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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프로젝트 제 24일 - 사신(死神)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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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희원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자와 목도리속에 얼
굴을 파묻고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바닥에는 이미 흰 눈가루가 날
리는 중이었다. 기온도 충분히 낮으니 오래지 않아 쌓일 것이다. 그녀는 싱
긋 웃음지었다.
'애인 없는 녀석들은 배, 무지 아프겠네. 흐응.'
지금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다. 이 눈이 내일까지 내린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고, 소위 아베크 족이라 불리는 커플들이 아닌
다음에야 모두 시린 옆구리를 부여잡고 누구를 향할지도 모르는 저주를 퍼
부을 것이다. 희원은 몇몇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다시 웃음을 입가
에 띄웠다.
"뭐, 난 상관없지만 말야. 하지만 이거,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그래도 바보처럼 좋은 기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제, 좋아하던 사람으
로부터 프로포즈와 함께 반지를 받았다. 당장이라도 결혼이 결정된 것은 아
니었지만 그가 머뭇거리며 건네주던 반지의 감촉이 느껴질 때마다 떠오르는
행복감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종류였다. 세상이 보이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은 익히 몸으로 느껴온 바였지만, 그 일상적인 '상식'을 무시하
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세계가 얼마나 경이와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
는지 강변해주고픈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혼잡한 거리 여기저기의 상점 앞에는 상업주의의 옷을 입은 빨간 산타들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희원에겐 그것마저 이브의 낭만으로 보이고 있었다. 분
명 1년 전만 했어도 '저딴건 어린애들 돈이나 뜯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노인
네라고. 칫, 하긴 요즘 어린애들이 저런 걸 믿을지 모르겠지만.' 하고 투덜
거리곤 했었는데- 아주 작은 계기가 사람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이제야 믿게 된 그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들뜬 기분으로 이브의 거리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다. 그녀
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어?"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랄까, 흰 천 위에 시커먼 얼
룩이 져 있는 것을 본 기분이었다. 이 거리의 분위기와는 딴판인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뭐였을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감각이었다. 그녀의 행복감을 마비
시킬 정도로. 그리고 그 감각의 여운은- 너무나도 차디찼다. 희원이 정신없
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뭔가 잊으신 것이라도 있나요, 아가씨?"
참 기이한 목소리라고, 희원은 생각했다. 비웃음이 섞인 듯한 조롱조의 말
투였지만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굉장히 특이한 외모를 가진 키다리 사내가 희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밝
은 블론드의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흰색 계통의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선 입가엔 비웃음과 비
슷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다.
희원이 그를 바라보자, 사내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우
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상당히 이국적인 행색이었지만, 희원은 그가 외국
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유창한 한국어 발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친근한 느낌 때문이다.
"글쎄요. 제가 뭘 찾든, 당신에게 볼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전 지금 친구
를 기다리는 중이라서요. 방금전에는 왜 안오는지 궁금해서 두리번 거렸을
뿐이에요."
그녀는 일부러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희원은 마음속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아까 느꼈던 그 기묘한 이질감의 정체는 바로 이 사내라고- 두려움
이 희원의 마음을 잠식했지만, 그에 걸맞지 않은 친밀감이 솟아올랐고 어울
리기 힘든 두 감정은 이내 혐오감이란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차가
운 눈길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내는 당혹해 하기는 커녕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하하, 그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시면 곤란합니다. 기분나쁘셨다면 사죄
하도록 하지요."
사내는 마치 연극에서 취하는 동작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희
원은 약간 당황했고, 다시 고개를 든 사내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내는 희원의 눈앞으로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 그녀는 비명을 지를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그는 너무나 궁금하다
는한 표정으로 희원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입을 다시 열었다.
"당신은 제가 '보이는'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원은 숨을 들이켰다. 사내의 머리 뒤로 희미한
가로등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투명한 사내의 머리 바로 뒤에 가로
등이 비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기 보다는 그 경악의 정도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아, 아…"
입을 벌리고 희원은 손가락으로 사내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부
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또다시 어깨를 으쓱거린다.
"미친 사람 취급 받기 싫으시다면 그만두시죠. 사람들이 봅니다."
과연 주위의 사람들이 지나가며 그녀를 보고 수군거린다. 아마도 사내는
다른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희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유령인지
무엇인지 모를 이 정체모를 사내는 그녀 옆으로 스르륵 다가와서 속삭였다.
