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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ul Christmas - 하리가스트로의 세번째 방문

01/12/26

태그 : 데카메론 프로젝트, 크리스마스, 하리가스트

Colorful Christmas - 하리가스트로의 세번째 방문
(2001/12/26 作)

<제12일, 데카메론 프로젝트 단편 - 문장 :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D-day 7 (2001.12.18)

12월 18일,정확히 크리스마스 일주일전 우리들에게 떨어진 특명은 간단했다.

"거두절미, 변명불가!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까지 특종들을 하나씩 물어왓!단 조
건은 무조건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것이어야 함! 자, 가랏! 지구는 넓지만 기사거
리는 적단 말이닷!"

이상은 우리 신문사의 편집부 장 부장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때는 바야흐
르 21세기였지만 장 부장은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인 관료제의 위계질서로부터 비
롯된 특권의식을 남용하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 솔선수범해 앞으로 나서 이 구세
기의 유물을 청산하자고 강력히 건의하여 퇴폐적 인습을 추방해야만 했다. 그러
나 아무도 남자도 히스테리를 부릴 수 있다는 의학적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새
롭게 일깨워 주는 장 부장에 대항해 맞서싸울 용기를 지닌 투사는 없었다. 심지
어 나 마저도 옆 동료 기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말았다. 결국 공을 물어오는 애완
용 강아지 수준으로 추락된 우리의 인격은 복권되지 못한 채, 모두들 죽을 상을
하고 후닥닥 밖으로 달려나가는 추태를 보였다. 가엾은 인간들이여. 그놈의 직업
법이 웬수지.

어쨌든 지금은 고실업율 시대는 전혀 아니다. 전세계는 실업율 제로를 달성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고약한 세계 정부의 농간 때문이지 백수나 거지들이 근면함
에 자각해서는 아니었다. 노동 관련법을 여러 모로 뜯어 고치고 직업법을 신설한
결과이다.기막힌 자격증 제도는 주부, 거지, 백수들에게까지 자격증을 지급해 직
업으로 취급하는 사태를 제조해냈고, 성실한건지 무식한건지 분간이 불가능한 세
계 노동관리국 직원들은 손수 오지까지 찾아가 각 부족의 전사와 추장들에게 자
격증을 발급했다.
이정도는 약과이다. 일단 어디에든 취업하면 인사와 이동, 해고는 그 지역의 노
동 관리소에 맡겨지게 된다.언론계의 마왕으로 군림하는 장도일 부장이 우리 G신
문사로 발령되던 날 우리 C시의 노동 관리소는 G신문사 직원들의 사표와 이전 신
청으로 업무가 마비되었다. 그러나 우리 신문사 직원들의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소박한 꿈은 C시 노동 관리국에서 날아온 한 통의 전보로 인해 무산되었다.

'접수 불가. 결제는 무기한 연기되었음.'

장 부장의 강림은 예상 외로 많은 이로운 효과를 불러왔다.아무리 심한 인격 모
독적 발언에도 성자처럼 웃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인내심을 키워 준 것이라든가,
세계화 시대에 필수라 일컬어지는 칼 같은 시간 감각을 길러준 것이라든가 하는
종류 뿐 아니라 날아오는 볼펜이나 디스켓 따위를 쉽게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동
체 시력을 단시간 내에 증진시켜 주기까지 했다. 물론 이 말을 G신문사 직원에게
했다간 당장 치과에 들려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 부장에게 대든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기에 집으로 돌
아오며 가로수의 그루 수대로 그에 대한 폭언을 퍼부어 주고는 차분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동료들과 연계를 해 쉽게 일을 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게 왠걸. 장 부장의 마수는 거기에까지 뻗쳐 있었다.

"여보세요?"

"어이, 환경부 정 기자님 맞죠?"

달칵.

무심한 비프음과 함께 전화는 대부분 끊어지고 말았다. 그날 저녁 뒤늦게 메일
을 확인해 보고서야 진상을 깨달았다. 장 부장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메일을 삭제할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 아난 나는 그것을 열어 보고야 말았다.
음성이었다.

"사회부 이상한 기자! 잔꾀는 통하지 않는다. 통화기록도 확보해 두었으니 발뺌
할 생각은 꿈꾸지 마랏! 이번엔 저번 백야(白夜) 때 처럼 슬쩍 넘어가는 것은 절
대 없어! 단, 자네도 크리스마스 특종에서 예외는 아냐. 만약 실패하면 추가 징
계다!"

