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Pleasure
밖을 나오면, 하이얀 눈이 흩날리고 있다. 꿈에서나 보았을법한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입에서 숨을 내쉬면, 하이얀 김이 서리어 공중으로 흩
어져 날린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기지개를 쭈욱 켰다. 오늘은 방학날. 이제 학교
를 다녀오면 당분간 교복은 안녕이라는 소리다.
그래봤자 우리나라에서 고2의 앞날은 어둡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어깨
에 비스듬히 둘러매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집 안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
렸다.
"유, 유나야! 도시락 가져가야지!"
나는 머리를 짚었다. 아빠가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고 나온 도시락은 예
쁜 꽃무늬 손수건으로 곱게 싸여 있었다. 나는 이를 드러냈다.
"밖에서까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그리고 이거 뭐에요, 이 꽃무늬!"
"아버지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거지."
아빠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일말의 주저없는 그 말과 행동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정도면 팔불출도 위험수준이다.
"미안하지만 그런건 필요없으니 가지고 들어가욧!"
나는 그 손수건을 돌돌 말아서 아빠에게 휙 집어던지며 도시락을 가방에 쑤셔넣
었다. 아빠의 애절한 애원은 한귀로 흘리면서 대문을 열면, 언제나처럼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언제나 시끌벅적하네."
푸른색 프레임의 자전거에 몸을 기댄 채, 짧게 자른 머리에는 털모자를 푹 뒤집
어쓴 소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
도 손을 들어올린다.
짝,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이 내리는 거리에 손뼉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안녕. 시우형."
"좋은 아침이야. 윤하야."
키가 작은 나로서는 약간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큰 키였다. 시우형은.
같은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의 깔끔한 외모.
전교 상위 등수를 유지하면서도, 축구부에서 학생회까지 열심히 활동중인 팔방
미인. 성격도 더할나위 없이 자애롭다. 그런 부담스러울 정도의 멋진 선배를 어
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단지 옆집에 산다는 이유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이 사람과 알고 지낸다는 사실에 난 언제나 감사했다. 힘
들때는 아버지보다 더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나에겐 없는, '형'이란 존재를
그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시우형은 푸른 프레임의 자전거에 훌쩍 뛰어올랐다. 자전거가 빙글, 하고 내 쪽
으로 돌면, 어느새 쌓이기 시작한 눈에 그림이 그려진다.
"타고 갈래?"
하얀 입김이 시야를 가리며 흐트러진다. 나는 멋적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오늘은 12월 24일이잖아요. 그 애가 기다리고 있어요. 가끔은 괜찮겠죠?"
시우형은 픽, 하고 웃음지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한탄한다.
"아─아. 그 애 때문에 징징 짜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뜨거운 커플 티를 내다니.
너무하네. 이젠 나 같은 건 눈밖에 나겠어."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거 아녜요. 제가 시우형을 어떻게 생각하는 줄 잘 알면서 그래요?"
"어떻게?"
시우형은 눈을 반짝이며 즉시 대꾸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분명
장난이란 뜻이다. 나는 얼굴을 풀며 대꾸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가족이죠."
"너희 아버지는?"
"…그 팔불출 아저씨는 좀 논외로 쳐요. 제발."
나는 질린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런 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툴툴거려본다.
"어차피 형도 커플이잖아요. 아름 누나는 어쩌구요? 집이 멀다고 해도 오늘쯤
은 같이 가는게 어때요. 수업 시작까지는 아직 한창이잖아요."
시우형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아. 아. 녀석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걸. 뭐, 좋아."
탁, 하고 가볍게 발을 구르면 형을 닮은 날렵한 자전거는 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형은 두 손가락을 올려 머리에 대고 나에게 윙크한다.
"힘내. 윤하야. 네 뒤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구."
나는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같은 포즈를 취하며, 힘차게 대답한다.
"네. 형도 힘내세요!"
차르르륵.
시우형의 자전거는 미끄러운 비탈길을 경쾌하게 잘도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저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주는 것 같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러다 늦겠군."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책가방을 둘러매고, 그 안에 담긴 도시락의 무게를 느끼
며, 걸음을 빨리해서 골목길을 달린다.
돌고, 돌고, 또 돈다.
세번째 골목길을 돌면, 그 아이가 있었다.
마치 매일 그래왔다는 것처럼, 당연한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희미한
눈발에, 그 아이의 흑발은 더욱 빛났다. 나는 입을 힘겹게 떼었다.
