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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dream

05/02/19

태그 : 유천시, 미즈미르, 현아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
차갑다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체온.
아주 짧고도 가벼운 시간 동안,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 닿았던 입술은 떨어져 나갔다.
이것이, 내 첫 키스의 추억.

"……이."

상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뒤로 슬쩍 얼굴을 돌리고,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썼다.

"……이, 이."

부들부들 떨리는 온몸. 그제서야 이성이 천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멍하게 지켜보던 여자가 얼빠진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와우."

"이, 이이이이!"

"이빨이라도 들이박았냐? 괜찮아. 처음이니까 실수할 수도 있는거지. 뭐."

심드렁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

내 외침은 그렇게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라는 전개였으면 좋았으련만. 내 목소리는 방안을 맴돌 뿐이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면 일주일전 이 원룸을 싼값으로 구해서 좋아했을 때부터가 크게 어긋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시간전 첫주라고 강의를 빼먹은 것도 문제였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몇분 전 창문이 깨졌을때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수였을거다.

어쨌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 첫키스를 빼앗긴 채로, 영문도 모를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존재일 뿐이었다.
…정말로 눈물 나왔다.




내 이름은 정찬. 지극히 평범한 19세 남성이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신학기 첫주에 들어서서, 들뜬 마음으로 캠퍼스 라이프의 꿈을 꾸던 중이었다.
서울 유명대는 아니지만, 어쨌든 지방민으로서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중이었다. 선유대학교라고. 모를 사람들은 모를 좀 작은 곳이지만.
학비를 절약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근처에 원룸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쓸 것이긴 하지만, 최대한 집의 부담을 줄이 위해서 나는 이곳저곳 싼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리고 운 좋게 구한 곳이 바로 이 방이다. 신학기에 방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건만, 내가 갔을때 우연히 일 때문에 나가야 할 사람이 생겼기에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원룸치고는 지나치게 싼 가격을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그건 내가 오늘 수업은 그냥 제끼기로 마음먹고 널려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먼저 난 소리는,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였다. 당황한 내가 창문을 바라보았을 때,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 전체가 요란하게 깨져나갔고,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들어 날 벽까지 날려보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철퍽, 하고 뭔가가 내 곁에 떨어졌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까마귀였다. 벽에 검은 깃털과 붉은 피가 범벅이 된 기분나쁜 줄을 만들어 놓은 그것은, 바닥에서 이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쳤다. 바로 그 순간, 까마귀는 고개를 들고 붉은 안광을 빛냈다. 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건드리지 마!"

앙칼진 여자아이의 목소리.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까마귀는 정말로 부리를 열고 말했다.

"쳐, 쳐다보지도 마!"

엉겁결에 고개를 들려다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말하는 까마귀의 명령 따위를 들어야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다시 내렸다. 까마귀는 힘겹게 피에 젖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일어서려고 애썼다.

"도와줄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얼빠진 말을 꺼냈다. 까마귀는 고개를 쳐들고 다시 부리를 열었다.

"닥쳐!"

거참 입버릇 더럽구만. 그래봤자 까마귀 주제에. 나는 그 건방진 까마귀에게 한마디 해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식간에 까마귀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그리고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불쑥 피투성이인 손이 튀어나왔다. 놀랄 새도 없이 두번째 손이 불쑥 튀어나오고, 곧이어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그림자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가 없는 바닥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줄어들고 넝마가 된 검은 드레스를 걸친 피투성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 보면 검은 머리칼에도 피가 엉겨붙어 있었고, 숨쉬는 것조차 무척 괴로워 보였다.
그녀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휘저었다.

"아, 아직… 인간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약해지지 않았어."

…아니. 충분히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상투적인 대사를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너무나도 만화같은 전개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귀가 여자애로 변했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별 문제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또 기타 등등의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하렘이라도 만들어주는 건가.
나는 이 상황에서도 피식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설마 그럴리가…….

"뭐, 뭐야! 비웃는건가?"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화낸다. 그리고 몸을 약간 틀자, 깃털이 날아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상처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아니. 아닌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깃털들이 무더기로 창밖에서 흩날려 들어왔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아냐!"

소녀의 당혹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보니, 흩날리는 깃털은 흰 깃털이었다. 마치 천사를 연상케 하는 하이얀 깃털… 은 아니군. 가까이서 보니 그냥 희끄무레한 깃털일 뿐이었다. 깃털이 바닥에 모두 떨어지자, 나는 악몽을 볼 수 있었다.

