흠칫 했다. 그것으로, 나는 민희란 여자아이를 더이상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친애심이 마구 솟아오른다. …아아, 정말. 바보같은 남자친구를 둔 덕이다. 결국 말싸움을 중단한 우리는 옥상의 물탱크 위로 올라갔다. 아마 방해하거나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고, 나는 민희의 이야기를 들었다. 9. 정리되는 이야기 아무도 원하지는 않았더라도, 커다란 힘을 타고난 자들의 탄생은 그 자체가 비극을 예고한다. 이를테면, 태어나자마자 날개를 잘리고 돌에 짓눌려야 했던 아기장수가 그렇다. 단순하게 '아아~ 설화에서나 있을 법안 일이야~' 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 세상에는 널렸다. 그래. 잘리는 것이 자신의 날개라면 그때도 시니컬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농담처럼 생각되겠지만, 태어나면서 정말 날개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불평등하다]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기뻐하면서 박수를 칠만한 일이다. 그들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새하얀 날개를, 세상에 날때부터 달고 태어났다. 만약 방송사가 알게 된다면 당장 가십거리로 전세계 구석구석 모르는 인류가 없게 될 만큼 황당한 일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 날개는 오직 그 자신과, 같은 날개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더욱 희극적인 일은, 이 터무니없는 [날개]의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 기원이 된 것인지 현대판 아기장수인 그들 자신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진 이는 신의 사역하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저 돌연변이적 능력의 발현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으며, 맨인블랙과 UFO를 좋아하는 이들은 우주인의 개입이 있었다고 지껄이기도 했다. 단정할 수 있는 건, 그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 또한 널려 있다. 일상 생활에만 지장이 없다면, 일부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새하얀 날개 따위는 3류 양판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현실에선 거추장스러울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늘을 펄럭펄럭 날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이 무진장 세지는 것도 아니다. 설사 같은 날개가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만져보거나 하는 종류의 물리적 접촉이 전혀 불가능했다. 게다가 까마득한 확률로 태어나는 몇몇 사람들조차, 어릴때 비상식에 대해서는 세뇌에 가까운 반발심을 주입받아서 어른이 되었을 때는 완전히 존재조차 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것이, 불과 10년전까지의 일이었다. 아무런 전초도 없이, 아주 급작스럽게 [날개]에 특별한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생각되던 '펄럭펄럭 날아다니는 일' 같은 것이 실제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자각한 몇명의 사람이 그것에 당혹해 하고 있을 즈음, 눈깜짝 할사이에 세계의 모든 [날개]가 펼쳐졌다. 처음은 누구였을까. 발빠른 누군가가 명명한 [천사(Angel)] 라는 자못 우스꽝스럽게 들릴 정도의 네이밍 센스가 그들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굳어지고, 뒤이어 묘한 조직이 떡하니 그들 사이에 등장해 버렸다. 정식명칭은 [신인류통합비밀결사회], 애칭은 [천사회]. 당장이라도 지하철에 나타나 도를 권유할 듯한 이 웃기지도 않은 조직은, 삽시간에 전 세계 각국에 뿌리를 박았다.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면 어떻게 될까?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건 금전의 힘이다. 당연히 그 강력한 힘을 휘둘러 보고 싶겠지. 비록 로또보다는 못하지만, 그것보다 더 직접적인 힘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얻게 된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그 여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 [천사]들이 꼭 그 표현대로 천사다운 삶을 살아왔을리는 없다. 그리고 예고되었던 [비극]들이 산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들 자신에게만 보이는 힘이라 해도, 이상한 사건들이 쌓이고 쌓인다면, 세계를 뒤덮고 있는 갖가지 통제기관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천사회]는 그 [비극]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 사이에 최소한의 행동법규를 세우고, 그것을 자주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 세계에서는 이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네트워크의 그물 사이에서 태어난 천사들의 치안기관과 같은 존재였다. 천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수준과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라면 대사관과 같은 형식의 [지부]를 가지고 있으며, 기본적으로는 그 국가의 [천사]들 모두가 지부원의 자격을 지닌다. 하지만 애초에 인간이 그리 합리적인 존재라면 범죄나 치안이란 단어 자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터이다. [천사회]에는 [회장]이란 천사들의 왕이나 대통령 급의 최고 의결권자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가진 능력의 특수성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천사들이 최고 간부가 되어 원탁 회의로 모든 문제를 결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는 천사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역사가 짧은 지금으로선 별로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권력]이라는 세속적 화두가 반드시 등장하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더라도, 실제로 천사회라는 조직은 자잘한 소요에 대해선 별 해결의지나 타개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으며, 성향 자체도 매우 온건했다. 아무튼 이러한 불만이 결국 터져나와, 천사회 최고 간부중 한명이 탈퇴해 별개의 조직을 만드는 파국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간부의 이름은 윌. [백(白)의 궁장(弓裝)]이라 불리우는 그가 가진 '날개'의 능력은 매우 특별했다. 그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강화하는 능력이 아닌, 자신의 날개의 깃을 뽑아 심어주어 평범한 사람에게 [천사]와 마찬가지로 힘에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천사회에서도 상당한 강경파에 올곧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윌은 미적지근한 천사회의 태도에 분을 참지 못하고 [너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간다면, 내가 직접 쏘아 떨어트리겠다] 라는 살벌한 말을 남기고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 길로 [사수단]이라는 사조직을 창설해 일반인들에게 [천사]의 힘을 나누어 주고는 [천사]의 어긋난 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도리에 벗어난 짓을 저지르는 천사들에게 가차없는 응징을 가하고 있다. 아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죽는 것보다 더 참혹한 꼴을 당한 천사들도 있기에 [사수단]은 힘을 남용하는 천사들에게는 섬찟한 단어였다. 그리고, 유지하와 연민희는 바로 그 [사수단]의 일원이었다. 10.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 "아까 이야기했지? 나의 [깃]은 트랜스포트 페더. 전이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럼, 지하도?" "응. 지하도 [깃]의 사용자야. 지하의 깃은 G 페더라고 불리워. 나는 보조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 애는 직접 천사와의 전투에도 참여했지. 