"흐음. 이거 절 보는 사람을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 아, 걱정할 것 없어요.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가세요. 그러면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
희원은 기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이봐요.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 도대체 뭐고, 왜 내 앞에 나타났느냐
하는 거라구요.'
내키지 않으면서도 희원은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귀에 댔다. 혹시나
정말로 유령 같은 것이라면 그녀에게 해코지를 가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일
단 하자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자아, 했어요."
"그래요? 그러면 아름다운 이브의 거리나 활보해 봅시다. 정말 친구를 기
다리고 있던것도 아니었죠? 어차피 겨울밤에 외롭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내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희원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자신도 놀
라버릴 정도로 강하게 부정했다.
"아녜요!"
또다시 주위의 이목을 끌고 말았다. 희원은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그러나
여전히 화난 말투로 사내에게 대꾸했다.
"원래는 그이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구요.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온다는 연
락이 와서 그렇죠. 난 당신처럼 외로운 유령따위가 아니라구요. 흥!"
그녀의 흥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바로 곁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내는
여전히 싱글거리기만 했다.
"아아― '그이'라니. 정말 친근한 호칭인데요. 애인인건 알겠고, 혹시 결
혼할 사이?"
"뭐, 뭐죠? 마음이라도 읽는 거에요?"
"꼭 마음을 들여다보는 신비한 능력을 가져야만 독심술을 쓸 수 있는게 아
니죠.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사내는 걸음을 빨리해서 그녀를 앞지른 후에 그녀의 바로 앞에 떡하니 버
티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을 들어 희원의 미간을 꾹 눌렀다. 차갑지만 생
생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말!"
희원이 소리를 빽 지르자 그는 슬며시 손가락을 거두었다. 사내는 비웃음
과 의문이 섞인 기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어째서 날 유령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희원은 발끈 해서는 사내를 돌아서 지나쳤다. 그리고 내키는 대로 내뱉었
다.
"그야 당연하잖아요. 반투명하고, 보통사람들에겐 안 보이고. 유령 아니면
뭐겠어요? 흥, 그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 하며- 당신은 분명이 죽기 전에 여
자도 한명 못 사귀어 보고 죽은 총각일 거에요. 내말이 틀렸나요?"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긴 다리로 그녀를 금방 앞질렀다.
"하하. 그거 재미난 해석인데요. 그렇지만 당신이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군요."
사내는 갑작스럽게 몸을 숙여 눈높이를 희원에게 맞추었다. 그리고 세련된
손놀림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똑바로 그녀의 눈을 쳐다
보았다. 희원은 순간 숨이 막혔다.
저 건방지고 무례한 사내가 순간적으로 -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 안기
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얼
굴을 붉혔다. 사내의 두 눈동자는 밤하늘을 닮은 칠흑색이었다.
"이정도 얼굴인데도 말입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확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당혹감에 휩싸인 목
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호, 홀리기라도 한 거지?"
"제가 무슨 흡혈귀라도 됩니까. 멀쩡한 사람을 홀리게."
"그, 그럼 당신은 도대체 뭐야?"
사내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쳤다. 희극적이고 과장된
동작이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제 직분과 이름조차 밝히지 못했군요. 죄송
합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사내는 선글라스를 멋을 잔뜩 부리며 다시 걸치곤 유럽의 옛 귀족들이나
할 만한 고풍스러운 인사법으로 허리를 숙였다.
"저는 사신(死神), 나르시라 합니다. 사자(死者)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
제 직분이지요. 저승사자라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실
상은 이쪽 세계에서도 가장 따분한 직업중 하나이죠."
결국 저승사자란 말이잖아. 그 시커먼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들
말이야. 하지만 진짜와는 하나도 안 닮았어. 전설의 고향 따위, 헛소리였잖
아! 아니, 그건 백년 전쯤 이야기였던가?
그녀의 머릿 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간 생각은 수백가지 였지만, 튀어나온
말은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제, 제가 죽을때가 되었단 거에요?"
"저런, 앞서가시긴. 죽을때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저승사자가 보인다
면 이미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을 텐데요. 그저 당신에게 우연히 보인
것 뿐이죠."
"하필 왜 전데요?"
"글쎄요. 저도 그게 궁금하군요."
나르시는 희원을 훑어보았다.
"평소에 유령이라도 자주 보이거나 느끼는 겁니까? 영감이 강한 거라면 이
해가 가겠는데요. 전 몸을 숨기는데 좀 부주의한 편이라."