잘그락.
바닥에 떨어진 유리파편을 하이힐로 짓밟으며,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어깨 너머까지 늘어뜨린채 검은 여성용 정장을 빼입은 젊은 여성이 오른손을 들고 방긋 웃었다. 그에 맞춰 내 입가는 일그러졌다.

"하이~!"

…오우 노우.
마음속으로 영어로 대꾸한 후에 나는 벽에 붙어 슬슬 달아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까마귀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날 멈추게 했다.

"도망치지맛!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여버린다!"

…안돼. 이것도 너무 전형적이잖아.
하지만 전형적이든 어쨌든 내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였기에, 나는 돌부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붉은머리 여성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우리 까마귀양. 너무 귀여워♡ 딱 내 취향인데 말야. 하지만 일은 일이니 이 언니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해치지는 않을테니 순순히 돌아오려엄~"
"놀리지 말앗!"

소녀는 그림자를 앞으로 빼서 어둠에서 시커먼 활을 꺼내들었다. 붉은머리 여자는 그것을 보며 씩 웃었다.

"화내는 모습도 귀엽네."

손을 뒤로 해서 앞으로 쭉 뻗는가 싶더니, 땅바닥의 깃털들이 튀어오르며 소녀에게 쇄도한다. 하지만 소녀는 활줄을 팽팽하게 당기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소녀의 눈 앞까지 깃털들이 날아들었을때 소녀는 그제서야 활줄을 튕겼다.
기이잉.
그러자 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현상이 벌어졌다. 소녀에게도 다가오던 흰 깃털들이 모두 공중에서 멈추더니, 몇번 부들부들 떨다가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깃털들이 모두 검게 변하자,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붉은머리 여자에게 돌아갔다.
까마귀 소녀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곧 그 미소는 사라졌다.

"화(火)의 수호(守護)!"

창밖에서 깃털과 붉은머리 여자의 사이로 누군가가 뛰어들며 짧게 외쳤다. 소름끼칠 정도로 맑은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그러자 공중의 검은 깃털들은 모두 불타올라 재가 되어 떨어졌다. 까마귀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엄청난 일을 벌인 창본인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소녀를 무시하고 뒤의 붉은머리에게 말을 걸었다.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 주세요. 누리양."
"아슬아슬함이 있어야 이 지겨운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거라고."

붉은머리 여자의 태연스러운 대꾸에, 뛰어든 사람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아이였다. 붉은 머리 여자보다도 키가 작았고, 잘 봐줘야 10대 중반으로 보였다.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새카만 남성용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은 묘하게 언밸런스했다. 거기에다 목에는 검은 털목도리를 칭침 감고 있다.
그 아이를 본 소녀는 뒷걸음질치며 날 가리켰다.

"가, 가까이오면 이 녀석을…"

…왜 납니까. 이런 상황 정말 싫구만.
정장을 입은 아이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의 장갑을 벗으면서 손가락을 복잡하게 놀리며 짧게 말했다.

"속박(束縛)의 주(呪)."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녀의 주변에서 붉은 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까마귀 소녀는 당황하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다 날려보낸줄 알았던 깃털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떨어져 있었고, 지금 그 깃털들이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새장 속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현아양."
"시, 싫어어어어!"

깃털에서 붉은 실들이 순식간에 뻗어나와 까마귀 소녀의 온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붉은머리 여자는 안절부절 하면서 아이에게 달라붙었다.

"저, 저기, 수? 다치게 하면 안된다?"
"알았으니까 좀 놔줘요. 시안! 당신 차례에요!"

그러자 또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다 깨진 베란다 창문을 드르륵 열며 들어왔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갖춰 입은 그 미남자는, 손에 붉은 표지의 책을 들고 그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투덜거리면서 걸어왔다. 그의 머리칼은 눈부실 정도의 금발이었다.

"늦잖아. 수. 덕분에 중요한 장면에서 끊어지게 생겼어."

수라 불린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까마귀 소녀를 가리켰다. 금발의 미남자는 책을 덮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내키지는 않지만."

천천히 몸부림치는 소녀에게로 걸어간 그는, 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까마귀 소녀가 그 눈길에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소녀의 허리를 자신의 팔로 휘어감고 들어올렸다.

"무…. 으웁!"

소녀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대로 남자의 입술이 덮쳐왔다. 소녀는 처음에는 몸을 버티며 반항했지만, 몸을 몇번 꿈틀거리더니 눈이 서서히 풀리고 그의 손에 몸을 완전히 맡겼다. 남자는 소녀의 입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소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붉은 실들이 사라졌다. 남자는 소녀를 놓았다. 소녀는 남자의 품에서 미끄러져 벽에 기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두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는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돌아서면서 다시 책을 펴들고, 왼손으로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하아. 또 여자와 해버리다니… 그것도 새끼 까마귀와."

