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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소녀

07/03/15

태그 : 아카넘, 검의 기사, 새벽의 소녀

새벽의 소녀 07/03/15

새벽이란 시간만큼 어정쩡한 시간대도 없지.
트렌치 코트의 깃을 여미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혼에는 나름 운치가 있지만, 새벽의 어스름은 황혼과 같은 밤과 낮의 경계이면서도 이질감만을 느끼게 했다.
언제나처럼 아파트 단지 뒷켠의 작은 공터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새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사람의 목소리도, 시끄러운 차들도 없다. 약간 고지대에 위치한 이 텅빈 공터에는, 놀이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었고, 땅도 고르지 못해 운동하러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차도 입구가 좁아 들어오지 못한다. 주변에는 아파트 외에 주거시설은 없다. 그나마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마저도, 얼마전 새로 조성된 아파트단지 입구 부근의 호젓한 공원으로 가기 시작했기에 이제 이 협소하고 어두운 공터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작은 나무벤치 몇개와, 구석의 검은색 쓰레기봉지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난 매일 새벽마다 이 공터를 찾았다.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모호한 시간 속에, 마치 별세계 같은 이 공터에 있노라면 새삼스레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매일 찾은 이유는 그것뿐이 아니다.
며칠째 깎지 않아 까슬까슬하게 느껴지는 수염과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되어 멍한 정신 속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아아,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시계를 보면, 7시 20분이다.
응? 하고 놀라서 도리질을 치다가 보니 문득 떠올랐다. 그저께 시계의 약이 다 떨어져 멈추어 버린 것을, 귀찮다고 시계방에 가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시계 따위, 언제든 고칠 수 있고. 사실 언제나 시간에 맞춰 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탁탁탁.
짧은 발소리가 연달아 이어져 들린다. 약간은 흐릿하지만, 꽤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왔구나.'

하지만 나는 황급히 감정을 수습했다. 이 표정을 보이면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난 최대한 뚱한 표정으로, 트렌치코트에 손을 쑤셔넣고 소리가 들리는 반대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공터 안에 가쁜 숨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멈추었을때도, 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하아, 하아…… 아, 오늘도 계셨네요."
"그게 아니지. 어른을 봤을 때는 '안녕하세요'라고 하는거야."
"앗, 실수했네요. 안녕하세요."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인사했다.

"너도 안녕."

공터에는, 자그마한 소녀가 하얀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회색의 특색없는 트레이닝 복을 입은 소녀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본다 해도 중학생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난 저 아이가 지금까지 교복을 입은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초등학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 같은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매일 새벽에 소녀는 달리기를 하며, 그 종착지는 이곳이라는 사실이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소녀를 손으로 만류하자, 소녀는 희미하게 웃고는 두세번 크게 숨쉬기를 하고 내 옆의 벤치에 앉았다.

"그래도 날씨가 많이 풀렸어요. 요즘. 달릴때 그다지 춥지 않은걸요."
"그래?"
"그러니까, 아저씨도 그 코트는 더워 보이는데 벗으시는게 어떠세요? 겨울 내내 입으셨잖아요. 이제 곧 봄이 다가온다고요."
"싫어."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소녀는 아이답게 벤치에 앉아서 짧은 다리를 흔들흔들거렸다.

잠시 말이 없이 조용했다.

난 소녀의 이름을 모른다. 나이도 모르거니와, 어디 사는지조차 모른다.
소녀 역시 나에 대해서 비슷하게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매일 새벽에 만나고, 별 내용은 없지만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친애의 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저 그 자리를 매일 거치기에, 우리는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본다.

그때는 소녀가 먼저 공터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사람은 소녀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말없이 소녀를 지나쳐 벤치에 앉았다. 숨고르기를 끝낸 소녀도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지금처럼 내 옆의 벤치에 앉았다.

그때는 아마, 파란 트레이닝복이었지.
질문을 먼저 꺼낸건 내 쪽이었다.