희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된다.
"설마요. 저는 평상시에도 둔감한 편이에요. 영감이라니."
그래서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도 무려 2년이나 걸렸지.
희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르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저로서도 짐작할 길이 없군요.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나르시는 또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당혹감이 가시자 희원은 그를 유
심히 관찰했다. 자신을 사신이라고 소개했다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영 아
니다. 아무리 봐도 죽음과 관련된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당신은, 행복해 보이는군요."
"예? 그런가요."
"그래요.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요."
"그렇겠죠. 둔해서 감정표현도 제대로 통제할 줄 모르니."
"아니, 자학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개성은 소중한 거에요. 그런데 말
입니다―"
이럴때 보면 굉장히 진지해지는 사내다. 희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사
내가 사신이라니 확실히 우스운 일이지만.
"행복합니까? 그것으로 좋습니까?"
"예? 더 뭘 바라죠. 행복하면 그걸로 그만 아닌가요?"
"…그렇군요.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좋단 말이죠."
나르시는 고개를 들어 눈내리는 창공을 응시한다.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든 그는 이내 희원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당신같은 사람이 좋습니다."
"무, 무슨……."
"아니, 별로 신경쓰지 마세요."
어떻게 저런 눈으로 신경쓰지 않으란 거지.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을 진정
시키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나르시는 희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쿡쿡
웃었다.
"왜 웃는 거에요?"
"아니, 그렇게 숨길 필요 없어요. 당신의 지금 마음, 진짜가 아니니까. 그
냥 '현상'일 뿐이니 신경쓸거 없어요. 당신에겐 '그이'가 있잖습니까."
희원은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놀리지 마세요! 사신은 모두 당신처럼 능글맞나요?"
그녀가 대꾸하자 나르시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빠르게 스쳐갔다. 물론
희원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말인즉슨, 내가 가진 사신으로서의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로군요!
아아, 이거 정말 큰 모독입니다.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나르시의 연극대사를 읽는듯한 과장된 말투로는 '모독'에 과연 진실로 분
노했는지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희원은 그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이려
니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야 어쨌든, 나르시는 벗어든 선글라스를 오른손
에 꽉 쥐었다. 마치 부러뜨리려는 듯, 힘을 쏟아부어 움켜주고 있다. 희원
이 의아한 눈길로 나르시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짐짓 꽤나 진지한 얼굴이
아닌가. 선글라스는 구부러지다 못해 으스러지기 시작했는데, 이내 본래 형
태를 잃고 유동체로 변화했다.
"아니―?"
나르시의 손에 잡힌 검은 유동체는 격렬한 요동을 치다가 갑자기 천이 펼
쳐지듯 위아래로 확 펴졌다. 희원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 사이, 어느새
나르시의 손에는 타로 카드 속 사신이나 들고 다닐 만한 거대한 낫이 쥐어
져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을 잃고 그 낫을 바라보았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아, 네―"
"뭐, 이것만으로 믿으라는 것은 무리겠지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아니, 아닙니다. 좀더 극적인 것을 보여드리죠. 저기, 저 남자 보이십니
까?"
그가 거대한 낫의 끝으로 가리킨 쪽에는 평범한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꽃
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걷고 있다.
"저 남자, 얼마 안 있어 죽을 겁니다."
"예?"
나르시를 만난 이후로 줄곧 황당한 것들만 보고 들어 왔지만, 저토록 담담
하게 타인의 죽음을 입밖에 내다니. 그녀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
이었다. 그러나 나르시는 태연함 그 자체였다. 그는 리듬을 타며 흥얼거렸
다.
"셋, 둘, 하나. 콰당!"
멀쩡히 걷던 남자는 갑자기 빙판에 미끄러져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움직
이지 않았다. 희원은 입을 쩍 벌렸다. 나르시는 조용히 말했다.
"저 남자는 이제 병원으로 실려가게 될 겁니다. 뇌진탕으로. 그러나 가는
도중에 죽게 될 거에요. 참 어이없는 죽음이긴 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허무
한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희원은 갈피를 잡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르시는 여전히 평온한 표
정이다. 그녀는 그제야 나르시의 존재감과 위압감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그녀의 본능은 미지의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희원
이 머뭇거리자, 나르시는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착각한 모양이다.