검은 옷의 아이 쪽이 까마귀 소녀를 안아들었고, 붉은머리 여자는 거기에 달라붙었다. 세 사람은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뭣보다 나는, 순식간에 끝나버린 상황에 그저 멍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그리고 그대로 베란다로 걸어갔다. 나는 무심중에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저기, 여긴 2층인데요."
"……"

모두들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 여자 쪽이 머리를 손으로 탁 쳤다.

"아, 목격자 처리 깜박했다."

처리? 처리라고? 나는 불안감에 떨었다. 남자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닭대가리가 어디 가냐."
"뭣이!"

여자가 핏대를 올리자, 아이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싸움은 나중에 해주세요. 현아양도 얼른 데려다줘야 하고."

…정작 피해자인 내 의지 따윈 중요하지 않은 듯 싶다. 산 넘어 산이라는 게 이런 기분일까나.
뭔가 셋이 상의하더니, 여자 쪽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품속에서 은색의 금속 막대를 꺼낸다. 여자는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 눈 똑바로 뜨세요."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그게 뭐죠?"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갑자기 반말로.

"너 맨 인 블랙 안봤어?"
"……."
"그것도 안봤냐… 하아. 그냥 눈만 뜨고 녜녜, 대답하기만 하면 끝나. 불 반짝 하면 땡인데 뭐."

사실은 봤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별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여자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우리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 담당자가 그쪽 매니아라서 말야. 옷도 움직이기 불편한 이런 정장에다 기억 지우는 기계까지 들려보내고… 광선총까지 휴대하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
"야, 닭. 언제까지 수다떨래? 벌써 10번은 넘게 끝냈겠다."

책 읽는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지른다. 여자는 그 말에 발끈했다.

"자꾸 닭닭 거릴래, 이 호모새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지."
"말 좀 가려서 해라. 저 좆도 좆만한 자식이!"
"그럼 좆이 좆만하지 얼마만큼 커야겠냐? 역시 닭대가리답군."

까마귀 소녀를 안고 있는 아이는 속이 타는지 방방 뛰었다.

"저속한 말싸움 좀 작작해 주세요!"

그제서야 두 남녀는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푹 내쉰 아이는 문득 생각난 듯이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아, 그런데 이번에는 그거 안하나요? 테스트."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그 말에 책을 읽던 남자도 조용히 책을 덮었다. 세 사람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말했다.

"먼저 나부터."

그리고 아까보다 더 뚫어져라 날 훑어본다.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위험한거 아냐?
여자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애초부터 평범해 보여서 기대도 안했긴 했지만."

뭔지는 몰라도, 나는 가슴 속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다른 시선이 느껴지자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금발의 남자가 날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차분하고 침착했지만 동시에 꼼꼼하고 집요했기에 나는 스토킹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남자라는 점에서 플러스 점수."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점수인데요.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날 계속 응시하며 나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나이는?"
"열아홉."
"직업은?"
"대학생인데요."
"고등학교때 성적은?"
"…일단은 중상위권에 들었던 것 같은데요."
"수염은 매일 깎나?"
"…네."
"연애해본 경험은?"
"아직…"
"그럼 섹스는?"
"……저기."

산발적이며 두서없는 질문들이 이어졌고, 나는 기계적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남자는 겨드랑이 사이에 책을 낀채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여자가 눈을 빛냈다.

"어때? 시안."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미묘하게 어긋나네. 조금만 더 키우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내키진 않아."
"그럼 꽝이네. 자아…"

남자의 말에 여자가 은색 막대를 들이대려고 했다. 난 차라리 얼른 내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그것을 저지했다.

"전 아직 안했어요."

여자와 남자는 모두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수? 네가?"
"의외인데."

그 아이는 까마귀 소녀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무릎을 꿇은 채 나에게 다가왔다. 놀라울 정도로 맑은 검은 눈동자. 나는 그 앞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본지 채 10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마음에 들어요."
"엑?"
"어?"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기겁하며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경악이 사라지기도 전에, 아이는 모자를 벗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틀어, 내 입술을 훔쳤다.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고, 날 바라보는 두 남녀의 얼굴도 새하얗게 변했다.
세상이 이렇게 밝은지 미처 몰랐다. 아하하.
…빌어먹을.



"남자가 키스 한번에 질질 짜냐. 쯔쯔."
"남자라고 감수성이 없는 줄 아냐. 여자라도 모두 감수성이 풍부한 건 아니라는 증거가 너 자신이잖아."
"뭐얏!"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말로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치심과 당혹감, 그리고 앞이 막막한 내 처지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일까. 아아.
솔직히 말하자면 눈물을 흘리는 나 조차도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었다. 문득 깨닫고 나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내 눈가로, 작은 손이 다가왔다.