"몇살이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심코, 그저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중 하나를 던진 것 뿐인듯 싶다. 하지만 소녀는 그 나이대의 어린 아이들이 그러듯이 생각없이 대충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는 벤치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분에게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아."

설마 그런 대답이 나올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아무 대답도 꺼내지 못했다. 소녀는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알고 싶으신가요?"

소녀는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맑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 고요함과 침착함이란. 평정심이라는 것을 유리구슬로 빚는다면 저런 맑은 눈동자가 나올까.

"...아니. 괜찮아."

내가 겨우 입밖에 낼 수 있는 대답이었다. 소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서 벤치에 탈싹 앉았다.

"부모님께서 평소에 말하시던 걸 충실히 지키는 거야? 착한 아이네."

나는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던진 질문이었기에, 소녀의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을때 나는 하마타면 벤치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아니요."
"어떤게 아니라는 거야?"

소녀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둘 다에요."
"응?"
"전 착한 아이도 아니고, 부모님께선 그런 말씀 해주신적 없어요."
"무슨..."
"부모님은 두분 다 말을 못 하시거든요."

그때였다. 내가 매일 새벽 공터에 나오기로 결심한 건.
그 후로 별다른 말은 없이 아침해가 뜨고 나서 헤어졌지만, 다음날 새벽부터 일찍 가서 기다렸더니 소녀가 찾아왔다.
이야기를 많이 할 때도 있었고, 적게 할 때도 있었다. 비가 올 때도 있었고, 눈이 올 때도 있었다. 가끔은 소녀가 오지 않는 때도 있었고, 내가 가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렸고, 소녀가 나중에 찾아오곤 했다.
그것은 어느새 일상의 일부처럼 되어 있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새벽 6시가 기상시간이 되었다.
내가 소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첫날의 그 대화 이후로는 전부 짐작에 의한 것 뿐이다.
아마 학교 어딘가의 운동부 비슷한 곳에 소속되어 있으리란 것.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니며,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주택에 산다는 것.
학업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닌 것 같고, 뭔가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

대화에서 유추해낸 이런 단편적인 정보가 내가 알고 있는 소녀의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소녀에 대해 무리하게 물으려 들지 않았다. 소녀 역시 나에 대해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단 한가지, 내 트렌치 코트에 대해서는 꽤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아세요? 요즘 바바리를 입은 변태가 돌아다닌데요. 여기저기서 시끌시끌해요."
"...그거 내 얘기 하는거 아니지?"
"왜인지 몰라도, 어린 여자애들만 노린다던데 말이에요."
"......난 트렌치 코트야."
"어디가 틀린거에요?"
"...그 뭐냐...아무튼 틀려."
"후후훗…… 아세요? 아저씨는 저보다 아이 같으세요."

소녀가 제대로 웃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그때, 딱 한번이었다. 내가 트렌치 코트를 벗지 않는 이유는, 그 웃음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바보같은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아직 꽃샘추위가 남았으니, 앞으로 조금은 더 입으셔야겠네요."
"아마도."
"봄에는 뭐 입으실 거에요?"
"글쎄. 어차피 이것도 새벽이나 밤에 외출할 때만 입는 거니까."
"흐응."

소녀는 발을 흔들거렸다. 그사이, 어두운 공터 안에도 드문드문 희미한 햇살이 기어들기 시작했다.

"안 가? 학교."
"가야죠."

소녀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공터의 출구 쪽을 향했다.
언제나처럼 작별인사는 없다. 왜냐면 어차피 내일 또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까.
인사는 만남의 인사 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조금 더 고요를 만끽하다, 햇살에 따사로움이 실리기 시작했을 때 일어섰다.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손에 들고, 공터의 출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녹아간다.
나의 덧없는 시간도 또 하루 스러져가겠지. 그렇지만, 그래도 말이지. 내일을 기다릴 가치는 있어.

새벽은 또다시 찾아오고, 새벽과 함께 소녀도 찾아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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