나도 그 진짜 능력은 잘 몰라. 상당히 강력한 힘이라고는 들었지만, 평소에 잘 쓰지 않으려고 해서." "……왠지 알 것 같네." 예전 영화관 앞에서 싸가지 없는 양아치 녀석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우물쭈물하다 꽤 두들겨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내가 질질 끌고 도망치지 않았으면 다음날 꽤 멋진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초인적인 의지력이 있는 사람이거나, 엄청난 바보다. 지하 녀석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후자 쪽이겠지. "그런데 말야.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잘도 믿는구나." "응?" 민희는 물탱크에 걸터앉에 아래를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성의한 태도로 대꾸했다. "뭐, 믿지 않는다고 다른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암튼 그런 [지구를 지킨다~] 부류의 바보같은 짓거리 땜에 나와의 데이트를 날려먹고 했다는건 이해했어. 그런데 말야,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지금 그녀석이 어디로 사라졌냐]에 대해선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든?" "…너, 또!" 지하에 대한 험담에 민희가 또 발끈했지만, 곧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휘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하가 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한가지만 알아둬." "응?" "지하는 세계를… 아니, 정확히는 너를 구하려 하다가 죽었어." 나는 머리의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죽어? 누가? 이건 방금전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아." "지금까지의 이야기, 전부 믿고 안 믿고는 네 맘이야. 어디가서 떠벌려도 별 상관은 없어. 지하의 죽음을 헛수고로 하고 싶다면 말야." "잠깐, 그래도 이건 이야기가 너무…" 민희는 살벌한 눈동자로 나를 째려보았다. "지하는 네 몸 속의 [폭탄]을 껴안고 사라졌어. 그리고 다음날, 북한산 중턱에서 그의 너덜너덜한 옷만이 발견되었지. 그리고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어. 아무리 바보라도 지하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걸." "…무슨 소릴 하는지, 전혀…" 17일전의 뉴스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건 순간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모른다. 단지, 느껴진건 아득하고 잡히지 않는 허무함. "용무는 끝났어. 사수단의 의지와 지하의 부탁도 있으니 널 앞으로 지켜보긴 할 테지만. 그리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거야." 민희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교복이 옥상의 거센 바람에 의해 펄럭인다. "…그럼." 슬쩍, 뛰어내린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내 공중에서 아예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바람은 차다. 물탱크는 높다. 유지하 이 바보자식. 논리전개의 개연성이 완벽하게 무너진 3단 논법을 완성시킨 나는 손나팔을 만들어 허공에 외쳤다. "야이 자식아! 누가 멋대로 가버리래! 같이 올라왔으면…" 눈앞이 흐려진다. "같이… 내려가야 할거 아…냐. 혼자… 어떻게……" 누구에게 한 말인지조차 모르겠다.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입을 틀어막으며, 지하가 사라진 그날처럼, 난 주저앉아 소리없이 비명질렀다. ……믿을 줄 알아? 죽을리가 없다. 터무니없는 녀석인 만큼. ……포기할 줄 알아? 나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내가 다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는 그 녀석을 반드시 찾아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는 고개를 들었다. 폭풍이 다가오는지, 바람이 강해지고 있었다. 귓가를 스치며 머리칼을 흩날리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자아. 내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3. 주인공이 사라지는 이야기 식은땀이 뚝뚝 흐른다. 안색이 파리하다. 어지러이 세계가 돈다. 초점이 전혀 맞지 않는 눈동자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방이라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안쓰러운 광경. 하지만,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지하는 씨익 미소지었다. "아아,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너 미쳤어?" 민희는 휘청거리는 그의 몸을 부축하며 빽 소리질렀다. 평소에도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지하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 심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바보스러움을 비난할 말마저 잃고 말았다. 그저, 그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소리질러 줄 뿐. 민희는 고작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서,무력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하는 흐트러지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민희의 부축을 거절했다. "단비도, 똑같은 소리 하더라. 하핫." "이… 구제불능의 멍청이가……! 끝까지 그 애만…!" "그래도 말야. 그런 구제불능만 할 수 있는 일도 있는거야. 여기와서 머뭇거리면, 분명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없게 되어 버려. 두렵고, 무섭고, 힘들지라도 앞으로 걸어가야만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설령… 도착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후회할 일은, 남지 않을거야." 지하는 두 손을 민희의 어깨에 올리고, 그녀의 시선을 자신의 눈에 똑바로 고정시켰다. 민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확 붉어졌다. 하지만, 지하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민희야." 그녀를 향한 지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날… 보내줘." 민희는, 간절함을 넘어 절박함이 담긴 그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돌아올거지?" "……." "응?" "…노력할게." 지하는 그제서야 민희에게서 손을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어깨에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까 말야." "……바보. 꺼져버려." "미안." 살풋, 지하의 몸이 떠올랐다. 그리고, 땅을 박차면── 지하의 모습이 민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 민희는 등산로의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가, 이내 힘없이 미끄러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견뎌, 내, 아, 아파, 아파앗!" 민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칼을 배에 찔러넣은 채, 천천히 돌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전신의 감각을 미쳐 날뛰게 했다. "카, 아아악, 우, 으으읏." 시야가 점멸한다. 신음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린다. 닦을 새도 없이, 추하게 바닥을 굴렀다. 희미해져가는 의식의 저편에서, 지하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단비를 노리고 만들어진 [폭탄]이야. 나는 남자니까 신체의 내부구조가 다른 탓에 어느정도 견딜 수 있지만…' 기대었던 나무에, 머리를 세차게 들이받는다. 묵직한 통증이 머리를 뒤흔들었지만,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민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감각전이가 끊겨 버…려. 조금만…." 