"눈물."

수, 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는 이번에는 흰 장갑을 벗은 왼손의 손가락으로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훑었다. 그러자 내 눈물은 신기하게 멈추었다.
그리고 수는 그 손가락을 홀린 듯이 바라보더니, 입에 넣고 쭉 빨았다.

"짭짤하군요."

빙긋,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수는 묘하게 밝아 보였다. 그러자 나는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의문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여자애야? 남자애야?"

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고, 뒤의 남녀는 손을 휘저었다.

"우리가 알고 싶어. 그건."

…엉망진창이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볼게요. 방금전에 한 '테스트' 란게 도대체 뭐죠?"

세 사람은 한꺼번에 대답했다.

"취향 테스트."

나는 이 순간 지구가 두쪽으로 갈라져 멸망해 버렸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대충 수습하고 나는 그들에게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 말에 제일 난리를 친 건 누리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찬? 찬이? 외자 이름이네? 수랑 같아! 찬이. 찬이라. 차니. 챠니~ 같이 좀 귀엽게 부르면 어떨까? 챠밍하잖아. 아 그래, 챠밍은 어때?"
"…남의 이름 멋대로 바꾸지 말아주세요."
"뭐 어때. 내가 부르기 좋은게 좋은거야. 그나저나 선유대라니. 들어본적도 없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면 SKY 정도는 와야 되는거 아냐?"
"……SKY가 뉘집 애 이름인가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남들이 좋다고 하더라고. 뭐 난 대학은 안가고 벌써 5년째 '이쪽' 일 하는 중이야. 엄니는 대학도 안갔다고 투덜대긴 하지만, 수입은 쏠쏠하니 난 불만 없어."
"…가정사까지 일일히 말해주시지 않으셔도 되요."

이런 식이었다. 소개는 중간에 종종 끊어져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난 내 소개를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 그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이번에도 제일 먼저 나선 건 누리였다.

"난 나누리. 일단 이 팀의 대장을 맡고 있지. 예쁘고 귀엽고 어린게 취향이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엄니지만. 좋아하는 음식은 단거. 또 취미는…"

그후로 꽤나 긴 일장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그녀를 잘 관찰했다. 언뜻 보면 굉장히 가벼워 보이는 여성이었지만, 그건 단지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일 뿐인 듯 싶었다. 가끔씩 흘리는 그녀의 말 중에선 정말 날카로운 부분이 많았다.

"…랄까. 야! 챠밍! 너 내 얘기 안 듣고 있었지!"
"아, 아녜요!"
"그럼 내 초등학교때 출석번호가 몇번이라고 했었지?"

으악. 사실은 흘려듣고 있어서 기억 안난다. 나는 그녀의 성에 맞춰서 대충 앞번호를 찍기로 했다.

"11번…이었나요?"
"정답!"

…정말 맞춘거야?
그러나 곧 그녀의 수도가 내 정수리로 떨어졌다.

"방금전까진 내 중학교때 이야기 하고 있었다구!"

…유쾌한 사람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다.

"시안. 하시안이다. 외국인 이름 같지만 엄연한 한자 이름이고. 여자, 특히 시끄러운 여자는 싫어하지."

책 읽는 것을 방해받아서 기분나쁜지 얼굴을 찌푸린 미남자가 옆에 있는 누리를 째려보며 소개를 했다. 누리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남자만 좋아하는거냐?"

…취향이 그랬나. 세상은 넓으니 아무래도 좋지만. 시안은 불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내추럴 게이야. 아직까지 별로 그 사실에 불만 없지만 말야."
"…좀 상관없는 질문 같지만, 혼혈 아녜요? 머리칼이 염색한 금발이 아닌데다 눈동자는 파란색…"
"컬러렌즈에 가발이야."

시안의 말에, 누리는 내 귀에 대고 소근댔다.

"사실은 대머리래."
"누가!"

시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시안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읽고 계시던 책은 뭐에요? 계속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데…"

시안은 붉은 표지의 책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이거? 야오이 소설. 그냥 재미로 읽는거야."
"시안. 평범한 대학생에게 야오이란 말 해봤자 알아들을리가 없잖아. 호모물이라던가 해줘야…"
"…아하하.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거짓말이다. 내 여동생은 야오이 동인지 내러 코믹에도 나간다. 난 안보지만.