나는 그날 밤을 허탈한 표정으로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잠들었
다. 배신자들 같으니라구. 화병으로 속이 터져 쓰러지지 않는 게 기적같은 일이
다. 대신에 밤새도록 가위에 눌려 신음하고 말았다.

D-day 6 (2001.12.19)

다음날인 12월 19일은 별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발로 뛰어 다녀야만 했
다. 그러나 별 소득은 얻지 못했다.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산타 클로스.
그에 대한 인터뷰를 작성해 볼까 했지만 너무나 흔한 소재였다. 게다가 산타는
송년마다 찾아오는 기자들의 등살에 못이겨 자신의 집 주위를 강력한 결계로 봉
했다. 실상 썰매와 사슴들에게 떠오르는 마법을 건 상태로도 시간과 공간을 왜곡
시켜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단 몇시간 내에 전세계에 엄청난 선물을 뿌리고 다니
는 그에게는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내노라 하는 마법부 기자들도 설원에
펼쳐진 그 광대하고 복잡한 결계를 뚫지 못했다. 얼마 전 브리튼의 대마법사 멀
린 경이 친우인 산타를 만나러 갔다가 결계를 파해하지 못하고 거의 얼어죽기 직
전, 산책나온 산타에 의해 구조된 사건은 그와의 인터뷰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를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요즈음 코카콜라 회사에서 로열티를 적게 준다고 지정된 빨간 옷을
벗고 대신에 윗도리는 빙그레 웃는 M마크가 들어간 빨간 색이고 아랫도리는 노란
색인 맥도날드의 옷을입는 바람에 계약 위반이라고 광분해 날뛰는 코카콜라 회
사와 법정 분쟁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튀어서야 특종의 의미가 없다. 알
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이 특종이 되는 것이다. 실상 이것은 장 부장의 지론이
긴 하지만 반박의 여지는 추호도 없다.

D-day 5 (2001.12.20)

12월 20일은 그야말로 암담한 날이었다. 그놈의 기관지가 또 탈이 나버린 것이
었다.겨울만 되면 속을 뒤집어 놓는 고질병이었으나 매번 수술 외에는 방도를 찾
지 못했다. 3일 동안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
어져 겨우 2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금같은 시간을 이틀이나 날려야 하다니
기막혀 뒤집혀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신마취 중에도 장 부장의 음흉한 웃음
은 환청처럼 청각을 괴롭히니 죽을 맛이었다.

D-day 4 (2001.12.21)

말해 무엇하랴. 회복실에서 쥐죽은듯 하루종일 누워 있었다.

D-day 3 (2001.12.22)

퇴원은 했으나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2일에 불과했다. 특종을 잡은 몇몇 기자들
은 벌써 연휴 준비를 마치고 크리스마스 이브만 대기중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한
편으로 그렇지 못한 불행한 기자들은 장의사에게 관 치수를 재고 오는 중이라는
끔찍스런 이야기도 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그의 눈밖에 나버린 나로
서는 추가 징계가 무엇일까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실패자에게 재기 불능의 낙인을 찍는 무척 사디스틱한 취미가 있지."

장 부장의 입에서 직접 나왔으니 신뢰해도 좋을 대사이긴 하지만 그의 취미생활
도구로 쓰이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임에 분명한 것이다. 참고삼아 말하지만
나는 마조히즘적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난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대륙
관통 열차에 비싼 돈을 얹어주고 올라탔다. 결국 내가 선택한 장소는 하리가스트
였다.

