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
1.
"어이, 설치는 다 끝났어?"
담배연기와 뒤섞인 느긋한 말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긴 금발의 더벅머리를 대충대충 땋아 늘어트린 머리꽁지를 흔들거리며, 남자는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왼손에는 지도가 눈발 섞인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그의 오른쪽 눈에는 구름이 비춰졌다. 그 시선은 이내 아래로 떨어져, 산 중턱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기술자들을 관찰한다.
"B조 완료했습니다."
크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허리에 헐렁하게 걸쳐진 가죽벨트에 고정된 무전기에서 보고가 흘러나왔다. 그에 뒤질세라 보고가 잇따랐다.
"C조도 완료했습니다."
"A조, D조도 모두 완료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전기를 향해 대꾸했다.
"아, 모두 수고했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응전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도록. 해가 지면 분명 [크리스마스]가 찾아올거다. 이상."
"전구역, 라져!"
그 대답을 끝으로 무전기는 침묵했다. 키를 놓고 무전기를 공중으로 던져올린 남자는, 담배를 눈밭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담배가 눈밭에 떨어지는 그 순간, 떨어지던 무전기가 공중으로 튀어오르며 완전히 박살났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휘 두르는 남자의 손에는 어느새 핸드건이 쥐어져 있었다.
해가 지평선 너머의 산에 걸렸다.
뉘엿뉘엿 산 사이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빛이 더이상 드리워지지 않는다.
탄연이 피어오르는 총구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갑자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것도 없었던 하늘에서, 갑자기 구름을 뚫고 내려온 거대한 무언가가 산을 뒤덮는 그림자를 만들어내자 설산 중턱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비명이 터져나왔다.
"써... 썰매! 썰매다! 썰매가 나타났다!"
"대기해지! 즉시응전!"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다니! 말도 안 돼!"
무전기는 이미 부서졌지만 남자는 그 혼란을 보지 않고도 눈에 잡힐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꽤나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이야... 설마 성층권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떨어져내릴 줄이야. 매번 상식을 뒤엎는 등장이시로군."
남자는 핸드건을 집어던지고, 너덜너덜한 챙모자를 꾹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도 지금까지 놀고 있었던 건 아니거든?"
남자가 땅을 힘껏 박차자,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눈덮인 대지를 꿰뚫고 커다란 4개의 금속 기둥이 솟아올랐다. 장장 높이만 10여미터, 지름도 2미터 이상 가는 그 터무니없는 물체는 보기와는 다르게 날렵한 기동력으로 움직이더니 그 끝을 하늘을 가리운 그림자를 향했다.
남자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더니, 장난스럽게 하늘을 향했다.
"Bang!"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4개의 기둥에서 일제히 빛과 폭음이 토해지며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빛은 하늘이라도 꿰뚫을 듯한 기세로 서로를 휘감으며 뻗어나갔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새하얀 거함(巨艦) ── 애칭 [썰매(Sled)]라 불리우는 항성간 비행이 가능한 전투함정 [홀리데이 이브(Holiday Eve)] 를 향해 쇄도하는 빛.
그 광포한 빛이 닿기 직전──
'공간왜곡마법진 전개.'
허공을 가로지르며 선명하게 새겨지는 곡선과 직선, 아름다운 문양과 신비스러운 문자들.
그것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두려운 광경이었다.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현상.
인과를 뛰어넘은 인과.
그것은, 바야흐로 [마법]의 재현이었다.
그 마법진에 닿은 미친 빛은, 고스란히 빨려들어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썰매]는 긁힌 상처 하나 없이, 유유히 떠 있었다.
남자를 제외한 각 구역의 병사들은, 자신의 임무들도 잊은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돌려줘라.'
'OK. 그랜파.'
갑자기 백열하기 시작한 마법진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아까 쏘아올렸던 그 [빛]이, 이제는 수백 수천의 가느다란 빛살로 쪼개져 설산에 비처럼 쏘아졌다.
"크아아악!"
"지원, 지원을 부탁... 아아악!"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비명과 악다구니. 그 사이에서, 남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물론, 이 정도에 당해주면 곤란하지."
준비한 것의 반의 반도 안 보여줬는데 말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는 손가락을 튕겼다.
"항마파동포(抗魔波動砲), [판타스틱 포(Fantastic Four)], 제2격 준비."
포성과 빛, 고함과 폭풍, 저녁과 밤의 경계 사이에서 재차 기동하는 4개의 거포.
빛의 입자가 포의 기둥 사이로 광륜을 만들며 모이더니, 빛과 굉음을 토해낸다.
'학습능력이란게 없는 녀석이군. 이번엔 대응사격을 준비해라.'
'자, 잠깐! 그랜파, 중간에 반응이 사라졌어?'
'무슨?'
빛줄기는 허공에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고, 남자는 빙긋빙긋 미소를 지었다.
"[발전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
혼잣말을 중얼거린 남자는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보여주마. 이것이 나의 [마법]이다. 좌표확인, 클라인 게이트(Cline Gate) 개방!"
[썰매] 후미쪽의 허공이 일렁이더니, 말 그대로 마법처럼 나타난 회전하는 거대한 4개의 금속 고리 ─ 그 고리의 저편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광학미채로 숨겨뒀었군. 거기에다 퀀텀텔레포테이션을 응용한 물질전송... 마법에 근접한 초과학(超科學)의 산물인가.'
'거리 50, 40. 공간왜곡마법진을 펼칠 시간이 없습니다. 젠장! 일반물리방어 배리어 긴급가동! 충격에 대비해 주십...'
저녁 어스름 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태양. 네줄기의 빛은 [썰매]의 후미를 직격했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함선은 크게 기울었다.
'멍청아! 그런건 빨리 말하라구! 피해상황은?'
'선체 장갑의 피해는 경미합니다만, 함선 전체의 균형이 깨지는 바람에 긴급기동은 불가능합니다. 다음 포격이 시작되면 또다시 피격당할 위험이 높습니다!'
'그냥 해치 열어! 내가 나간다, 그랜파!'