"흐음- 이런 '작은' 힘으로는 여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겁니까. 내참. 제
가 아무리 한심한 난봉꾼 취급을 받는 놈이라 해도 평범한 인간 아가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다니. 은퇴라도 생각해 봐야겠군요."
"처, 천만에요!"
"아니, 아니에요. 다 압니다."
나르시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낫을 공중에 띄운
후에 크게 한 바퀴를 돌리자, 그의 손에는 거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정도
크기의 커다란 책이 나타났다. 책의 양장은 시커멓고 너덜너덜했으며, 책장
여기저기에 갖가지 색깔의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나르시는 그 책을 왼손
바닥에 올려놓고 희원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올렸다. 희원은 불안감이 엄습
해 옴을 느꼈다.
"당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예언해 드린다면, 믿겠습니까?"
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저 남자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
니다. 죽을 때를 안다니, 필멸자인 인간으로서 그녀는 가장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었다. 그녀는 온몸으로 부정했다.
"믿겠어요! 제발 사양해 주세요! 그걸 듣는 순간 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거에요. 결정된 끝이라니.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두렵다구요!"
"흐음- 역시 그렇습니까."
나르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콧소리를 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묘
한 마력을 풍기는 두 눈만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평온했다. 아름답지만 그
만큼 불가해하다.
"그럼 좀더 큰 것으로 찾아볼까요. 가장 최근에 일어날 것으로."
나르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책을 뒤적인다. 그리고 탄
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책을 돌려 보인다. 어느 나라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활자들이 누런 지면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자아― 이제 채 15분도 안 남은게 하나 있군요. 딱 크리스마스의 시작에
터지는 사건이네요. 가스폭팔이라. 이런 사고는 요즘 흔치 않은데."
불행하다면 불행할 일일 '사고'를, 마치 기상변화를 말하는 캐스터처럼 천
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르시는 그녀의 무
덤덤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떠들어댄다.
"아마 내일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겁니다. 흐음… 어디 보자. 부상
자는 많은데… 사망자가 하나뿐이라. 이것도 꽤 드문 경우로군요. 건물 안
에서 혼자 숙직중에 불의의 사고로 죽는거군요. 참 안됐어요."
그러나 그 목소리엔 일말의 동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희원은 겉과 속이 참
다른 사신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내밀었다.
"민… 민서현. 그게 사망자의 이름입니다. 내일 확인해보고 절 유능한 사
신으로 기억해 주세요. 하핫. 어? 왜 그러십니까?"
희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온 몸을 부
들부들 떨고 있다. 눈동자도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고 제멋대로 구른다. 나
르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아가씨?"
희원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입술이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 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망자…에 대해서 말에요……."
나르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현 씨는 지금 사무실에 혼자 근무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다 그 건물
바로 밑에서 가스가 폭발하죠. 그리고 '쾅'! 건물도 날아가고, 부상자도 생
기지만 사망자는 한명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민서현씨죠."
"아… 그런, 말도 안 되는……."
"뭡니까? 혹시 아는 사람?"
"…에요."
"예?"
"그이- 에요! 그이라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뭔가 착오가 있는 거에요!
도, 동명이인이라던가!"
희원은 발악하듯 외쳤다. 나르시는 별 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고
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아닌 듯 싶군요. 이 도시에 민서현이란 이름을 가진 남
자는 한명 뿐이니까."
"그럼… 서현씨는… 아녜요!"
그녀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떨리는 손
으로 귀에 대고 있던 휴대전화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불길한 신호음은
계속 이어지고, 희원은 불안에 휩싸였다.
이용자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음성이 처음 흘러나왔을 땐 그다지 다급하
지 않았지만, 두번, 세번 걸어도 계속되자 그녀는 그 음성이 죽음의 선고쯤
되는 것으로 들렸다. 결국 희원의 손에서 힘없이 휴대전화가 떨어졌다.
"아……."
나르시는 머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런. 이렇게 곤란한 일이 생길 줄이야. 그가 근무하는 숙직실로
전화하는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마 폭발 바로 직전에나 돌아올 겁니다. 전
화는 소용 없다는 말이죠."
희원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하지…?"
"물론 직접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곳까지는 차를 아무리 빨리 가도 30
분은 걸리는 거리일테죠?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하지만… 그이를 죽게… 죽게 할 수는……."