북유럽 어느 산골에 처박혀 있는 도시인 하리가스트는 유럽쪽의 공간과 시간의
왜곡점이 집결된 기이한 곳이다.한편으로는 목가적인 소도시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이세계라고 불러도 될 만큼 복잡하고 기괴하며 넓다란 곳이다. 고대와 중
세, 현대와 미래가 공존한다. 그렇게 설명하면 별천지로 들릴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공간과 시간의 '왜곡점'에 있는 만큼 그것들은 일그러지고 융합되어 완
전히 변해버린다. 반쯤 돌아버린 마법사들과 용감무쌍한 학자들이 가끔씩 찾아가
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에겐 아직도 신비로 싸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작년 까지는 나역시 아무것도 몰랐지만, 어느날 날아온 대학 동창의 편지 한
통에 웬 책 한권(독실한 유일신론자에 동시에 허무주의자였던 다니엘 쇼방의 '금
지론')을 사러 갔다가 그 도시에 기묘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복잡하고 변화무
쌍한 곳이니만큼, 별별 사건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그것은 그만큼 기사거리는 널
려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실제로 작년에는 용감한 기자가 환자 완치율 100%를 처음 기록한 하리가스트 시
청 산하 특별 보건소의 전문의들이 모두 영능력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취
재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덧붙이자면, 그 용감한 기자는 나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던 중 열차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나는 돈을 아끼느라
중간 중간에 히치 하이킹을 여러번 해 가며 하리가스트로 가는 마법의 통로가 설
치된 곳중 가장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갔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언제나 버블껌을 짝짝 씹어대며 아무에게나 매혹의 마법을 걸어대는
마녀 뀌뇨린느는 여전히 아비뇽의 마법 통로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그
녀의 얼굴을 피하며 지나가려 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야 말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기자님.호호. 마법 우편물 특급 배달은 아직도 겸직이니 필
요하면 불러주세요. 단, 수신자 부담 아니면 안 가는것 알죠?"

그녀는 윙크를 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진정한 아
름다움은 마음에 있다. 수신자 부담을 핑계삼아 몇십프랑씩 돈을 갈취하는 마녀
가 아름답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 것은 나중이었고,당시엔 이미 매
혹의 마법에 또 당해버린 상태였다.

"물론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나는 마법의 통로를 통과하는 내내 헛구역질을 해댔다.그것이 싸구려 마법의 부
작용인 어지럼증 때문인지 아니면 뀌뇨린느에게 한 말 때문인지는 분간하기 힘들
었다.

하리가스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안대를 한채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서 펜딕의
가게를 찾아갔다. 전에 쇼방의 금지론을 사러 갔던 가게였는데, 가게 주인인 펜
딕 씨는 그나마 정신나간 하리가스트의 주민들 중에서는 정상적인 편이었기 때문
이었다.게다가 그 가게는 잡화점뿐 아니라 여관도 운영하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
었다. 예상대로 펜딕 씨는 반갑게 날 맞아주었다. 물구나무를 선 채 시뻘개진 얼
굴로 헐떡이며 인상을 쓰는 모습이 반가운 표정의 정의에 들어갈 수 있다면 말이
다. 펜딕 씨는 그래도 말할 기운이 남아 도는 모양이었다.

"흐억, 허억, 이 기자, 님, 학, 오셨군요!"

난 굳이 물구나무를 선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설명하기 좋아하는 펜딕 씨는 친
절하게도 그 이유를 말해주려 했다. 난 간신히 그를 말려서 정상적인 대화를 요
구할 수 있었다.

"서재와 방좀 하나 하루동안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무, 물론이죠!"

난 고개를 휘젓고는 방으로 올라갔고, 펜딕 씨는 계속해서 끙끙댔다.물론 저 정
도는 정상적이라고 봐 주어야 한다. 이 하리가스트는 캐럴의 원더랜드나 스위프
트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라퓨타 인들도 심심찮게 하리
가스트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곳은 공간의 경계가
모호하니까 별로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방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니 책상 위에 늘어진 시계는 ( 그 광경은 흡사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아홉시를 가리켰다. 51시간. 그것이 남은 시간
이었다.시간도 돈도 아낀다고 갖은 애를 썼건만 결국 무정한 시간은 정처없이 흘
렀고, 시간의 왜곡점이 모여 있으면서도 시간은 현재와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괴
상한 하리가스트를 원망했다.
원망해 보았자 기사가 쓰여질 리는 없었다. 피곤에 찌들어 뻗어 버릴 수 밖에.
나는 가위에 눌리는 대신 악몽을 꾸었다. 워낙 엉망진창이라 의미는 불명이었다.
단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장 부장의 얼굴을 한 장의사의 웃음 뿐이었다.

D-day 2 (2001.12.23)

다행히도 다음날 펜딕 씨는 정상적인 표정에 정상적인 자세를 취하고 정상적인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차를 즐기면서 말이다.

"여어. 좋은 아침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이틀 남았군요."

"... 그렇군요."