아득한 곳에서, 폭음이 몸으로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폭탄]을 설치한 녀석과 싸우고 있다. 그녀의 몸으로 전해지는, 찌릿찌릿한 긴장감이 전투의 긴박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깃]을 유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몇번이나 의식이 블랙 아웃 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수명이 다 된 백열등 같았다. 하지만 민희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그 터무니없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몸도 마음도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황에서, 민희의 안타까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 안돼! 지하야아아아앗──!" 민희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몸 안쪽에서 격발하는 강렬한 충격과… 아득하게 퍼져가는 [죽음]의 감각이었다. 11. 다가가는 이야기 "…어이,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고 있어?"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민희의 어깨를 툭 쳤다. "…친한 체 하지 마." 학교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뚝뚝한 모습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눈앞에 있는 낡은 빌딩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외진 골목에서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멀거니 솟아 있는 볼품없는 그 빌딩은, 민희의 말에 의하면 예의 [사수단]의 임시본부중 한 곳이라고 했다. "…난 데려다주기만 할 뿐이야. 그 다음은 내가 알 바 아냐." 차가운 말투로 딱 자르는 민희.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뭐. 그러시다면야. 나는 예의 책임자란 사람만 만나보면 된다고." "……" 민희는 말없이 내 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독기를 풀고 코웃음쳤다. "좋을대로 하라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아무래도 태풍은 돌아가지 않았고, 비를 한차례 뿌릴 생각인 모양이다. 나는 흘끗 하늘을 뒤돌아보고, 곧장 민희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섰다. 건물의 안은 밖보다도 더 초라했다. 칠은 다 벗겨져 흉물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콘크리트 벽에서 땀이라도 흘리듯 물이 줄줄 새서 흘러내리는 모습은 차마 한두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관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비밀결사인데, 뭔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안은 최첨단 시설]이라는 전개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아?" "……가난한 단체라 미안해서 어쩌나." 민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눈을 돌렸다. "아니 뭐. 검소하다는 느낌?" "헛소리는 그쯤 해둬. 다 왔어." 문득 고개를 들면, 불투명한 유리문이 눈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문 위쪽의 낡은 명패에는 [사회보수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런 이름의 당이 있었나?" 내 얼마 되지 않는 정치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대부분은 9시 뉴스, 혹은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으로 접한 수준이지만) 끙끙대고 있는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민희는 단 한마디로 날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없지." 얼빠진 표정의 나를 무시한 채 민희는 문을 열었고, 유리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리며 방문을 알렸다. 그리고, 나는 신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변태다." "…우리는 언제나 묘한 곳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군." 이 칙칙한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게 단촐하고 깔끔한 사무실 내부를 가로질러 뜬금없는 해먹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새하얀 정장을 걸친 남자가 누워서 기분좋은 표정으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귀에는 미니 컴포넌트에 연결된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있어서, 우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싶었다. 내가 상식 밖의 광경에 잠시 굳어 있는 동안, 민희는 기세좋게 터벅터벅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해먹의 줄을 가차없이 잡아당겼다. "으악!" 결과는 참혹했다. 떨어질때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그는 온몸을 뒤틀며 바닥을 굴러다녔고 보다못한 민희가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찰때까지 그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민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요. 총수. 손님 왔는데요." "아으윽. 기껏 남국 분위기를 내고 있었는데 무슨 짓입니까." "…밖에 비 오는데요." "그러니까 스콜이란 느낌으로." "느낌은 무슨 얼어죽을 느낌! 작작좀 하시죠! 손님이 찾아왔는데 언제까지 추태 부릴꺼에요?" 민희는 이를 득득 갈며 해먹을 걷어 구석에 쳐박았다. 총수라고 불린 흰 정장의 남자는 옷을 툭툭 털더니, 날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는 사회보수당 총수……" "…걔 지하 여친인데요." "……라는건 어디까지나 위장신분이고, 사수단의 중간관리직을 맡고 있는 비밀주의 핸섬가이입니다. 간단하게 총수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성의없는 자기소개를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후닥닥 끝마친 총수는 화려한 동작으로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는 뚱한 얼굴로 그 멍청한 짓거리를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총수는 내 얼굴을 흘깃 보더니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그러자 미니 컴포넌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귀에 익숙한 클래식 멜로디가 빗소리를 지우며 방 안을 채워나갔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Eroica)'입니다." 총수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음악을 음미했고, 민희는 아니나 다를까 한심한 표정으로 총수를 흘겨보고 있었다. "…제가 제일…" 총수가 손가락을 튕기면, 음악이 꺼지고 고요가 흐른다. 나는 갑자기 등줄기에 까닭모를 오한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내 총수가 눈을 뜬다. 그 눈에서 더이상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다. "혐오하는 음악이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끝을 모르고 타오르는, 저열하고 맹목적인 증오 뿐이었다. 12. 추락하는 이야기 나는 갑자기 굳어버린 단비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총수의 썰렁한 개그에 얼어버린건가? 애초에, 총수는 클래식 따위를 듣는 남자도 아니라고. 그때였다. "그나저나, 정말 잘 했어요. 민희양." 잠시 말이 없던 총수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들려졌다. "이년이 빌어먹을 유지하의 연인이었군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독기서린 목소리가 쟁쟁히 울렸다. "잠깐, 총수, 무슨 생각인 거에…" 말이 채 끝나기전에, 몸이 휙하고 떠오른다. 그리고 새하얀 깃털이 흩날렸다. "나의 '날개'는 그 본질에 충실하지요." 총수가 두 팔을 펼쳤다. 그 펼쳐진 팔 뒤에, 새하얗고 아름다운 [날개]가 돋아난다. 