희원은 그 말을 끝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절망과 경악, 슬픔과 공포가 뒤
범벅이 된 감정이 밀려들어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르시
는 슬쩍 소매를 걷어올려 일부러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시계를 보기 위해
숙인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측은함
이 깃들어 있었다.
"흐음. 하지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군요. 그렇기에 한가지 방법이 있
습니다. 별로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경악과 공포로 경직되어 있던 희원은 나르시의 말을 듣고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제발, 제발! 뭐든지 좋으니 하겠어요! 그이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요!"
나르시는 검은 두 눈을 그녀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사람을 끄는 마력이 아
닌 위험한 사기를 풍기고 있기에 그녀는 움츠러들었다. 그 묘한 두 눈동자
의 색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고 느낀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달빛과
별빛의 차이랄까, 아주 미묘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곧 잊고 말았
다.
"아주 단순해요. 제가 당신의 영혼을 대신 가져가는 겁니다."
"그, 그런……."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겠다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단순하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지요. 다른 방법은―"
나르시의 무심한 눈동자는 비수가 되어 희원의 가슴을 후벼팠다.
"없습니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넘쳐 흐른다. 하지만 말
처럼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하는 상대의 목숨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꿀
단검이나 독약이 손에 쥐어져 있을때, 과연 망설임 없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말만으로 삶이나 죽음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설사 생명
을 구하더라도 남겨진 자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그 결
말이 어떤 것이든 행복이 결여된 현실이 미래를 채워간다. 그 '사랑'이 진
실한 것이었든, 거짓된 것이었든 말이다. 살아가는 것이 행복 그 자체가 되
기는 힘들었다.
희원은 지금 결단을 강요받고 있었다. 저울의 무게를 넘어선 가치를 올려
놓고 맞재는 무리한 저울질, 정답이 없는 선택이 시간이라는 잔혹한 괴물의
발톱 아래 요구되었다. 그녀는 입을 뻐끔거리기를 거듭했다. 고개를 숙인채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나르비는 낫을 선글라스로 바꿔서 쓰며 그녀의 선
택을 가만히 기다렸다. 초조한 표정이 슬쩍 스쳐갔다.
"…겠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 중에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이 튀어나왔다. 나
르시는 천천히 희원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결정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눈 밑에 눈물 자국이 번져 있다.
"가겠어요!"
"예?"
"전화가 되지 않는다면, 직접이라도 찾아 가겠어요!"
나르시는 처음으로 눈에 평정을 잃고 당황스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
는 당돌하게 말을 계속했다.
"늦어요? 15분 내로는 못 도착한다구요? 누가 그런 걸 정했죠? 전 지금이
라도 당장 갈 거에요! 15분 밖에 안 남은게 아니라, 15분 이나 남은 거라구
요! 제길, 당신따위 알게 뭐야!"
희원은 몸을 홱 돌려서 차로 쪽으로 달린다. 택시라도 잡으려는 모양이다.
나르시는 허공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냉정을 되찾은 그
는 그녀의 말에 불길한 토를 달았다.
"그래도 당신이 가서 볼 수 있는 것은 건물의 잔해 뿐. 그의 시체조차 볼
수 없을 겁니다."
"시끄러워요!"
희원은 귀를 막고 뛰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나르시의 말이 귀를 막는
다고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당신은 자신의 무력함만 실감하고는 더욱 불행해질 겁니다. 그만두시길."
"택시!"
그녀는 뛰어가면서 외쳤다. 마침 빈 택시가 U턴을 하고 있었다. 나르시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강제로라도 막을 수 밖엔 없겠군요. 전 당신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
으니까요."
그는 선글라스를 낫으로 바꾸어 들고 허공에 휘둘렀다. 순간 그녀는 뻣뻣
하게 굳어 버렸다. 택시가 그냥 지나쳐 버리자, 나르시는 금제를 풀었다.
희원은 분노하는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짓이에요!"
나르시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희원은 눈물을 뿌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중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쯤 해 두는게 좋을거다. 나르시."
희원은 나르시의 뒤쪽에서 좀 떨어진 공간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
고는 경악했다. 마치 두 손으로 주물럭 거리듯 쉽사리 시야 자체가 비틀어
지고 왜곡되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그 공간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구
멍이 있었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무색의 그 구멍은 점점 넓어지더니 마침
내 사람 한명이 들락거릴 정도로 확대되었다. 나르시는 심각한 표정을 풀더
니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이런. 또 걸렸네. 곤란하게 됐군. 나참."