티타임이 이른 아침이라서 대답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찻잔을 뒤집어 놓
고 차 쟁반에 차를 담아 마시는 소박한 풍습에 약간 당황했을 뿐이었다. 누차 말
하지만 이 정도는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덥수룩한 구릿빛 수염에 체크무늬 남방,
멜빵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그만의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하리가스트에서는 이
패션 역시 굉장히 소박한 패션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했다.
난 그에게 대충 형식적인 아침 인사를 건네고 차를 얻어 마셨다.물론 접시에 담
긴 차를 고상한 매너로 홀짝거리는 일에는 초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했지만 장 부
장에게 단련되어 온 나로선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
이나 정신병원에 들락거릴뻔 했던 나는 최대한 밖에 나가는 상황을 꺼렸다. 서재
를 빌린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정체 불명의 아침 식사들을 후닥닥 쑤셔넣고 나서 서재에 가서 크리스마스에 대
한 조사를 시작했다. 뭐, 크리스마스에 관한 책들은 많았지만 별달리 눈에 띄는
것들은 없었다. 의외로 정상적인 책들과 스크랩들로 가득했던 것이었다. 하리가
스트의 특색이 드러난 것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하리가스트 사람들은 책
을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정오 때까지 고군분투하다 서재에서 널브러진 나에
게 펜딕 씨는 점심을 직접 가져다 주었다. 서비스 하나는 확실하긴 확실했다. 그
것을 보자니 처음 이 가게에 들렸을 때 극진히 대접받던 한 사내가 떠오르게 되
었다. 박학다식한 만물박사에 엄청난 괴짜,폴크 교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폴크 교수에게 조언을 구하면 되잖아.나는 점심으로 나
온 튀긴 전갈의 다리를 아그작거리고 씹어대다가 펜딕 씨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저기, 폴크 교수님 여기 아직도 묵으시죠? 물어볼 일이 하나 있는데, 만날 수
있을까요?"

"에엑! 그러시다면 진작 말씀하시지. 어제 자정에 여행을 떠나셨으니 언제 돌아
오실지 모르겠군요."

"뭐라구요!"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서재에서 단서가 나올거라는 보장도 없고, 하리가스트에
서 내가 아는 조언자라고는 펜딕 씨와 폴크 교수가 전부였다. 폴크 교수는 그나
마 원래 하리가스트 사람이 아니라 이차원(異次元)에서 온 사람이라 오히려 대화
하기가 편했지만, 펜딕 씨는 상당히 상대하기가 곤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친절했다.

"음, 단지 조언을 원하는 거라면, 교수님과 통화가 가능합니다. 자, 여기."

펜딕 씨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손거울이었다. 난 교수의 센스에 그저 기막
혀 할 수 밖에 없었다. 정교한 거울 주위의 금세공에 점점히 박힌 다이아몬드,토
파즈, 아쿠아마린, 알렉산드라이트, 월장석, 지르콘, 에메랄드,사파이어 등의 보
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압권은 손잡이에 진주로 새겨진 룬 문자였다. 자그만
진주들이 늘어서 '현명한 폴크 교수'라는 문구를 이루고 있었기에, 역시 폴크 교
수라고 감탄을 연신 내뱉을 수 밖에. 어쨌든 급한 것은 기사거리를 찾는 것이었
으므로 손거울을 들고 급히 소리쳤다.

"현명한 폴크 교수님! 들리십니까?"

정말 입이 간지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도움을 청하는 주제에 가타부타 따져서
야 안되지. 몇초 지나지 않아 손거울 주위에 붙어있는 보석들이 천천히 빛을 발
하더니, 거울의 표면은 흐릿해지고 투명해졌다. 그러다 돌연 펑 하는 소리와 함
께 연기가뿜어져 나오고, 손거울의 표면 너머로 모바일 폰을 귀에 댄 채 악어의
등에 올라타고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있는 폴크 교수의 모습이 생생히 보였다.
그는 악어의 주둥이를 누르면서 어깨와 목 사이에 모바일 폰을 끼었다. 그제서
야 내가 보이는 모양이었다.그는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쇼
맨쉽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늪에 빠져 썩은 물을 한바가지 마시기는 했다만.
어찌어찌 해서 결국 폴크 교수에게 난 내 뜻을 대충 전달할 수 있었고, 폴크 교
수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들고 다니는 검은 우산으로 악어의 눈을 찌르고 두들겨
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모험 활극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 였지만, 그는 태연하기 그지 없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어갈 때쯤, 폴크 교수는 악어의 얼굴을 두 손으
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기며 외쳤다.