'...아니. 내가 나가지.'
'...그랜파?'
'하부 장갑을 열어라. 사출준비.'
'...네.'
'아아아, 이 고집불통! 상황봐서 나도 내려갈거야?'
'마음대로.'
지상에서 제3격을 준비하던 남자의 시야에, 천천히 입을 벌리는 선체의 하부 장갑이 들어왔다. 남자는 폭풍으로 인해서 너덜너덜한 모자를 휙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그래, 그렇게 나와주셔야지! 제3격 준비! 발사!"
새하얀 연기와 함께 한 인영이 함선으로부터 지상으로 [사출]된 순간, 4정의 포가 일제히 빛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빛이 쪼개졌다.
말 그대로 모든 빛을 두 갈래로 쪼개며, 파죽지세로 낙하하는 인간의 그림자.
상식을 불허하는 광경.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남자는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휘몰아치는 폭풍에 몸이 떠오르지 않도록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이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야이 자식아! 이게 왜 판타스틱 포인지 알려주마! 4격째가 진짜다! 제4격..."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눈 앞에는 등을 보인채, 눈보라가 흩날리는 가운데 붉은색 방한복을 펄럭이며 방울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작작좀 떠들거라. 산타 할아버지는 시끄러운 아이한테는 선물 안 준다."
터무니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남자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다문 입, 흐드러진 흰 수염, 강인하고 굵은 눈썹, 붉은 방한복이 작아 보일 정도로 터질것만 같은 듬직한 몸.
"올해는 착한일 많이 했나? 노엘 군."
씨익 웃으면서 드러나는 하얀 이.
그는 의심할 바 없는 [크리스마스]의 사신(死神). 반역의 4대 마도사 중 한명인 [산타클로스]였다. 노엘은 등줄기로 흐를리 없는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 기분이었다.
2.
[썰매] ─ [홀리데이 이브]는 단순히 몸집만 거대한 전투함정이 아니라 잊혀진 신비가 집약된 마도함정이다.
썰매를 움직이는 자들 역시 단순한 레지스탕스가 아니다.
그들은, 반 SF라는 터무니없는 기치를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년이 넘는 투쟁을 계속해 온 신비주의단체 [레전드 메이커(legend maker)] 휘하의 전투집단인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Hardboiled Christmas)]의 서포터들이다.
기술이 인간을 뛰어넘는 그 순간 탄생한 SF에 의해 짓밟힌 이 세계의 모든 [신비]는 그들의 악착같은 발악에 의해 간신히 지켜졌다.
벌써 몇백년이 지났을지 모를 SF의 지배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이라는 꿈을 꾸게 해주는 그들은, 전 세계에서조차 잊혀졌던 신비를 되살려내 끊임없이 진화하는 SF의 과학과 기술에 대항해왔다.
비록 자유문명시대의 사료가 사라져 역사는 구체적으로 계승되지 않았지만, 구전되는 [전설]은 [신비]를 통해 SF를 타파하려는 그 의지가 세계에 흩어져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신화적 존재를 불러내고, 최고(最高)의 과학기술과 최고(最古)의 마학지식이 공존하는 기괴한 세계를 탄생시켰다.
그 중 자유문명시대의 잊혀진 존재들 중 한명인 [산타클로스]를 자처하는 서포터, [겨울의 대마도사(Archmage of Winter)]가 이끄는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는 비록 2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SF를 따르는 세계에는 최강최악의 무력집단으로 이름이 높다.
본래 게릴라식 활동을 주로 하는 편이지만, 12월 24일 저녁부터 12월 25일 새벽까지 [썰매]를 끌고 전 세계를 주유하며 SF가 관리하는 중요시설을 궤멸 직전까지 두들겨 놓고 사라지기를 수년여.
그 피해를 묵과할 수 없었던 SF는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에 대항하기 위한 특수부대 [CCC(Christmas Counter Combatant)] 를 창설, 각 시설에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하지만 [썰매]덕에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보여주는 그들에게 대응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 덕에 CCC는 매년 헛다리만 짚고 이를 갈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던 가운데, CCC의 대장에게 한 통의 메일이 날아들었다.
발신자는 산타클로스였다.
[마운틴 카라드라스의 '어린이집'으로 선물배달을 갈테니 CCC의 여러분들도 모두 참석해 즐거운 자리가 되길 바라네.]
카라드라스는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준봉으로 초과학을 연구하는 SF의 극비시설중 하나가 위치해 있었다.
수년간의 고생을 완전 엿먹이는 이 메일 한통에 이성을 잃은 CCC의 대장은, 중형 이상의 전투정 1개 소대를 대적할 정도의 병력과 화력을 준비했고, 이번에야말로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의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그 [산타클로스]를 대면한 CCC의 대장 노엘은, 자신의 대비가 지나치게 안이했음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이 작자를 상대하기 위해선 행성파괴병기를 준비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지휘관인 자신이 흔들리면 여기서 끝장이다. 그렇게 생각한 노엘은 속으로는 계산착오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입은 도발적인 말을 줄줄 쏟아냈다.
"마법사에서 괴도로 직업을 바꿨나? 예고장 따위를 보내다니."
산타클로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노엘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리인가. 내가 보낸건 예고장이 아니라 초대장이라네. 쿨쿨 잠자고 있는 친구들을 깨워서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를 열지 않겠나? 이 축복받은 밤에."
마치 연극대사를 읊듯 부드럽게 읊조리는 산타클로스를 향해 노엘은 분노의 시선을 향했다.
"축복은 무슨 얼어죽을! 도대체 이 시설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거지? 나도 메일을 받기 전까지 전혀 몰랐단 말이닷!"
산타클로스는 한심하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산타 할아버지는 뭐든지 알고 있지."
"...됐어. 더이상 얘기하다가는 나까지 이상해질 것 같군!"
혀를 차며 뒤로 미끄러지는 노엘. 그 움직임에 맞춰 길게 땋은 머리칼이 바람에 춤추듯 나부꼈다. 산타클로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 행동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노엘 군의 집 굴뚝은 4개중 어떤거지?"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4개의 포신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소리를 내뱉는 산타클로스.