나의 몸은 그 날개에 닿기가 무섭게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죽음의 문턱까지, [날아가버리세요]." 아아, 알고 있다. 총수의 능력은 분명, 순수하게 뭔가를 [날려보낸다] 라는 개념에 특화된 [날개]! 미처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내 등은 건물의 창문에 부딪혔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가 흩날렸다. 파편이 몇개인가 박혀들어갔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차가운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얼굴을 두드리는 비의 감촉. 건물의 높이는 5층. 희미한 시선 아래로 보이는 시커먼 아스팔트.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사이, 냉혹한 물리법칙이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깃]을 발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전 그정도로 무르지 않아요." 새하얀 날개가 흐릿한 하늘 아래 성스럽게 펄럭인다. 총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 자태는 마치… "천…사." "네. 천사지요. 당신들 반역의 [사수]를 처단해, 그 어리석음을 징벌할 천사 말이에요." 총수의 손이 뻗어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날려버리는] 것은 물체만이 아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힘들게 잠입한 사수단에서 이런 직위까지 올랐는데 도망치게 놔둘수는 없지요." 총수의 손이 내 이마에 닿고, 빛이 터졌다. '단비… 잘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날려가기 직전, 단비를 건물 입구로 전이시켰다. 바보가 아니라면, 도망갔을테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여자지만… 지하와의 약속이었으니까. '하, 난 정말 바보야.' 그것으로, 내 의식은 깨끗이 [날아갔다]. 5. 주인공이 사라진 후의 이야기 Ⅱ "어떤 수를 써도 좋으니, 찾아내." "…어떤 수라고 해도 말이죠. 지부장."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곤란하다는 느낌의 목소리였다. "혹시 천사회를 무슨 흥신소 같은 단체로 알고 있는건 아니죠? 일단 동원할 수 있는 정보망은 움직여 보겠지만, 그리 기대는 않는 편이…" "…아, 그리고 말야. 큰거 하나 불렀어." "…네?" "정확한 경로는 특정해줄 수 없지만… 대충 일본근해에서 북상해서 동해를 통과할거야. 인명피해나 재산피해는 최소로 하도록 각별히 신경써줘." "자, 잠깐만요, 지부장! 설마 [날개]를 펼치시려고요? 이런 시기에? 제정신이십니까!" 이제 목소리는 기막혀서 어쩔줄 몰라하는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아아, 지극히 제정신이야. 일단 도착할때까진 되도록 비만 적당히 뿌리도록 [부탁]해두지, 뒷일은 맡길게." "맡겨요? 뭘 맡긴다는 겁니까? 이미 저지를 마음 가득한 일을 저보고 뭐 어쩌라는 거죠? 지부장, 제발 좀 철좀…" "뭐, 요즈음 가뭄이 지나치게 길어졌다 싶어서 말야. 농부 아저씨들은 기뻐하지 않겠어?" "그런 발상은 요새 초딩도 안 할거라고요! 게다가 대의회에 보고도 안 한 상태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 언제나 너의 유능함을 믿고 있었잖아. 하.하.하." "보이스웨어도 그것보단 더 생동감 있게 말하겠다! 그거 진심 전혀 안 담겨 있잖아요? 귀찮은거 떠넘기려는 시커먼 속셈이 빤히 보이는데요?" "무슨 소리야." "…이제와서 순진한척 해봤자. 나중에 펼칠 시기랑 위치나 특정해 주세요. 연락받는 즉시 움직일테니." 포기한 듯한 청년의 목소리. "…미안. 언제나 멋대로라서." "아뇨." 수화기 저편의 청년은 딱 잘라 말했다. "전, 지부장의 그 멋대로인 점이 좋아요." "…….너, 방금 터무니없는 소리 지껄인거 알아?" "…에?"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청년은 버벅대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전 단지… 아, 그, 뭐, 뭐랄까! 지부장이 생각하는 그런…" "비밀스럽고 조금은 에로틱한 느낌의 그런?" "놀리는건 관둬요! 저 끊습니다!" "어이어이. 그렇게 열낼 필요는 없잖아." "…우으윽. 상관만 아니면…" "아니면 뭐?" "……아무것도 아녜요. 도와드리긴 하지만 뒷일은 책임 못 져드립니다." "짜식. 튕기기는.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달칵. 신호음만 울리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자아. 나도 슬슬 움직여 볼까." 12. 히로인의 이야기 Ⅰ "정말 바보같은 여자야." 차가운 비가 내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조금도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어떤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한 남자아이를 너무도 좋아하기에, 그를 위해 그의 여자친구를 목숨걸고 구해낸 바보같은 여자아이를. "난… 뭐야."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이렇게 그냥 도망쳐도 되는거야? 이래서야 히로인도 아닌, 엑스트라에 불과한 역이지 않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린다. 시야를 가리는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꺼내든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한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여보세요." 13. 히로인의 이야기 Ⅱ 나는 내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정통으로 머리부터 들이받아서, 피와 함께 회백색의 내용물이 흩뿌려져 있다. 몸도 이리저리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져 있었다. 비바람이 내 죽은 몸을 두드려댔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바닥에 내던져진 개구리 같다. 기분나쁜 그 시체는, 볼수록 구역질이 난다. "아악!" 몸을 튕겨올린다. 가슴은 방망이질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는 차가움이 내 몸을 적셨다. 하지만, 묘한 따뜻함이 내 어깨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미안. 우산은 안 가져와서." …이건 꿈이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주마등이 이런 거라면… 죽기 직전에 꿀 수 있는게 이 행복한 꿈이라면. "약속은 지켰어. 노력했거든." 난……! "지하야아아아아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하의 몸을, 나는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 온 몸으로 느껴지는 이 따뜻함이,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너, 주, 주, 죽은줄로만 알았잖아. 으, 이, 우으으윽!"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어, 나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 바보같은 얼굴을 지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해서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었지만, 그 편이 훨씬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삼스레 그 품에서 벗어나기도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난 잠자코 그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 숨을 골랐다. 지하는 잠자코 날 감싸안아 주었다. "아─ 이거 감동적인 상황이네요. 잠시 기다려 드릴까요?" 내 등줄기로 한기가 흘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뻔뻔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총수는 새하얀 날개를 펼친 채, 바닥에 내려서 있었다. "오랜만이죠? 유지하군." "너무 반가워서 그 반반한 낯짝에 주먹이라도 날려주고 싶네요. 총수님." "그거 영광인데요?" 지하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에도 총수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잘생긴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름 고르고 고른 집행자인 어큐트 크리티시즘Acute Criticism 정도로도 무리였나요?" "……." "인질극, 함정, 저격, 시한폭탄, 배신자…이 모든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무대였는데 말이죠. 