그 구멍 사이에서 처음 튀어나온 것은 검은 지팡이의 밑부분이었다. 이내
지팡이가 천천히 빠져나왔고, 지팡이를 쥔 손이 나타났다. 그리고 갑자기
지팡이와 손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공간은 미미하게 떨렸지만 무색의 구
멍은 거짓말처럼 없어져 있었다. 희원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네 놈 인사를 받을 이유는 없어. 이 사기꾼 녀석 같으니."
나르시가 희원의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엔 못보던 남자가 지
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분한 인상의 사내
였다. 세련된 디자인의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정 일색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척이나 침착해 보이는 그 사내는 지금 얼
굴을 일그러뜨리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희원과 눈이 마주치자, 거짓말처럼 그 표정을 지운다.
"미안하게 되었네. 나는 사신 '가늠'이라 하네."
"그럼, 당신도 사신이란 말인가요? 그럼 나르시의 상관쯤 되시는 분인가
보죠? 제발―"
사신 가늠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눈길이 자신에게 꽃히자
나르시는 딴청을 피웠다. 가늠은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당신도'라니. 실례군. 저 녀석이 몽마(夢魔)주제에 꼴에 악마라고 영혼
을 얻기 위해 사신 사칭이라는 어이없는 짓까지 하며 돌아다니는 놈이라 무
례를 무릅쓰고 자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세."
"그렇다면 이건… 꿈이군요! 그, 그럼 모두 거짓말인가요? 서현씨는 무사
한 거죠?"
자신의 영혼이 위태로웠다는 사실도 잊은 희원의 안도섞인 물음에 가늠은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르시는 싱글거렸다.
"이봐요. 아가씨. 재미난 사실 하나만 알려드리죠. 사신은 거짓말을 못해
요. 고로 내 이야기 중 하나는 진짜란 이야기입니다."
희원은 화를 버럭 냈다.
"시끄러워요! 사기꾼 악마같으니! 당신 말은 이제 못 믿어요!"
가늠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 졌다
는 듯이 쓰게 내뱉었다.
"…어쩔 도리가 없군. 저 녀석의 능력은 진짜라네."
"그, 그렇다면… 서현씨는 정말로……."
희원은 탈진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너무나 기막힌 일을 많이 겪어서 눈
물을 흘릴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넋나간 표정으로 눈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나르시는 차갑게 미소를 지었고, 가늠은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잊어버리게."
"……."
가늠은 희원의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잊게. 이건 자네 말대로 그저 '꿈'일 뿐이야. 그저 '꿈'일세."
"꿈……."
"그래. 꿈일세. 자넨 깨어나면 현실로 돌아가는 거지. '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뭔가 바꾸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현실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사신님?"
가늠은 눈을 부릅뜨고 나르시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르시
는 태연하게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 빨리 잡아가세요. 이것저것 수속도 귀찮아요. 징계나 몇개월 받고 나
면 끝날 일인데."
그 태연함을 가장한 뻔뻔함에 치를 떠는 가늠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가늠
은 나르시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가늠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늘은 곱게 잡아가지 않겠다."
소맷자락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나무상자를 꺼낸 가늠은 나르시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르시는 호들갑스럽게 놀란 시늉을 했다.
"에, 저기다 쑤셔넣고 데려가실 생각인 겁니까? 세상에. 사신 치고는 고약
한 취미를 가지셨군요. 아니, 당연한 일인가요?"
"더이상 나불거리면 직접 두들겨서 저 상자에 들어갈 정도로 크기를 줄여
주겠다. 꾸물거리지 마."
희원은 여전히 초첨을 잃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르시는 그녀에게 윙크
를 하고는 다시 정중한 귀족식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보지요. 아가씨."
나르시의 몸은 점점 투명해 지더니 이내 연기로 화해서 가늠이 든 나무상
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러자 주위의 풍경이 모두 무(無)로 화했다. 희
원은 그제야 가늠을 빤히 바라본다. 가늠은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
다. 점점 다가온다. 희원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지팡이가 그녀의 머리
를 가격하는 순간, 그녀의 의식은 튕겨져 올라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네.'
희원은 눈을 떴다.
"아."
희원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잠깐 잠이 든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
자와 목도리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바닥에는 이
미 흰 눈가루가 날리는 중이었다. 기온도 충분히 낮으니 오래지 않아 쌓일
것이다. 그녀는 싱긋 웃음지었다.