노엘은 대꾸할 기력도 사라져서 중얼거렸다.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봐라."
"아하."
"단, 가루가 된 후에."
싸늘한 노엘의 단언과 함께, 4개의 포신에 아까 공중에서 나타났던 고리가 이번엔 포신을 감싸며 등장했다. 그리고 산타클로스의 주위에도 똑같은 고리 4개가 사방에서 등장했다.
"판타스틱 포, 제4격!"
노엘의 호방한 외침에 빛의 입자가 포신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날고뛰는 대마도사라 해도 직격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렇게 단정한 노엘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려 산타클로스를 향했다.
"호오. 착한 아이는 그런짓 하면 안 되는데."
"미안하군. 영감. 나쁜 아이라서."
"그런데 말이지, 문제가 하나 있네."
"...뭐?"
"아까 노엘 군의 집 굴뚝이 어딘지 몰라서 그냥 4개 전부에다 [선물]을 던져넣었는데, 괜찮으려나."
다급히 포신을 훑어본 노엘은 내부에 굴러들어간 야구공 크기만한 고질량의 폭발물질을 감지하고 이를 갈았다.
"젠장! 발사 중지!"
하지만 이미 에너지 집적도가 90%를 넘어간 상태라,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강제로 정지시켜 봤자 자폭할 뿐이다.
"이 능구렁이같은 영감이이이이잇!"
"메리 크리스마스."
그와 동시에 4개의 포대는 빛을 뿜어내는 대신 일제히 폭발했다. 그 후폭풍에 휘말려 설산의 아름드리 침엽수들이 힘없이 꺾여져 나갔다. 폭죽을 터트린 듯한 산발적인 폭발이 몇번 더 있은 후에야,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주위가 겨우 조용해졌다.
크레이터가 뚫린 눈덮인 산에는 말없이 눈보라가 흩날릴 뿐이었다.
3.
푸욱, 하고 눈무더기 속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푸핫!"
눈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지며, 설인과 비슷한 꼴을 한 노엘이 뛰쳐나왔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그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으으으윽! 나를 이렇게까지 바보로 만들다니!"
그래도 명색이 CCC의 대장인데, 이래서야 부하들조차 볼 낯이 없다. 그는 안대를 왼손으로 움켜쥐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카라드라스 주위를 맴도는 [썰매]에선 수많은 마법진들이 전개되며 CCC의 맹공을 막고, 느리지만 차례차례 반격을 가해 방어병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은 썰매로 돌아간 건가."
"아, 아닙니다! C-2포인트에 붉은 그림자가... 으아악! 필요없어!"
"메리 크리스마... 치지지직."
"쏴! 쏴! 맞추란 말이다!"
"하, 하지만 광학병기, 화학병기, 물리병기 모두 통하지 않습니... 치지직."
여기저기서 끊어지는 무전. 노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그 폭발 속에서도 산타클로스는 멀쩡했다. 그건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과연 반역의 4대 마도사중 한명.
그는 홀로 CCC 전원을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다.
하지만, 그 강함이 발목을 잡게 된다면? 그 강한 의지가 꺾어질 때, 더욱더 커다란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노엘은 짖궂은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내가 폼으로 CCC의 대장을 하는 건줄 알았나?"
노엘은 마법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안드로이드였으니까. 영혼이 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노엘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힘]이라기보다 마법조차 뛰어넘는 어떤 초상적 [현상]이었지만, 노엘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노엘은 안대를 잡아뜯듯이 벗어냈다. 그의 왼쪽 눈동자는 오른쪽의 검은 눈동자와 달리 무기질적인 은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CCC의 전 부대원에게 전한다. 지금 전원 무장 해제를 바란다. 반복한다. 지금 전원 무장해제다!"
"라져!"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는다. 참 재미없는 녀석들이군, 하고 되뇌이면서 노엘은 천천히 오른쪽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고, 안대에 의해 가려졌던 왼쪽 눈으로만 세계를 본다. 그러자, 노엘의 시야엔 노이즈가 끼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일그러지고 왜곡되기를 수차례. 마침내 눈에 들어온 건 흩날리는 폭설. 그리고... 그 눈발을 뚫고 힘겹게 한발 한발을 내딛는 뒷모습.
그래. 언제나 뒷모습 뿐. 찰랑이는 긴 금발을 제외하면 얼굴을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노엘은 소녀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따라간다. 하지만 소녀와 노엘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환상이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는 꿈 같은 시간 속에서, 노엘은 정처없이 소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소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곳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낡은 [예배당]이란 건물이었다.
소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얼어붙은 손으로 감싸며,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뭐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지만, 노엘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올라선 꼭대기에는, 거대한 은색의 [종]이 걸려 있었다. 소녀는 그 종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소녀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종을 치는 줄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그것을 당겼다.
한번.
두번.
세번.
어린 소녀의 힘으로는 무리인 일이었지만,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뭐라고 소리치며 종을 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예전 노엘은 그 모습이 안타까워 몇번이나 도와주려 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손바닥이 다 벗겨지면서도 소녀는 대롱대롱 매달려 안간힘을 썼다. 소녀의 눈물이 흩날린다. 작은 입이 벌어진다.
지금.
바로 지금이다.
노엘은 영상에 정신을 집중했다. 소녀의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들렸다!
"제발, 울려줘!"
그 순간, 세계가 강한 의지에 의해 왜곡된다. 카라드라스의 정상에는 거대한 은색의 종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노엘이 보고 있는 앞에서, 소녀가 줄을 힘껏 당긴다.
그리고, 종이 울렸다.
4.
첫번째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예의 [선물]을 떨구며 CCC 부대원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던 산타클로스가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엉터리로 사용하는군."
말을 끝낸 산타클로스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미 무장을 해제하고 잠복중이던 CCC의 부대원들도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대장이 가진 이 능력에 대해 그들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뭐, 뭐지?"