왜 안 뒤져주신 겁니까. 이 망할 새끼야." 총수의 얼굴의 순간, 증오로 뒤범벅이 되어 무너졌다. "당신 때문에 제 계획이 방해받은게 몇번인지 아세요? 아아, 이제 셀 수도 없잖아. 썅. 상상할 수 있나요, 그 좌절감과 슬픔을?" 총수는 평정심을 잃은 듯, 어투가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지하는 나를 조용히 내려놓고, 우산을 내 손에 쥐어준 후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총수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세계정복 같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나 하는 너같은 저능아에게 줄 관심은 없어. 엿이나 쳐먹고 떨어져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총수의 입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파랗게 질려갔다. "이, 개애애────자식이!" 총수의 날개가 옥상의 천장을 훑자, 두꺼운 콘크리트가 패여져 우리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지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커다란 콘트리트 조각들이, 마치 바닥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지하의 손 안에는 검은 깃이 있었다. 그것은… G 페더. 나는 이제야 그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를 둘러싼 중력Gravitation을 제어하는 그 깃의 이름은 G 페더. 유지하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 힘을 개방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단비와 민희에게 사과해라. 쓰레기." 세계의 절대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반역의 검은 깃이 그의 손에서 빛난 순간, 총수는 총알처럼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끄아아악!" 그리고, 날아오르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하강한 총수는 얼굴과 바닥이 닿기 직전, 떨어지는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다시 올라갔다. 마치 유원지의 놀이기구를 탄 듯한 그 움직임은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수백미터의 상승과 낙하를 반복한 총수는 그 상황이 그다지 우스꽝스럽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수단 제6의 사수, 흑(黑)의 단장 Sixth archer the black master ── 유지하다. 그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두도록 해라." 총수는 바닥에 쓰러져서 헐떡거리며 온몸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랑하던 새하얀 양복이 더러운 비에 젖어 더러워져 있었다. "크, 히히힉, 후우, 하아아악." 대답할 여유도 없는지, 총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하는 그 앞으로 걸어가, 그의 허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크헉!" 총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옆으로 굴렀다. 하지만 지하는 그에 멈추지 않고, 발로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나는 그 광경에 아무말도 꺼내지 못한채 굳어 있었다. 저런 모습의 지하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지하는 그 어떤 임무를 맡더라도,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았던 여린 소년이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소년은, 지하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 같은 이질감이── "…또 건드렸겠다." 뿌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의 발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에 따라 지하의 손에 들린 깃도 검은 빛을 뿌렸고, 총수는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꿈틀거렸다. "단비도 모자라서, 민희까지…!"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뒤틀린 이상중력에 의해 쩍쩍 갈라진다. 나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지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하야, 그만…!" "네놈은, 어째서, 어째서 내 주변의 사람들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거지? 내가 맘에 들지 않으면 네놈 손으로 없애버리라고! 네놈은 최악이다. 너같은 녀석에게는 악당같은 호칭조차 과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로 짓눌려 죽…" "지하야!" 나의 비명 때문인지, 아니면 지하 자신이 스스로 멈춘 것인지 검은 깃이 사라졌다. 지하는 입술을 깨물고 총수를 노려보았다. 총수는 그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마치 벌레처럼. 짓밟힌 날개는 그 흉한 모습을 감추는 허물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지하는 고개를 돌렸다. "…손댈것도 없어. 네놈 따위는." 씹어뱉듯 말한 지하는 총수를 뒤로 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돌아온 그의 모습에 두 팔을 펼치고- "…왜, 나도 어큐트처럼 죽여버리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악의어린 말은, 가느다란 실이 되어 지하를 옭아맨다. 그것은 차가운 맹독. 서서히 퍼져, 단숨에 척수로 파고든다. 지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고개를 떨군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 "죽였습니다. 네가. 다름아닌 네놈이." 독사가 살아있다. 그 비열한 녀석은, 미끌거리며, 쉭쉭거리며, 기분나쁘게, 악의로 나의 소중한 사람을 속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우산을 접었다. 생물에 물체를 겹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잔혹하게 박살이 난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녀석은 마지막에, 멋대로 자폭을…" "기억이 이상해진것 아닙니까? 죽인것은 당신입니다. 그것은 기정사실. 당신이 직접 손을 대서, 힘을 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은 그의 죽음의 이유가 되었어. 그러니까, 네놈도 죽어버리세요." 이제야 알았다. 그가 주입하고 있던 독은, 실은 나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저 더러운 독사의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분노가 이성을 잠식해갔다. "네놈이나 뒈져." 손에 든 우산을 던졌다. 그리고, 그놈의 심장을 향해 전이했다. 콘크리트가 튀어올랐다. 총수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길다란 우산이 바닥에 박혀 있을 뿐. 그리고, 내 손 안의 깃도 사라져 있다. "체크메이트." 독사가 미소짓는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지하의 왼팔에 길다란 우산이 틀어박혔다. 나는 입을 벌렸다. 지하도 한순간 당황했고, 그것으로 끝. 퍽. 시야가 붉게 물든다. 거짓말처럼 지하의 왼팔이 폭발하듯 날아갔다. 엄청난 피가 뿜어져 나온다. 거짓말 같다. 아니. 거짓말이다. 누가 거짓말이라고 해줘. "대단한데요? 민희양의 힘." 총수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웃는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하가 바닥에 쓰러진다. 어떻게 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는, 걸어가려고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에 팔다리를 움직이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마지막 [폭탄]을 당신이 발동시켰군요. 이거 매번 신세만 져서 어쩌나." 그의 손에서 내 깃이 빛나고 있다. "사실 그의 '깃'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당신의 능력도 나쁘지 않군요. 더구나 제 [날려버리는 날개]와 결합하면 꽤 멋질 것 같은데요?" 총수는 자못 유쾌한듯이 이야기한다. "깃을 폭탄으로 바꾸는 천사, '어큐트 크리티시즘' 최후의 폭탄.