대충 이 사람들이 매우 특이한 사람들이란 것 하나는 확실히 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마지막으로 수를 돌아보았다. 수는 중절모 아래서 눈을 빛냈다.

"이름은 수에요."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수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로 끝?"

누리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사실 그것밖에 몰라. 나이도, 성별도, 제대로 된 이름조차. 이 일 같이한지도 몇년 되었는데. 철저하게 개인정보는 숨기는 주의라고. 저 녀석."
"남자애 여자애를 떠나서,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워."

누리의 말을 시안이 거들었고, 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데, 너무들 하시네요."
"사실이니까."

누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씨익 웃은 수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수는 수수께끼의 첫글자. 모든 만남과 인연은 비밀이며, 수수께끼에 싸여 있어요. 제가 선택한 당신은, 누구보다도 저를 더 잘 알아주기를 원해요. 저도 노력하겠지만, 찬이형도 노력해 주세요."
"…형?"
"손윗사람에 대한 호칭이에요. 제 모든 비밀을 밝혀주는 순간, 당신을 올바른 호칭으로 불러드릴게요. 일단은 이 모습에 맞추는 거에요. 하핫."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시안과 누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수가 형이라고 불렀어…"
"…별일이 다 있군."
"왜 그러시죠? 누리양. 시안군."

수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태평하게 말을 걸었다. 누리와 시안은 날 바라보고 뭔가를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수… 미안하지만, 내가 너에게 첫 키스를 빼앗긴 건 사실이라고 쳐도, 난 네가 누군지도 몰라. 게다가 만난지 몇분도 안되었고, 난 너에게 별 감정이 없…"
"알아요. 친구부터 시작하는거. 맞죠?"
"……."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안과 누리는 큭큭대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우응…"

완전히 잊혀졌던 까마귀 소녀, 현아가 몸을 뒤척였다. 누리는 화들짝 놀라서 현아를 들쳐업었다. 시안은 드디어 책을 완전히 덮고 일어섰다. 수 역시 일어서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잠깐, 결국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못 들었…"

누리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는 은빛 금속 막대가 들려 있었다.

"미안. 이 애가 깨기 전에 가봐야 해서. 나중에 또 놀러올게."

수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날 보았다.
그리고 빛이 번쩍였다.




나는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진 유리조각과 흰 깃털들을 쓸어담고 있었다. 방금전, 까마귀 한 마리가 피투성이로 베란다 창문을 깨고 뛰어들었고, 뒤이어 엄청난 수의 흰 비둘기 - 혹은 닭 - 무리가 몰려들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난동이 끝나고 비둘기 - 혹은 닭 - 뗴가 까마귀를 물고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구경만 했다. 이거야, 동물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군.
서울에는 참 별난 일도 다 있다. 희안한 곳이구만. 하하.

──일리가 없잖아!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상식적으로 있을리가 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분명 방금전의 기억은 그랬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거야?

나는 한가지 이유를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까마귀 한마리가 날아들고 나서 덮친 것이 비둘기 무리인지 닭 무리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혼동이 생기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제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도심 한복판에서 2층 베란다로 닭 무리가 날아들 일은 없으니, 닭처럼 생긴 비둘기 무리였던 걸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미치겠네. 나는 청소도구를 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요즘 잠이 부족한 것 같다. 청소는 내일로 미루고, 침대에서 잠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나는 기지개를 펴고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눈가를 비비…려다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눈물자국?'

…뭐야? 이건?
그것을 의식하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지만 나는 그저 기분탓이려니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검은 까마귀로 변한 마녀가, 날 물고 날아가 탑에 가두자 3명의 용사가 날 구해주는 꿈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계속 찝찝한 기분에 시달렸는데, 결국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밝혀낼 수 없었다.
뭔가 미덥지 못한 느낌이었는데. 분명.
나는 결국 나는 수면부족 이외에 그 어떤 이유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고 베게에 머리를 파묻는다.
골치 아플땐 자는게 제일이다. 역시.



"누리. 이 닭대가리야. 비둘기로 하라니까 거기서 왜 닭 소리가 튀어나오냐?"
"…으아, 몰라! 시안 니놈이 자꾸 닭닭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랬단 말야!"
"책임전가."
"닥쳣! 어쨌든 다시 했잖아!"
"또 닭이라고 말했어."
"더이상 못참아! 조져버릴테다!"
"…저기, 수. 나 저놈들에게 당했다는거 무지 기분 나빠."
"…하아. 저도 그 말에 동감하고 싶어지네요."
"뒤에서 뭐라고 쫑알대는거야!"
"마스터에게 변명할 꺼리나 미리 생각해 두라구요."
"…윽."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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