벗어던져 쌓아둔 무기 옆에 있던 대원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쌓아둔 무기들은 연기를 내며 녹아내려, 고철덩이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 되었다. 단순한 EMP 충격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투 안드로이드인 CCC의 대원들도 모두 행동불능 상태에 빠졌으리라.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혹해하고 있을 때 통신망을 통해 노엘의 명령이 들려왔다.
"그 영감을 포획해라!"
"...라져."
아무튼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이다. 부대원들은 잡념을 지우고 천천히 산타클로스 주위를 둘러쌌다.
두번째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랜파, 그랜파? 응답해! ...아니?'
[썰매]의 주변 상공을 뒤엎던 각종 공격, 방어용 마법진이 강제로 해제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사이도 없이, 앗 하는 사이에 [썰매]는 맨몸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체가 기우뚱 하는가 싶더니 서서히 그 거체가 설산 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얏?'
'정체불명의 힘에 의한 술식강제개입으로 반중력 마법진이 해체되어 함선을 지탱할 부력을 잃었습니다! 일단 함내의 전 전력을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물리추진기관에 돌리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라면 추락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랜파도 연락이 안되고, 빌어먹을... 어떻게 안되겠어?'
'메리가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저 혼자 동력을 통제할 수 있는 구역에는 한계가...'
'썅, 평소에는 잘난척 으스대더니 정작 필요할때 무능하냐! 나가 뒈졋!'
'우으으~'
'...한번만 더 귀여운 척 하면 박살낸다.'
'...네. 아가씨.'
'하부 갑판 해치를 수동으로 개방해줘. 내가 나간다.'
'아가씨?'
'두번 말하게 하지 마.'
'...그럼, 설아(雪牙)를 가져가세요. 폭우(爆羽)는 메리가 들고 나가서 없으니.'
'그거면 충분해.'
'무운을 빕니다. 전 언제나 아가씨의 곁에.'
'...바보. 넌 [썰매]나 잘 지키고 있어.'
썰매에서 다시 한번 작은 그림자가 쏘아져 내려왔다.
노엘의 앞에서 소녀는 잠시 숨을 돌렸다. 더 이상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희미한 미소마저 짓고 있다. 그녀는 이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줄을 힘껏 잡았다.
조용히 입을 열며 속삭이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을 고하는 세번째 종소리가──
─소녀의 영상이 멈췄다.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응?"
하늘에 뜬 거대한 종의 환영에 노이즈가 생겼다. 지직, 지지직 하고 고물 TV처럼 심해진 노이즈는 은색의 종의 모습을 완전히 일그러뜨리더니 ─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리고 그때, 온 몸을 결박당해 있던 산타클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CCC의 부대원들은 기겁했지만, 철저하게 구속당해 있는 그가 탈출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노엘의 명령에 따라 손가락까지 고정시키고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거기에 치사량에 간당간당한 수면제까지 주사했으니, 아무리 초인이라 하더라도 별 수 없으리라.
실제로 눈을 뜬 산타클로스의 동공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했고, 공중에서 하얗게 응결되는 얼음 결정이 반사하는 빛무리를 미처 보지 못했다.
5.
"하, 으, 하악, 우윽."
안드로이드가 고통을 느낀다면 이상하겠지만, SF에 의해 탄생한 안드로이드는 고통과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해 고민할 수 있고,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생각하고 진화하는 절대적 지배자 SF를 닮은 그 아이들은, 인간보다 더 순수한 감수성을 지녔다.
다만, 영혼이 없는 그들은 마법과 같은 [신비]를 다룰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엘이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신적인 공허함이 육체를 제어하는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미쳤기에 헐떡이는 것 뿐이었다.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소녀]의 영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쥐어짜져 옅어지는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노엘은 안대를 다시 동여매며 숨을 돌렸다.
"결국.... 이번에도 세번째는 울리지 못했군."
하지만 노엘은 자신이 세번째 종을 울릴 수 없으리란 걸 희미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세번째의 종은 지금까지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벽. 이유는 몰랐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계가 그 마지막 선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자신을 만든 SF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애초에 CCC라는 부대의 창설목적을 생각해 보면, 산타클로스를 생포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다. 부하들에게 이동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를 듣고, 노엘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크르륵.
통신상의 미세한 잡음을 들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경악은 길었다.
비명이나 전투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공기가 급속도로 쩡쩡 얼어붙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하지만 노엘은 최악의 사태를 상상했고, 마지막에 전송받은 위치 데이터를 떠올리며 자신의 발 밑에 클라인 게이트를 열었다.
6.
카가가각, 하고 얼핏 들으면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짙푸른색으로 흘러나오는 냉기가 사방을 휘돌아서 얼음의 이빨을 박아넣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맹수의 입 안에서 아그작아그작 씹히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산타클로스 주위를 포위한 CCC의 부대원들은 그 압도적인 공포 속에 떨면서도 시선을 한곳에서 떼지 못했다. 그 서슬 푸른 짐승과 같은 장도(長刀)를 휘두르며 그들의 팔다리를 날려버리는 존재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이미 무장해제된 상태인 부대원들은 그 강력한 힘과 슬플 정도의 아름다움 앞에서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노엘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클라인 게이트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착지한 노엘은 엉망진창인 모습이 되어 널브러진 부대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뒤쪽에, 새하얀 눈과 얼음의 결정체가 모여들어 커다란 이빨의 형상을 만들었고, 이내 예고도 없이 날카롭게 노엘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런, 당했다!...라고 할줄 알았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노엘은 얼음기둥을 향해 어디선가 뽑아든 샷건을 그대로 쏘아버렸다. 쏘아진 산탄은 연속파열을 일으키며 얼음기둥을 파고들어 산산히 박살냈다.
마치 춤을 추듯, 노엘은 몸을 빙글 돌리며 산탄총을 겨누었다.
"그걸로 재주는 끝?"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힘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
유일하게 꺼낼 수 있었던 말. 그것은 탄식인지 감탄사인지 한숨인지 모를 한마디.