"푸앗! 하리가스트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괜찮은 기사거리를... 이놈잇! 아, 실
례. 얻으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 클럽의 삼총사를 찾아가 보게! 어푸!"

그리고 손거울은 팍 하고 꺼져 버렸다. 나는 악어의 입 속으로 딸려들어간 폴크
교수의 명복을 비는 대신에 펜딕 씨에게 교수가 한 말의 뜻을 물어 보았다. 펜딕
씨는 피식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 그런 것이라면 진작에 말씀하시죠. 그 클럽은 제가 자주 들리는 곳이거
든요. 삼총사 노인네 분들도 잘 알고요."

"정말입니까? 당장 갑시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장 부장의 악몽에서 탈출이로구나! 그러나 펜딕 씨
의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지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그 클럽은 24일에만 문을 연답니다."

"......"

귓가엔 장 부장의 희열에 찬 음성이 환청으로 들려왔다.

"다른 방도는 없을까요?"

펜딕 씨는 친절할 뿐 아니라 솔직했다.

"없는데요."

정말 암담한 일이로고.죽을 상을 하고 한숨을 푹푹 쉬어 대고 있으려니 펜딕 씨
는 시계를 보고 한 마디를 꺼냈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티타임이네요."

소박한 티타임 시간이 지나고, 찻잔의 손잡이를 발가락으로 잡으려고 애쓰던 기
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장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는 시간에
도저히 맞출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연기를 해보려는 생각에 건 전화
였지만,통화가 끝나고 고막파열에 초주검이 된 날 펜딕 씨가 침실에 눕혀놓고 응
급처치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장 부장의 공포가 없는 좀 더 행복한 세상으로 갔
을지 모른다.

D-day (2001. 12. 24)

나는 6시에 침대에서 일어난 시간이 채 24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명을
올려야만 했다. 펜딕 씨는 시간에 딱 맞추어 날 깨웠고. 아예 옷을 걸치고 잠들
어 버렸기에 옷 입을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대충 입에다 블루베리 케익을 한
조각 물고 뛰쳐나와선 거대한 낫을 등에 짊어진 인상적인 모습의 사신이 모는 마
차를 잡아타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클럽에 도착했을 때는 7시 30분이었다.
클럽 안은 꽤나 붐볐다.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즐겁게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었고, 그때문에 펜딕씨가 삼총사 노인을 찾는데 30
분이나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자신들을 각각 아토스, 프르토스, 아라미스라 소
개한 세 노인은 실제로도 프랑스의 총사대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미테
이션이든 아니면 이들이 진짜 삼총사 이야기의 주인공 들이든 시간에 쫓기는 나
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그들의 멱살을 흔들며 외쳤다.

"나 죽어요!당장 기사거리를 내놔요!"

펜딕 씨의 만류로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나는 좀 더 정중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속터지게 답답했다. 먼저 아토스 노인이 말했
다.

"아아, 그래? 잘 찾아왔군. 나도 폴크 교수를 잘 알지. 그런데, 젊은이는 이름
이 뭐랬지?"

아라미스 노인은 옆에서 참견했다.

"저 건망증 심한 노인네 보게나. 이름이 '저널리스트' 라잖아."

"그래? 요즈음은 별 이상한 성이 다 생기는군."

과묵한 프르토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내 앞날은
희망없는 어둠으로 점철되는 듯 싶었다. 이야기가 점점 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
자 펜딕 씨가 불쑥 끼어들어서 말했다.

"아토스, 아라미스! 뭔가 자랑할 것 있지 않아요?"

아토스 노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랑할 것...? 아, 있기야 있지."

아라미스 노인이 손바닥을 딱 치며 맞장구 쳤다.

"있기야 있지가 뭐냐, 이 노인네야. 우리는 '마지막 사람' 이라구. 두고두고 이
클럽의 자랑거리가 될 거야."

프르토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됐다 싶었다. 펜딕 씨는 정말 친절한 사
람이라니까. 나는 즉시 저널리스트의정신을 불태우며 그들에게 달라붙었다.

"히야아.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셨군요. 기사에 쓰려고 하니, 좀더 자세히 설명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토스와 아라미스 노인은 번갈아 가며 말했다.

"우린 과거에 하리가스트 기후 조정청 직원이었지. 그때가 1960년대 였던가..."