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건에 맞으면 발동되는 논리폭탄. 상대방의 힘을 강탈하는 그 폭탄의 발동조건은-" 안돼. 말하지마. 나를 더욱 추하게 만들지 마. "[저를 죽이려고 공격할 것]입니다." "…아냐…"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이 저 개자식을 말렸을때, 제 계획이 간파당한것이 아닌가 마음을 졸여야만 했지요. 뭐,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잘 되었지만 말입니다." 신음조차 흘릴 수 없다. 빗속의 지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총수는 나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는 뿌리치려 애를 썼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그냥 여자애였고, 총수는 호리호리하다고는 하나 엄연한 성인 남성이었다. 그는 내 손목을 틀어쥐고, 움직이지 않는 지하를 향했다. 그리고 그 손 끝에는,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닌 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자아, 마지막은 당신이 직접 당신의 능력으로 끝장을 내주기로 하죠." "시, 싫어!" "흐응. 저에게 가학 취미는 없지만 당신의 목소리는 제법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군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가도록 할까요.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어디로 할까요?" 콰드득. 총수의 날개가 옥상을 휩쓸고, 파편들이 날아올랐다. "[기회]는 많습니다. 오른팔, 양 다리, 아니면 손가락이나 얼굴부위 같은 선택도 나쁘지 않아요. 어느 부분이 가장 괴롭지 않을까, 치명적이지 않을까, 잘 선택해 주세요. 잘못 선택하면…" 총수는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로 죽어버린다구요?" 숨이 턱 막혀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없다. 행동할 수 없다. 잘난 듯 단비에게 떠들어대던 나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최고의 바보 얼간이였다. "아… 우으윽…" "이런이런. 중요한 순간에 울어버리는 걸로 도망치는 건가요. 여자들이란 참 어쩔 수 없다니까요. 그럼 제가 대신 선택해 드리죠. 다음에 날려버릴 부위는…" "네놈의 뻔뻔한 주둥아리다." "뭐? 컥!" 총수의 반문은 대꾸도 받지 못했고, 그대로 위로 쏘아지듯 튕겨져 나갔다. 간신히 공중에서 자세를 잡은 총수는 입술이 터져서 피투성이였고, 나는 뭐가 어떻게 된건지 영문도 모른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는 옥상의 입구에서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퍼컷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시선을 느끼고 머쓱한듯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어서, 신음을 흘리며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은단비?" "이게 무슨 바보같은 일이얏!" 입의 피를 소맷자락으로 훔쳐낸 총수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분노보다는 당혹감이 더 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비는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긴. 진짜 주인공의 귀환이지." 언제부터였을까. 폭풍은 멈춰 있었다. 0. 옛날 이야기 : HHH "꽤 특이한 별칭이네. H는 허리케인의 H? 아니면 레슬링 즐겨보니?" "쯔쯔. 윌. 그러니까 넌 언제나까지나 머리 굳은 강경파 소리밖에 못 듣는거야." "……보자보자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 "왜? 어린 여자애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기분 나빠? 어차피 천사회의 대회의에 참석하는 의원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넌 권리보다 상식이 필요한것 같은걸." "흥." "여튼, 궁금한데. 밝힐 생각은 없는 건가?" "너, 내 날개가 뭔지 알지?" "음… 상상은 안 가지만 대충은. 폭풍천사란 별명도 있잖아?" "그거,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내 날개는 [그것뿐]이 아니야." "무슨 소리지?" "내 별칭, HHH가 뭔가의 약자라고 생각해?" "흐음?" "간단한 확률의 문제야. 여기 동전이 3개 있어. 숫자가 있는 쪽이 뒷면으로, T라고 하자. 그리고 할아버지가 있는 쪽을 앞면으로, H라고 했을때 말야." "에?" "난 말야. 이걸 던졌을때 전부 앞면이 나왔으면 좋겠어." 잘그락.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동전은 예외없이 앞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어떻게…" "HHH. 몇번을 해봐도 마찬가지야. 이것이 내 날개 ── 절대적인 [희망, 행운, 행복]의 3쌍 날개 HHH의 힘." "…지, 진짜냐… 넌 그럼, 세상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는 거야?" "후훗, 그랬다면 좋겠지만, 아냐." "…뭐?" "날개가 힘을 가지고 펼쳐질때, 당시의 내가 바라던것 3가지가 무의식적으로 정해져 버렸어." "그중 하나가, 태풍의 힘이란 건가…" "그것이 내가 어렸을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으니까. 아마 그것이 그 두려운 힘을 내 마음대로 부르고 다루는 것이 [희망]이란 이름의 첫째 날개. 그에 반해 내 두번째 날개인 [행운]은 동전을 던졌을때 무조건 앞면이 나오는 것 뿐. 뭐 내기할때는 유용하게 써먹었지. 이런말을 내가 하기 그렇지만, 어린애들이 생각하는 행운이란 그 정도라고." "그럼, [행복]은 뭐지?" "흐응… 그건 말야……." 아직 사수단을 만들기 전, 대회의에 참석한 윌의 앞에 선 소녀, HHH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밝게 웃어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내 세번째 날개인 [행복]이야." 14. 주인공이 자기소개하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신인류통합비밀결사 천사회, 한국 지부의 관리감독 및 통솔을 책임지고 있는 은단비입니다. 아마 코드네임인 HHH로 더 잘 알려졌을 테지만요. 닉네임으로 폭풍천사, 걸어다니는 자연재해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좋아서 달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이상 자기소개 끝." 15. 수습하기 힘든 이야기 "예상지점에서 태풍 반응 완전소멸! 실장님!" "좋아. 카운트 들어가고, 지금부터 상황종료시까지, 예상지점의 관측이 가능한 모든 기관과 기록기기에 개입한다. 미션 스타트!" "넵!"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천사회 한국지부 정보통제실의 온도를 싸늘하게 낮춘 것은, 얼굴이 창백해진 오퍼레이터 여성의 한마디였다. "…실장님. 대의회에서 전화 왔는데요." 실장님이라고 불린 청년의 얼굴도 오퍼레이터의 얼굴에 뒤지지 않게 하얗게 질려 갔지만, 그는 이내 결심한듯 마이크를 내렸다. "…일단 바꿔줘." "……네." 오퍼레이터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청년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잘못된 번호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플리즈 콜 어게인… 이고 뭐고 시끄러우니까 닥쳐! 따지고 싶으면 지부장에게 따지라고!" 덜컥. 전화가 끊기는 소리는 통제실 직원 전부의 마음에 무겁게 울려퍼졌다. 청년은 고개를 잠시 숙이고 있다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현 시간부로 상황종료시까지 대의회 본부와의 통신 일체를 차단한다." "……" "…일하자." "……네." 16. 마무리되는 이야기 총수인가 뭐시기인가 하는 작자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분명, HHH는 2년전부터 활동을 중지하고 대의회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을텐데…." "아 그거.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공부해야지. 천사회가 대학 보내주는건 아니잖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작이라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고교생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수능 얕보면 큰일난다. 거기에 대해선 저기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줄 모르는 민희양도 익히 공감하고 있을걸. 