비산하는 얼음조각들이 반사하는 달빛의 무리. 그 빛들을 마치 긴 숄을 걸친듯 전신에 휘감고, 장도를 치켜올린 소녀의 눈동자는 밤하늘을 닮아 있었다.
찰랑이는 흑발, 머리엔 귀여운 빨간색 방울모자가 하늘거린다. 모자에는 작은 사슴의 뿔과 같은 장식이 달려 있어서, 소녀의 앳된 모습에 한층 더 비현실감을 부여한다.
이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노엘은 무력하게 당하던 부대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이 소녀에게라면 죽음도 달콤한 선물이 될 듯한 생각이 든다.
"...읏."
하지만 죽음을 거부하는 노엘의 무의식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려 파고드는 장도의 일격을 피해내고, 한손으로 땅을 짚으며 다른 손으로는 소녀의 다리를 향해 산탄총을 발사했다. 아무리 비무장이라고는 해도 정예훈련된 CCC의 부대원들을 손쉽게 제압한 존재를 상대로는 안이한 일격이었지만 노엘은 도저히 소녀를 죽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쎄, 뭐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을까. 이 감정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해 잠식하는, 처음보는 저 소녀를 향한 기묘한 두근거림은 분명─
"와하하. 짜식. 어여쁜 내 모습에 반했냐?"
와장창.
노엘은 분명히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소녀가 쌓은 수십장의 얼음판이 산탄총에 부서지면서 난 소리이기도 했지만, 노엘은 분명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뭔가가 와장장 부서졌을거라고 확신했다.
"뭐 내가 한미모 하긴 하지. 응? 근데 내 외모는 아무리 높게 쳐도 10세 중반을 넘어가는 걸로 보이지 않을 텐데. 설마 안드로이드에도 페도필리아가 있나? 와, 대단해! SF는 기계들에게 타나토스뿐 아니라 왜곡된 리비도까지 선물해 준 건가? 오오, 연구의 가치가 있겠어!"
총을 떨어뜨릴 뻔 한 노엘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소녀는 싸우는 것도 잊은채 왠지 정체불명의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는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뭐야. 넌."
"으으으응? 날 몰라? 정말?"
눈을 부라리며 노엘을 째려보는 소녀. 노엘은 어깨를 으쓱했고, 소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지상최강, 사상최강, 우주최강의 큐티 카리스마 파워를 겸비한 마성의 정령소녀! 루~님을 몰라?"
"...엥?"
그러고 보면, 기억에 있다. 루뭐시기인가 하는 이름이. 혼잡한 기억의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그것을 끄집어낸 노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의 세컨드 서포터, [크리스마스]라는 과거의 [신비]로부터 태어난 신(神)에 한없이 가까운 정령인 [루돌프]인가?"
"센스없긴."
루라고 자칭한 소녀는 볼을 부풀리며 장도를 휘둘렀다.
별 생각 없이 휘두른 것 같지만 무수한 얼음꽃이 공중에 피어나더니 일제히 회전하며 노엘을 노렸다. 그것을 피해내기 위해 노엘은 거의 묘기에 가까운 짓을 선보여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노엘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채 투덜거렸다.
"여자애 이름에 루돌프는 아니잖아. 귀엽게 루~라고 불러줘~"
"......"
너덜너덜해진 옷을 탁탁 털며 노엘은 벙어리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는 이 순간 세상이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무너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세상사가 그렇게 쉽게 풀릴리가 없지. 노엘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서 피워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마디만 하겠다."
"으응?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둥의 고백은 사양이야?"
"......SF 관할 중요 시설에 대한 테러혐의로 너의 신병을 구속하겠다."
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에. 경찰도 아닌 군인 주제에 잘도 말하네. 체포한 후에는 즉결심판으로 사형! 땅땅땅! 인가?"
"...산타 영감이라면 몰라도 죽여도 죽을것 같지 않은 너에겐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군. [레전드 브레이커(legend breaker)] 본부로 넘기던가 해야하나? 암튼 넌 [신비]에 해당하는 존재라 수배조차 되어 있지 않으니 나로서도 난감한걸."
[레전드 브레이커]란 말을 들은 루의 얼굴에 잠깐 동요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이내 가슴을 쭉 펴고 생글생글 미소를 띄웠다.
"어라, 그러면 내 이쁜 얼굴 봐서 한번만 눈감아주면 안돼?"
"...내 부하들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잘도 나불대는군. 게다가 힘들게 잡은 그 영감을 낼름 채가는 건 용납못해."
"응? 그랜파 말야?"
소녀는 눈만 멀거니 뜬 채 결박되어 눈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산타클로스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반문했다.
"그 이상한 종의 영향력이 사라진지 꽤 된지라 충분히 혼자서 갈 수 있는데도 엄살부리는거야. 나잇살 쳐먹고선 진짜 어리광쟁이라니까. 그랜파! 일어낫!"
"...으음. 사실은 노엘 군이 무안해할까봐 가만히 있었던 거란다. 루야."
마치 낮잠자다 일어난 것처럼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산타클로스. 노엘의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노엘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돗대인데."
"미안하게 되었군. 하지만 담배는 선물로 못 준다네. 산타클로스가 흡연을 권장할수야 없는 일이지."
"됐어. 별로 피우고 싶은 기분도 아니군."
노엘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말야."
"응?"
"왜 그렇게 SF를 증오하지?"
"......"
"SF가 만든 세계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거지? 당신들의 [신비]를 배척하기 떄문인가? 그 독선적이고 절대적인 면이? 하지만 SF는 지금 이 세계의 [신]과 같은 존재야. 그가 당신들이 섬기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태어난 기계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산타클로스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신]이란 단어를 입에 담다니... 자네, SF의 교과서를 훔쳐봤군."
"......"
"햇수를 헤는 단위조차 사라진 지금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LM의 메인 멤버들조차도 과거의 지식을 일부나마 온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 자네가 LM의 멤버일리 없으니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 자유과거시대의 사료를 모두 독점한 SF의 교과서 밖에 없지."