"안녕."
눈을 깜박인다. 누구나 하는 당연한 행동인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는 빛나는 듯이 보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불꽃이 피어오
르는 것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마법.
이미 눈에 뭐가 씌였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 순간 만
큼은 나에게 마법이었다.
"응. 가자."
손이 내밀어진다. 장갑을 낀 손이긴 했지만, 나는 쭈뼛거렸다. 으, 전혀, 이거
익숙해지질 않잖아. 하지만 그 아이의 손이 내 맨손에 겹쳐졌다. 끌려가는 꼴
로 발을 내딛는다.
"자, 잠깐만."
"…망설이는거야? 아직까지. 정말 이 손을 놓아도 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눈송이는 어느새 꽤 굵어져 있었다. 볼에 닿아 녹아내
리는 그것들은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뭘 망설이고 있을까.
이미 결심했던 일이다. 나는 즉시 손에 힘을 주었다.
"미안. 민희야."
그리고 잡은 손을 풀어냈다.
"…윤하, 너…"
민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려고 한다. 나는 그것
을 토해놓듯, 용기를 쥐어짜내어 외쳤다.
"이제, 더이상 너만 다가오지 않아도 돼! 나도 손을 내밀테니까. 내가 먼저
손을 잡도록 노력할테니까! 미안해. 미안."
이미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목소리는 기어들어간다. 눈
송이는 점점 굵어져 시야를 가리는데, 볼에 닿는 눈송이들은 불에 달군 것
처럼 뜨거웠다. 설마 수증기라도 피어오르는걸까.
"서로 내밀면 되잖아. 바보야."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민희가 손을 내민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서로 맞잡는다. 마주보고 미소짓는다.
"고마워." / "고마워."
동시에 같은 말을 해버린 우리는, 멍하게 서로를 응시하다가 피식피식 웃
어버린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떼어 달리기 시작했다. 세계
는 빛나고 있었다. 가쁘게 뱉어내는 숨은 하이얗게 응고되어 주위로 흩어졌
다.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고통이 아닌 즐거움만이 나를 채웠다.
"와아하하하─"
기분좋게 웃으며 달려가본다.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
찌릉찌릉.
유쾌한 자전거의 벨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커다랗게 외쳤다.
"시우혀어엉─!"
"즐거워 보이네."
페달을 밟으며 한손을 놓고 휘익, 휘파람을 부는 시우형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이 언제나 타는 푸른 프레임의 자전거 뒷편에, 오늘은 사람
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은 털목도리와 검은 장발을
휘날리는 그 여성은 시우형의 연인인 아름 누나였다. 왠지 두 사람 모두 스
스로 커플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학교 내에선 1학년때부터 학교
최고의 커플로 공공연히 인정받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집까지 가서 태우고 왔잖아.'
마음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저 둘은 너무나도 어울렸다.
그림같아,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두 사람은
내 마음 속까지 보는 것 만으로도 내 가슴속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민희도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유명인이었으니까, 시
하고를 다니면서 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우 선배. 아름 선배. 안녕하세요─"
그녀의 말에서도 행복감이 느껴졌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듣고 있는 것
만으로도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그런 민희의 인사에, 언제나 차분한 시선을 뿌리던 아름 누나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입꼬리가 들어올려지며, 입이 열린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인다.
나는 아름 누나가 짓는 저런 표정을 처음 보는 기분이 들었다. 둘이 같이
있을 때조차,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볼때만은 언제나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그 상념 사이로, 시우형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우리 먼저 갈게. 학교에서 보자─"
"네에─"
다시 민희와 붙잡지 않은 손을 들어 힘차게 흔들어 준다. 시우형의 푸른
자전거는 비탈길을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때, 민희
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응?"
"우리, 지지말자."
숨도 차지 않는지 자세를 가다듬는 민희. 난 숨을 고르면서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이런 점이 정말 좋았기에 난 그녀를 선택
했다.
"달려!"
하나 둘 셋 따위의 준비구호는 없었지만, 우리는 동시에 같은 발을 내딛고
있었다. 12월의 태양이 하늘 위에서 빛나고 있다. 순간의 세계는 우리의 것.
나는 이 달리기가 영원토록 지속되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의 인생의 종막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그 감정은, 눈과 함께 빛나는 새하얀 즐거움이었다. 목록으로 돌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