"하리가스트의 기후는 무조건 기후 조정청에서 결정해 조작된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설마 젊은이가 그런것도 모를려구. 나는 관제소에서 기상 통보관을 했었고, 아
라미스는 기계설비 감독관이었지. 그리고 프르토스 저 친구는 컴퓨터 제어 직원
이었다네. 마지막으로 흩날리던 그 황홀한 빛깔의 눈발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지.
난 당시엔 그 눈이 마지막이란 생각을 꿈에도 못 했어..."

그들의 말에서 요점을 찾아내 기사를 쓰는데 걸린 시간은 채 한 시간이 넘지 않
았다. 비록 기대에 비해 커다란 소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가십거리
는 충분히 될 만한 기사였다. 무엇보다 장 부장에게 추가징계를 받지 않아도 된
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이다.

하리가스트에서 아비뇽으로,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파리로, 파리에서 서울
로, 서울에서 C시로-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미친 짓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당시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웃기지도 않는 쇼를 기획했을까?하
리가스트의 세번째 방문이 내 자신을 많이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그 크리스마스 때의 참담한 심정은 차마 글로 다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Epilogue - Colorful Christmas in Harigast(2001. 12. 25. am 00:00)

동료 기자들은 어떻게든 기사를 물어 오고야 말았다. 대부분 욕을 바가지로 먹
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부분 무사통과 되었다.드디어 내 차례였다. 장 부장은 먹
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부라리며 나에게 물었다.

"이 기자! 물론 기사는 준비 되었겠지?"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되도록 눈치 못채게 팩시밀리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선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켰
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부장에게 기사를 넘겨 주었다. 나는 최대한 건방지게
보이지 않으려고 생글생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여러분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하리가스
트에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흰색 외에 다른 색깔의 눈이 내리는 곳도 있
지만 그런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단색에 불과합니다. 하리가스트에선 매년
수만가지 색들이 뒤섞인 눈이 내립니다! 붉은색, 핑크색, 파란색, 초록색, 하늘
이 천천히 갖가지 색으로 물들어 낙하합니다. 얼마나 장관인 모습입니까."

장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는 1963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그렇게 기후 조정청 방침이 바뀌었다고 쓰여
있군. 그런데 왜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거지?"

"그야 그것을 기사화할 생각을 아무도 못 했으니까요. 게다가 하리가스트 시청
에서 대거 몰릴 관광객을 염려해 최대한 정보 누출을 금했다고 합니다."

나는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면 어떤 이
유로든 한번 오면 다시는 오기 싫어질만한 곳이 하리가스트인데, 그런 웃기는 정
책을 펴는 이유를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어쨌든 장 부장의 표정은 그런대로 수
긍하는 표정이었다.

"좋아, 다 좋은데."

예상대로 부장의 목소리가 뒤틀렸다.

"왜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거지?"

나는 착착 들어맞는 계산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건 하리가스트 시청 방침 때문이라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미 사진
을 찍어 팩시밀리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사진을 기사와 실으면 부수가
꽤 높아질 걸요."

그때 팩시밀리가 시끄럽게 소리내기 시작했다. 나는 복사버튼을 힘차게 누르고
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지이잉-
어떤 사람들의 발이 보였고-

지이잉-
이내 빙그레 웃으며 티타임을 즐기는 펜딕 씨와 악어의 두개골을 자랑처럼 두
손에 치켜든 폴크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클럽의 삼총사 노인
들의 미소가 보였다. 그들은 1963년 눈의 색 제어기를 망가뜨려 1962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낸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다. 1962년 크리스마스 때는 도시에 눈
이 내지지 않기로 되어 있었고, 기후 조정청에서 그들 셋만이 연휴 중 근무를 자
청했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사진 맨 상단에는 멋들어진 프랑스어 필기체로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낸.」

거리에서 찍은 사진인듯, 사방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흑백이잖아앗!"

"이상한 기자아앗!"

장 부장의 고함소리는 편집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고, 그날 밤 나는 크리스마
스 캐럴 대신 장 부장의 욕설을 들으며 진정한 21세기의 첫 크리스마스를 맞이하
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내 특종은 하리가스트의 컬러풀 크리스마스가 아닌 흑
백 팩시밀리의 모노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편집실의 팩시밀리가
흑백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
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날 이후로 내가 내렸던 가장 현명한 결정은 다시는 하
리가스트에 관한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수차
례 어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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