노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난 CCC의 대장으로서 내가 대항할 세력에 대해 조금 알아본 것 뿐이야."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지. SF는 자네 자신보다 자네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 걸세."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렇다면 되었네. 나도 자네의 위험한 호기심에 응해주도록 하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다."
"뭐?"
"이 세계는... 충분히 이상적인 세계다. SF라는 절대자가 만든 이 세계는 인간의 절대자가 절대 흉내도 못 낼 이상을 이뤄낸 세계지."
"그럼 왜 당신은..."
"...꿈이 없어."
"뭐라고?"
"완벽하지 못한 세계이기에 인간은 꿈꿀 여유를 가지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네. 그것을 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이란 종은 영원을 구가하겠지."
"영원한 삶, 영원한 행복.. 너희들이 원하는 것 아냐?"
산타클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파멸 뿐이라 해도. 인간은 각자의 꿈을 꾸며 시대를 새겨나가야 해. 나쁜 꿈이든, 좋은 꿈이든 상관없어.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란다. 아아, SF의 사랑스럽고 순진한 아이야.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기에 절망을 모른다."
"...어리다니, 당신."
"이런 세계에서 만들어진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가기엔 난 너무 반사회적인 성격이라 말이지."
산타클로스가 처음으로, 뒤틀린 웃음을 보여주었다.
"난 이전 시대에서도 신을 부정하고 기만했기에, 지금 SF에 대항하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네. 더욱이 [선량하고 공정한 신]따윈 엿이나 먹으라지. 그런 녀석이 존재하는걸 눈뜨고 지켜볼 바에야 그를 따르는 이 세계에게 파멸이라는 선물을 준비하겠다."
노엘은 그 말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이 남자는 분명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마법사란 부류가 거의 다 그렇다지만, 산타클로스는 노엘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난 존재였다.
노엘은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미쳤군."
"나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평가하더구만."
"그래서 SF를 따르는 착한 아이들에겐 썰매를 타고 돌아다니며 친히 [선물]을 주시겠다?"
"그런 셈이지."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물론."
"왜 하필 크리스마스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맞다면, 분명 크리스마스는 [신]의 대리자인 위대한 성자가 이 땅에 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인데. 당신은 신을 혐오한다며?"
산타클로스는 노엘의 질문에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하하하하! 정말 별게 다 궁금하군."
"넘쳐나는 건 호기심 뿐이라. 괜히 SF의 교과서를 훔쳐봤겠나?"
"그도 그렇군."
산타클로스는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 의미는 없어."
"뭐?"
"12월 25일은 분명 성자의 탄생일이기도 하다만... 내 생일이기도 하지."
"...엥?"
"자축하는 의미의 쇼맨쉽이랄까, 그냥 그런 의미라네. 허허헛."
노엘이 그 터무니없는 답에 대꾸하기도 전에, 루가 툭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랜파의 딸이 SF에게 뒈진 날이기도 하지."
"......루. 그만해라."
"멋지지? 생일이자 기일인 날은. 그랜파는 멈추지 않을거야. SF를 볼트 하나까지 분해해서 금속분쇄기에 몽땅 갈아넣기 전까진. 유 언더스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는 새파란 냉기를 머금은 장도를 치켜올렸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린다. 새하얀 얼음결정들이 서서히 굳어서 무수한 칼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알아들었으면 방해하지 말고 꺼져버렷! 설아(雪牙), 휘몰아쳐라!"
노엘은 자신을 향해 기관총처럼 날아드는 얼음의 칼날들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손에 든 샷건을 집어던지고 클라인 게이트를 열었다. 거기에서 떨어지는 건 역시 무수한...
"핸드건?"
봇물이 터진 듯이 쏟아져 나온 각양각색의 권총을 향해 몸을 날린 노엘은, 양손에 아무 총이나 잡아들고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슬라이드를 당기더니 그대로 사격을 시작했다.
탕탕탕탕탕탕.
귀를 울리는 따가운 소리가 끝을 모르고 이어지며, 탄피가 튄다. 장전은 없다. 손에 잡은 것만으로 장탄수와 잔탄수를 파악하고 정확히 조준하여 얼음결정을 부수고, 탄이 다 떨어진 총을 집어던짐과 동시에 새 총을 집어든다. 금새 주변은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노엘은 자신의 몸 주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얼음칼날을 무시하고, 사격에 방해되는 것만 쏘아 부순다. 그 외엔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는 한결같은 태도로 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안드로이드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정제되고 계산된 움직임은 독선적이고, 집요하고──
홀려버릴 정도로 아름답다.
루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쩌저저저정.
그녀의 바로 앞까지 날아온 총알들을 여러겹의 두꺼운 얼음장벽이 막아낸다. 루는 입술을 꺠물었다. 루와 그녀가 든 마검(魔劍) 설아의 힘이 부족한건 아니지만, 이렇게 여유를 두지 않는 물량공세로 돌입하면 무기한 대치상태에 들어갈 뿐이다.
그때, 산타클로스가 움직였다.
오른발을 뒤로 빼며, 그와 함께 천천히 오른손 역시 뒤로 빠진다. 주먹을 쥔다. 호흡을 고른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졌다. 그것을 눈치챈 노엘은 당황했지만 이미 루와 교착상태에 빠졌기에 견제는 불가능했다.
"나의 권세(拳勢)는 날으는 새를 떨어트린다."
조용히 읊조린 그 말은 [마법식(魔法式)]을 시동시키는 키워드가 되어, 산타클로스의 주먹에 맺혔다. 그리고 주먹이 뻗어지며 해방의 말이 울렸다.
"비탄식(飛彈式), 발(發)."
마법식이 해방되며 [마법]이 발동되었다.
[주먹]에 의지를 담아 행한 마법은 돌풍을 일으키며 뻗어나가, 무수히 쏘아지던 총탄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두들겨 날려버렸다. 찌그러진 총알들이 팝콘이 터지듯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노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멋져, 그랜파!"