그렇지?" 갑작스레 나에게 지목당한 민희는 뭔가 잔뜩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입을 벌린채 금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민희를 위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렇다는군." 총수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됩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천사회에 속한 간부가 같은 천사를 공격한다는건 천사회 방침에 어긋…" "그 멍청한 방침에 따르자면 내 모가지는 벌써 몇번이 떨어졌을지 몰라. 그런데 내가 왜 아직 지부장인지 알아?"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총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반반한 얼굴은 멋지게 일그러졌다. "알게 뭡니까! 뒈져버리세요!" 총수의 '날개'가 옥상을 훑었고, 날아오른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그는 냉랭한 미소와 함께 아까 빼앗은 민희의 [깃]을 발동시켰다. 민희는 비명을 질렀다. 아마 내가 박살날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겠지.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총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뭐하냐. 너." "어, 어라? 깃이……?" 총수의 손에 들려 있던 [깃]은 사라져 있었다. 민희도 멍청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어이. 괜시리 폼 재지 말고 나와." 그러자 쯔,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장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말이지. 산통 다 깨는군." 쓰러져 있던 지하 주변에서 눈부시게 새하얀 깃털이 흩날렸고, 그 남자는 정신을 잃은 지하의 몸을 양 팔에 안고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동지들." 철지난 트렌치코트, 깎지 않아 듬성듬성한 수염,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 거리의 부랑자 같은 꼬라지를 했지만, 눈빛만은 생경한 그 남자의 이름은─ "사수단 제1의 사수, 백(白)의 단장 First archer the white master 윌이다." "단장님! 지하야!" "네놈까지 어떻게 여기에!" 절규하는 민희와 경악하는 총수. 윌은 그 반응이 짐짓 즐겁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뭐, 성대한 환영이로군." "단장님! 지하가… 지하가!" 민희의 뒷말은 울먹임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궁장(弓裝)이고, 너희는 내가 깃을 달아준 화살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를 부러지게 만들지는 않아." 그의 새하얀 날개가 지하의 몸을 훑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새하얗게 변해 있던 지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 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잘린 팔의 단면에서 무수한 깃털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어느새 지하에게는 온전한 팔이 붙어 있게 되었다. 아직 피가 안 통하는 모양인지 창백하긴 했지만. 민희는 그 광경을 보고 안심해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맥없이 무너졌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윌은 피식 웃고는 민희의 옆에 조심스럽게 지하를 내려놓았다. "자, 그럼 은원관계를 청산해 볼까." "빌… 어먹을." 총수는 이를 악물고 허공에서 움찔거릴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를 사수단의 간부로 직접 임명해준 자, 사수단의 첫번째 사수인 윌의 진짜 힘을. 하지만 윌은 총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빚은 다 갚았다. 꼬마 아가씨." "웃기고 자빠졌네. 어떻게 옛날이랑 달라진게 하나도 없어?" 나는 으르렁거리며 윌의 손을 후려쳤다. "다 네놈 수하들이 저지른 짓이잖아. 너는 볼일보고 물내리는 것도 생색낼 셈이야?" "…너 역시 그 건방지고 품위없는 말씨는 여전하군." "사람이란 것이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지." "동감이야." 윌은 어깨를 으쓱하고 나를 지나쳐 옥상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총수쪽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 깜빡할뻔 했는데…" 무시당한 것에 멍해 있던 총수는, 윌을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이 시간부로 자네는 사수단에서 제명이야. 불만은 없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윌은 자신의 일은 다 끝마쳤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서 걸어갔다. 잠시 충격으로 멍해 있던 총수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개졌고, 나는 황급히 윌의 옷자락을 잡았다. "야 임마! 네 부하들은 어쩌고?" 나는 민희와 지하 쪽을 손가락질하며 윌을 다그쳤다. 그러자 윌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응?" 다시 돌아보니, 두 사람의 모습은 옥상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민희가 가지고 있었던 [전이]의 힘을 가진 깃이 윌의 손 안에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윌은 능글거리며 대꾸했다. "유능한 리더는 너처럼 부하를 막 다루지 않는다고. 내가 한만큼 그들은 보답해주지." "…오오. 그래. 저 하늘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멍청이에게도 그딴 소리 지껄여 보시지? 네 생간이라도 꺼내어 씹고 싶은 모양인데. 저런 보답이라면 난 사양이야." 총수는 하늘에서 조악하고 유치하지만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효과적인 폭언을 퍼붓고 있었고, 윌은 그 소리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태연히 귀를 후비고 있었다. 나는 이 녀석을 불러온 것이 커다란 실수가 아닐까 고민했지만, 윌은 나에게 고민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자. 그럼. 너무 날뛰지는 말라고." 윌의 손에서 깃이 빛을 발했고, 그의 모습은 깃털의 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나참, 여전히 쇼맨쉽이 강한 녀석이로군. 나는 한숨을 쉬며 뒤로 돌았다. "자… 그럼, 으엑?" 뒤로 몸을 돌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총알처럼 쏟아지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의 무리. 저것들에 하나라도 스쳤다간 뼈도 못추릴 듯한 흉흉한 기세였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날개]를 움직였다. "치워." 그리고, 귓가를 스치는 청량한 바람만 남긴 채, 쇄도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마치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눈 앞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커다랗게 펼친 날개를 접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총수는 아연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날개도 펼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는 그 헛소리에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날개는 진작부터 펼치고 있었다고. 멍청아. 넌 내 별명도 까먹었냐?" "폭풍천…사? 설마?" 총수는 내 말에 기겁한 표정으로 내 뒤의 허공을 쏘아보았고, 얼굴에 잔뜩 오른 핏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보았을 것이다. 하늘에 장장 수킬로미터로 펼쳐져 있는, 광포한 폭풍을 두른, 나의 반투명한 [날개]를. "거짓말이야… 환영이겠지? 저런게 있을리가 없어!" "그렇게 믿고 싶다면 맘대로 해. 나의 날개는 폭풍을 휘감아 휘두르는 검─ 펼쳐라 날개, 날뛰어라 바람!" 