그때 번개처럼 기억이 번뜩였다. 환청과 환상이 휙휙 머릿속을 지나친다.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네.'
'민서현 씨는 지금 사무실에 혼자 근무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다 그 건물
바로 밑에서 가스가 폭발하죠. 그리고 '쾅'! 건물도 날아가고, 부상자도 생
기지만 사망자는 한명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게 바로 민서현씨죠.'
'이정도 얼굴인데도 말입니까?'
'뭔가 잊으신 것이라도 있나요, 아가씨?'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기억
과 감정이 실제와 같이 너무도 생생한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의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익숙한 신호음이
간다. 희원은 그 신호음이 어느때보다 길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제발,
제발 받아줘―
"여보세요?"
"서, 서현씨!"
희원은 하마타면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격한 감정을 누르며 되도록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현씨. 바보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내 이야기 꼭 믿고 따라
줘. 제발, 부탁이니까 단 한번만―"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이야기하자 전화기 저편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라도 처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어이, 희원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희원은 또다시 울음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은 현실이다. 꿈이 아니고, 가능성을 바꿀 수 있지만 기회는 단 한번 뿐이
다.
"우선 아무말도 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봐. 그게―"
눈송이가 굵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그에 따르듯 굵
어지고 있었다. 이브에 넘쳐나는 캐롤이 그녀의 흐느낌을 묻어주고, 눈발이
그녀의 눈물을 가려주고 있었다. 은혜로운 밤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잘 되었군요. 서현이란 남자, 지금은 투덜거려도 내일이면 뒤집어질 겁니
다. 자기가 숙직하려던 건물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으니."
"닥쳐! 도대체 영혼을 받아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저 여자를 도와준 거냐?
단순한 동정이냐?"
"이름이 재미있잖아요."
"뭐?"
"바라고(希) 원하다(願)니. 그녀의 행복을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 절 불렀
을 지도 모르죠, 뭐."
"하… 정말 이해하기 힘든 놈이로군."
"아아. 그래도 그녀에게 힌트까지 주시다니. 역시 당신은 친절하신 분이에
요. 가늠."
"시끄럽다. 도대체 어떤 놈이 네 눈깔에 예지안을 박아놓았는지 궁금하다
만, 언젠가 그놈도 꼭 잡아넣고 말겠어."
사신 가늠은 바람을 타고 영혼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있는 채였다. 말소리는 그 나무상자에서 흘러나왔다.
"흠. 당신이 누님을 잡으시겠다고요? 어림없는 소리. 그분을 잡으려면 아
마 염라대왕님이라도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
"오호라. 누님? 여성 악마란 말인가. 좋은 정보를 얻었군 그래."
"틀렸어요."
"뭐? 그럼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악마가 아니란 말입니다. 답답하군요."
"헛소리 마! 악마가 아니면 누가 너같은 하급 몽마의 눈에 예지안 같은 물
건을 박아주겠어?"
"…악마가 아니니까 박아주신 거라고요. 아, 참고로 말하자면 얼마전 나왔
을때 왼쪽 눈도 새로운 걸로 갈아끼워 주셨지요."
"쳇.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라고. 투시안같은 거냐?"
"훗. 틀렸어요. 마안(魔眼)입니다. 옛적의 신화에 등장하던 누군가가 썼다
지요? 그런 물건을 공짜로 주시다니. 역시 누님은 마음도 좋으셔."
"…농담이겠지? 정말 '그것'이라면 이런 공간결계쯤은 찢어낼텐데."
"농담이 아닙니다. 절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놈으로 취급하시면 곤란하죠.
아, 그리고."
가늠은 나르시의 비웃음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
었고, 대신 어조의 변화가 없는 태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을 뿐이었다.
"좋은 것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큭!"
가늠의 손에 들린 나무상자는 순식간에 폭발해 버렸다. 가늠은 황당한 표
정으로 상자의 잔해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에게 나르시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신세만 지고 가네요. 언제건 그리스로 찾아와 주세요! 대접해 드
리겠습니다. 하하하!"
웃음소리의 여운을 끝으로 주위는 고요해졌다. 가늠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
공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상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를 날아가던
새들 중에 민감한 놈들이 놀라서 헛날개짓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밝
았지만, 그에겐 아무래도 좋을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사신의 크리스마스라. 젠장.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좋은 일 따위가 일
어날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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