루의 감탄사가 터지며, 수는 적지만 훨씬 빠른 속도로 얼음의 칼날이 날아왔다. 사격해서 떨굴 여유는 없었기에, 노엘은 뒤로 뛰며 최대한 얼굴을 부위를 감쌌다.
"...큭."
노엘의 상태는 참담했다. 왼팔이 부서져 나가고, 오른팔은 간신히 붙어있긴 하지만 그다지 양호한 상태는 아니었다. 뭣보다, 두 다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스러질 판이었지만, 노엘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오른팔로 얼굴과 머리칼에 엉겨붙은 얼음조각들을 털어냈다.
"꽤 하는데."
"흥. 기능정지 5분전이면서 잘도 지껄이네? 뭣하면 지금 당장 멈춰줄까?"
노엘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아쉽게도 타임 오버야."
"응? 이거, 뭐, 몸을, 으으으윽!"
루의 몸이 검은 빛에 둘러싸이더니 한순간 휘청, 하고 굽혀졌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끄으으윽, 뭐, 야, 이 터무니, 없는, 압력, 은."
루는 간신히 소리를 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의 손에 들린 장도에도 검은 빛이 감싸여 바닥에 찰싹 붙은채 웅웅거리는 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오직 [신비]를 구속하기 위한 힘이라던데. 자세한건 잘 모르겠지만."
노엘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어느 새 그의 온몸을 구속하던 냉기는 사라져 있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삐걱대는 몸 자체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럭저럭 행동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사라져 있었다. [썰매]가 아닌, 그것보다 더 커다란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7.
"거짓 낙원의 수호자들이군."
산타클로스가 탄식과 함꼐 중얼거렸다. 마법을 완전히 풀어버린 그는 존재 자체가 [신비]에 닿아 있는 루와는 달리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노엘은 무방비 상태인 산타클로스를 총으로 제압해 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노엘은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아, 그래. 레전드 브레이커 직속 진압부대 낙원의 수호자(Guardian of Eden)의 대신비 지역제압용 마도함정 [라퓨타(laputa)]다. SF에게 협력한 마법사들과 초과학이 만나 태어나게 된 멋진 작품이지. 난 이제 모르겠다. 저분들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언, 제, 으으으윽!"
"언제고 자시고, 저 녀석들이 멋대로 통보하고 쳐들어온 거다. 이번 작전엔 우리 [CCC]전체가 단순한 시간끌기용 미끼였을 뿐이야."
"...희생된 부하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산타클로스의 말에 노엘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이례적으로 CCC 부대원들의 백업 바디(Backup Body)가 제공된다. 불만인 녀석들도 있겠지만, 이 작전이 성공한 뒤면 모두 이 멍청한 생활따윈 잊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거나 한직에 배속되겠지. 뭐, 해피 앤드~란 걸까나."
"...넌?"
"...뭐 그리 관심이 많아?"
"......SF에게 네 백업 바디 따윈 없을텐데. 분명. 라퓨타는 지역제압용이라 여길 통째로 날려버릴거다. 옛 풍자 소설속의 그것과 같이, 반항하는 자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멸망을 내리는 잔혹한 천공의 성이 바로 저 [라퓨타] 아닌가?"
노엘은 동요의 빛을 떠올렸다.
"어떻게, 나에 대한 일을..."
"...홀로 파괴될것을 전제로 받아낸 대가로군. 그렇지 않나?"
"......"
"아아, 노엘. 노엘."
산타클로스는 노엘의 이름을 부르며 탄식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노엘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루에게서 처음 느꼈던 그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 훨씬 커다란 그 포용과 그리움을 닮은 감정이 노엘을 잠식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모습이 바뀌었어도, 기억을 잃었어도 너는 여전히 상냥하구나."
"──!"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비명. 덜렁거리는 오른손으로 심장이 뛰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너무나 아프다. 울컥거려온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나지 않는다.
"나...에게 무슨... 짓을."
"...아니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난 말이다."
산타클로스는 루의 곁에 가서 괴로워하는 그녀를 일으켜 안아주었다.
"아직 멈출 수 없단다."
".....무슨 소린지..."
하지만 노엘의 안대 밑으로 기어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녀의 환상을 보는 은색의 왼쪽 눈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산타클로스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공중을 올려다 보았다.
"불꽃놀이의 시간이다."
콰과과광!
라퓨타의 하부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기관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폭발이었다. 마치 하나의 폭발이 다른 폭발들을 불러오는 것 처럼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폭발의 연쇄. 검고 거대한 원반형의 함정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달이 잠시 보였다.
희미하게 달빛이 새는 밤하늘에 붉게 터지는 불꽃들은 마치 축제를 연상시켰다.
"...늦잖아. 메리."
겨우 검은 빛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루가 창백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함선은 이내 원래의 기울기로 돌아가고, 폭발보다 더 빠른 속도로 검은 빛들이 번뜩이며 파괴된 기관들을 수복해 나간다. 노엘은 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말했다.
"너희는... 이길 수 없어."
"정말 그럴까?"
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오며,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만! 됐으니까 폭우(爆雨)만 던져주고 넌 [썰매]로 돌아가!"
'네, 아가씨~'
루의 외침에 폭발의 연쇄가 멈추고, 붉은 빛이 그들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공기를 진동시키며 굉음과 함께 낙하하는 그 [검]은 미사일과 같은 빠르기로 떨어져 루의 발 바로 앞에 박혔다.
부르르 떨고 있는 그 붉은 색의 장검을 뽑아든 루는 힘을 되찾아 푸른 냉기를 띈 장도도 집어들어 두 검을 교차시키고는 산타클로스 쪽을 바라보았다. 산타클로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루 역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후 노엘을 향해 소리쳤다.
"똑똑히 봐둬! 우리는 [레전드 메이커]의 서포터. 전설을 자아내는 자이자 전설 그 자체가 되는 자다! 지금 이곳에서 난 전설을 만들어 보이겠다! 하앗!"