나는 모든 상념을 지우고 천천히 마음을 다스리는 주문과도 같은 단어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비록 만화의 마법 주문마냥 유치하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거대하고 강력한 날개를 다루는 건 나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지. 평소에 이런 이미지 메이킹을 해두지 않으면 제어하기 힘들다. "으아아아!" 이미 총수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모양인지, 나를 직접 날려버리려는 듯 달려들었다. 물론, 나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총수의 날개가 닿기 전, 나는 침착하게,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울분을 담아서 마지막 단어를 토해놓았다. "꺼져."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17. 주인공이 돌아온 이야기 [기상청은 어제 6시경을 기해 태풍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소멸했다고 밝혔습니다. 지겹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늘부터는 전국적으로 구름없이 맑은 날씨가 당분간 계속되겠습니다. 오늘 낮 서울 최고기온은…] 18. 계속되는 이야기 "지부장님? 지부장님? 저 좀 살려주세요. 매일처럼 대의회에서 전화가 와요. 화장실도 못갈 지경이라구요. 노이로제에 걸려서 TV에서 핸드폰 진동소리만 나도 움찔거려요. 제발 대의회에 전화 한통만 해주세요. 네? 저 S대 출신이거든요? 특별과외 무료로 시켜드릴수 있거든요? 제발 이번 건 만큼은 지부장님이 수습……." "수업중이야. 끊어." "지부장님!" 달칵. 나는 슬라이드를 닫아버렸다. 그러자 옆에서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이 무능하면 부하가 고생하지." "…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라고 몇번을 말해줘야 알아듣겠어?" 나는 그 뻔뻔스러운 면상에다가 빈 음료수캔을 집어던졌지만, 윌은 태연스럽게 그것을 날개로 휘감아 잡아냈다.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겠어?"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내 주변에는 온통 바보들 뿐인거냐. 끼리끼리 어울린다거나 초록은 동색이라고 말하는 녀석 있으면 그자리에서 코뼈를 뭉개 줄테다. 나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지하에게 툭 쏘아붙였다. "이봐. 괄호열고 전 괄호닫고 남친. 자꾸 뭐가 아쉬워서 엉겨붙는데? 평소에도 치매가 아닐까 의심되는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것 같은데, 잊었다면 다시 상기시켜줄게. 너는 어제 나한테 차였거든?" "나는 순수하게 친구로서 걱정하는 건데." 아아. 남자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어. 이 끝을 모르는 뻔뻔스러움이라니. 짜증을 넘어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에 멈추지 않고, 꼴에 재활용주의자라고 빈 캔을 날개로 찌그러트리고 있던 윌은 내 염장을 지르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지하군은 걱정할거 없네. 대의회는 이 난봉꾼을 통제하지 못하거든. 뭐라해도 원탁을 차지한 늙은이들이 그 무거운 궁둥이를 다 들고 출동해도 HHH에겐 이길수가 없기 때문이지. 내가 매번 말하지 않았나. 으하하핫!" 그래도 거리의 노숙자 같은 꼬락서니를 했던 어제에 비해 수염도 깎고 옷도 갈아입어 좀 사람같은 꼬라지로 돌아왔나 했더니,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있는 채다. 윌 저녀석은 평생을 저런 못난 아저씨로 살아갈 팔자다. 나는 그 존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그래도고 자시고 임마! 시끄럽다고 말했지!" 결국, 꾹꾹 눌러 참아왔던 화가 폭발해 버렸다. "남 걱정 할 시간 있으면 네 몸이나 걱정해! 그 팔은 어쩔거야? 여기서 잡담할 시간 있으면 재활 훈련이나 하라고!" 내 말에 지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교복 소매 사이로 보이는 그 팔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된 채였다. 옆에 있던 윌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하의 팔은 어디까지나 [임시]로 만들어낸 것이라, 평상시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지만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정교한 동작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질낮은 [의수]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팔의 원형이 남았으면 어떻게든 연결해보았겠지만 공간좌표중복으로 인해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라 별 수 없다는데…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저 바보는 확실히 한 팔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환상지를 활용해 열심히 연습하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팔의 감각과 제어를 찾을 수 있다는 윌의 말이었다. 마법처럼 편리하게 치유되면 좋으련만, 우리 [천사]들의 날개는 만능이 아니다. 젠장. "단비 말이 맞아." 그 와중에 조용하게 고개를 든 여자 동지, 민희가 한마디 거들어 온다. 요전번 사건 이후 과묵하고 조용한 캐릭터로 일변한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하 너야말로 좀 쉬어야 해." 그것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였고, 지하는 민희의 말에 입을 다물고 얌전히 점심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낄낄거렸다. 저건 정말 걸작 커플이로군. 나는 사투끝에 건진 소시지빵의 비닐을 이빨로 찢으며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 시커멓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투명했다. 그 풍경을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현실감은 없었다. 뭐. 살아가며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만. 점심시간, 학교 옥상 물탱크 위에서 얼간이 아저씨, 둔감한 남자애, 붙임성 없는 여자애라는 괴상한 콤비와 함께 소시지빵으로 점심을 때우는 이 순간마저도 말이지. "근데 단비 넌 왜 점심을 빵으로 때워? 도시락 미리 까먹은거야?" "시끄러워 둔감남. 내가 무슨 걸신이라도 들린줄 아냐. 아침부터 엄마랑 싸워서 도시락 안 가져온거 뿐이야." "아니 아침부터 왜…" 나는 아침의 광경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쓰다가 어떻게 들었는지 '어제 남자친구랑 깨졌다며? 어이구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처신 잘 하라고 했지' 라는 잔소리를 줄줄 쏟아내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아있지 않던 모녀간의 애정을 고사시키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그런 복잡미묘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윌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래보여도 사춘기 소녀니까 말이지." "사춘기군요." "사춘기네……." 순식간에 알지 못할 공감대를 형성하며 단합하는 사수단 일동.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걸까, 이 개념을 상실한 아저씨는? 저 둔감한 멍청이는 말뜻이나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거냐? 요 계집애는 왜 또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고 있어? 바뀐 캐릭터 은근히 재수 없거든? 옛날이 더 낫거든?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하늘은 적당히 맑았고, 일어서면 청량한 바람이 살결을 스친다. 나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윌의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차며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아아. 그래. 바로 지금,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생의 주인공은 나, 은단비. 내 이야기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뭐. 이래보여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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