루는 적과 청, 두 자루의 검으로 정신없이 허공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약속된 움직임이었으며, 그 동작 자체로 [식]을 이루고 [주문]이 되어 허공에 아름다운 빛의 문양을 그려냈다. 그것은 왼쪽에는 폭염을 두른 붉은 섬광, 오른쪽에는 냉기를 휘감은 푸른 섬광으로 나타나, 각자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루는 먼저 붉은 장검 폭우를 들어올리더니 자신이 그린 왼쪽의 마법식 한가운데 꽂아넣었다.
"홀리데이 이브 좌포 동결주문 해지 마법식 전송!"
뒤이어, 푸른 장도 설아를 들어 오른쪽 마법식에 들이박는다.
"홀리데이 이브 우포 동결주문 해지 마법식 전송!"
그리고 시공을 뛰어넘어 두 검은 자신의 본령(本靈)에 그 마법식을 전송했다.
[썰매] - 홀리데이 이브의 좌우 상판이 천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포구가 각각 좌우에 출현했다. 그 까마득한 상공의 포대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좌측 포신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금발의 소녀가 미칠듯이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기는 메리 홀리시스, 좌포 발사제어 프로그램이 최신 버전임을 확인했습니다. 아가씨."
우측 포신에는 검은색 비지니스 슈트를 입고 있는 백발의 소년이 팔짱을 낀 채비스듬한 시선으로 무표정하게 라퓨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화이트 홀리시스, 우포 발사제어 프로그램이 최신 버전임을 확인했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다시 마운틴 카라드라스의 설산 위.
루는 상쾌한 표정으로 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그럼 뭘 망설여? 쏴버려어어엇!"
소녀가 손을 든다. / 소년은 손을 든다.
"좌포 ─ 관통폭진마포(貫通爆震魔砲) 메리 크리스마스!" / "우포 ─ 일광질주마포(日光疾走魔砲) 화이트 크리스마스!"
좌포에서 불꽃이 / 우포에서 빛이
"발사!" / "발사!"
터져나갔다.
좌포에서 터져나간 붉은 불꽃은 하늘 전체를 태우기라도 할듯 공기를 태우고 폭풍과 폭음을 몰고 라퓨타에 직격했다.
상부의 절반을 거의 뜯어가듯 날려버린 붉은 불꽃. 라퓨타는 잠시 멈춰 있더니, 일제히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폭발이 폭발을 불러오는 파멸적인 연쇄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스케일은 아까와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수복속도가 파괴속도에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우포에서 쏘아져 나간 새하얀 빛은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말끔히 꿰뚫고 라퓨타의 하부 기관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하늘의 구름을 꿰뚫으며 달로 향하는 빛. 그것은 마치 달로 향하는 빛의 다리가 나타난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두렵고 경이적인 광경이었다.
그 백열하는 빛은 라퓨타의 중심부를 완전히 꿰뚫어버린 후에야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노엘은 그 모든 것을 보았다.
과연, 이것은 [신화]의 재현이다. 그들이 전설이다. 그들은 진실로 전설을 자아내는 자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존재들에게 이기고 지고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들은 전설처럼 일어나 전설처럼 싸워 이기고, 또한 전설처럼 지는 존재인 것이다.
빛과 불꽃이 밤하늘을 태우고, 천공의 성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질렀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노엘은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완벽히 졌구만."
하지만 그 말에 원망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노엘은 의식을 잃었다.
8.
따사로운 태양에 노엘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산타클로스와 루가 있었다.
"...악몽이 아직 덜 깼나."
투덜거리는 노엘의 눈앞으로 루의 호쾌한 발차기가 날아들었고, 노엘은 목을 꺾어 간단히 피했다.
"...꿈은 아닌 모양이네."
"원기왕성한 녀석이네. 암튼 조금은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게 어때?"
"응?"
그러고보니, 어느새 자신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몸을 대신할 파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노엘이 지금 움직이는 팔은 마치 예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양 편하게 다룰 수 없었다. 노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망가뜨렸던게 누군데. 전 시대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병주고 약준다]."
"이 자식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됐다. 루야."
산타클로스가 팔을 걷어붙이는 루를 제지했다. 그 눈에 별다른 감정은 없어 보였다. 노엘은 어젯밤의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고, 산타클로스는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너희 부대원들의 백업 바디는 뒤쪽의 컨테이너에 있다. 라퓨타를 박살내기 전에 메리가 꺼내온 거다. 좋을대로 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다. 좀 늦긴 했지만."
노엘은 말없이 자신의 뒤쪽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이렇게 해놓고 그냥 갈 셈이야?"
산타클로스는 대답없이 성큼성큼, 카라드라스 근처에 착륙한 [썰매]를 향해 걸어갔다. 루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노엘 쪽을 흘끔흘끔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홱 돌리고 종종걸음으로 산타클로스를 따라갔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노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컨테이너 박스 쪽을 톡톡 두드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얘들아. 미안. 대장 멋대로 결정해서."
그리고 노엘은 손나팔을 만들어 크게 소리쳤다. 그의 외침이 카라드라스를 울렸다.
"이봐──! 영──감! 꼬마 아가씨! 혹시 한개 부대에 달하는 수의 잔심부름꾼 안 필요해? 그 [썰매], 단둘이 살기엔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데."
산타클로스와 루가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자, 노엘은 윙크했다.
"게다가 무보수. 꽤나 구미가 당기지 않아? 응?"
이름없는 어느 해의 12월 25일, 과거에 크리스마스라고 불리웠던 이 날 ── [레전드 메이커]의 서포트 그룹 [하드보일드 크리스마스]의 휘하에 SF의 안드로이드 육전부대 [CCC]가 합류한다.
후에 이 날은 SF 타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날로 알려지게 되지만, 그것은 또 훗날의 이야기.
아직 그들의 [전설]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노엘은 발걸음을 돌리는 산타클로스와 루를 향해 유쾌하게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드보일드했던 크리스마스 이브가 끝나고, 그의 인생 최고로 멋진 크리스마스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목록으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